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0편 강해-큰 할렐루야

 

시편 150편입니다. 마지막 시편이네요. 6절까지 있습니다. 짧지요, 짧습니다. 이걸 함께 읽을 텐데요. 두 번 연 달아서 읽겠습니다.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읍시다.

 

1.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2.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3.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4.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5.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6.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예, 우리가 수년 동안 수요일 저녁마다 같이 공부했던 시편공부가 오늘 마지막입니다. 예, 대장정이었습니다. 이렇게 긴 장수, 편수의 성경은 없지요? 150편에 이르니까요. 깁니다. 오늘 이 제목이, 표제라고 하는 그 제목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큰 할렐루야” 크다는 얘기인데 뭐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나요? 왜 크다는 얘기를 했을까요? 그건 제가 정확하게 조사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건 제가 보는 주석에서는 말하지 않아요, 그걸 말하는 주석이 따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보기에는 이 150편에는 할렐루야가, 내용이 그거잖아요?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가 그게 수없이 반복됩니다. 계속 반복됩니다. 이런 시편은 없습니다. 시편이 150편까지 있는데 그 중에 146편에서부터 150편까지, 5편이죠? 뒷부분의 다섯 편은 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대로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요. 다 할렐루야가 관계된 겁니다.

 

그런데 이 150편만은 더 유독히 찬양하라고 하는 말이 한 구절에 두 번씩이나 반복 되요. 우리나라 말로는 000을 찬양하라, 00을 찬양하라로 되어 있잖아요? 원래 원어로는, 히브리어는 제가 잘 모르겠고요, 원래 히브리어성경은 모음은 없고 자음만 되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돼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모음을 달았는데 조금씩 다르게 되었다고 그래요. 독일어나 영어에서는 앞에 찬양하라가 나와요. 찬양하라, 00을, 찬양하라 00을, 그러니까 이게 자그마치 11번 들어가고 할렐루야가 두 번 더 들어가요. 그러니까 전체에서 할렐루야하고 찬양하라가 똑 같은 얘기거든요? 찬양하라와 할렐루야가, 이게 13번이나 여기 들어옵니다. 이 짤막한 구절 안에요, 그러니까 할렐루야가 대 편성됐다, 그렇게 부를만합니다. 그런 뜻으로 “대 할렐루야” “큰 할렐루야”라고 하는 표제가 잡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루터 성경에는 그 말 그대로 그로스(Groß)라고 하거든요? 크다는 것, ‘Das große Halleluja'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큰 할렐루야예요. 이건 아주 음률을 맞추어서 읽어야 딱 기분이 날 것 같은데요? 그걸 염두에 두고 내용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성소에서 찬양하라고 해요, 찬양하라 성소에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의 성소에서,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 어순을 따르면 찬양하라 하나님을, 그의 성소에서 이렇게 나오겠죠? 예, 성소에서 찬양하라고 하는 걸 보면 이게 제의공동체에서 부른 노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한 거예요. 제의, 제사 드릴 때, 성소에서 하는 거니까요. 거룩한 곳, 거룩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 그리고 그 형식에 따른 제의,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소와 제의, 이런 것들을 단순히 형식적인 것으로만 보면 좀 곤란해요.

 

거룩한 곳이 어디 있냐, 다 똑같지 그거 틀린 말은 아닙니다마는 거룩한 곳, 그리고 의식을 통한 예배 이런 것들은 중요합니다. 하나의 형식 이예요. 형식 자체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형식 안에 본질이 담기거든요, 형식 없이 본질은 유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형식은 매우 중요한 거예요. 예배드릴 때에 뭐 예배 형식이 중요해? 그냥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되지,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그 예배 형식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교파들이, 침례교가 주로 그렇게 하고 더 나아가면 퀘이커교도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예배 형식이 없어요. 모여서 가만히 침묵 지키고 있다가 성령이 인도하면 성경 읽고, 설교 하고 싶으면 하고, 찬송 부르고 싶으면 하고 성령의 자유로운 인도하심을 따른다고 하는데 그건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 예배형식을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발전시켜 왔어요.

