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1편 강해-강하고 담대하라

 

시편 31편, 오늘 같이 읽겠습니다. 다른 시편보다 조금 긴 편에 속하는데 그래도 내용은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렇게 길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1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이제 제가 읽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성경을 가지고 있다면 눈으로도 같이 보시고요, 없다면 들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31편,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의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4.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5.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6.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들을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7.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8.나를 원수의 수중에 가두지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9.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10.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11.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2.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3.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14.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15.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6.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17.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를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악인들을 부끄럽게 하사 스올에서 잠잠하게 하소서

18.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이 말 못하는 자 되게 하소서

19.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0.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21.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22.내가 놀라서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23.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24.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아멘! 오늘 여기 말씀에, 다른 시편들도 많이 그런데요, 특별히 고통에 대한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고통이요. 이 고통과 시, 고통과 시편,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있는 것 같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이유야 여러 가지 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흥미들을 다 없애버리는 기능을 합니다. 지금 제가 큰 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지금 50대 대장암이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개인적으로 소화는 잘 안 되는 편이고요, 약은 먹지 않습니다. 소화 상태가 좋지 않은데 그것은 곧 위와 장, 소장, 대장 이런 것들이 원활하지 않다는 거지요. 내시경을 통해서 검사해봐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안하고 있습니다. 모르지요. 그러다가 정말 위나 대장이나 요새 흔한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제가 다른 생각 아무 것도 안할 거 아니예요.

 

오직 그 병만 생각하겠지요. 그런 상태에 들어가면 다른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다 손 놓지요, 글쎄요. 뭐를 놓을까요? 구체적으로 제 경우를 본다면 제가 본질적이지 않은 그런 일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어떤 걸까요? 테니스 치는 것? 이건 본질이다 아니다 보다도 암이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저하되었다면 테니스는 계속 할 것 같구요, 교회활동, 이건 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강단에 서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저하되지 않는 한 할 거고요, 글 쓰는 것? 다비아 홈페이지에 댓글 다는 것은 줄어들지 모르겠는데, 당장 손 놓아야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손에서 놓을 걸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만약에 이런 거죠, 주식투자를 했다거나 부동산 팔고 사고 그런 건 아마 다 때려 치겠지요. 그런 것들이 제게는 없네요. 어쩌면 심심하게 사는지 모르겠고요. 다른 것들은 별로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가 자꾸만 이 공부 시간에 들어가서 미안합니다.

 

말씀 드리다보니까 그런 생각이 나서 그런 거예요. 우리가 큰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소에 사는 삶의 모습들이 그런 병에 걸렸을 때 사는 그런 것하고 비슷한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사람이 큰 어려움들을 당하게 되면 모든 염려 근심이 없어지게 됩니다. 여자들이 미용이라든지 이런데 관심 많이 있잖아요, 암에 걸려서 당장 시한부다, 시한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몇 년 동안 계속 암과 싸워야 된다면 정말 그런 마사지 다니는 거라든지 악세서리, 자기 몸치장 하지는 않겠지요. 하더라도 그런 관심은 줄어 들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언어로 표현하는 우리들의 신앙적 태도가 바로 기도이고 시편, 신앙적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한다면 다른 때 우리 생각들이 확장되어 있다면 곤란하잖아요, 하나님의 관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야 되는데 보통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을 쏟아내야 될 대상들이 많다면 힘든 거예요.

 

그런 점에서 친구들이 많다고 하는 것은 심심하지 않다고 하는데서 좋겠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을 일부러 가려가면서 사귀어야 된다는 말씀은 아닌데요. 사람들에게 쏟는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너무 많으니까 친구들의 관계를 가능하면 줄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친구들의 관계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친구들만이 아니라 인간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점에서도 양적으로, 질적으로가 아니라 양적으로 거기에 우리의 삶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 시골에서 오래 살다가 와서 그런지 모르지만 큰 도시는 모르겠습니다. 읍 단위, 면 단위 사람들의 친목단체가 의외로 많습니다. 본토백이들은 더 많습니다. 같은 띠의 모임으로부터 시작해서 학교동창들,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거의 자기 인생을 쏟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식들 돌보고요.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크게 잘못 되었다고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영적인 집중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런 것들이 가능한대로 제거되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고통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고통과 고난은 정말 힘들기는 한 거지요. 힘들기 때문이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이 될 가능성은 많습니다. 준비만 되면요, 준비가 안 되면 우리 삶을 파괴하지요. 고인이 되신 분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최진실씨, 그 분은 한국의 탑 탈렌트요, 배우였고요, 기독교 신앙을 나름대로 독실하게 가졌던 분이라서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와 연예계의 정체성이 뭐냐, 그 분이 하나의 상징적으로 제시 될 수 있는 거지요. 그 분이 외롭다고 그랬잖아요. 아무도 자기하고 대화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에 자살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외롭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말 그 사람이 신앙적 깊이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영성을, 영적인 기쁨을 조금이라도 맛보고 있다면 문제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외로울수록 사람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오히려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고 하는 이 신비로움 영적인 현실들을 전혀 모르는 거지요. 이런 게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영적인 깊이를 맛본다기보다도 마치 계모임, 동창모임, 취미생활 동아리에 참석하듯이 그렇게 가는 것이 비일비재해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교회 가서 재미있으면 됩니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종교적 취미생활하면 충분한 거예요. 그 신앙이 별로 진지해질 필요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부응해서 신자들을 말씀의 깊이 안으로 끌어 들이지 않아도 되죠, Win:Win이라고 할까? 목회자도 편하고요. 자기도 영적으로 깊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신자들에게 종교적인 위로, 위안 그런 정도의 수준에서 접근하면 되고, 신자들도 심각하게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여기서 심각하다고 하는 것은 물론 양면성이 있는 거예요.

