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3편 강해-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을 시편 말씀은 33편입니다. 제가 이 시 전체를 읽겠습니다. 1절부터 22절까지입니다.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5.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6.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8.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9.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10.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11.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12.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15.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16.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18.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20.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21.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아멘! 이 시편이 22절까지 있습니다. 이 말씀 내용도 그 시인들이 살았던 고유한 역사적 배경, 그게 개인일 수도 있고 공동체일 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는데요, 그런 배경을 충분히 살피지 않으면 이런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자칫하면 자기 논에 물 대기 식으로 해석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떤 삶의 그 배경들, 처했던 삶의 자리들, 그런 것들을 우리가 꼼꼼히 따라간다고 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한계가 있고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성서 텍스트를 바르게 읽고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부단한 용맹정진의 그러한 태도와 더불어서 그런 노력들이 함께 요구되는 것 같습니다. 그냥 기도 많이 하고 또 말씀 묵상 많이 하고 보통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경건의 모양과 준비들, 그런 것들만으로 이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어려운 거지요. 또 말씀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역사적인 어떤 배경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건데요. 그런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용어들을 대할 때 어떤 백과사전이나 혹은 철학사전, 용어사전 그런 것들을 통해서 일반적이고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의미들은 우리가 찾아 낼 수 있지만 그것의 어떤 생생한 어떤 현실들, 그런 것들을 잡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이 성서 텍스트가 오늘 이 성서를 대하는 우리들하고 영적인 공명을 이뤄질 때가 가능한 거거든요. 이런 설교 할 때도 그렇고 성경공부를 할 때도 그렇고 현재 개인적인 한계 이런 것들이 계속 느껴집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진도를 나가야 되겠지요? 부족한 부분은 우리 한계로 받아 드리고 또 비록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이 성서가 기록 될 때에 거기에 그걸 주도적으로 끌어 가셨던 생명의 영이 이 시간에도 우리들하고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활동하심으로 많은 부분들이 보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령과 성서읽기의 관계,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1절 3절까지 노래하라고 하는 그러한 권고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라, 즐거워하는 사람은 당연히 찬송을 부르겠고요, 찬송은 마땅한 일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1절에서 그렇게 세 가지 단어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것, 찬송, 그리고 우리의 마땅한 태도, 이런 거지요. 사실은 더 생각하면 이 1절 안에 많은 단어들이 조합되어 있어요. 세 가지가 아니라 더 많은 단어들이 조합됨으로써 어떤 영적인 세계를 우리들에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의인들아, 의인,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거지요. 실제적으로 잘 못이 하나도 없는 가리키는가, 아니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그리고 사람들한테 의인이라고 인정받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가, 그런 것들도 생각을 해야겠지요. 즐거워하라고 얘기할 때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즐거워할까요? 혹은 다른 말로는 여호와를 인해서 즐거워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본문에는 그런 표현도 많이 있을 겁니다. 여기는 조금 더 직접적이네요. 여호와를 인해서 즐거워하라는 것하고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하나의 영적인 경험, 늘 이야기하지만 좀 구별되기는 합니다. 여호와로 인해서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삶들을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바라보라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 명제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삶을 즐거워하는 것, 이 세상의 삶,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졌다고 한다면 여호와를 즐거워하라고 하는 것을 여호와 자체에 대해서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두 가지가 같은 이야기겠지요. 여호와를 통해서 여호와가 주신 이 세상의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나,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나, 사실은 그것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 이 관계를 잘 이해하려면 여호와 하나님과 그 분의 현실성과 그리고 세상의 현실성, 이런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요즘 판넨베르크 사도신경 공부하는 그 대목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현실성과 이 세계의 현실성이죠. 핵심은 현실성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건 이 세상이죠, 이 세상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사람들과 관계를 갖고 또 활동도 하고 노동을 하면서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게 세상의 현실이거든요. 이 세상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러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현실들과 딱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현실들 안으로 은폐 방식으로 임재 한다, 그렇게는 말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임재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을 모두 다 담아내기 힘든 그런 한계도 있고 합니다.

