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49편 강해-구원과 심판

 

시편 149편, 1절에서 9절까지 있습니다. 저하고 여러분이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마지막 절은 같이 읽으면 되겠네요.

 

1.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

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시온의 주민은 그들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지어다

3.춤 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4.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5.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6.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7.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8.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9.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의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

 

아멘! 예, 여기 149편도 제가 앞에서 한두 번 말씀 드렸듯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이 시편의 마지막 묶음집의 하나입니다. 146편부터 150편까지 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편 전체가 다 여러 가지 주제들이 있지만 찬양하라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양하라하고 하는 이야기예요. 마지막 묶음집에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이 149편은 약간 좀 특이해요. 그래서 지난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149편을 오해한 경우들이 가끔 있습니다. 해석을 조금 오해하는 거지요. 이 텍스트이기 때문에 모두 다 해석이 필요하거든요? 사실 모든 것들이 인간 삶의 흔적들은 다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문학은 말할 것도 없지요. 시, 소설 이런 거 해석하지 않고 잘 모르는 거예요. 알아봐야 또 일부만 알고요. 미술도 해석이 필요하지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연주자들이 그냥 연주하는 거 아니라, 아시죠? 컴퓨터에 딱 입력해서 연주하는 것은 연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연주가가 그 곡을 해석해서 연주하는 거예요. 물리학도 마찬가지지요. 다 해석이지 해석 아닌 것은 없습니다. 성경도 해석이 꼭 필요한 거예요. 해석이 잘 될 때도 있고 잘 못 될 때도 있거든요, 그만큼 기독교 성서기자들의 영적인 수준에 달하지 못하거나 영 엉망으로 가게 되면 이 해석을 엉뚱하게 하게 되는 겁니다. 사이비 이단들은 대표적인 거고요. 통일교나 전도관, 옛날에 한국에서 흔한 시작한 이단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은 성경을 정말 엉뚱하게 해석해서 심지어는 문선명이 재림주가 이런 데까지 나가게 되거든요? 다 성서를 해석해서 다 그렇게까지 되는 겁니다. 거기는 몇 가지 숫자들을 다 끌어다가 동방에서 재림주가 난다, 동방에서 나는데 원리강론 읽어 보셨어요? 참 우리가 보면 유치한데 통일교 신자들은 거기에 완전히 빠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림주가 오는 햇수가 계속 계산이 나와요. 그럼 그게 문선명이 태어난 햇수하고 비슷하게 딱 맞아요.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성서를 해석하는데 그게 사이비 이단만 그런 게 아니라 정통이라고 하는 쪽이라고 하는 데서도 수준이 안 되면 성경을 이상하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많지요. 헌금에 대한 오해되는 것도 많고요, 기도도 그렇고, 많이 그렇습니다. 여기 이 149편도 좀 오해되는 경우가 기독교 역사에서 좀 있었습니다. 제가 두 개만 거기서 예를 들었어요. 하나는 독일 30년 전쟁에서 이 149편이 호전적인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은 독일에서요, 가톨릭하고 개신교 영주들이 싸운 유명한 전쟁이거든요? 30년 동안 싸웠어요. 1618년에서 1648년,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100년 후네요. 1517년에 종교개혁이 시작 했다고 본다면 100년 후에 시작해서 서로 영지, 정치적인 것이 많이 연관되어 있고요.

 

세계 역사에 나오는 유명한 겁니다. 30년 만에 양 쪽 다 망해요. 양쪽 다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게 전쟁이라고 하는 게 끝이 있습니까? 지나 이겨도 다 마찬가지인데 30년 만에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거기가 제가 85년도에 잠깐 유학했었던 중부 독일의 뮌스터라고 하는 곳입니다. 베스트팔렌(Westfalen)州의 州都가 뮌스터인데 거기에 시청사인가 거기서 유명한 30년 전쟁을 끝내고 평화협정을 맺어요. 그게 유명한 ‘베스트팔렌 협정문(Peace of Westfalen)’입니다. 그 때 서로 이 149편을 인용하면서 싸우자, 하나님이 원수를 무찌르라고 주신 말씀이다, 인용했고요, 앞서서 농민 전쟁 때, 1524년에 일어났던 독일의 유명한 농민전쟁 이예요. 우리나라에도 동학 농민봉기, 혁명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비슷한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 전쟁은 누가 지는지 아시겠지요? 결국은 농민들이 집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아주 참혹하게 깨졌습니다.