 

너무 종교생활이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좀 가벼워져야 되는데 그러나 지금 바로 얘기한 이 진지함을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있어야 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는 신앙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당연히 주어져야 될 생명의 깊이 앞에서의 두려움과 놀라움 그런 것들이죠, 그런 것들에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어떤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넘어 질 수 밖 에 없어요. 그리고 그러한 고통들을 피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요. 결국 그래서 용케 빠져 나와서 좋은 일들만 많으면 그렇게 인생을 살다 끝나는 것이고 어려움을 만나면 정신 못 차리게 되는 거겠지요. 이 31편에도 고통 고난의 문제가 중심주제로 나와 있고요. 제가 서론적으로 말씀 드린다고 하는 게 좀 길어졌습니다. 이게 사실은 서론이긴 하지만 시편 공부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기본 바탕이 되는 거지요. 영성의 깊이니까요.

 

고통과 고난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 이것을 만나는 기회가 된다고 하는 사실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여기서는 또 오해는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해도 잘 된다고 하는 자기합리화는 아닙니다. 그리고 인생이 늘 그렇게 어둡고 칙칙하고 고생바가지여만 된다고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금욕적이 되어야 된다거나 자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니고요, 우리 삶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계속 부닥치기 때문에 좋은 일들도 어려운 일들도 행복할 수 도 있고 그 조건들이 불행할 수도 있는데요, 어떤 상태에 있든지 우리 상태의 밑바닥, 우리 영혼의 가장 밑바닥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어야 되는데 아주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삶이 잘 풀리면 그 관계에 잘 들어가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고난이 억지로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로 끌어들이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거지요.

 

산상수훈에서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눈물 흘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 우는 사람이 복이 있다, 등등 그런 표현들이 있잖습니까, 그것도 지금 제가 말씀 드린 것하고 연관되는 거지요. 가난해야만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을 해결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릴 수 밖 에 없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지요, 여기서 외롭고 소외되고 하는 사람들은 혹시 뭐, 현실을 무시하고 피안의 세계로 간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피안적인 구원을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의 이것이 이원론적으로 나눠지면 안되겠습니다만 하나님 나라의 피안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노동의 문제, 성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등. 우리가 풀어야 될 많은 문제들을 다 푼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일치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이미 기독교 신앙에서 대전제입니다. 차안의 문제로 모든 차안의 문제가 해결되지않는다고 하는 거죠, 피안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피안성은 우리가 놓칠 수 없는 건데 딱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피안이라고 하는 것이 저 세상이니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이 차안, 이 세계의 삶과 어떻게 변증법적인 연결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유기적인 관계라고 할까요? 긴장관계라고 할까요? 그 어떤, 우리가 다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 면에서 이원론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피안이 무조건 이 차안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재림신앙하고도 연관되는 거지요. 오늘 말씀을 잘 보시지요. 좀 긴데 오늘 구절 하나하나 보진 못하겠습니다. 같이 읽어가면서 중요한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사실 이 전체를 꼼꼼하게 살피려면 31편 하나만 가지고요 한 달 내내 해야 될 것 같아요.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예, 주님께 피한다고 하지요,

 

