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2편 강해-죄를 가려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시편 32편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윗의 마스길〛

1.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아멘! 우리가 지금 읽은 이 32편은 어거스틴이 즐겨 읽고 그리고 이런 저런 기회에 많이 사람들에게 언급한 그런 내용이라고 합니다. 마틴 루터도 역시 그랬고요, 성서 주석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마틴 루터가 이 32편을 “사도바울의 시다”, 뭐 그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32편의 주제가 바울신학에 아주 가깝다고 하는 말이지요. 바울신학의 핵심은 칭의론이죠? 우리가 많이 들었던 그런 내용, 그런 단어입니다. 칭의론,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그러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례를 받기만 하면 그 과정 공부에서 기초적으로 이런 내용을 공부합니다. 그래서 알고 있습니다. 혹은 알고 있다고 자기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사도바울에 의해서 초기기독교 신앙의 토대로 자리를 잡은 거거든요? 이러한 신앙의 내용을 여러분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들의 예수님에 대한 경험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독교 신앙에 토대를 자리를 잡게 된 겁니다.

 

처음부터 그게 있었던 건 아닙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신앙은 좀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을지 모릅니다. 조금 더 극단적인 경우라고 얘기한다면 이 바울의 칭의론, 이런 것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역사 안에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갈라디아서 공부를 하다보면 그런 내용들을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데요,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기독교들, 처음의 교회입니다. 유대교적인 기독교, Judaic Christianity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 있으면서 예수를 믿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기독교의 특성이 잘 나타나지 않은 오히려 유대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하고 이방인공동체의 태두인 사도바울하고 계속해서 신학적인 그러한 투쟁을 많이 했습니다. 그게 갈라디아서에 많이 나옵니다. 그게 작은 차이가 아니라 결정적인 차이 였거든요?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기독교는 기독교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서 결국 오늘과 같은 기독교가 역사에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초기기독교에서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했으며 조금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대한 경험은 분명한 거지요. 이 경험은 초기기독교인들이요, 혹은 예수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게 좋겠고요, 예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추종하던 일단의 무리들, 그들의 예수경험이 그게 중요한 건데요, 그 경험이 크게 나누면 두 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과 그건 십자가 사건까지지요. 이건 역사,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한 인물의 연대기적 역사에 나타나는 그런 삶의 흔적들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공생애 동안 예수님을 경험 한 건 분명하거든요, 그건 어떻게 보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마 이미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더 중요한 건 부활한 예수에 대한 경험이거든요. 이 두 가지, 공생애 때 그러한 예수에 대한 경험과 부활현현하신 예수에 대한 경험, 이 두 가지 경험이 기독교 신앙의 특징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는 거지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한 분 예수님에 대한 것은 분명하지요?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Personality, 그에 대한, 똑 같은 그 분에 대한 거니까요. 그러나 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늘 객관적으로, 여기서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참되다, 아니다 차원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살아가는 실증적인 방식이냐, 아니냐 그런 거거든요, 보통 우리는 실증적인 것만 사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요. 우리 이야기에 조금 더 집중해서 보면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의 제자들과 추종들의 경험, 그것과 부활현현 이후의 그 부활체인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과 추종자들의 경험,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하나의 예수에 대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공생애 때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러한 삶의 경험들,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들이고요, 그러나 부활현현의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거든요.

 

이 두 가지가 하나이긴 하지만 또 충돌하기도 하고요, 서로 보충한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요, 이 두 가지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있었는데요, 그게 그대로만 그냥 있다면 그러면 하나의 종교의 어떤 힘을 얻지는 못합니다. 그 한계 안에 떨어져 있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아예 소종파 운동 정도로 떨어지게 되는 거지요. 지난 인류역사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선생들도 많고 종교지도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특별한 일들은 많이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 멈춰버린 거예요.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기독교인들도 어쩌면 그런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의 등장에 원시기독교가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에 대한 경험, 두 가지라고 그랬지요? 공생애와 예수 부활에 대한 경험, 이 두 가지가 바울에 의해서 교리화 되는 거예요.