 

여기에 루터, 아, 복잡한 얘기 그만두고요, 루터와 거기서 그 문제 가지고 서로 사이가 벌어졌던 뮌처가 사실은 전쟁을 해 봐야 점점 농민들이 질게 뻔 한데 피해만 많이 볼 텐데 아주 열광적인 상태에 들어가서 싸우자, 하나님은 우리가 저 영주 군인들을 물리치게 해 주셨다, 뮌처가 그렇게, 어떻게 보면 선동이고, 어떻게 보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걸로 이 149편을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잔인하게 학살당합니다. 여기 6절에서 9절이 그렇게 인용될만한 내용들이예요. 7절 보면 이렇게 나오지요? 7.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수(報讐)하며 보수한다는 얘기는 복수한다는 뜻입니다. 민족들을 벌하며 8.그들의 왕들은 사슬로, 그들의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전쟁에서 그렇게 무력적으로라도 한 번 해보자 그런 내용들이 좀 있는 거지요. 그런데 그건 오해예요. 그리고 성경에 호전적인 부분이 있긴 있습니다마는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고요, 사실 그걸 말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이 149편은 핵심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공동체의 제의찬송이라고 할 수 있어요. 표현이 조금 학문적인 용어지요? 그걸 여러분들이 천천히 이해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왕권, 왕 되심, Kingship이라고 할까? Lordship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왕의 권한, 이게 고유한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왕권이 있다고 하는 것을 공동체가, 이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그걸 높이는 제의찬송, 제의는 제사 드리는 거예요. 의식을 얘기합니다. 예배찬송이라고 하는 거죠, 예배찬송, 그러니까 이걸 예배찬송이라고 생각해야 되는 거예요. 149편을, 그걸 갖다가 전쟁에서 이기자, 무찌르자 이렇게 얘기하면 곤란하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찬송가 중에서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원수 마귀 무찌르고 그런 거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어떤 시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적으로 이해해가지고 전투적인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얘기하면 좀 문제가 있는 거지요.

 

서론적으로 이 149편을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왕권은 구원과 심판으로 나타난다, 이거예요. 이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것들을 잘 이해하셔야 되요. 신앙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해가 아까 제가 해석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바른 해석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열광적인 데 들어가거나 아주 유치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거든요, 유치해도 믿음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건 믿음이 좋을 수 없습니다. 작은 것으로도 흔들리고요,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좋을 땐 좋다고 하더라도 결국 금방 문제가 많이 벌어지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영성도 그렇습니다. 좀 약간 진도가 늦게 나가는 것 같다 하더라도 그래도 일단 그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러니까 바르게 공부하는 게 최선입니다. 왕권이요. 하나님의 왕권을 얘기하잖아요? 이제 강의에서 좀 더 설명하게 될 겁니다. 왕권과 심판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납니다.

 

구원과 심판, 그렇게 정리하고 본문으로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1절에서 3절이 한 단락이고, 4절에서 6절이 한 단락이고, 7절에서 9절입니다. 오늘 공교롭게 딱 3절씩이네요, 전체가 9절인데, 3절씩 단락이 나뉩니다. 첫 번째 단락의 주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도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여기 1절에서 3절 첫 번째 단락에 이걸 조금 집중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던 대로 시편은 꾸준하게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이걸 잘 생각하세요. 그리스도의 삶은 정말 찬양입니다. 저도 시편을 이렇게 몇 년 동안 걸쳐서 꾸준하게 공부하기 전에는 그냥 늘 쉽게 쉽게 지나갔어요. 읽더라도 그 뻔 한 이야기 그런 정도로 지나갔는데 몇 년 동안 이렇게 같이 여러분들과 공부하면서 아, 이게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성을 정말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유대인들의 詩들이구나, 세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조금 더 시편 공부를 잘 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찬양하라고 외치지 않습니까, 정말 그건 찬양이거든요, 우리 삶이요, 그냥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 몰라라 하고 미친 척 교회 와서 예배만 드려라, 하는 얘기 아니라는 것, 아시겠죠? 세속의 삶 자체가 찬양이 되는 거예요. 이 찬양은 속 안에 기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아, 기쁨이라고 하는 것도요, 내가 뭐, 아파트 하나 구입했다고 해서 기쁜 것, 그것도 약간 기쁘긴 기쁜 일인데, 그건 잠깐 지나갑니다. 여러분들 아시지요? 아무리 좋은 거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면 금방 일상으로 떨어져서 다 시시해 보입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성서가 이야기하는 기쁨은 존재론적인 차원을 이야기하거든요? 그게 상대적으로 낫다,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건 우리가 습득해서 얻을 수가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거지요.