 

예전이라고 얘기 하거든요? 기독교도 예배형식에서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어요. 완전히 부정하는 쪽이라고 할까? 그 쪽이 형제교단이나, 그 다음에 퀘이커교도들, 침례교회 등등이 있다고 한다면 아주 엄숙하게 제의에 집중하고 있는데가 정교회, 그 다음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있겠고요. 아주 극단적으로 정교회, 로마 카톨릭교회에 그 다음에 가까이 와서 성공회, 루터교회 이렇게 되고요, 감리교회가 중간쯤 되고요. 장로교회가 형식이 약간 덜 하고요, 장로교회도 원래 형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교회를 많이 따라가기 때문에 형식을 많이 놓쳤고요, 형식주의라고 보통들 얘기하는데 형식주의가 아니라 본질을 담아내려고 하는 제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쭉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제의공동체가 부르는 노래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1절에서 또 얘기하죠?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권능의 궁창이라고 하는 것은요, 뭐, 여러분들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이 궁창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물위와 물아래를 나눴어요.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사건에서, 물위와 물밑을 나누고 그 사이를 뜨게 했습니다. 이걸 궁창이라고 해요, 보통 우리가 하늘이라고 하는 데를 궁창이라고 하는 겁니다. 윗물과 밑의 물을 나눠서 중간을 비우게 했는데 이게 궁창이고 하늘이다, 그러니까 우주공간을 가리키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있는 거고요, 그 권능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러한 뜻입니다. 거기 큰 설명을 필요 없겠지요, 그런데, 제가 다 설명하지 않지만 시편기자의 영성이 어떤 가를 여러분들이 잘 아셔야 됩니다. 이걸 많이 놓치지요. 모든 게 형식주의, 아니면 신앙의 매너리즘에 막 빠지게 되고요. 그걸 처음 볼 때와 같은 느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게 좀 필요한데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거든요?

 

뻔한 거지요. 모든 것들이, 너무 익숙해서 이게 살아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그런 필름이 막 지나간다고 할까?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보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이 세계를 봐야 되고요.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어떤 권능들, 그런 것들도 새롭게 느껴야 되는데 그래야만 찬양이 나오게 되겠죠, 지나가는 말씀으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그 세계 뉴스로 나온 것 같은데요, 미국 나사에서 우주 어디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그런 것 찾기가 쉽지 않거든요? 비슷한 조건이라고 합니다. 인류가 후손들이 거기 가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건 꿈 이예요. 600광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600광년 떨어져 있으면 지금 우리의 인공위성 이런 걸로는 수천만 년 걸리거든요? 실제적으로는 갈수가 없습니다. 우주에서 아주 외롭게 떠 있는 별이, 그리고 스스로 떠 있는 것도 아니고 태양이 우리를 겨우 붙들고 있는 거지요.

 

이게 중력, 그리고 어떤 이런 것도 조금만 틀어지면 다 모든 게 무너지는데, 아주 위태로운 생태우주론적인 그런 균형 속에서 우리가 겨우 살고 있는 거예요. 그만큼 소중한 거죠, 지구 안에 모든 것들이 새로운 건데 우리가 놓치고 다른 것에 우리의 신경을 더 많이 뺏기기 때문에 우리의 영성이 메말라 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고요, 기독교 신앙도 하나님의 창조, 궁창의 권능, 이런 것들은 조금 멀어요. 내가 예수 믿고 어떻게 무얼 잘 할 수 있냐, 너무 이런 것에, 주관적인 것에 기독교 신앙이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찬양하라는 그런 상태에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1절을 그 얘기였고요, 2절은 이렇습니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 예,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 이게 눈에 보여야 되는데 이게 잘 보이나요? 사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립니다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충 생각해 놓고 믿고 있는 자기에게 열광하는 그런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것을 좀 극복하고 결국 그건 자기신뢰에 떨어지게 되고요, 업적신앙에 떨어지기 때문에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집중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능하게 행동 하시는가, 그걸 봐야 되는데요, 구약도 다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 시편기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기도도 하기는 하는데요, 이건 잘 생각해야 됩니다. 그 분만을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예요. 거꾸로 얘기하면 참된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연결이 되시겠지요? 만약에 물리학자들이 세계를 구성해서 끌어가는 아주 가장 근원적인 힘을 발견했다면 그 힘이 하나님일 수 있고요, 그 힘과의 일치된 어떤 분이라고 우리가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지 못할 거예요. 피조물에게는 근원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기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보통 일반적으로도 몇 차원, 몇 차원 얘기하잖아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요, 그런 인식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작은 지렁이 한 마리가 사람을 인식하기 힘들잖아요? 그런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그 만큼 초라하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잘 이해하셔야 되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단편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식할 만한 능력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니까 토기장이를 알 수 없다, 그렇게 얘기하면 인간이 그렇게 별 볼일 없다는 얘기냐, 그렇게 이해를 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서의 핵심은 우리의 근원적인 인식의 한계를 얘기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질그릇과 같은 지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냐, 얼마나 절대적인 분이냐, 우리가 그 어떤 것으로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끊임없이 그걸 초월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그 것을 얘기하는 거지요. 그 하나님이 어떻게 능력으로 행동하시는지를 인식할 때만 하나님의 경험이 가능합니다.