 

체계화 된다고 하는 거예요. 조직화 된다고 하는 거예요. 학문적 근거를 얻게 되는 거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조금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은 나사렛 예수의 생생한 복음, 하나님 나라 운동이 헬라화 되었다고 얘기해요. 그러나 그건 하나의 편향된 사고입니다. 어리석은 일이예요. 그래서 바울에 의해서 복음이 헬레니즘화 되었으니까 다시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야 된다, 역사적 예수는 가난한 자와 같이 있었고, 민중들의 편이였었고, 그런 식이죠. 그런 민중지향적인 예수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는데 그건 어리석은 이야기입니다. 한 부분만 보는 거지요. 그러한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하나님 나라운동, 그리고 예수와 일치되었던 하나님 나라 운동, 부활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의 신적인 토대가 주어진 거예요. 그것을 이 바울이 일종의 보편적 진리에 근거가 될 수 있도록 신학화한 거지요. 신학화,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부분적으로 일리는 있는 겁니다.

 

헬레니즘화 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에서 헬레니즘화 된 것에 떨어져 버리게 되면 그럼 그것도 문제가 되는 거지요. 헬레니즘화라고 하는, 교리화라고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유럽세계에 어떤 진리를 이해하는 통로들은 헬라철학이었으니까요. 헬라철학과 로마법, 이런 것들이예요. 그런 것 안으로 매몰되어 버리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방식을 통해서 그 당시 최고의 지성과 학문과 세계를 이야기 할 수 있는 진리론적 토대, 거기에 이 기독교가 자기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운동이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귀한 일을 그 쪽으로 몰고 들어간 거지요. 말하자면, 화약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 든다고 할까요? 아주 폭발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 운동은 다이나마이트와 같은거잖습니까, 그게 그대로 허허벌판에만 있게 된다면 능력으로 발휘는 못 되는 거예요. 헬라문화권 안에 그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변증했습니다.

 

교리화이고 신학화이거든요, 그 방식을 통해서 기독교가 헬라지식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당시에 진리를 논하는 자리에 아주 중심 자리에 서게 된 겁니다. 제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나갔지요. 이 시편 32편은 이 바울의 신학과 가장 유사하다는 마틴 루터의 주장이 뭐냐, 하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서론적으로 들이다가 좀 길어졌습니다. 칭의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하는 이 기독교의 원초적 복음, 이런 것이 바로 이 시편 32편과 일맥상통한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마틴 루터나 어거스틴이나, 다 사도바울의 신앙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신앙을 더 심화했고 종교개혁도 일으켰는데요, 한 마디 좀 해야 되겠습니다. 칭의론이라고 하는 것이 그냥 낱말 뜻으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믿음으로 그렇게 된다, 믿음 생활 잘 하라는가 보다 그런 정도로만 생각하면 좀 곤란한 겁니다. 오늘 우리가 시편 읽으면서도 계속 나올 것이고요,

 

이 시편 한 편만 다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한 달 정도 계속해도 여기서는 우리가 할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대게 우리들은 성서 읽을 때 주마간산이라고 할까요. 그런 식으로 넘어 가기 때문에 그 깊이 있는 걸 다 놓치게 되요. 예수를 믿고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할 때 이것이 어떤 것을 배경으로 하고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또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은총론이죠, 여기에는 죄론도 들어가게 되고, 구원론도 들어가게 되고 다 연관되는 문제죠, 부활, 세례, 이런 것들이 다 칭의론에 연관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게 여러분들 머리 속에 정리가 되죠? 칭의론, 이게 왜 은총론이고 죄론이고 세례론이고 성화론까지도 포함 되서 전반적으로 연관 되냐, 부활이해까지 연관 되냐, 이해되시겠지요?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흐름과 틀들을 우리가 같이 이해하면서 은총론으로 들어가야만 우리가 그것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고,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이 파악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이해한다고 하는 건데요, 이것들이 한국교회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하면 믿으면 된다는, 일종의 믿음 만능론에 떨어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 용어는 제가 자주 쓰는 거지요. 믿음 만능론에 들어가 있어서 이렇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개념화 하는 그런 것들을 비신앙적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태도입니다. 믿음이 당연히 중요하지요. 당연히요, 그러나 믿을 만한 것을 믿어야지 무조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만능은 아니지 않습니까, 믿음만 강조하게 된다면 결국 사이비 이단들과 똑 같은 길을 간다고 하는 건데요, 그런 방식으로 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믿어야 될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하는 거예요. 그것하고 유기적이라고 할까요? 변증법적이라고 할까, 그런 관계, 긴장 그 관계가 밀접하게 연관되는 상태에서 믿음이 강조되어야 되지요.