 

그러한 관계가 뭔지 딱 손바닥에 놓듯이 설명하기는 힘든 거예요. 다른 때도 이야기한 신학용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의 관계에 있거든요, 만약에 내재성 이런 것들을 강조하게 되면 이 세상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다 볼 수 있고요, 초월성을 강조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창조성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보는 거지요. 이 두 가지가 완전히 구분되는 건 아닌데 나눠서 그러니까 이게 완전히 구별되는 게 아닌데 구분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되어야 되고요. 조금 더 말씀 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런 걸 배경으로 두고 생각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찬송, 노래, 즐거워하라 라고 하는 그런 내용들이 1절에서 3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2절,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문학적인 표현이죠, 그 당시에 가장 귀한 악기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겁니다. 그냥 성가대가 찬양하는 방식으로 찬양을 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께 찬양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3절,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 1절부터 3절까지 반복해서 하나님을 찬양해라, 노래해라,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 일 수 있고 또 우리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적지 않은 경우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축소되고 사람에 대한 관심들이 더 확대 되거든요? 하나님에게 집중한다고 하는 것, 찬양이 바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되는 거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우리들의 예술적인 표현정도에 머물고 말겁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단계로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얘기하면서도 이 말이 그냥 진부하고 상투적인 용어로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요.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에 그냥 안다고 생각해 버릴 때가 많거든요. 저도 거기서 크게 다르지 않고요, 어떤 것이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인가, 조금 다른 말로는 성령과 성령 안에 충만해서 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죠,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말씀을 좀 더 진지하게 읽고 또 말씀에 대한 신학에 대한 공부도 있고 개인적인 경건훈련 등등..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때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입니다. 1절부터 3절까지는 찬양하라는 얘기였고요, 왜 찬양해야 되냐의 설명이 그 뒤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찬양해야 될 이유죠, 진실한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5절,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예, 가득하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지 못하는 눈이 있습니다.

 

시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생명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는 것처럼 이 시편기자의 눈은 바로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하는 거지요. 이런 것들이 그냥 낭만주의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무엇도 모르고 무조건 환상에 취해 있는 건 아닙니다. 이 사람도 분명이 이 세상에서 고난과 시련들, 무죄한 자들의 아픔과 시련과 고난들, 이해 할 수 없는 딜레마들 그런 것들도 다 알았겠지요. 그래도 이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하는 그런 경지에까지 올라 간 겁니다. 그게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영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가정을 예로 든다면 어린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기가 혼나고 있을 때는 부모에 대한 서러운 마음들, 원망하는 마음, 자기에 대한 서러운 마음들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철이 들면 부모가 자기를 향한 책망이나 그런 것들로 부모와의 사이가 멀어지지 않죠, 이해하게 되거든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많은 시행착오들, 불행들, 이런 것들마저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로 이해 될 수가 있습니다. 이해되어야 하겠지요. 물론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다비아의 어떤 분이 그런 하소연 비슷한 글을 올렸습니다. 실제적으로 자기 가정에 어려운 문제들 이런 것들이 있으면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그건 일리가 있는 이야기고요, 사실 견딜 수 없는 어려움들에 파묻히게 되면 짜증스럽게 되거든요. 옆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되면 더 참기 힘듭니다. 그래도 그래도요, 그러한 것마저 신앙적인 차원에서 당연히 극복 되어야 합니다.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말씀 드리기는 힘든데 성서를 통해서 배운 그런 가르침에 의하면 당연히 될 수 있고 되어야 됩니다. 그 과정에서 물론 힘든 건 있죠, 과정에서는, 그러나 결국은 그런 모든 일들이, 험한 일들까지 포함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가득한 것으로 받아 드려질 수가 있습니다.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절,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말씀, 창조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창조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자연의 광휘, 이런 것들에 취하는 것은 아니고요, 성서기자들은 그냥 자연론자들은 아닙니다. 자연찬양시인들도 아니고요, 자연의 아름다움과 광휘를 알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어떤 분, 창조자지요, 그 분에 대한 몰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말씀으로 하늘을 지으시고 만상을 그의 입김으로, 루아흐겠지요? 숨, 하나님의 숨으로 이루어 냈다고 하는 겁니다. 8절,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여기에 두려움과 경외가 같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왜 두려움일까요? 바로 앞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었다고 하고 바닷물을 마치 우리가 주전자로 어떤 병에다 물을 따라 붓듯이 아주 간단하게 물을 모아 놓아 놓으실 수 있는 능력자를 지금 이야기 하면서 그 여호와를 두려워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두려움과 경외, 이것은 서로 연결되는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는 종교적 현상이라고 할 있습니다. 제가 예로 몇 번 들었던 그 누미노제의 경험, ‘거룩한 두려움’ 그런 것이죠, 왜 우리가 그것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건 공포하고는 다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두려움, 거룩한 두려움, 모세가 호렙산에서 신발을 벗어야 되는 것 같은 두려움, 이사야가 성전에서 스랍들의 찬양 소리를 듣고 자기가 부정하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입술을 숯불로 지져 달라고 하는 기도를 드렸던 것과 같은 두려움들, 이런 것들은 그 하나님의 존재, 혹은 하나님의 행위, 이런 것들이 도저히 어떤 우리 인간적인 인식으로 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하다고 하는 경험에서 나온 겁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다 해명 할 수 없는 그 엄청난 어떤 분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지금 우리도 여기 시편기자도 자연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두려워하라고 했는데요?

