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5편 강해-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시편 35편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절부터 28절까지입니다.

 

〚다윗의시〛

1.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4.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부끄러워 수치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들이 물러가 낭패를 당하게 하소서

5.그들을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몰아내게 하소서

6.그들의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며 여호와의 천사가 그들을 뒤쫓게 하소서

7.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9.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10.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11.불의한 증인들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질문하며

12.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13.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14.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15.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16.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17.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18.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19.부당하게 나의 원수된 자가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20.무릇 그들은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히 땅에 사는 자들을 거짓말로 모략하며

21.또 그들이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격하였다 하나이다

22.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23.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24.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그들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25.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아하 소원을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그를 삼켰다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26.나의 재난을 기뻐하는 자들이 함께 부끄러워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스스로 뽐내는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하게 하소서

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아멘! 상당히 긴 시편입니다. 1절에서 28절까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이 시편 35편은 탄원시라고 합니다. 아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는 그런 기도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특별히 오늘 이 시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억울한 누명 비슷한 것, 왕따돌림, 이즈메 그런 것들을 당했을 때 그리고 속임수를 당했을 때 그렇다고 우리는 억울한 일을 누구에겐가 호소해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을 향해서 탄원하고 있는 이 시편기자는 어떤 민사상의 고소, 고발, 그런 방식으로 자기가 당한 어려운 상황을 해결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이미 이 사람을 억울하게 하려고 하는 세력들이 너무 강해서 그들과 도저히 대항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일지 모릅니다. 그 상대방은 숫자도 많고 실제적으로 힘도 강해서 이 사람이 사법당국에 정식으로 호소를 한다고 하더라도 승산이 거의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일들은 요즘에도 없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흔하게 돌아다니는 말로 무전유죄, 거꾸로 유전무죄와 같은 그런 상황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없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실제로는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건 사회학적인 어떤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가 끊어서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정적으로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사법제도와 거기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고 하더라도 늘 모든 일들이 공평무사하게 처리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당한 억울한 일을 그렇게 제도적으로 해결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이 사람을 괴롭히는 그런 세력이 막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탄원을 드린 거거든요.

 

이 사람이 어느 정도로 어려운 일을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를 않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조금 의심해 본다면 실제로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아닌데 오히려 혼자서 자격지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도 한번은 짚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어려운 일들을 누구 탓이든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대개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탓하기 마련이거든요. 글쎄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우리가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증거냐, 이건 증거의 문제가 아니예요. 그런 것들은 사회과학이라고 할까요? 실증적인 법 논리에 속하는 거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그런 문제를 논할 수도 없고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이 사람이 처한 영적인 상태, 그러니까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문제를 어떻게 신앙적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하는가 하는 신앙적인 태도, 영적인 태도 이런 것인 거지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이 시편기자에게서 볼 수 있는 아주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으면서 늘 느끼는 어려움 중에 하나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와 상대해 있는 사람을 저주 비슷하게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좀 상대방을 이해한다거나 신학성서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원수를 사랑한다고 하는 경구에 근거해서 아무리 자기에게 어려운 해를 끼쳤다고 하더라도 그렇게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탄원하는 것은 신앙적인 면에서 조금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구약성서에서, 특별히 시편에서 나타나고 있는데요, 확연하게 우리가 분석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유들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가 더 얘기 하지는 말기로 하고요, 중요한 것은 어쨌든 아까 말씀드린 그런 부분하고 연관되는 건데 이 사람이 그러한 당한 어려운 문제들을 상황 자체가 사실 중요한 거지요.

 

정말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도 그런 상황을 벗어 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그런 절박한 상황 말입니다. 거기서 그가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했다고 하는 그 사실, 이게 중요한 거지요. 그래서 이런 점에서는 이 사람이 도덕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람과 상대방과 투쟁, 알력관계에서 누가 더 크게 잘못하고 덜 잘못했냐, 그런 것들을 우리가 심판하자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이 사람이 당한 정말 절박한 그런 상황, 그런 도덕적인 가치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오늘 읽은 데서 느끼는 바는, 전달되는 바는 이 사람이 상당히 주변에 큰 악한 세력에게 휩싸여 있고 오랫동안 시달려 있다고 하는 것은 그건 아주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건 한 개인의 시이긴 하지만 이런 시들이 유대인들에게 계속 읽혀지고 역사에 살아남을 수 이유는 한 사람의 절박한 상황에서 나오는 탄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 민족 전체의 상황하고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세계로부터 계속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여기 시편 35편에도 그렇고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는 그 문서들 속에서도 똑 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을 전쟁의 신처럼 분노하는, 진노하는 원수를 갚는 분처럼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다 망하게 하는 그런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잖아요? 여기 35편의 개인의 탄원시와 이스라엘 민족의 당한 상황과 그들의 영적인 태도 이런 것들이 사실은 다 맞아 떨어지는 거지요. 제가 바로 앞에서 이 시편기자가 도덕적으로 얼마나 탁월 하냐, 아니면 거기서 거기냐 하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위 말해서 가나안 부족들, 이방인들이라고 하는 그들과 토지분쟁을 계속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기들은 늘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저들은 하나님의 적대자라고 늘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내려 온 거고요, 우리가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만 무조건 정당하다고 보는 것은 어렵거든?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요, 그들이 역사적으로 제국들에게 많이 당하기는 했지만, 그들도 때에 따라서 자기들보다 약한 민족을 향해서 그런 폭력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거든요.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해서는 그런 것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사실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팔레스틴 원주민들하고 계속 투쟁을 하고 있고, 지난 2차 세계 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건국한 다음에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과정에서 도덕성 이런 것들을 찾아보기 좀 힘들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이 혹은 여기 35편 기자가 이스라엘과 똑 같다고 말씀은 아니고, 그러나 그 내용이 하나님을 향한 탄원들이 비슷하다고 하는 점에서 연관해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더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서를 읽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사건, 혹은 계시를 담는 그릇, 우리가 말을 하는 이유는 거기에 영적인 경험들, 영적인 태도들, 그런 것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을 참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기도와 태도 행위에서 어떤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향한 바른 신앙이 태도였고 어떠한 부분이 오해한 부분이었는가, 하는 것을 칼로 무를 잘라내듯이 확실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약도 그런 관점들을 우리가 구분해 낼 필요가 있긴 있는데 구약은 조금 더 그렇습니다. 거기에 민족주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자기순혈주의 이런 이방인들을 향한 배타주의 이런 것들마저 신앙적인 것으로 우리가 받아 드릴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인간적인 그 시행착오들이 성서 안에 더 정확하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 경험 안에 있어요.

