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0편 강해-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하게 될 시편은 30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한 성경은 <공동번역>이었어요. 오늘부터 <개역개정>판으로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이렇게 바꾼 이유는 우리 샘터교회가 11월 첫째 주일(2008.11.2)부터 대구에 있는 공간울림이라는 곳으로 예배처소를 옮기는데요, 이런 저런 몇 가지 이유로 성경도 지금까지 썼던 <공동번역>에서 <개역개정>으로 바꿨습니다. 거기에 맞춰서, 수요일 성경공부 겸 기도회로 모이는 것을 대체하는 이 성경공부에 성서도 <개역개정>으로 바꿨습니다. 예, 오늘 본문이 1절부터 12절까지 있는데요,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다윗의시, 곧 성전 낙성가〛

1.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4.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5.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6.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아멘! 이 30편의 표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다윗의시, 곧 성전 낙성가〛성전에 대한, 성전낙성식? 헌당식? 에서 부르는 찬송가라고 하는 거지요. 왜 이것이 다윗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여기서 말하는 그 성전이라고 한다면 다윗은 솔로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맞지 않아요. 아마 이것은 다윗이라고 그 성군, 큰 군주의 이름을 빌려서 이 내용에 좀 더 권위를 두려고 했었던 어떤 사람, 혹은 어떤 학파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 같습니다. 처음부터 성전낙성식에서 불려 졌던 건 아니겠고요.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제사행위, 예전에서 시편, 구전되어 내려오던 혹은 문서화 되어 있던 이 시편이 그렇게 사용된 걸로 보입니다. 그러한 변화, 하나의 편집사적인 변화라고도 할 수 있고요. 어쨌든 하나님의 이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사람을 통해서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에서 이 성서는 지금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을 포함해서 문서들이 지내오는 그런 과정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죠,

 

오늘 여기 표제어가 말하듯이〚다윗의시, 곧 성전 낙성가〛라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딱 정해진 대답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렇게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렇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우연한 것은 아니고요, 그 성서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적인 세계와 더불어서 그것을 읽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어떤 선택, 이런 것들이 같이 어울려서 거룩한 그런 말씀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영향을 끼친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는 핵심은 이 30편이 아무 내용도 없는데 그냥 어떤 사람이 툭 가져다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여기에는 우리가 아무리 퍼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영적인 깊은 샘물이다, 그 뜻입니다. 예, 한 절씩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예, 다른 시편에서도 그런 내용들이 많이 나오지만 시편기자 이 사람도 주변에 자기를 모함하거나 또 영적인 면에서 경쟁하거나 이 사람을 어떻게 해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 주변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처한 어려움을 보고, 그 상대방들이 즐거워하게 되는 상황 그건 이 시편기자가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 표현들을 보면, 시편기자가 너무 인간적이다 할 수 있어요. 비록 자기들과 대적했던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자기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고 말이지 굳이 그런 것까지 이 내용 안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조금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게 아니냐 하는 거지요. 동양의 어떤 군자상이라고 할까, 주변의 그런 상황으로 흔들리지 않고, 너희들은 어린애들이야, 이런 정도의 높은 경지, 인간적인 높은 경지를 갖고 있지 못한 것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들을 시편에서 여러 번 만나게 되거든요? 그러나 그렇게 인간적인 모습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더 성숙한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성숙하다는 표현이 맞지 않는다면 더 진솔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건데요, 하나님 안에서 응답하는 건데요, 이건 어떤 인생살이에 그런 풍파 이런 것들을 다 거쳐서 하나도 흔들림이 없는 평정의 상태에 도달하는 그런 자기 훈련은 아닌 거지요. 그런 것이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건 핵심은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원수와의 관계에서 티격 대격하는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어떤 그 신앙적 태도 그게 바로 신앙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면 안 되겠다, 이야기 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의 삶이라고 그렇게 치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시편기자의 관심이라고 하는 것이 원수를 갚지 못해서 안달하는 그런 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에게 그런 것들이 영광되지 않는다고 하는 더 근본적인 생각이 거기에 있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셔서, 또 못하게 해달라는 기도이고요, 내가 주님을 높인다고 하는 겁니다. 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원수들이 나를 조롱하는 이유는 내가 어떤 불행에 빠졌기 때문이거든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니 저 혼자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이 큰 소리를 치더니 꼴 좋다, 이렇게 말을 들을 정도로 이 시편기자가 어려움에 빠진 겁니다. 성서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큰 난치병,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냐,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 같아요. 거의 절망적인 그런 상태에 갔다가 병도 치료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더 이상 이 사람과 원수 되었던 사람이 조롱하지 않게, 기뻐하지 않게 된 거지요.