 

그게 조금이라도 소홀한 상태에서 믿음을 강조하게 되면 그 때에는 우리는 인간론으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실존을 잘 알아야만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고 하는 차원에서의 인간론이 아니라 자기연민으로서의 인간론이지요. 실제적으로 자기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기 자신의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되어 있어요. 은총론을 중심으로 해서 오늘 여기 나오는 시편 32편의 이러한 이야기들의 어떤 내용들을 파악하고 그 내용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이게 정말 구도정진에 그런 경험? 일종의 돈오의 경험? 그런 것들이 없으면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구별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냥 겉으로 말하는 것만 보면 비슷비슷해요. 저 목사님이 말하는 것도 예수 잘 믿고 의로워지고 의롭다 인정을 받고 그래서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 이 사람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시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은총론에, 혹은 칭의론 여기에 정말 자기의 어떤 의식, 실존 전체 그것을 몸으로 경험한 사람하고 그 안에 들어간 사람하고 그렇지 않고 말만 하는 것 하고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느끼시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구별되지 않는 이유는 언어의 한계입니다. 그러니까 잘 모르면서도 그런 종교적인 용어를 쏟아내면 사람들은 그런가보다, 저 사람이 뭔가 알고 있는가보다, 그렇게 착각을 하고요, 실제적으로 그러한 하나님의 칭의와 은총 부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언어 말고는 달리 사람들에게 전할 길이 없어서 언어를 사용하는데 언어의 한계가 있어서 그게 잘 전달이 안 되는 경우도 있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언어를 통해서 전달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멋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걸 통하고 아는 사람도 이걸 통하고 이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어서 이걸 전해 듣는 사람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면 속기에 안성맞춤인 거지요.

 

사이비 이단들이 가능한 거예요. 어거스틴, 마틴루터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던 이 시편 32편이 사도바울의 칭의론하고 깊이 연관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말씀을 보십시오. 여기는 크게 보면 두 대목으로 나눠져 있어요. 1절에서 7절까지는 하나의 감사 찬송이라고 한다면 8절부터 11절까지는 자신의 신앙적 순례길을 어떤 사람에게 가르치는 거죠, 훈계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시편 32편은 감사와 훈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1절부터 7절까지는 감사 찬송이고 8절에서 11절까지는 훈계입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인생살이 경험도 많고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깊어서 젊은 사람들에게 훈계할 수 있는 어떤 높은 신앙적 경지에 올라선 사람의 신앙시라고 할 수 있지요. 좀 옆으로 나가는 말씀이지만 이런 점에서는 나이가 든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 같아요. 그가 어떤 자기의 삶을 끊임없이 진리와 말씀에 성찰하는 훈련을 중단하지만 않았다면 나이가 먹을수록 그는 영적인 세계를 깊이 볼 수 밖 에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그 성찰이라고 하는 것을 그냥 형식적으로 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런 거지요. 이 늙음으로서 인생경험이 깊어지고 또 그런 것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원로들, 정말 지혜자이지요. 지혜자, 이런 사람들이 한국기독교 안에서도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말 그대로 원로이고 지혜자이지요. 지혜로운 원로들이고 아주 실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그의 사상이나 삶에서 그런 분들이 많이 나와야 한국교회 미래가 그나마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1절 다음과 같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다고 하네요. 여기서 말하는 복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설교가 신명기에 나오는 광야생활에 대한 회고와 더불은 모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데요. 가제로 “광야의 복”,“광야의 삶과 하나님의 복”으로 정했습니다. 며칠 생각을 해 봐야겠는데요, 복인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문제인데요.

 

신명기 역사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을 이야기하거든요. 이 복을 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당연히 이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 이런 것하고는 깊이 연관이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거지요. 이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신앙이 육체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정신화 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가 하나의 물질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냉소적으로 보면 안 되죠. 이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 복은 이 물질 우리가 보이는 돈, 재물 이런 것은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바탕들이고요,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행하신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중요한 거거든요. 그러한 관점을 우리가 붙들어야만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복이라고 하는 차원을 전혀 새롭게 해야지요. 우리 일상적인 예로 좀 바꿔서 말씀 드려 볼까요? 사람들 다 떠나서 외로워도요, 정말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옆에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한 거지요?

