시편 148편 강해-만물이여, 찬양하라

 

시편 148편, 1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은 남자성도들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여자분들이 읽고 해서 교독하겠습니다. 먼저 남자 성도들 읽겠습니다.

 

1.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5.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6.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8.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1.세상의 왕들과 모든 백성들과 고관들과 땅의 모든 재판관들이며

12.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13.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

14.그가 그의 백성의 뿔을 높이셨으니 그는 모든 성도 곧 그를 가까이 하는 백성 이스라엘 15.자손의 찬양 받을 이시로다 할렐루야

 

아멘!! 예, 시편 148편이예요. 제목이 “만물이여, 찬양하라”입니다. 예, 앞에서도 제가 말씀을 드렸듯이 146편부터 마지막 150편까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그런 시편입니다. 예, 그렇다고 해서 똑 같은 이야기는 아니고, 하여튼 형식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라고 하는 단어의 뜻은 ‘여호와를 찬양하라’예요. 다 할렐루야이기 때문에 146편부터 거의 비슷한 주제로 내용이 채워지는데 이 148편은 조금 더 그런 부분에서 아주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극치라고 할 수 있어요. 만물의 찬양을 요청합니다. 만물이요. 이게 참 무슨 뜻인가 생각을 해 보십시오. 결론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를 할 텐데, 찬양하라, 찬양하라, 산들을 찬양하라, 작은 산을 찬양하라, 하늘의 하늘, 이런 얘기하잖아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잖습니까, 이게 고유한 이 시인의 영성에서, 그게 어떤 것들이 포착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시편은 특별히 시인의 감수성이 없으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건 사실은 시편만이겠어요? 구약 신약 다 합해서 이게 다 문학입니다. 형식적으로 문학 이예요. 글로 된 거예요. 텍스트예요. 글로 되어서 읽히고, 읽히고 그래서 정수만 남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고전과 같은 거거든요, 단테의 <신곡>이나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같은 거,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어떤 깊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길이길이 고전을 읽는 거 아니겠어요? 성경은 더 한 거지요. 이 148편이 저도 읽으면서 참 좋았어요. 예, 시편을 몇 년 동안 공부를 하는데 그 때마다 제가 좋다고 얘기 한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각각이 다 좋아요. 어떻게 2500년, 2300년 전 그런 때에 이렇게 수집된 시편 묶음인데 그 전부터 노래로 불리어졌겠지요? 아, 정말 놀라운 걸 많이 느낍니다. “만물이여, 찬양하라” 하는 거예요. 세 파트로 나뉩니다.

 

하나는 하늘에 속한 것, 1절에서 6절, 두 번째는 7절에서 10절, 이건 땅에 속한 것, 그리고 인류, 인간, 11절에서 14절, 하늘과 땅과 인간, 天地人이네요? 천지인? 그야말로 코스모스, 우주? 우주론적인, 아주 유니버설한 그러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찬양은, 그리고 이렇게 하늘 땅 인류, 모든 걸 총망라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실 만한 유일한 분이다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다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고, 달라진 눈에서 우리 영성이 확보됩니다. 세계관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 다음에 영성은 안 되는 거예요. 가끔 그리스도교 신앙을 영성, 영성 많이 얘기하지요? 모든 걸 다 영성이라고 붙이는데, 그걸 갖다가 자기 심리적인 확신, 자기 카타르시스, 심리적인 어떤 Therapy, 이런 정도로 생각하거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부수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 뿐 이고 더 근원적인 것은 새로운 세계관의 형성입니다.

 

하나님, 세계, 피조물, 세계완성, 창조, 칭의, 아, 이런 것들이 얼마나 놀라운 세계이해이고 인간이해이겠습니까, 칭의론적인 시각에서 인간을 보는 거거든요? 그게 기독교적인 시각으로만 하는 교리문답이 아니라 총체적인 인간론, Anthropology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기독교신앙, 그리고 성서의 세계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세계 과학이 발달하면 어떻게 될까봐 그런 것 주눅들 필요 없고요, 이건 우리보다 훨씬 더 이 세계 전체를 이해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고유한 세계를 진술한 사람들의 신앙이라서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오늘의 어떤 학문이나 세계관 앞에서도 그 진리론적인 근거를 잃지 않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편 148편은 다니엘서 3장에 있다고 그러네요. 제가 참고하는 성서주석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우리말 성경에는 다니엘서 3장에 이게 없습니다.