이런 표현도 여러분들이 너무 설교조로만 듣지는 마십시오. 도대체 이 시인이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어떤 영적경험을 했는지 또한 영적경험에 대한 진술인지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께 피합니까? 우리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잖아요?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까, 아니면 기도원으로 들어가야 되는 겁니까, 어떤 걸까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하는 거잖아요? 주님께 피한다, 그냥 간단하게만 본다면 자기가 의지했던 세상의 모든 세력에 대한 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끊어내고 하나님에게만 우리가 집중한다고 하는 뜻인데요, 세상과의 관계, 친구, 친지 지인, 그 등등의 관계를 끊는 것은 쉽게 손에 들어오는데 여호와께 피한다고 하는 것은 무얼까요? 예, 그것을 저도 그것을 정확하게 말씀 드리기가 쉽지 않겠네요. 일단 연관, 상관되기 때문에 따로 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아까 산상수훈의 얘기 했듯이 인용한 구절처럼,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할 때 그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접어 두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기대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사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거지요. 여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는 대로 여호와께 피한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의지할 만한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거지요. 일단 그렇게 되면 일단 벗어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피하는 출발점입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고 야훼 하나님을 섬기라고 할 때 비슷한 관계거든요. 야훼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 것은 딱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고 우리 인식론적 범주 안에 끌어 들일 수도 없는 그런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은 그렇지 않아요, 아주 분명한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기는 아주 명확합니다. 그게 더 설득력이 있죠, 사실은요, 한쪽은 아주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는데 다른 한쪽은 사실은 막연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요, 바로 말씀 드렸듯이 그 분이 이름도 없는 분이고요, 나는 나다, 모세에게 그렇게 말씀 하셨듯이, 자존하는 거고, 존재근거가 자기 안에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런 분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상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다산, 다복, 풍년,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제공해주는 어떤 힘이기 때문예요. 그건 가능합니다. 자본주의 같은 것들, 자본주의 자체를 뭐라고 하기엔 힘들지만 자본주의적 그런 속성이요, 그런 것은 아주 다이나믹하기 때문에 섬기기 쉬운 거예요. 우상으로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확 드러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우상숭배로부터 벗어나는 것만큼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밖에 없어요. Positive한 설명은 불가능하고 Negative라고 할까요? 약간 소극적인 방식으로 설명 할 수 있는 겁니다. 아니다, 하나님이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 하나님 경험이 그런 거 아니냐, 그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많은 경우에 목사들이 그런 방식으로 설명을 하지요. 사업이 안 되었었는데, 어떻게 하고, 기도하고 하니까 되더라든지, 믿으면 축복받는다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들이 선포되고 그것들이 다 받아 드려지고 있지요.

 

심지어는 우리 교회에 천 만원 십일조 하는 신자 열 명 나오게 해 주십시오. 믿습니다. 하는 식의 설교도 해요, 신자들은 거기에 아멘 하거든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 그래야 신자들도 마음이 통쾌하니까요. 그러니까 뭔가 믿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가 잘 못 따라 가는 겁니다. 그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은 붙이지만 오히려 우상숭배에 가까울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끌어 내릴 수도, 잡아 낼 수도, 범주화 할 수도, 계량할 수 도 없는, 측정할 수도 없는, 그 분 스스로 계시를 하는 것 만큼 우리가 조금씩 따라 갈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적극적으로, 실증적으로 따라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이 좀 적당하지 않은 것 같지요?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답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큼 말씀 드린 거예요.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2절,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바위와 산성, 3절도 계속 그런 호소입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이게 상징이잖아요? 반석과 산성, 단단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긴 한데 그러나 그것은 구체적인 것이라기 보다도 비유이고 상징이고 메타포(Metaphor)이기도 합니다. 이게 그렇게 바위와 산성이신데 나를 인도하고 지도해 주소서, 이게 그런 쪽으로 신앙적인 눈을 뜨지 않으면 이런 기도는 헛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모르면요,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거나 우리를 지도하시는 것은 아주 특이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방식이 아닌 것으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공부 시작할 때 드린 말씀처럼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 은총에 이르는 길, 은총을 경험하는 길이 된다고 했잖습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를 도와준다, 이끌어준다 하는 것하고는 다른 거잖아요, 어떻게 고통이 하나님의 은총에 이르는 길이 될까, 그런 질문을 우리가 이해해야만 이런 말씀들이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죽은 언어가 됩니다. 말은 하지만 종교적인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떨어지고 마는 거지요. 우리가 어떻게 고통과 고난을 뚫고 우리에게 먹구름 장 사이에 약간 뚫린 푸른 하늘 사이로 햇살이 쏟아 내려오는 듯한 하나님을 경험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경험하는 사람들만 할 수 있겠지요. 4절, 예, 그들이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시편기자의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물을 쳤어요. 빠져들도록, 이게 적대자, 시편기자를 빠뜨리게 하는 그물을 친 적대자들, 이들이 그렇게 얼굴에다가 나는 나쁜 놈 써 붙인 놈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교양이 많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성인일수도 있고요, 어쩌면 같은 종교인일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편기자하고는 신앙적 근본이 다른 거지요. 어떤 건지는 지금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무조건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얘기 했듯이요. 그러한 기본적인 생각의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피해를 주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겠고요, 예, 조금 내려가서요. 원수들 이야기는 지나가고 7절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으며 예, 이게 바로 고난과 환난 중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시인의 고백입니다. 고통과 환난 시련을 당하고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인자하시다고 얘기합니다. 속상해하고 왜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원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그게 아니라 인자하심을 기뻐한다,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영성이죠, 이것은 이것도 저것도 판단하지 못하는 자기망상, 사이비 이단들이 빠지기 쉬운 그러한 망상은 아닙니다.