 

사람들이 너무 많으면 피곤한 거고요, 사람들이 이 땅위에서 여기 살면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어울려 다니고 재미있게 사는 것 이걸 행복하다고 생각할텐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만 있어도, 오히려 한 더 사람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나가서 생각한다면 그 한 사람마저 없어도 사실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뜨이기만 하면, 물론 사람이 있으면 더불어서 같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좋고요, 그렇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많이 있다 없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외롭다 아니다 하는 것을 결정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디서 이뤄지냐 하는 것은 죄가 해결되어야 되는 거거든요, 기독교 신학에서 이 죄가 인간 실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로막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제시되고 있잖아요. 이 시편기자들도 그런 문제들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 때문에 고통당하고 죄가 가리움을 받고 오늘 여기서도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과연 무엇일까요? 죄가 가려졌다고 하는 것이요. 조금 더 읽어 보겠습니다. 2절,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1절과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죄가 가려졌다는 그 사실이고 여호와게 정죄를 당하지 않는 것, 그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들을 복이 있다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이 같은 구조군요. 1절에서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자 이렇게 되어 있고요, 2절에는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은 자 이 둘 다 복이 있다 결론은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이 같은 구조예요. 허물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하고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같은 이야기인거지요. 그럴 때 죄가 용서 받는 거지요. 제가 1절에서 말씀 드리면서 죄가 가려진다고 하는 게 뭐냐 질문했습니다. 보이는 건 아니잖아요?

 

죄가 어떻게 가려집니까? 우리가 사함 받았다는 것,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어요? 이게 실증법 같은 거라면야 제가 잘 못 한 것 재판 받고 감옥살이 한다거나 벌금만 물고 그럼 지나가게 되면 용서받아 다 해결된 걸로 되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죄 받지 않고 죄가 가려졌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보이는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어려운 거예요. 이런 점에서는 자기기만도 여기 많이 작용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용서 받지 못했는데도 자꾸만 용서 받았다고 착각 할 수도 있는 거지요. 그걸 누가 결정해 줄까요? 누가 확인해 줄수 있을까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요, 로마카돌릭 교회에 마틴 루터가 있던 그 당시에는 사제들이, 용서받았다, 마리아에게 어떻게 해라 이런 방식으로 그 문제가 해결 된 것처럼 했지만 만인제사장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하는 이런 가르침 이후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가 씻겼다, 아니다, 이렇게 결정할 수 없거든요,

 

아마 이런 게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은 자기 암시거든요, 그래서 계속 울어요. 쓸데없이 필요하면 울어야 되는데 자기 슬픔에 겨워서 울고 교회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약점을 찌르고 불안하게 만들고요, 자책하게 만들고요, 그래서 계속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고 하는 그러한 두려움 가운데 빠지게 하고 그래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회개하고 반복하고 그렇게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심한 경우도 있고 덜 심한 경우도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용서 받았다고 하는 이러한 것을 그 어떤 방식으로도 확인 할 수 없어서 심리적인 차원에 들어가서 자기 확신에 떨어지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지 않는 것 아시겠죠? 또 그런 마음이 들어가죠? 계속 불안하죠? 반복됩니다. 이건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럼 우리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까요? 알수 있다기보다도 우리는 이런 성서기자들, 신앙적으로 성숙했던 그러한 선배들의 말을 통해서 배우는 거지요.