 

우리말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 거거든요? 그런데 구약성경에 70인 역이라고 있어요. 제가 언제 말씀 드렸을 겁니다. 셉투아진타(Septuaginta)라고 해서 70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헬라어를 쓰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구약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이 70인 역 성경 이예요. 햇수(*b.c.200~250)가 언제지? 제가 기억을 못 하겠습니다. 기원전입니다. 그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여기저기 많이 흩어져 살고 있었거든요? 그들을 위해서 구약의 많은 부분들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안에 들어가 있다고 그래요. 제가 확인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이 148편이 중요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니엘서 3장 부분을 기억하시지요? 감을 잡고 있지요? 다니엘과 그 3명의 친구들이 불속에 들어가서 죽을 정도 되었는데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아났다 그 얘기예요. 내용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는 그 말의 그 첫 번째 대상은 하늘에 속한 것들입니다. 1절에서 6절 이예요. 여기 하늘에 속했다고 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들이 여기 다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건 아마 근동지역에 있었던 일반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만 유독히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고요, 그 당시 근동에 이렇게 저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요?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 거지요. 거기에 보면 쭉 나옵니다. 천사, 군대, 해와 달, 별, 군대 이건 하늘의 군대를 뜻하겠지요? 하늘의 하늘, 그리고 하늘위의 물,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위의 하늘은 고대인들이 그런 식으로 우주를 생각한 거죠, 하늘은 층층이 있다, 이런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위에 물이라고 되어 있지요? 하늘위에 물이라고 하는 것은 예, 하늘위에 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재미있는 게 창세기 1장 앞부분에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할 때 그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물을 둘로 나누었다고 그래요.

 

물을 만든 건 아니예요. 이상해요. 그냥 그대로, 제가 히브리어 원어를 보지 못해서 그 정확한 뉘앙스를 말씀 드리기 힘듭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크게 틀린 게 아닐텐데요, 물을 따로 만든 것은 안 나오고 물과 물을 갈라갖고 가운데 어떤 것을 만들었어요. 이게 궁창이라고 하는, 이게 공간이죠. 공간, 이게 보통 하늘이라고 하는 공간인데 그런데 물을 만들었다고 하는 얘기는 없어요. 제가 1장을 본 걸로 보면, 그럼 물은 원래부터 있었다는 얘기인가, 그건 아닐 텐데요, 혹시 그럴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그 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사실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누가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창조사건을 누가 확인하고 쓰는 것 아니거든요?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과 이집트 등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도움이라기보다도 서로 생각, 사상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유대의 예언자가 고유한 방식으로 그것을 서술한 거예요.

 

어쨌든 거기에 보면 물과 물 사이를 나누어서 궁창을 만들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물이라고 하는 것은 헬라 사람들이 만물의 본질로 생각한 거죠? 그러니까 헬라인들하고도 생각이 좀 통할 수도 있습니다. 물을 근원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참고적으로 말씀 드린 거예요. 이 시인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쭉 나열한 다음에 찬양해야 될 이유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그대로예요. 두 가지입니다. 5절이 하나예요, 첫 번째 이야기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것, 피조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 혹은 뻔 한 이야기라고 생각 하실 텐데요, 그게 아닙니다.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속성을 정확하게 뚫어 본 사람이 한 이야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도 서로 그게 아니다, 저절로 됬다, 아니면 하나님이 만들었다, 서로 입장이 다르긴 할 겁니다.

 

