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편 강해-여호와의 선하심을 알지어다

 

시편 34편을 읽겠습니다. 1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1.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이 시편 34편은 특별히 8절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구절입니다. 8절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구절이 34편의 주제절 이라고 해도 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이 표현이 문학적이지요? 거룩한 문학이지요?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사람들의 응답, 계시와 응답, 그 사이에 이 문학적인 수사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계시하시고 사람들이 그대로 대답하면 되는 거지 거기에 문학이 왜 들어가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하나만 알고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을 잘 모르는 태도입니다. 이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요, 제가 일반적인 말로 문학이라고 얘기했지만 그것은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통치를 경험하는 것이거든요? 이 문학, 언어를 통한, 언어를 형상화함으로써 어떤 본질적인 경험을 드러내려고 하는 이런 인간의 행위인 문학, 이것은 사람의 감수성이라든지, 인식이라든지 조금 더 쉽게 속된 표현으로 얘기 하자면 잘 난체 하고 자기 꾀를 피우고 멋을 내고 하는 그러한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하이덱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그런 관점하고도 연결되어 있고요. 문학, 이 언어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뛰어 넘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최선의 표현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는 다 어떤 면에서 사실은 다 문학적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시편이나, 잠언이나, 아가서라든지 드러내 놓고 聖문학이라고 분류되는 그런 것만이 아니라, 다른 중요한 토라라고 할 수 있는 모세오경과 전, 후기예언서를 포함한 성서들은 다 문학적인 거예요. 이게 왜 그럴 수 밖 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표현 할 수 있는 길이 그것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음악도 있긴 있겠습니다만 음악도 큰 범주로 보면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처음에 시 같은 게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시가 나오고, 그 시에 운율을 기도 하듯이 붙이게 되었고요, 거기에 조금 더 정교한 음악장치가 들어가지 않아요? 그런 역사가 있는 것 처럼요, 두루두루 문학, 음악, 예술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방식이 아니면 안 되는 그런 마땅한, 당연한 그런 우리의 신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선하심을 어떻게 맛 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문학적 표현이라고 얘기했는데요, 이 시를 기록한 시인의 영성이 그 만큼 하나님과 아주 밀착관계에 돌입했다고 하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사과 맛을 보듯이 아니면 꿀맛을 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렇게 맛보고 알 수 있다, 그래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이런 표현은 단순히 낭만적인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젊은 남녀가 첫눈에 반해서 사랑에 떨어지는 그래서 가까이 있고 싶어 하는 그런 경험 그런 것도 소중하긴 한데 그런 것은 대개 감정에 머물러 있으니까요. 제가 감정을 무시하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신앙은 감정적인 요소가 있어요. 감정적으로 표현이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경험이 어떻게 냉정한 상태로 남아 있겠습니까? 신학은 비교적 감정이 아니라 아주 논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그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신학도 결국은 경험의 어떤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억제하는 거지요. 그건 감정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기쁨, 평화 그리고 아득함에 대한 경험, 그런 것들이 신학을 통해서 주어지는데, 어떻게 거기 인간의 구성 요소인 인간의 감정이 거기 따라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학 하는 과정에서는 감정이 작동되면 좀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건 마치 바이올린 연주자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 자기 안에서 격동적인 느낌이 나오긴 하지만 그것을 억제하면서 그 음악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에 바이올리니스타가 어떤 격정이 울어난다고 해서 악보와 다르게 연주한다거나 자기절제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고급한 클래식 음악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지요. 예, 그런 하나님 경험에서 감정적인 요소가 분명히 들어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여기서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는 것이 그냥 젊은이들이 쉽게 빠지고 마는, 흔들리고 마는 그러한 감정적인 그런 사랑의 경험하고는 다르다고 하는 거지요.

 