 

1절, 2절을 통해서 본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겁니다. 입으로만 잘 못했다, 잘 못했다, 이렇게 떠들어 대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함과 2절에 보면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고 했잖아요? 이것도 정말 쉽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사람으로 서는 것, 이게 자기죄를 당연히 주님께 용서를 구할 수 밖 에 없지요? 진실하다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니까요. 어떻게 나를 보겠어요? 우리의 속마음 까지 뚫어 보게 되잖아요? 우리의 이중성들, 자기가식도 있고, 위선, 위선은 정말 많지요. 저에게도 그런 것들이 계속 나올 겁니다. 바리새인들의 그런 위선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들은 대개 다 바리새인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다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상당한 부분에서 우리는 바리새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문제겠지만요.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고 하나님에게 용서함 받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런 단계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그게 정말 우리들에게 평생 동안 풀어야 될 숙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여기 주어진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이 말도 또 설명이 되어야 되는군요.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얼까, 하는 거지요.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인데, 이름도 없는 분이신데, 그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 할 수도 없는 분인데, 그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무얼까, 하는 겁니다. 이게 참 큰 문제군요. 신앙적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오늘 성경공의 핵심은 아닌데 말하다 보니까, 중요한 것을 짚은 것 같습니다. 오늘 공부 할 것 다 잊어 버려도 괜찮고요, 여기 중요한 것이 나왔군요.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것이 무언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내가 하나님 앞에 직면해 있다고 하는 것을 어느 때 경험하는지 말입니다. 예배드릴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나요? 하나님의 거룩성,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광휘, 이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경험될까요? 경험되고 있을까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감상하면서 많은 관객들이 그 음악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듯이 베르디의 레퀘엠을 들으면서 놀라운 죽음과 부활의 세계에 빠져 들 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을 경험하고 있냐는 겁니다.

 

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 문제는요, 여기 관계된 많은 것들이 있는데 창조의 문제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직면한다고 하는 것이 뭔가에 대한 항목별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해명인 성서와 그 성서의 현실적 해명인 신학의 역사 그리고 오늘 생명의 영으로 이 세상과 그리고 많은 사람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과 소통하고 있는 성령의 경험 이런 것들이 아주 복합적으로 충실하게 이해되고 경험되는 그런 단계에서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또 경험이 됩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다 가짜지요. 가짜 많이 있지요? 내가 어떤 분을 꼬집어서 미안합니다. 이게 중요한 문제이고 공부이기 때문에 그냥 하나의 예를 들어서 드리는 겁니다. 장경동 목사님의 그런 개그방식의 설교라든지, 엔터테이먼트에 떨어지는 그런 행위들은 하나님 앞이라고 하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요, 결구 계속해서 일종의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거지요.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처럼 만들고 마는 거지요. 거기에는 아무런 영성의 열매들이 맺혀 질 수가 없습니다. 3절,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지 않으면 자기 뼈가 쇠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예민했으면 이럴까요?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열지 않는다, 뭘까요? 하나님은 생명자체니까 세계 전체니까 시간 전체니까요, 그 어떤 형상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칼바르트 용어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절대타자인 그 분에게 우리가 입을 열어야 되는데 진실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때에 그렇냐, 그렇지 못하느냐 마저도 사람들은 느끼지 못 하고 있는 거지요. 제 말이 자꾸만 제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지요?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진실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생명의 가장 심층적인 정신작용이라고 할 영혼의 울림, 그런 것들이 진실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속이는 게 없고 자기자신을 그대로 노출하게 되는 거거든요, 자기를 투명하게 의식할 수 있는 상태거든요, 고유한 자기 정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그것이 그대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진실한 거지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요. 사람 앞에서야 말 몇 마디 진실한 척, 고상한 척, 점잖은 척, 그렇게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불가능한 거거든요, 그런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영적인 상태에 들어가지 못할 때 자기 뼈가 녹아 난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뼈가 녹아나는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이런 뼈가 녹아난다는 정도로 표현하는 이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입니다. 이런 예민성, Spiritual Sensibility라고 하면 좋을까요? 이런 단계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고요,

 