 

그건 하나님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건데 그런 기쁨에서 우리가 밥 먹는 거라든지, 숨을 쉬는 거라든지, 길을 걷는 거라든지, 모든 것들이 사실은 찬양으로 자리를 잡아야지요. 우리 현실은 찬양하고 거리가 멀어요, 힘듭니다. 짜증스러운 것도 많고요, 그런 식으로 보면 거의 모든 게 짜증스럽지요, 일단 우리가 도사가 아닌 한 현실의 지배를 받는 건 맞습니다. 신앙은 그러나, 찬양을 우리들에게 요구합니다. 찬양은 우리 안에서 존재론적인 기쁨이 우러나야 된다고 말씀 드렸는데, 조금 더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면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찬양을 해야 될 이유라고 하는 게 실감이 나나요? 우리는 피조물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은 창조자, 우리는 피조물, 창조사건이 신앙의 가장 궁극적인 토대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가 많이 듣기는 했습니다마는 아주 실질적으로 인식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마다 자주 그걸 강조하죠? 그냥 낱말 뜻으로 아는 것하고, 사전을 찾아보고 사전에 어떤 풀이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하고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 하고는 다르다고요,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게 우리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식의 성육신, 이런 게 필요한 거지요. 그런데, 이게 정말 큰 차이인데, 여러분들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인이니까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내가 뭔가를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꺼다, 이런 생각을 하거든요, 물질에 대한 것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것도 그렇고, 자식도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다고 말은 듣긴 듣지만 우리의 의식이 아예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가 번 돈이라든지, 아니면 자기가 얻은 명예라든지 자기 건강이나 외모나 자식이나 이게 다 자기 소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게 작동하게 됩니다. 이게 저절로 그렇게 사는 거지요. 결국 그건 오늘의 시대가 우리에게 그걸 강요하고 있고요, 그게 많으면 정말 잘난 사람, 보통들 그렇게 이야기하잖습니까, 자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는 거지요. 자기 노력을 통해서 강화하는 방식으로, 인생이 그런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내가 노력해서 수능점수도 많이 받고, 청년학생들이요, 이런 저런 사회의 지위에도 오르고, 그래서 그게 인생이 아니냐, 그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배운 삶의 방식입니다. 성서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충돌하잖아요? 나는 내가 소유하고 획득하고 내가 확인하는 방식으로 사는데 익숙한데 성서는 그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굉장히 그리스도인들이 충돌합니다. 이 삶이 분열되어 있어요.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위선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분열로 떨어 질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건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이미 달콤한 음식, 패스트푸드에 완전히 길들여지면 일반적인 밥상이 맛이 없듯이 우리가 세상이 말하는 방식의 패턴으로 우리 삶을 굳어져 버리면, 그게 달콤한 거니까요. 성서가 얘기하는 게 겉돌게 되죠, 이건 억지로 되지 않는데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소유와 자기를 강화하면서 삶을 확대하는 방식은 삶을 파괴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은 우리 왕이다, 그거예요. 왕은 세상을 통치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존재죠? 하나님이 그렇게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얘기한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것하고 연관이 되어 있어요. 조금 구분을 해서 제가 설명하는 겁니다. 큰 틀로 보면 같은 이야기예요.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통치한다, 통치한다는 말을 다시 또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냥 낱말 뜻으로 아시면 곤란하고요,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섭리다, 하나님의 통치다, 보통 이야기 많이 하고 있잖습니까, 어떻게 하시냐, 그 얘기하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지, 나에게 다 좋은 것 주시고 다 잘해 주신다,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건 잘 모르는 이야기지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거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통치하지 않아요. 이 차이를 일단 전제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에서요, 거기 강의안에 쭉 썼습니다마는 사람들이 승리주의로 오해를 합니다. 승리, 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승리해, 이 복도 받고 저 복도 받고 뭐, 다 하고, 십자군 승리처럼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건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 아시죠? 그리고 이건 신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것 아시죠? 수능시험이 얼마 전에 지났습니다마는 각 교회마다 수능을 위해서 무슨 특별 기도회를 한다, 그런 것 하는데 정말 잘 못된 겁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뜻대로 바람직하게 산다면 우리 자식들보다도 어려운 아이들 정말 좋은 점수를 받아야 될 아이들이 더 잘 받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가 제가 보기에는 정말 신앙적인 기도예요. 그렇게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노력한 것만큼 받아서 그렇게 주어진 대로 충실하게 살면 되는 건데 우리교회 아이들만 어떻게 해서라도 잘 보게 해 달라는 식으로 기도를 한다면 그건 승리주의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출세하고 뭐하고 일단, 그 신경을 좀 꺼야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승리주의와는 오히려 반대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넘어서야 되요. 하나님의 방식으로 통치하므로 종말론적인 승리를 내다보는 겁니다. 지금 당장 어떻게 잘 되는 게 아니라 종말론적인 승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승리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 승리에 대한 희망,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낮아져요, 오히려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달리신 것 생각하면 답이 나와요. 예수님이 일부러 십자가 지려고 지신 것 아니거든요?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게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도 모르신거예요. 정확하게 얘기하면 그렇습니다. 원해서 간 게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내가 인류를 구원하시겠다고 예수님이 생각하신 게 아니라 그걸 거부하신 거죠, 그건 이미 복음서가 다 얘기하고 있습니다.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달라고, 그러나 이 역사 속에서 결국은 그걸 받아 드렸어요. 그러니까 예수님도 승리하신 분이 아니라 실패하셨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통치 방식으로 부활이 일어난 거거든요, 그럼 우리 기대하고 전혀 다른 겁니다. 좀 막연하다고 생각이 되시나요? 기독교신앙이 뭐 그래? 여기서도 화끈하게 이루어지고 잘되기도 하고 이런 저런 게 있어야지 교회 다닐 맛도 나고 하는 거지 실패라니, 쉽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제가 말씀 드린 거예요.