이 사람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거지요. 그게 뭔가, 우리가 이 34편을 조금 더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34편이 오직 그거 하나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밑바탕에 있다고 하는 거고요, 1절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이런 표현들이야 시편에 많고 다른 성경에도 많이 나오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앙의 단계인 거지요. 여호와를 항상 송축하고 찬양한다, 실제적으로 찬양하는 태도를 포함해서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거지요. 콧노래로 매일 찬송가를 부른다고 하는 그런 차원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 영혼이 찬양을 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 것을 실질적인 찬양으로 나타내면 그건 좋은 겁니다, 과연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 하는 거지요. 이건 다른 이유가 가능하겠지만, 그 중에 하나를 짚는다면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큰 긍정이죠, 하나님에 대한 큰 긍정, 그럴 때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단계에 분명하게 들어간다면 오늘 여기 시편 뒷부분에서도 나오고 앞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런 삶을 살수가 있는 거지요. 이건 그냥 그런 게 좋으니까 그렇게 살라고 하는가보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는 것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큰 긍정을 한다고 하는 이러한 신앙은 로만티시즘, 아까 말한 그런 단계를 뛰어 넘는 겁니다. 이 세계 실체를 뚜렷하게 보는 거지요. 거기는 마냥 즐거운 것만이 있는 게 아니라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과 고독 절망 이런 것들을 다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얼마나 가능하냐 하는 거지요. 우리가 억지로 노력해서 되는 것들은 아니고요,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만 가능한 삶의 경지인데요. 시편기자들은 그런 경험을 합니다. 시편기자들하고는 다르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훨씬 더 근본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구약에 있는 시편기자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 그리고 구약에 있었던 많은 영성가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하나님을 경험했던 사람들인데 그 이후로 우리들하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런 문제로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또 하나의 주제가 되기 때문에요. 다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보느냐, 연관되는 문제인데요. 신약공동체가 구약을 그대로 받아 드렸다고 하는 왜 그렇게 받아 드릴 수 밖 에 없었냐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신구약성서에 대한, 그리고 초기기독교에 대한 개론만 안다고 하더라고 어렵지 않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공부 할 때도 몇 번 설명한 내용 이예요.『기독교를 말한다』 한들출판사, 2001. 제가 쓴 책에서도 말한 거고요.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중심으로 하는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앙인 것만은 분명합니다만 구약신앙을 배제 한 체 그렇게 되는 것은 압니다.

 

독특하고 분명히 다르긴 하지만 그러나 구약과 유대인들의 신앙과 대립하지 않는 그런 어떤 관계에 있는 거예요. 유대인들 신학이 있기 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생기기 전에 유대인들도 당연히 하나님을 바르게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래서 완벽하게 다 하나님을 경험했거나 인식한 건 아니고요,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얘기 한 것처럼 거울로 보는 것처럼 절대적인 세계를 경험하고 있을 뿐이지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 분의 사역, 그분의 구원사건이 이미 일어났어도 역시 우리 신앙적 인식의 잠정성? 한계는 여전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이 불안전하거나 미비하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진리의 통전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우리 인식의 한계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이런 것도 결국은 종말에 가서야 완전하게 드러나는 거지요. 그 때 가서야 우리가 궁극적 실체를 직면하게 될 텐데요.

 

하여튼 그런 근본적인 한계가 있어도 구약의 신앙과 신약의 신앙이 차이가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양보 할 수 없는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역사 안에서 성육신의, 그리고 삼위일체의 한 위격자로서 우리들에게 오셨고 그렇게 사역을 하셨고 또 종말에 재림할 자로 오신다고 하는 약속이 있었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그런 구체적인 기독론적 구원의 현실들을 알지 못했던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림자처럼 알았던 유대인들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지요. 이 문제는 그런 정도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 1절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지요. 전체주제가 8절이라고 했는데 8절을 중심으로 해서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것, 이런 신앙의 상태, 이것이 1절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는 거지요.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일치되는 것, 그러한 영적인 경지를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2절,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를 자랑한다, 이러한 표현들을 여러분들이 들으시면서 아, 그렇지, 예수 믿는 것을 자랑해야지, 교회도 자랑해야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틀렸다고 말할 수 없지만 충분하지가 않는 거지요. 여호와를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여호와를 자랑하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자랑할 만한 상태에서 자랑하는 것은 이유가 없는 거예요. 여호와를 자랑하고 믿고 하는 것을 다 누구나 좋아하고 박수치고 하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게 무슨 대수겠어요?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 않은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편기자들은 고독하게 그러나 아주 분명한 하나님의 경험 가운데서 이렇게 자기들의 신앙들을 표현하고 있는 거지요. 참 놀라운 겁니다. 너무 여러분들이 이러한 진실들을 상투적인 것으로 받아 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곤고한 자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실패한 사람들이거든요?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이거든요? 실제적으로 삶이 피곤한 사람들이거든요?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를 자랑할 주제가 되지 못합니다. 꼬락서니가 별로 내 보일 게 없는 거지요. 여호와를 자랑하려면 정말 복되고 다 잘 되고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들의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을 텐데요, 그러나 이런 곤고한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시편기자는 그 당시 일반적인 어떤 신앙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록 힘들지만 어려운 상태지만 여호와를 자랑한다,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곤고한 자들이 기뻐한다, 기뻐하리로다 그렇게 시를 쓰고 있습니다. 3절,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이어진 이야기입니다. 4절,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다, 간단하지 않다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이미 짐작하시겠죠?