어쩌면 이것은 노력으로가 아니라 은총일지 몰라요. 그 자체도, 이런 경험을 했어요. 4절에 보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이 나를 밤낮으로 누른다는 경험을 한 겁니다. 문학적 표현이지요. 하나님이 손이 있어서 우리를 누르겠어요? 참된 진리, 참된 생명, 우주 전체, 생명전체, 어떤 존재의 모든 근거, 토대인 그 분, 그 분 앞에 서면 우리가 막막할 수 밖에 없고요, 그런 분 앞에서마저 자기를 숨기려고 할 때는 결국은 자기 모든 몸과 마음이 녹을 정도의 상태가 되는 거지요. 5절,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자복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 허물을 자복했다, 남에게서 훔친 것, 잘못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겠지요? 이건 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솔직하지 못한 모습들을 그대로 드러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 놓았더니 용서해 주셨다, 내 죄악을 사하셨다고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사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요?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이고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방식으로 하는 거지요. 참된 해방, 자유, 평화, 기쁨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응답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는 어떤 소리를 직접 들으시려는 분은 없겠지요? 자꾸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밤에 무슨 소리를 듣는다거나, 음성을 듣는다거나 이런 방식으로요,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죄악을 사하셨다고 하는 이 시편기자의 문학적 표현들을 사실적인 언어로 이해하시면 여러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영적인 깊이를 얻지 못합니다. 저도 아직 멀긴 하지만 조금씩 약간씩 이해가 되고 있어요.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그러한 상태, 그건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해,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가능한 어떤 것입니다. 억지로 누가 그렇게 해 줄 수는 없어요. 이런 점에서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외로운 길입니다. 누가 같은 길을 따라 갈수가 없어요. 자기만이 가야 되요. 자기에게만 주어진 거예요. *하이덱거가 <숲길>이라는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철학자의 길을 그렇게 묘사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길을 가야 될 영적인 순례자들에게는 더욱 고유한 거지요. 지난 주일 제 설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마는 하나님의 심판에는 판례가 없다,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고유한 기준이 있을 뿐이다고 했어요. 우리 영적인 순례의 길, 생명의 길, 삶 자체가 생명의 길이니까요. 이건 순례죠, 여기에는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가능한 진실한 고백과 용서하심 이런 것들이 있는 겁니다. 이 단계로 여러분 각자가 가셔야 되요. 제가 억지로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마르틴 하이덱거 Martin Heidegger,『숲길 Holzwege』신상희역, 나남출판사

 

신자들이 그쪽으로 가려고, 그게 바로 성령이 인도하시는 길인데 그게 용기도 없어, 아예 준비도 안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어울려서 이리저리 쏘다니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마치 소녀들이 스타들 따라서 우르르 몰려다니듯이 말이죠, 그 방식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의 정신세계는 채워지지 않는 거잖아요? 하나의 열정에 불과한 거지요. 바깥으로 드러난 열광에 불과한 거지요. 하나님이 사셨나이다라고 하는 시편기자의 영적인 상태를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7절 보면 이렇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감사찬송 이예요. 힘들었다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응답을 받고 참된 자유, 해방, 평화 이건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화예요. 그건 아시지요? 예, 그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늘 배부릅니다. 이게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들이 그러려니 뻔한 이야기,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마시고 더 그 세계를 더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참됨, 그러기 때문에 기쁨과 평화의 길입니다. 예, 7절만 잠깐 얘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그러니까 그런 어려움 상태를 벗어나서 하나님께 찬송, 찬양,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참 멋진 표현이예요. 주는 나의 은신처이다, 하나님만이 내 영혼의 은신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럼 다른 데 찾지 않죠, 예, 찾지 않죠, 더불어서 도반은 어떤 때는 필요해요. 더불어서 길을 가고, 그러나 계속 같이 못 가요. 잠깐 말 걸다가 헤어져야 되요. 길을 같이는 못 갑니다. 잠시 만났다 헤어지는 거예요. 그런 신앙적 친구들, 일종의 도반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국 자기혼자 가는 길에서 그런 면에서 하나님만이 은신처라고 하는 겁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방법은 특별하시니까 예, 부자되게 한다거나 병이 금방 낫는다거나 그런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거든요,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른다, 그렇게 나를 구원의 노래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이지요. 예, 여기까지고요, 8절에서 10절은 믿음의 후손들에게 자기 제자들에게 주는 훈계입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보시면 되겠네요. 그럼 마지막 구절만 볼까요? 11절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익숙한 표현인데, 여기에 놀라운 시편기자의 신앙적 경지가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두고두고 더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32편 말씀을 나누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계절,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늦가을에 이 저녁시간 주의 말씀을 같이 나눴습니다. 각각 형편에 따라서 이 말씀이 새롭게 정리되게 하시고 이 말씀을 통해서 각각의 영적인 순례의 길에 좋은 길잡이가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