 

출애굽기 이런 사건들을 하나님이 행하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만약에 오늘 그리스도인 어떤 사람이,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렇잖아요? 자본 이게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본이 그 사람에게는 신입니다. 지금은 거의 여기에 우리가, 현대인들은 매몰되어 있을 걸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그러면서도 거의 지배를 당합니다. 이 사회가 점점 그렇게 가기 때문에 개개인들이 그걸 뛰어 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군사력 이런 것들이 신이죠,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 무조건 승리주의, 정복주의 겉으로 드러나는 어마어마한 제국이 보여주고 있는 힘들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조금 더 구약을 뛰어 넘어서 그리스도 신약차원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 드릴 수 있어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무기력한 모습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무능력한 자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그 순간, 혹은 자리 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비교해도 될까요? 우리는 이렇게 사람처럼 이런 형태를 가진 게 뛰어나다고 보잖아요? 그러나 인간은 살다가 죽어서 다 해체가 되고요. 박테리아가 우리를 다 먹게 되고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우리보다는 박테리아가 더 힘이 셀지 모릅니다. 이게 적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능력과 힘이라고 하는 것을 늘 가시적이라고만 늘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이걸 넘어서야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것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반복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5절까지는 여러 악기들이 나오네요. 그 악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얘기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악기들을 열거 했는데 이렇습니다. 나팔, 비파, 수금, 소고, 소고춤을 춤추라 했는데요, 다른 것은 악기인데 춤만 따로 나왔어요. 약간 다른 형태인데, 소고 치며 춤추라고 했으니까 한 묶음으로 처리해도 됩니다. 현악 퉁소가 등장합니다.

 

이 3절에서 5절까지도 각 절마다 찬양하라 앞에 다 붙어요. 두 번씩 붙습니다. 예술적인 부분이죠, 음악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팔 비파, 악기 이런 걸로 노래 부르고 춤추고 이렇게 표현하는 거죠, 예술적인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예술도 그렇습니다마는 예술의 속성이 그런데요, 음악예술은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음악예술, 소리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에서 왔겠지요? 자연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라서 하려다 보니까 되겠지요? 대나무 숲에서 나는 바람소리, 이런 걸 들으면서 대나무를 잘라서 피리도 만들 수 있었겠고요. 이렇게 저렇게 예술이 자연에서 왔는데, 그러면서 그 자연을 또 뛰어넘습니다. 거기 인간의 특징 이예요. 문화, 문명의 한 요소이기도 하고요, 만약에 음악예술이 자연적인 것이기만 했다면 동물에게도 그게 가능해야 되는데 동물은 그게 가능하지 않지요? 자연을 통해서 어떤 것을 배웠지만 결국은 자연을 뛰어넘어서 또 궁극적인 것을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예술행위가, 인간의 행위가, 문화적인 행위가, 예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악기들은 다 소리를 내는 겁니다. 이 소리는 지구에만 가능한 공기에 떠 있는 현상 이예요. 이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 것은 참 황홀한 겁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는 소리를 듣지 못하겠지요? 몇 일이 지나야 소리를 들을까요? 본다는 것도 그렇고 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그렇고 참 대단한 건데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다른 게 부족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청각장애인이 치료해서 수술 받아서 처음에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 일까, 상상해 보면 대단하겠지요? 소리가 없다가 소리가 있는 거거든요? 無와 有의 차이인데 정말 절대적인 겁니다. 소리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다 사실은 다 無로부터 나온 겁니다.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하는 그 가르침 있잖습니까? 그 얘기는 어저께 누가 물어봐서 댓글을 달았었는데요, 연세대학교에 있는 김학철 교수가 기독교 사상 12월호에 <주기도란 무엇인가?> 책의 서평을, 비평을 했거든요?