 

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바로 여기 나오는 군요. 스올에서 이끌어 내사,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간 거지요. 스올은 고대 유대인들이 모든 죽는 사람들이 가야 할 지하의 세계라고 본 그곳입니다. 스올에서 끌어냈다고 하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 갔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 고백입니다. 4절,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예,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스올에서 끌어내서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으니까, 같이 찬양하자 하는 거지요. 표제가 성전낙성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찬양인데 저 무덤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하는 겁니다. 아마 이 대목에서 이 시편기자는 아마 출애굽 당시에 있었던 홍해를 건넌 사건,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해는 사람들이 다 빠져 죽는 사건이잖아요, 그리고 바다 속에는 악한 영들이 거한다고 그들이 생각했거든요, 스올에서, 죽은자들이 가야될 어둠의 세계, 지하의 세계에서 나왔다가 마치 홍해를 지나는 그런 역사적인 사건하고 연관해서 이 본문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라 거룩함, 예, 거룩은 세속적이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훨씬 더 근원적인 거예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행위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다 분석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 그러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지요. 성품보다도 능력이 서로 연관되는 건데, 거룩함, 하면 일단 이것은 성품처럼 어떤 속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만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 하는 것이거든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로부터 건져내고 바벨로 포로로부터 살려 내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바로 하나님인데, 그게 바로 거룩함이다, 그걸 기억하며 감사하자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각각 찬송도 중요하고요. 다 연관되는 문제인데요, 특별히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찬송, 기억, 감사 이게 같이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억하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도 그냥 듣던 얘기로 하고 지나가버리면 사실은 상투적이지요.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는 하나님 이렇게 기도드릴 때 앞에 붙이는 칭호가 틀린 건 아닌데 그것이 하나의 우리의 습관적인 것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그 깊이를 놓치게 되는 거거든요, 그 거룩함을 기억 한다고 하는 사실, 거룩함을 기억하라고 하는 이 시편기자의 이 권면, 이것은 우리가 늘 다시 새겨야 될 귀한 말씀입니다. 거룩함을 기억하라,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실제적으로 어떻게 경험하느냐 그런 문제이지요. 많은 경우에는 이런 것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어 있는 낱말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룩하지, 거룩하지 말을 하는데 그러나 그 거룩이라고 하는 것에 어떤 실체를 잘 알지 못하면서 말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루돌프 오토의 <거룩>이라고 하는 책 있잖습니까, 제가 다른 강의에서도 몇 번 인용한 책입니다. 다스 하일리게(Das Heilige)라고 하는 원어를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전문적인 용어로, 누미노제(Numinose)또는 누멘(Numen)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 그건 아득한 경험이지요. 현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한 경험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로써 다 포착해 낼 수 없고, 우리 인식으로 다 범주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과, 종말론적 완성행위, 그리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현재의 심층적 생명의 어떤 은폐된 능력, 그런 것들을 다 같이 아우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신비한 하나님의 통치를 표현하는 하나의 단어라고 할 수 있지요. 거룩함을 기억한다, 매 순간순간 기억한다. 매일 찬양하듯이 그 거룩함을 기억한다고 하는 겁니다.

*루돌프 오토 Rudolf Otto,『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길희성 역, 분도출판사

 

만약에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우리의 영성이 얼마나 건강 해질른지 참 우리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놓치는 거지요. 5절,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 사람이 경험한 큰 질병, 어두움, 스올에 가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을 하나님의 노여움이라고 표현했어요. 그건 잠깐이고 은총이 평생이다.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곧 뒤에 이어지는 구절은 비슷한 얘기지요.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왜 이렇게 표현하는지 아시지요? 아침에는 울음이 깃들더라도 저녁에 기쁨이 온다고, 보통 은 하루가 아침에 시작하니까 그렇게 얘기해야 되는데 이 성서에는 저녁과 아침이 대비가 많이 되요.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이 저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기에는 그렇습니다 그게 오늘 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인지는 모르겠는데요, 갑자기 연관되는 생각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런 점도 있겠고, 또 하나는 울음, 이런 것들은 저녁과 더불어서 밤 어두우니까 계속되고 아침에는 빛이 들어오게 되고, 새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기쁨이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지요.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아, 우리가 아픈 시간은 짧고, 그 다음에는 건강한 시간은 길다, 반드시 그런 쪽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이건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노염이 잠깐이라는 건 시간의 차원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노여움, 진노 그런 것들, 시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들은 우리를 정말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하나의 훈련이다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과 훈련이지요. 그건 다 지나가잖아요, 힘들긴 하지만 그런 훈련을 거쳐야만 우리가 어떤 경지에, 어떤 단계에 올라가듯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는 그런 노여움은 결국 그렇게 지나가는 거다, 더 중요한 것은 지나가는 것이면서 그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요.