 

모든 두려움은 정말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려움들 있잖아요? 이 시인은 하나님이 내가 간구할 때에 응답하시고 이런 두려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럼 모든 사람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끊을 때 그 때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두려움 가운데서 건지십니다. 그런 기회에 누구에게나 오는 건 아니예요. 모든 사람에 대한 기대, 사람과 더불어서 그 이후에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기대, 일말의 기대도 사라지는 그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살면서 그렇게 만나지 못합니다. 내란이 일어난다거나 특별하게 큰 재앙에 휩싸인다거나, 그런 일 외에,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경우들이 별로 많지 않아요. 그리고 점점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복지 문제가 괜찮아지면서 어려움 고난 두려움 먼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런 경험들이 없어서 오히려 그런 것들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허물어내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팔복에서 첫 번째 나오는 항목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건데요. 요즘 마가복음 묵상에서 나오는 부자, 낙타, 바늘귀 이런 이야기에서 나오는 건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어요.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지탱해 주는 물질로부터 단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사람은 다른 데를 향할 수 밖 에 없는 데요, 그 다른데가 바로 하나님이죠, 말하다 보니까, 생각이 나는군요. 불교에서 화두를 붙잡는 게 바로 그와 같은 겁니다. 백척간두와 올라선 것과 같은 상태지요. 발밑을 내려다보면 천길 낭떠러지 백척이예요. 장대 꼭대기에 서 있는 것 같은, 그 사람이 지금 무얼 생각하고 있겠어요. 내일 무엇을 먹을까, 저 사람이 날 싫어하면 어떨까, 좀 창피한데, 이런 걸 생각하겠습니까? 아니거든요? 오직 한 가지만 아는 거예요. 딱 거기 서 있어야 되요. 물론 거기는 백척간두 진일보해야 된다,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현전신(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그런 문장에서 나온 거지만 제가 연결시켜서 말씀 드린 겁니다.

 

그리고 화두를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길을 가다가 깊은 수렁에 빠진 때와 똑 같은 상태의 어떤 긴장이라고 합니다. 거기 떨어진 사람은 물불 가리지 않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기를 쓰잖아요. 한 가지에만 매달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 그리고 곤고한 사람들 두려울 수 밖 에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다른 걸 생각할 틈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 복을 얻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지 실제적으로는 아니다, 실제적으로는 통장에 돈도 좀 있고, 가족들도 평화롭고, 그래야지 든든하고 영적으로도 풍요로운 것 아니냐,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그런데 어떻게 영적인 풍요로움이 나올 수 있냐, 그렇게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는 어떤 면에서는 맞는 이야기이긴 한데 궁극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편안하다고 하는 것이 정말 그게 편안한 건지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절,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곤고한 자들, 힘든 사람들,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하는 자들이 부끄럽지 않다, 6절,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반복되는 이야기입니다. 7절,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천사 신의 대리자라고 보통 일컬어지는 존재인데, 천사론은 그만두고 넘어가죠, 하나님이 그렇게 지키신다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8절, 이 34편의 주제절이 나왔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도 이런 정도의 영적인 민감성을 확보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기본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덧입혀져서 의롭다고 하는 하나의 사실에 매달려 있긴 합니다만 거기서만 머물러 있으면 좀 곤란하죠, 이 표현이 좀 적당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만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이 그러면 칭의 이외에 다른 것이 또 필요하다고 하는 말이냐, 하는 것처럼 들릴 염려가 있어서요.

 

그러나 그런 뜻으로 제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우리 모든 신앙과 처음과 끝은 칭의죠,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바로 그 사실인데 그러나 그 사실이 그냥 하나의 교리문답으로 딱 끊어져 있어서 더 이상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그것은 칭의론 하고는 거리가 먼 거지요. 이 신앙이 자란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건 자란다, 닮아간다, 보통 성화라고도 하는 그런 과정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억지로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요. 이것마저도 믿음의 결과인데 이것은 약간 아주 그 차이들, 세미한 차이들을 우리가 잘 분간해야 됩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도덕적인 노력 그런 걸 통해서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가 업적신앙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가 성화되고 업적신앙으로 빠질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영적인 차원이 깊어지는 그런 어떤 점진적인 과정, 이런 것하고 우리의 태도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믿음의 자세라고 할까요? 아니면 노골적으로 노력이라고 할까요? 거기에는 어떤 관계가 있긴 있습니다. 이렇게 봐야 되겠네요. 결국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의로움도 그렇고 성화도 그렇고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한데 믿음의 사건도 혹은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 혹은 그 믿음의 차원이 깊어지는 그 과정에 우리들이 해야 될 일들이 분명히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업적이나 행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과의 영적공명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요. 우리가 우리의 행위나 우리의 업적으로 우리가 하는 모든 성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런 참된 복된 삶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 사실, 그 사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그 단계, 영적인 각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건 필요한 겁니다. 그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되요. 제가 그 두 가지를 지금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다가 말이 자꾸만 꼬였는데요, 칭의는 이미 이뤄졌으니까,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도덕적으로 훈련하고 봉사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성화하자, 그건 저는 잘못 됬다고 생각하는 거고요.