피조성을 말하는 거거든요? 피조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나쁜 뜻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피조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은, 뭐 피조되, 우리 스스로 자연에서 나왔고, 뛰어나고 그렇게 되지, 그렇게 말하는데 성서가 말하는 피조성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세계를 낮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속성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면서 오히려 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 세계를 보려고 하는 시각 이예요. 존재론적 이예요. 그게 존재론적예요. 그걸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니까 사람이 거기에 터치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그걸 도구적으로 이용할 수가 없습니다. 수단으로 만들 수가 없는 거예요.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론적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창조행위라고 하는 것, 그러니까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보통 이야기 하는 것은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이건 신적인 어떤 능력들이 있다고 하는 거고요, 하나님의 신성이 들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운 시각이죠, 그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찬양해야 될 두 번째 이유는 제가 창조보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만, 제가 신학적인 용어를 쓴 거고요, 그냥 6절이 그걸 풀어 쓴 겁니다. 그가 또 그것들을 영원히 세우시고 폐하지 못할 명령을 정하셨도다 그러니까 자연원리, 원칙을 세우셨다니까 창조의 보존을 이야기 합니다. 보존, 하나님이 보존하신다, 어느 누구도 파괴할 수 없다고 하는 거지요. 중력 같은 것들이 창조보존의 원리입니다. 중력, 지구가 이렇게 있는데 중력이 작용하니까 삥 둘러서 모든 동물들이 있어도 붙어 있잖아요? 다 중심을 잡고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이 다 창조의 보존 이예요. 하나님이 그걸 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진화도 사실은 그런 면에서는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진화가 세상 생물체가 보존되는 하나의 원리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보존인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전혀 알레르기,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현대 유전공학 이런데서 이 생명의 원리까지 조작하려고 나가는데, 이게 과연 어떨지요? 그게 하나님의 창조보존에 도전 하는 건지, 아니면 창조보존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건지, 제가 지금 끊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위험한 일이긴 합니다. 두 가지가 찬양할 이유라고 말씀 드렸어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요, 다시 말씀 드려요,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음 받았다, 피조성이고요, 그리고 우리 피조성안에 하나님의 창조보존의 능력이 임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너무 신학적인 표현 같은데요, 여러분들이 하여튼 그런 쪽으로 자꾸만 생각하셔야 됩니다. 지금 당장 돈 벌고 ,가족들도 돌봐야 되고, 또 이런저런 일상적인 어려운 일들 해결해야 되고 하는데 이거 피조성, 창조보존성, 이런 것들이 실제 우리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냐,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될지 모르겠는데, 그걸 극복해야 됩니다.

 

피조성과 창조보존이 핵심이었어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토대가 탄탄하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피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존재의 능력이 내부에 있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꾸만 제가 또 관념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지요? 다시 들어 보세요. 여러분들이 신앙적인 내용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시라 그런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창조자와 피조자를 구분하는 표현의 하나인 거예요. 존재의 근거가 내부에 있는 이를 가리켜서 창조자라 얘기하고요,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는 것을 피조자라고 합니다. 우리와 세상은 다 존재의 근거가 바깥에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존재할 힘이 없는 거고요, 바깥에서 주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은 주어질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 근거가 내부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인거예요. 그러니 바로 그런 분이니까 여호와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예, 이런 시편기자의 시각은 단순히 어떤 신앙적으로 채색된 그런 것 아닙니다. 이 세계를 뚫어 보는 거예요. 여러분들 이걸 꼭 기억 하십시오. 두 번째 단락은 7절에서 10절로 땅에 속한 것들이 찬양해야 될 이유, 그런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 7절에서 10절까지 나옵니다. 땅의 있는 것들 이예요. 용, 바다, 불, 우박 다 무서운 것들이네요. 옛날 사람들은 참 무서워했을 겁니다. 용, 용은 정말 사탄의 상징으로 많이 나오고 있고요, 바다도 그렇습니다. 참 고대인들의 눈에 바다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참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바다, 바다너머는 뭘까, 뭐 모르지 않았겠어요? 몰랐으니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불, 이런 것들, 쭉 나갑니다. 물, 안개, 산, 작은 산, 과수, 백향목, 짐승, 가축, 기는 것, 나는 새, 쭉 땅에 속해 있는 것들, 무생물과 생물을 포함해서 다 열거됩니다. 예, 우리 눈에는 무생물과 살아 있는 것들이 구별되는데 어쩌면 이 지구 안에 있는 것들은 무생물과 생물의 구분이 없을 수도 있어요.

 

보는 시각에 따라서요, 서로 원소의 차원에서 보면 똑 같습니다. 그러니까 나무에 있는 원소나 그리고 돌에 있는 원소나 아니면 코끼리의 원소나 이런 게 서로 다 왔다갔다 지구 안에서 순환되거든요? 예, 그렇습니다. 어쨌든 시편 기자는 이걸 같이 묶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용, 바다, 불, 이게 다 땅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들입니다. 여기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용처럼 악한 것 까지 포함 되요. 재미있죠? 악한 것까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죠? 악마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고 하는 적극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참 놀라워요. 우리는 자꾸만 어떤 걸 하나님 편 아니야, 내 보내고, 하나님 편, 이렇게 나누기를 좋아 하는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있죠, 물론, 용이나 마귀라고 보통 일컬어지는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는 건 아닙니다. 이게 서로 긴장 되요. 긴장, 충돌하면서도 그러나 더 근원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를 이야기 합니다.