 

그 쪽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신앙이 철저하게 도구화 되어서 내가 이용해서 써 먹는 도구가 되어 가지고 결국은 우리의 생명이 혹은 우리 영성이 훼손 됩니다. 이런 차원을 알아야 우리가 찬양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보통 문제가 아니죠? 예, 두 번째 단락입니다. 4절에서 6절입니다. 소제목은 ‘구원의 하나님’이예요. 창조자 하나님의 통치가 방금 말씀 드렸던 대로 세속적인 승리와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구원을 주신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를 원하지 않아요. 구원을 원해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벤처기업을 해서 큰 기업가가 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어떤 게 더 우선입니까? 그건 질문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구원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방식의 생명사건, 우리는 그걸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건 분명한 거예요, 그것이 우리가 찬양해야 할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 하나님은 통치자, 하나님은 구원자, 예, 아주 신앙의 기초적인 명제를 말씀 드렸어요. 그런 것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우리가 정말 찬양할 수 있는 거죠,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말에서요, 구원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뭘까요? 입만 열었다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 라고 얘기하는데 그 구원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그 몇 마디 못해요.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가고 살아 있을 때 그 평화, 기쁨 누리는 거지 이런 정도로 얘기합니다. 막연한 거죠, 그런 정도로 구원이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구원문제 이건 신학에서도 굉장히 많은 문제하고 연관된 주제입니다. 소테리올로지(Soteriology)라고 하는데요? 소테르(σωτὴρ)라고 하는, 헬라어죠? 구원이라고 하는 말에서 온, 고어에서 온 용어입니다. Soteriology, 구원이 참, 뭐, 한 두 마디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고 하는 명제는 옳은데, 그 구원이 뭐냐,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대답할 수 있으세요?

 