 

다비아에 제가 올려놨습니다. 거기에 누가 읽고 김학철 교수가 내가 그 안에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개념을 썼거든요? 성서적인 근거는 없는 거다, 썼대요. 썼습니다. 저도 읽어 봤으니까, 확인했어요. 그걸 읽어 본 어떤 다비안이 이건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인데 왜 성서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시나, 궁금해서 물었어요. 잠깐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건 학자들에 따라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고, 그게 성서신학자하고 조직신학자 차이이기도 하고요, 성서에 있는 걸 아주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사람들을 성서신학자라고 하거든요? 조직신학은 그렇게 실증적으로 문자 하나하나 하지 않고 개념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삼위일체 이런 것도 성서에는 없습니다. 삼위일체라고 개념 그 자체가 말 자체가 없어요. 없는 말을 왜 하냐, 왜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건 헬라철학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비판합니다. 물론 헬라 철학에서 왔어요.

 

플라톤이 아주 구체적으로 3가지를 얘기하거든요. 핵심적으로 어거스틴이 그 작업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없었는데 갑자기 플라톤 철학을 연구해서 한 것은 아니고요, 이미 그런 근거들이 쭉 처음부터 발전해 온 거예요. 초기 그리스도교 시작하면서 등등, 하나님을 삼위로 성령이해, 아들예수 이해, 창조자 하나님 쭉 발전해 오면서 이렇게 삼신론, 양태론, 단일신론 여러 가지 유형의 신론이 있습니다. 쭉 발전을, 논쟁을 하다가 삼위일체론으로 이제 자리를 잡게 된 거지요. 거의 확실하게요, 거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아타나시우스나, 아리우스 논쟁도 있고요, 그런데서 일일이 예수의 본성이 뭐냐, 그런 논쟁이 사실은 지금보다 더 치열하게 교부시대 때 신학적인 논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안티 기독교 관련된 책들이 좀 나오고 하잖아요? 그런데 대해서 겁먹을 필요가 하나도 없어요.

 

그런 논쟁들은 이미 다 끝난 문제들입니다.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그냥 기도만 해서 똑 떨어진 게 아니라 지금보다도 훨씬 더 신학논쟁, 이단논쟁, 헬라철학으로부터의 어떤 그러한 도전, 그런 등등 많은 정치 종교, 철학, 사회적인 그런 도전을 많이 받았어요. 거기에 합당하게 자기를 변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겁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거기에 헛튼 소리를 했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걱정 안하셔도 되고요. 삼위일체론도 성서에는 없지만, 기독교가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그때 거기서 푈만이라고 하는 신학자가 쓴 <교의학>에서 제가 잠깐 인용해서 답글을 달아 줬어요.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있잖아요? 창조한다고 하는 동사가 바라(bara)라고 합니다.

 

*사제문서(P)의 창조보도에 따르면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bara)"(창 1:1) 시제어 bara는 구약성서에서 오직 하느님의 창조에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이 창조가 '전혀 수고함이 없이'이루어졌다는 것과 '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왜냐하면 창조는 '질료에 관한 진술과 전혀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지 현존하는 혼돈에서부터 힘겹게 질서를 쟁취해 낸 '투사' 유출로서 세계를 만든 '유출자'가 아니다.(폰 라트)

 

그런데 그 의미가 어떤 질료를 가지고서 모양을 바꾼 게 아니라 질료 없이, 있는 게 없이 질료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을 다 질료라고 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얘기하는 “질료와 형상”에서의 그건데요? 그런 것 하나도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창조한 어떤 것을 말할 때만 이 ’바라‘라는 말을 쓰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근거에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하는 신학개념이 나왔는데 옳은 이야기지요. 소리도 그렇고 색깔도 그렇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는 거다, 무로부터의, 있다고 하는 세계로의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태도가 필요하지 않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6절입니다.