 

그걸 이해하시겠죠? 욥기에 보면 욥을 아주 극단의 고통속으로 몰아넣게 된 그 마귀가 하나님 앞에 가서 허락을 받고 해요. 어떻게 보면 그런 것이 코메디처럼 보이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거긴 놀라운 신앙이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당하는 그런 고난은 이 땅위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의인마저 그런 일을 당해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운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지나가면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착하고 믿음으로 살아도 장애 아이를 낳을 수 있고요, 사고도 많이 나고 아무리 잘 해도 그게 잘 안 되는 거 많습니다. 욥이 당하는 그런 고난을 보면 우리 현실이 어떤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어쨌든 감당을 해야 되는 문제예요. 그건 뭐, 이렇게 저렇게 왜 그랬냐, 따질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불어서 가능한대로 헤쳐 나가야 되고요. 성서기자들은 그게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것들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그걸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인 힘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일원론 이예요. 그런 차원에서 보면, 그런데 현실은 분명히 악이 존재한다는 말 이예요. 이게 충돌하는 거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행하는 아주 존재론적인 힘이 있어요. 이건 맞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악한 힘 이예요. 그건 뭐, 크게 다른 데로 나갈 것 없이 우리 내면에도 있습니다. 아무리 선하게 한다, 노력해도 거기서 거깁니다.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가 그러한 교양을 쌓고 가끔 설교할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훈련을 받고, 셀프컨트롤, 마인드컨트롤로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은 것들 안고 살아야 되요. 그런 것 보면 정말 이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악의 존재가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원론적으로 세계를 보는 종교들이 많았어요. 아마 영지주의도 그런 쪽에 가까웠을 거고요. 많습니다. 그러나 정통신앙, 성서의 신앙은 악까지 하나님 안에 들어온 거예요.

 

속된 표현으로 부처님 손안에 있는 손오공, 이런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론적으로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사탄, 악 이건 이미 끝난 거예요. 주도적인 힘은 다 끝났습니다. 부활이 모든 죄와 절망과 허무의 극복이니까요. 끝난 거예요. 그걸 문학적인 표현으로 마귀대장은 죽은 거고요. 패잔병만 남았다, 지금 중간시기라서 종말이 오기 전에 패잔병만 남아 있는데, 그래도 그게 강하니까 힘들지요, 우리가 맞서 싸우기가,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승리한 걸 내다보고 삽니다. 악까지 포함해서 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단락 11절에서 14절입니다. 사람을 향한 겁니다. 만민들아 찬양하라, 11절부터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거론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남녀노소 다 나와요. 왕, 백성, 고관, 재판장, 총각, 처녀, 노인과 아이들입니다. 모든 사람들이죠, 왕이라고 제외되지 않아요.

 

누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어야 되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세계를 봐야 되겠지요. 그게 억지로 봐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찬양해야 될 이유가 오늘 여기 본문에 제가 보기에는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이 홀로 높으신 거지요. 홀로 높으시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는 왕이 높아요, 백성들보다 왕이 높은 것 같지만 그런 건 상대적인 거고요, 그래봤자 도토리 키 재기에 불과한 거고요, 하나님만이 높으신 분, 그러니까 찬양해야 되는 거고요, 두 번째는 그의 영광이 뛰어납니다. 영광이 땅과 하늘에 뛰어나십니다.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때에 나타나는 어떤 능력, 이런 것을 가리켜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런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게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거죠,

 

세 번째는 여호와의 백성의 뿔을 하나님이 높이셨습니다. 14절에 나오는 이야기여요. 여기서 뿔이라고 표현했는데 하나님 백성들의 어떤 명예를 높였다, 하나님이 그렇게 책임져 주신다, 그런 뜻이죠, 세 가지라고 얘기 했습니다마는 그렇게 굳이 나눌 필요는 없긴 한데요, 그건 공부한다고 하는 차원에서 제가 그렇게 분류를 해 봤습니다. 세 가지가 나왔어요. 하늘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 그리고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거기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만물의 찬양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지금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이라고 얘기하는데 어떻게 만물이 찬양할 수 있을까요? 태양이 어떻게 찬양을 부를 수 있을까요? 태양한테 우리가 부르라고 해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시인의 영성 이예요. 태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시각으로 이 세계를 보는 겁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가능하고요, 안 보이는 사람에게 딱 막혀 있어요.