 

영적인 각성, 이것은 꼭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라고 한다면 우리 노력은 필요하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런, 이게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에게서 나올만한 놀라운 신앙고백이 아니냐 하는 겁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런 상태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이지요.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가 선하시다고 하는 것 말이지요. 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 그 선하심이 변하십니까? 우리의 마음만 변하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그렇습니다. 그 선하심에 대한 전적인 신뢰, 억지로는 못 믿어져요. 정말 그 선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대면해야 되거든요? 어디서 대면하십니까? 그냥 쉬운 대답으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요. 그건 물론 옳은 이야기다, 그건 단독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약속, 그리고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행위들, 총체적인 모든 것들 안에서 그런 선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것도, 숨도 루아흐라고 하는 것도 성령으로 구약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건데요. 숨쉬고, 이 시간에 세상을 보고, 불빛 안에서 강의하고 이런 시간, 공간 여기에 이렇게 있다고 하는 것 자체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죠, 우리가 우연한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누워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여호와의 선하심을 그 안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연결되는 이야기지요. 부족함이 없다, 10절,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것이 반복되고 있네요. 이게 자기합리화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이 세계를 명명백백하게 뚫어 보고 있는 사람의 차원 높은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 볼까요? 저는 이 시편기자의 영적인 경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제 입장에서 한 마디만 하면 이렇습니다. 비유적으로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이 말의 우리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경험할 수가 있느냐는 거지요. 우리가 밥 세 끼 먹잖아요? 잘난 사람이나 못 난 사람이나 다 그렇습니다. 또 부족한 게 없지요. 우리들에게는, 오 만원짜리 호텔뷔페 아니면 정식 이런 거 먹는 게 부럽다면 늘 부족한 거예요.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찬밥에 따끈한 물 데워 말아서 김치 하나 가지고 먹으면서도 이 먹는다는 행위 자체 안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거지요. 위암 걸려서 그런 물 말은 밥, 김치 그런 것마저 먹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냐, 그럼 정말 불행한 사람 아니야, 부족한 것 많은 것 아니냐, 트집 잡듯이 이야기 할 수는 있겠어요. 그러나 거기서마저 부족함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지금 제가 신앙적인 것하고 일반적인 것하고 섞여진 가운데 말씀 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거죠, 자기가 아주 작아지는 상태가 되면 부족한 게 없어요. 문제는 자기가 작아지지 않기 때문에 늘 불만, 아쉬움이 있는 거지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건, 그것보다 더 낮아 질수는 없잖아요? 가장 낮은 자리가 바로 거긴데요, 저주 받은 자리가 바로 거긴데요? 예, 그런 단계까지,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변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 자신이 작아지면 무화되면 혹은 무위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삶에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지요. 부요하죠, 그게 하나님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 11절부터 이 34편이 조금 루즈해집니다. 성서학자들의 표현 이예요. 10절까지는 상당히 긴장감 있게 나가다가 11절에는 교훈적으로 나갑니다.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어라, 가르치라 쭉 나가지요. 그래도 다 전반적으로는 짜임새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22절,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다시 찬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부족함이 없다, 복이 있다 건지신다, 이러한 모든 뜻과 이런 진술들과 하나가 되는 거지요. 11월 마지막 수요일 저녁입니다. 2008년도 이제 한 달 남았군요. 여러분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나그네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막집에 앉아서 평생 사는 나그네는 없잖아요? 길을 가야 되니까요. 마음에 드는 주모가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몇 년씩 묵으면서 지낼 수는 없잖아요? 우리는 그냥 가네요. 2008년도도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순례의 길, 우리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순례자들로 사는 사람들인데요. 오늘 여기 시편 8절에서 진술하듯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러한 신앙의 경지로, 나그네의 길에 들어가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마치겠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