 

여기에서 시편기자는 재미있는 표현을 해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이렇게 했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거의 똑 같이 반복하다가, 6절에서 약간 비틀었죠? 호흡이 있는 자마다, 이 사람이 문학적으로도 굉장히 세련되었다고 할까요? 아주 깊이가 있습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독자들이 쭉 똑 같은 게 반복되면서 읽어가다가 이 마지막 대목에서 또 한 번 새롭게 어떤 생각으로 비약하지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이 호흡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사람을 가리키겠지요? 특별한 경우에는 숨을 쉬는 모든 동물들을 가리킵니다. 호흡이 있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자가 찬양해야 될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그걸 뚫어 보지 않으면 찬양은 불가능해요. 내가 주인이다 생각하는데 뭐, 찬양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오늘 현대에 자기 확신, 자기긍정, 이런 것들은 신앙적인 게 아닙니다. 사실은, 자기를 부정하라고 하는 건, 자기를 비하하라, 자기를 냉소적으로 봐라가 아니라 아니라 본질을 뚫어보는 것이고요,

 

그 자기 피조성이라고 하는 본질을 알 때에만 창조주와의 관계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관계가 가능해야만 생명을 얻는 거지요.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을 한다면 조금 우리가 살아가는데 불편한 것이라든지, 건강이 조금 다른 사람보다 약하다든지 해도 다 감사한 거지요.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까, 아니면 반대로 자기의 건강이 아주 뛰어나거나, 좋은 게 많다거나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교만 할 것 없겠지요. 생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니까요. 우리가 그런 걸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도요, 한 5분만 숨을 안 쉬어도 죽으니까, 그러면서도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다, 참, 오늘 아주 너무 기초적인 건데 제가 또 말씀 드려서 미안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정확하게, 그리고 자기가 돈오(頓悟)라고 할까, 깊이 깨우침으로 알게 되면 자기의 삶, 운명,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습니다.

 

걱정할 게 없어요. 사실은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다 소중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요. 우리는 그걸 그 차원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비교하는 이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온갖 복잡한 생각들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단락입니다. 이게 오늘 150편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시편전체의 마지막이기도 하네요. 할렐루야로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할렐루야, 이제 나도 그러면 할렐루야를 입에 달아 살아 볼까? 할렐루야가 참 좋은데요? 말씀 보다 보니까, 제 친구 목사는 전화 받으면 할렐루야, 하하, 우리도 있어요? 아, 그렇구나, 할렐루야는 정말 우리의 영성을 그대로 담아내는 단어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는 건데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마냥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고난, 시련, 허무, 좌절, 그런 것을 알면서도 여호와를 찬양한다고 하는 건데요, 우리 삶은 할렐루야로 녹아들어야 됩니다. 이걸 우리가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요, 실질적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됩니다. 다른 건 찬양 할 게 없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잠깐 있다 가거든요?

 

목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사회적인 이런저런 거라든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가 버리니까요. 그런 걸 우리가 찬양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는 생명의 주인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인의 뜻에 따라 생명을 서로 나누는 거지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나눈다고 하는 것은 뭐냐,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다 다른 거고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생명을 서로 연대하고 나눔, 성만찬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붙들어야 할 신앙적인 화두(話頭)입니다. 딱 정답은 없어요. 때 마다 다른 거예요. 때에 따라서는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해야 될 때도 있고요. 때에 따라서는 병든 자와 함께 해야 될 때도 있거요, 정말 다 다릅니다. 어쨌든 그런 부분,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이 왔다는 그런 사실과 그리고 그 생명을 이 땅에 사는 동안 어떻게 같이 나눌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러한 데에 관심을 우리가 놓치지 말고 살자, 그게 바로 할렐루야 영성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3년여 동안 저희들 꾸준하게 시편공부를 마치도록 인도하신 것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한 해 마지막 달에 접어들어서 이 시편 마지막 편을 공부했습니다. 이 순간도 또 내일이면 과거가 되어 버리고 다 지나가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영원한 생명의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됨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이러한 공부들이 우리의 영혼에 귀한 양식으로 자리 잡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오늘 시편의 핵심주제처럼 ‘큰 할렐루야’로 가득하게 역사해 주옵소서, 오늘 이렇게 행복한 시간,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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