하늘나라에 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건 아니겠죠? 거기 가서도 또 배부르게 먹고, 맛있게 먹고 친한 사람 만나고, 가족들 만나서 계속 영원하게 살고 싶으신가요? 그게 구원일까요? 그건 아니죠, 뭘까요? 하여튼 지금 이건, 제가 그 문제를 다 설명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생각해야 될 문제예요. 이걸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오늘 저는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겸손한 사람을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나와요. 예, 4절에요,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실증적으로 묘사할 수 없어요. 실증적이라고 하는 말은 제가 아까 말했듯이 잘 먹고 잘 사는 것, 하늘나라에 가서도 가족 만나서 사시사철 목도 마르지 않고, 먹을 게 많고 그런 것들이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그림과 같은 표상들, 이런 것들은 실증적인 거거든요? 그렇게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건 묵시적인 어떤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지 실질적인 건 아닙니다. 왜 우리가 구원을 그렇게 실증적으로 말 할 수 없냐, 대답이 뭘까요? 하나님의 전권에 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조주가 할 수 있는 그 영원한 생명을 지금 우리가 뭘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야기 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이 아직 모르니까 그냥, 제가 어디에다 썼나요? 산타크로스 기대하면서 성탄절을 기다리듯이 그만 동화로써 만족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시간, 역사, 이 무한한 시간들, 여기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가, 이런 것들을 두루두루 아는 사람에게는 실증적으로 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권인거예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거예요. 상상력 안에 갇히지 않아요. 그러니까 희망할 만한 거지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라고 한다면 초라한 겁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기껏 해 봐야 어디까지 나가지를 못해요. 예, 그건 아름답게 하신다고 하는 게 그 뜻 이예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신다고 얘기를 하죠, 겸손한자, 지난 주 설교에도 작은 주제로 나온 거죠? 겸손과 대비되는 단어는 교만 이예요. 헬라어로 휘브리스(ὕβρις)라고 얘기했지요? 휘브리스가 교만이라고 하는 뜻인데 이게 죄예요. 자기신뢰예요. 교만은 자기신뢰입니다. 자기의, 스스로 만든 의, 자기업적, 이게 사람에게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요, 거기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죽기 전에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강도의 차이는 있어요. 그러나 누구나 자기를 신뢰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주 그건 본성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겸손은 다른 사람에게 친절 하냐하는 교양의 차원이 아니라 자기신뢰에 빠지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겸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겸손한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했다고 한다면 우리가 겸손하지 않은데 그런 사람을 구원한다면 우리는 구원받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죠? 이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는 겸손 할 수 없어서 스스로 구원받지 못하고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전가된다, 그래서 우리에게서는 구원이 발생할 수 없다, 이 말씀입니다. 예, 두 번째 단락이고 세 번째 마지막 단락입니다. 심판의 하나님입니다. 7절에서 9절 이예요. 이게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린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구절인데요. 이방인을 죽이고 침략하고 그런 뜻인데,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방인을 정말 그렇게 무력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없애라, 그 뜻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심판이 그런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만 영광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얘기하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심판은, 단순히 원수 갚기가 아니예요. 단순한 승리주의도 아닙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생각들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하고는 다른 거지요. 구약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 못 된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해석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원수 사랑에까지 이르지 않습니까, 구약에는 그건 없어요. 원수 사랑은, 그런 원수 사랑도 간단한 문제는 아닌데요, 구약의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그들이 살고 있었던 시대의 가치관들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한 것은 우리가 이해를 해 줘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 악이 멸망한다,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겁니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여기 묘사되어 있듯이 이방인들만을 향한 것은 아니예요.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을 향한 심판이 더 엄격했습니다. 많았습니다.

 

요즘 다비아 매일말씀에 에스겔서를 지금 계속 보고 있는데요, 참 놀라워요, 완전히 유대인들을 정말 그렇게 절망적인 그러한 상태로까지 비판하는데 에스겔의 예언이 나옵니다. 보통 이방인들에게 하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유대인들을 향해서 비판해요. 이러한 것들은 결국 싸워라, 어떻게 해라,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보실 때는 일단 이렇게 보셔야 되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위해서, 혹은 생명완성을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세계관, 혹은 가치관으로 표현한 거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금 제가 세 가지를 얘기했어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생명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시대의 필요한 것을 표현했다고 그랬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통하는 것 아시죠? 하나님의 구원, 생명완성, 하나님의 영광, 생명완성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 강의안에 썼는데 하나님의 구원은 직접 쓰지 않았지만 오늘 공부의 전체주제에서 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 생명완성, 하나님의 영광, 이 세 가지 개념을 연결해서 여러분들 생각하실 수 있으세요?

 

이 세 가지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 개념들을 설명해라, 그렇게 A4용지 5장 써라, 학기말시험 낼 수 있습니다. 잘 써야 좋은 점수 받는데 여러분들 쓸 자신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을 좀 대답을 얻으려면 그런 것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신앙이 깊어지는 거예요.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이 꼭 전문적인 신학자가 되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학자가 안 되도 이건 가능한 거예요. C.S.루이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은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이러한 것들이 다 바탕에 깔려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문가가 되지 않아도 일단 방향을 바르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떤 게 실마리가 풀리듯이 풀리게 됩니다. 그건 아주 분명한 거예요. 제가 문학을 전공하지 않았어도 어떤 소설이나, 시나 문학비평, 제 수준이겠습니다만 낮은 수준 이겠습니다마는 여러분들 나름대로 할 수 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일반 평신도들도 성서의 세계에 좀 더 깊이 들어가려면 신학적인 사유를 그 훈련을 해야 되겠지요. 우리 공부시간이 그러한 훈련기간이니까 여러분들이 좀 편안하게 생각하시면서 잘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전 유대인들의 제의찬양이었던 시편 149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왕권이 구원과 심판으로 나타난다는 놀라운 사실도 읽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당장 해결해야 될 많은 급한 문제들, 직장, 돈, 살림살이 이런저런 많은 것들에만 머무르지 말고 더 중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생명완성이, 성서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우리 영혼이 맑아져서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저희들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추운 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공부 할 수 있게 하신 것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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