 

6절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든 게 다 잘 될 때, 이럴 때는 자기 잘난 척 한 거죠, 모든 만사가 다 풀릴 거다, 생각한 거죠, 그러나 그것은 잘못인 거죠, 그걸 지금 반성하고 있는 겁니다. 7절,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자기 일들이 아무거나 잘 될 때는 뭐, 잘 난 척 하고 그랬었는데,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근심하게 되었다, 어려움이 오니까 자기는 견딜 수 없어했다, 앞에서 스올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성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8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절,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고대 유대인들의 생각이 그대로 들어 있어요.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거죠, 무덤에 내려 갈 때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렇지요? 무덤에 내려 갈 때 자기 몸속의 자기 피는 증발하고 없어지는 거니까요. 그렇다면 진토, 먼지, 흙에 불과 한 건데 어떻게 주를 찬양하냐, 그건 유대인들만의 생각을 그대로 여기 담고 있습니다. 그 만큼 간구하면서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하는 거지요. 10절,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결국은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 할 수 밖 에 없었지요. 은혜와 도움, 하나님 안에서만 자신의 삶이 유지될 수 있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입니다. 11절,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그러한 어려움들을 이제 딛고 일어서서 춤추고, 기쁨의 띠를 띠게 됬다,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지요. 어떨까요? 어떨까라기보다도 이 사람이 이 때 마음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을까요?

 

무슨 말씀이냐면 그 어려웠던 질병, 그리고 이런저런 시련 그런 것들이 다 해결되어야만 이렇게 우리가 기쁨의 그런 노래를 부를 것인가, 그런 질문인 거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정말 자기가 어려웠던 문제들을 다 해결했기 때문에, 똑 같은 이야기인데요. 이런 뒷부분에서 이렇게 슬픔이 변해서 춤이 되게 했다거나 베옷을 벗고 기쁨의 띠를 띠게 되었다거나, 이런 문학적인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일까요? 그건 지금 제가 딱 끊어서 말씀 드리기는 힘드네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질병에 걸리거나 어떤 개인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다 해결해야만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그대로 안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하나님이 정말 나를 도우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는 그런 영적인 단계에 들어가는 거거든요, 오히려 그런 어려움과 질병이 있을 때 그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거든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게 아마 6절과 연관되는 것 같아요. 6절에, 앞서 이야기한 그 말을 다시 한 번 읽으면 이렇습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형통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 같은 것들에 의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잊어버리는 거지요.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거지요. 당연한 것처럼, 나는 기도 많이 하고 어떻게 했으니까 잘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는 거지 당연하다, 이런 정도로 생각을 하는 거거든요. 아무리 잘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태에서는 참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의 깊이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게 참 사람이 이상해서 오히려 우리가 영적으로 어떤 기본, 이런 걸 놓치지 않기만 한다면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예민하게 더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더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주어지거든요. 그거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울이 한 말이 여기서 연관되겠군요. 자기는 풍부하거나 비천하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다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 그리스도 안에 그런 능력이 있다, 건강해도 건강하지 못해도 어떤 형편에도 다 처할 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형통한다고 한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아야 되는데 쉽지는 않지만, 교만하지 않는 게 영성이고 또 큰 어려움 가운데 더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다고 하는, 그것이 정말 우리들에게 기쁨이라고 하는 사실로 들어가야겠지요. 그런 것들이 또 영성이겠지요. 마지막 11절,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예, 잠잠하지 않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이것도 다 하나님이 다 시킨 것으로 말하잖아요? 찬송하게 하는 것도 자기의 의지라기보다도 그냥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시는 거지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에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하게 하고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셨다, 그게 분명하게 차이가 있는 겁니다. 자기가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마저, 기도하고 찬송하게 하는 것마저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라고 하는 차이가 있는 거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기가 인식하는 게 중요하는 거예요. 그렇게 깨달아 지는 게 중요한 거지요. 이건 잘 안되지만 사실 아니지만, 생각하는 게 좋다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런 겁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이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겪고 일어선 이 사람, 실질적으로 질병이 완전히 치료되었는지 아닌지는 두 번째 치고 이 사람은 상당히 스올에 가까이 갔다가 이제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런 단계까지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전 어떤 시편기자의 솔직한, 그리고 진솔한 기도시를 읽었습니다. 참 놀랍지요? 여러분과 저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이러한 신앙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영성의 가장 중심과 그 깊이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서 기도하게 하고 찬송하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그 안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에게 온전히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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