 

그 당시에 비해서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요? 그들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천둥번개를 치더라도 옛날 사람들은 두려워했겠지만,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식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옛날 사람들은 그게 신의 진노나 멸망의 징조로 생각했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미 그런 것들도 예측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공포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우주 자연 앞에서 느끼는 이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인들이나 우리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엄청날지도 모르지요. 옛날 사람들이야 하늘, 땅, 지하 이렇게 3층으로 이루어졌고,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하는 그런 우주관에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명백했지요. 그들의 세계 이해가요,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 세계에 직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 놀랄 수 밖 에 없는 거예요. 더 놀라지요.

 

120억년내지 130억년 전에 이 우주 출현이라고 하는 것, 그 정도 시간이라고 하는 것, 여기서 우리가 여기서 무슨 말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빅뱅 이후, 130억년, 그 이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었는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고대인들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미립자, 이런 세계까지 우리가 점점 들어가고 있어서 사실은 더 충격적인 거지요. 그런 두려움들이 신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 됩니다. 이건 자연 앞에서 두려움만은 아닐 거고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두려움인 거지요. 십자가나 부활, 그렇습니다. 그런 기독교 신앙에 있는 그런 내용들은 그냥 우리의 종교적 감수성을 아주 가볍게 터치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전체가 어떤 충격 속에 빠지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모든 게 다 그런 거예요. 우리가 흔하게 얘기하는 칭의론 같은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우리 실질적인 모습은 의로워지지 않았는데 의롭다고 인정받느냐, 그러한 어떤 사건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걸 알게 되는 건 놀라운 일이죠, 있을 수 없는 일들 인거죠, 그래서 우리는 은총이라고 얘기 하는 거고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그렇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두려움과 놀라움과 거기 따라 나오게 되는 경외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그런 신앙적 경험들이 우리 일상에서 꾸준하게 일어나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지요. 조금 가면 어느 순간에 조금 지나게 되면 신앙적인 매너리즘에 푹 빠지고 맙니다. 그런 신앙적 매너리즘으로 견디지 못하니까 그것을 더 강화하기 위해서 어떤 율법주의에 들어 갈 수 밖 에 없지요. 그게 우리 인간피조물인 인간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늘 새로워지는 그리고 놀라움이 함께 하는 이런 영성이 아니면 결국은 매너리즘에 빠질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둘 중에 하나예요.

 

이것도 저것도 다 갖출 수는 없습니다. 둘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그냥 단순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로 든다면 마리아와 마르다, 두 가지를 다 같이는 못합니다. 하나만 선택할 수 밖 에 없는 거지요. 이런 두려움 가운데서 이 본문이 얘기하고 있는 자연과, 그런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건, 공적으로는 그렇고요, 종말론적인 생명완성이라고 이러한 하나님의 전체 구원의 역사에서 그분을 만나게 되면 그런 것들을 경험하게 되면 두려워하게 되고 당연하게 그 분에게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경외 할 수 밖 에 없는 거지요. 앞서 얘기한 예배의 집중력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사건 속으로 푹 빠져 드는 거지요. 그게 쉽지 않죠, 쉽지 않다기보다도, 예, 정확한 표현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제가 지금 머뭇거리는데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같은거나 베르디의 레퀘엠 이런 것들을 들을 때는 참 충격적이고 놀랍지 않습니까? 그걸 반복해서 들으면 진부해 질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들에게 음악적인 영감들이 살아난다면 반복해서 들어도, 물론 한 자리에 앉아서 수십 번을 들으면야 우리가 기계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문제 있지만, 최소한 하루에 한번이나 이따금 그런 정도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새로운 경험이 올 겁니다. 그런 음악들이 고전이지요. 말하자면, 유행가 그런 것들은 그렇지 않지요.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표현을 빌리자면 고전중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자세가 준비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 진정한 의미에서 경외심을 우리가 유지할 수 있습니다. 9절,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여기서 얘기합니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자연이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매 이루어졌다고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하나님 경험인거지요. 말씀하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인격자이신 거지요.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는 방식이 인격적일 수 밖 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분이다. 이렇게 성서기자들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앞에서는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위를 이야기 했다고 한다면 지금은 역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역사, 나라들의 계획들을 폐하고 무효하게 만듭니다. 두 가지를 오늘 시편기자가 찬양할 이유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세계창조의 사건이고요, 또 하나는 역사의 섭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를 만드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 모든 것이 다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뚫어 볼 수 있다면 그런 사건 안으로 우리가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절,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 말씀이 이어진 겁니다. 역사를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고 하는 이야기지요. 12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13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 14절,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들의 실존을 지금 이야기 하는 거지요.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을 뿐이예요. 자기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 갈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이신데 그리고 또 그 세계에 임재 하시는데 또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의 그 십자가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곳인데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도망 갈 수 있겠어요? 불치병에 걸려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 그 숨을 쉬고 있는 그 곳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요, 그게 참 재미있는 표현 이예요.