 

그 망상이 인간에게 가능하긴 해요, 정말 자기에게 학대받는데도 모르고 무조건 추종하는 그런 것 있지 않습니까, Masochism이라고 하나요? 그게 인간에게는 심리적으로 가능합니다. 오늘 이 시편기자는 그런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깊은 차원, 고통과 환난이라고 하는 우리 삶의 어려움들의 그 깊이에서 혹은 그 높이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거지요. 참 놀랍지요? 이런 게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영성이죠, 하나님에 대한 총체적인 신뢰인거예요. 이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들은 정말 극한에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이래요.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던 거 같아요. 큰 질병, 불치병 같은 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가 당하는 환난과 고통 이런 것들을 자기 죄의 문제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10절, 다음과 같습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이게 시편기자에게서는 참 절망적인 상황이죠, 자기의 죄에 깊이를 들여다보니 자기가 당하는 고난이 마땅하다, 그러한 심정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주변에서 계속해서 자기를 모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안팎으로 완전히 짓눌리는 거지요. 그런 상황가운데서도 이렇게까지 이야기 합니다.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병은 걸려서 죽을 지경이죠, 죄에 대한 실존적 불안들이 가득하죠, 그리고 대적자들이 모욕하고 있지요? 어떻게 빠져 나갈 수 없는 도리가 없는 상황인데도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 주신다고 하는 신뢰가 가득하다면 그게 은총을 아는 것이고 더 이상 그 고통과 모욕 이런 것들이 자기를 파괴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중요한 고백입니다.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자기 심리적인 자기확신이 아니라 이건 이 세계와 인간 삶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위로를 경험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그러한 신앙고백입니다. 15절에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하는 겁니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다 주님의 손에 있는 거거든요, 그 말을 바꾸면 우리 운명을 책임 질 분, 그 존재는 오직 하나님, 주님이라고 하는 그 분이거든요. 그 분에게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맡기는 그런 삶의 태도, 그게 기독교 신앙이죠, 예수님도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면서 하나님에게 그런 기도를 드리고 그런 태도를 취하신 거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라고 하는, 절망적인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예수님은 아버지 손에 영혼을 맡기고 자기의 미래를 자기의 운명을 그분에게 완전히 맡기신 분이죠. 예수십자가는 바로 그런 사건이죠? 주의 손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쳐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쭉 나가는 이야기들, 원수의 손에서 지켜달라고 하는 기도,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끼리의 말다툼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했고요, 마지막 구절만 한 번 보겠습니다.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 하라, 잘 나갈 때야 강하고 담대하기 쉽죠, 힘들 때는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오늘 여기 이 시인은 그러한 영적인 경지에 들어 선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런 신앙에 어떤 단계 그런 걸 좀 배워야 되겠지요. 배우는 것이기도 하고 깨우쳐야 되기도 하고 또 그 분에게 우리에게 그러한 경지에서 신앙적 반응을 보여야 되겠지요. 여기서 제가 경지라는 말을 좀 썼는데 우리가 도를 닦아서 놀라운 신앙적 단계에 올라가야 된다고 하는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요, 기독교 신앙에서 우리의 노력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적으로 무엇을 성취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완전히 그 분에게 완전히 우리의 삶을 맡기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을 훈련이라고 한다면 그 훈련은 맞습니다. 어떤 뜻으로 우리가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훈련이 기독교 신앙에서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도 않고, 그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일단 우리가 이렇게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한다는 점에서 보면 이런 신앙의 위대한 영성가들의 신앙을 배울 필요가 있는 거지요. 다시 한 번 24절이요,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우리의 삶, 현재와 그리고 죽음과 죽음의 문을 통과한 다음에까지 우리의 모든 운명이 다 그 분 손 안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들의 어떤 고통과 고난 혹은 모욕, 조롱, 이런 크고 작은 그런 것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미 잘 알고 계실 줄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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