 

그러면 없는 거 아니냐, 없는데 시인들이 억지로 만들어서 그렇게 보는 거 아니냐, 이제 그걸 우리가 넘어서야 됩니다. 동화책 <강아지 똥>이라고 하는 것, 제가 언제 얘기한 건데, 누가 썼지요? 강아지 똥, 아, 권정생 선생이요. 강아지 똥 하나에 민들레가 피고 햇살이 쬐고 등등해서 친구가 되고, 우습게 보이는 강아지 똥이 이 만물의 하나의 조화가 되면서 놀라운 그런 생명의 메카니즘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는 거거든요. 그럼, 권정생 동화작가의 눈에 보인 이 강아지 똥의 아주 귀한 그 자리가 그걸 못 보고 그냥 지나가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한다면 없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시각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런 시각이요. 시인의, 영적인 시인의, 그러니까 영적인 시인인거지요. 그냥 시인이 아니라, 모든 현상들을 똑 같아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햇빛이 똑같이 내리고 비가 똑 같이 내리고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걸 다른 걸로 생각해 갖고 하나님을 증명하겠다,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아예 그건 안 되는 이야기예요. 그렇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린 사람들이고, 신앙적으로요. 똑 같이 우리 앞에 어떤 사물이 놓여 있고,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걸 영적인 시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통찰, 영적 감수성. 이게 신앙입니다. 성서기자들은 그걸 다 확보한 사람들입니다. 그 시각으로만 성령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 시각으로 생명의 영이 거기서만 이해가 되는 거고요, 예, 그러니까 만물이 어떻게 노래 부르는가, 이 말이 이해가 되지요? 그게 시인에 의해서 가능한 겁니다. 거기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역할이 있는 거지요. 그걸 조금 더 오늘 본문하고 연관시켜서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는 이 진술은, 그리고 이렇게 진술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인정하는 영적태도입니다. 그거예요. 창조능력,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잘났다, 이런 차원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창조의 신비, 성서와 세계를 보면서 들어가는 거죠.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인정하고 거기서 바르게 우리가 반응하고 살아가는 그런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도대체 뭐냐, 그건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쭉 스스로 해결해야 될 문제고요, 많이 있어요. 먹을거리 문제도 그렇고 우리 어떻게 같이 나눠 먹느냐, 나눔의 문제, 그리고 생태의 문제, 남녀평등의 문제, 제3세계와 그런 모든 나라의 정의로운 질서의 문제, 이것도 창조의 영성에 속해 있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바르게 자리를 잡게 자기가 살아가는 게 찬양하는 거죠,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찬양하는 겁니다. 만물은 이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게 인간과의 차이인데요? 만물은 그대로 두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역할을 그대로 사는 거예요. 사람만 유독이 그걸 망각하고 피조물로서의 자리가 아니라 창조자가 되고 싶다고 하는 욕망 때문에 많은 것들을 파괴하는 거지요.

 

그건 우리 사람에게 준 역할을 잘못하는 겁니다.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명령을 주셨어요. 동물들을 다 지나가게 하고 이름을 붙이게 했습니다. 각각의 이 자연의 질서와 창조원리를 인간이 바르게 세우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라고 하는 건데, 이걸 망각하죠, 계속해서 우리는 눈이 밝아져야 하겠다는 욕망으로 선악과를 취하고 그리고 형제와의 경쟁 때문에 분노로 인해서 아벨을 죽이는 카인과 같은 일들이 반복되고요, 그리고 하늘까지 높아지고자 하는 그런 욕망들이 바벨탑을 쌓는다든지 그런 일들이 좀 반복되고 있잖습니까, 이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지요. “만물이여 찬양하라,” 이게 우리의 일상을 끌어 갈 수 있는 시편기자의 영성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48편을 통해서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이유에 대해서 같이 공부했습니다. 잠시, 이 땅위에 정말, 잠시 동안 저희들이 손님처럼 살다 가야 되는데 주인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창조주처럼, 교만하지 않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참된 찬양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희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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