 

구약의 사람들은 숨, 바람, 영 이것을 하나로 생각했잖아요? 그 숨이 붙어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면 틀린 게 아닙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과 함께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느낌이 오지 않지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숨을 쉬는 것, 이게 성령과의 교감이다, 소통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건 말이 안 된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이시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인데 숨을 쉬는 것은 공기만 왔다갔다 하는 건데 이게 무슨 성령과의 소통이냐,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공기가 있잖아요. 질소가 몇 %이고, 산소가 어떻게 되고, 혼합의 공기인데 이것 자체가 성령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의 몸속에 들어와서 일으키는 생명의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그 힘이 성령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숨을 쉬지 않으면 생명을 놓치는 거니까요. 여기에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성령이 활동하시는 거지요. 활동자체가 성령이거든요.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것 자체를 성령과 함께 하는 거다, 생각하시면 맞습니다. 좀 의문도 생길 거예요. 그건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지 나쁜 일을 하면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그것도 그럼 성령과 함께 하는 거냐,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겠지요. 성령이 그 때도 함께 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그 성령을 외면하고 있을 뿐인 거지요. 그럼 그 성령과 악을 행하는 사람을 왜 나두느냐, 못하게 하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건 놔두는 것, 성령이 그 자리에 계신데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 그런 것을 막지 않는 것 자체가 악에 대한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15절, 그는 그들 모두의 마음을 지으시며 그들이 하는 일을 굽어살피시는 이로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걸 말했고요. 다음에 16절,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17절,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고대의 가장 힘이 센 권력이 있는 어떤 집단들, 어떤 사람들을 열거했습니다. 군대, 왕, 그런 것들도 구원에는 거리가 멀다고 하는 거지요. 아무리 군대를 모아서 세계를 제패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 다 낙엽처럼 다 떨어지고 말거든요, 개인의 죽음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어떤 민족들도 그런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걸까요?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 얘기죠, 이와 반대로, 18절,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19절,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그들을 살리신다, 군대, 힘 이런데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예요. 살리신다, 살리신다고 하는 것은 부자가 되게 한다거나 왕이 되게 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죠, 다른 방식으로 살리시는 거지요. 실제로 우리 몸이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가면서도 그래도 하나님이 살리시는 길이 있는 것을 아시죠?

 

전혀 다른 생명들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시거든요, 20절에서 22절까지는 그냥 읽겠습니다. 20.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그렇지요. 21.우리 마음이 그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의 성호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로다 22.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오늘 여기 마지막에 나와 있는 세 구절들도 잘 아는 내용들입니다. 익숙하게 들었던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그 분만이 우리의 도움과 방패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우리가 살고 싶은 거죠, 그리고 또 우리가 믿는다고 얘기를 하고요, 그런데 그렇게 구체적으로 사는 게 뭐냐, 기도를 많이 해야 된다는 거냐, 어떤 거냐,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을 의지하는 것은 분명하게 표시가 나요, 여기 표현했듯이 군대를 통해서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이런 것들요,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분만이 도움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딱 표시는 나지 않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는 그런 표시인데 그런 형식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아마 성령만이 판단하실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돈과 재물과 건강을 의지하면서 사는지 아니면 그것 너머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역사를 끌어가시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만 의지하는지 그건 성령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열매로 나타나지요. 평화와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면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가득하게 되면, 우리 내면세계를 충만하게 채우게 된다면 그는 바로 하나님만을 도움과 방패로 삼는 사람이죠, 그러나 겉으로 아무리 많은 것들이 잘 되고 잘 나가는 것 같지만 그에게 평화와 기쁨이 없다면 그런 것은 결국 군대나 이런 것에 의지하는 그런 삶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날씨가 좀 추워졌습니다. 여러분들, 건강 조심하시고요,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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