 

그걸 인정할 수 밖 에 없어요. 그래도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 공명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참 중요한 겁니다. 오늘 여기 35편의 시편기자도 그런 경험들을 하는 거지요. 정말 절박한 상황,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하나님에게만을 향해서 탄원할 수 밖 에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태까지 경험했던 바로 그러한 경험과 똑 같은 거지요. 그래서 이들이 말하고 있는 그리고 이 시편기자들이 말하고 있는 용어들이 비록 난폭한 부분들이 있긴 있지만 보통 전쟁용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고 있거든요.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요. 7절과 8절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그들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8.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거의 저주에 가까운 용어거든요, 나를 잡으려고 웅덩이를 팠는데 그 웅덩이에 빠지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전쟁용어 같지요? 이건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바로 그와 같거든요? 제로섬게임이라고도 얘기 하지요. 완전히 아무것도 없는 無냐, 아니면 모든 것이냐, 전쟁에서는 적당한 타협이 없는 것이거든요. 특별히 고대인들에게는 더 그랬습니다. 남자들은 다 노예가 되고 여자들도 다 잡혀가고 가족이 모든 흩어지고 자기들의 모든 역사 전통들이 없어지고요, 그런 일들을 당할 수 밖 에 없기 때문에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 민족도 그렇고 이 시편 35편 기자도 그렇고 그 외에 많은 시편기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를 대신 갚아 달라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도 이 시편기자가 그런데만 떨어진 것이 아니예요. 이스라엘 민족이 주변 나라들하고 자기보다 약한 나라들에 대해서는 폭력적이고 그런 전쟁이라고 하는 상황 속에서 조금 거칠고 난폭한 모습들을 분명히 보이긴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정확하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군요. 신약성경을 통해서 바꿔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 창녀 같은 사람들하고도 가깝게 했고요. 오히려 죄인 세리들이 바리새인이나 의로웠던 사람들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는 그런 가르침도 주셨고요.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실제적으로 보면 그게 가능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좀 방탕하게 산다거나 열심히, 성실하게 살지 못해서 인생에 실패한 사람들일수도 있고요,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허물어진 삶 자체가 하나님나라에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기에는 그건 쉽지 않지요. 그런 맥락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죄인 그러한 상황에 떨어지게 되면 어떤 다른 절대적인 절대자를 향해서 마음이 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하고도 맥이 닿는 겁니다. 사람으로부터 그러한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절대자를 향해서 마음이 갈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사람, 거기에 어떤 것이 이뤄진다고 하는 겁니다.

 

어떤 것이, 그것을 제가 무어라고 딱 딱 끊어서 말씀 드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게 아주 복합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래도 한 마디만 보충적으로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생명의 가장 밑바닥, 가장 깊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깊이로 떨어지는 경험인 거예요.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인 겁니다. 그게 하나님 경험인 거지요. 일반적으로 평안하고 잘 될 때는 그게 잘 안 되요. 말로는 하나님의 은혜다, 감사하다,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 감사, 생명의 그 깊이에서 나오는 감사 이런 것들은 쉽지 않습니다. 다 잘되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절망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서 영적인 촉수가 예민하게 작동될 수 있는 거지요. 무조건 그렇게 허물어지는 삶들이 그렇게 되는 거냐, 그런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그건 여기서 무의미한 질문 이예요. 신구약 성서전체를 통해서 볼 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잘 전달될 수 있었던 거예요.

 

예, 그래서 오늘 여기 35편의 말씀을 통해서도 제가 한 구절 한 구절은 다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설명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우리가 읽으면서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말이 거치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그 시각을 조금 교정시켜 드리려고 그 부분에 머물러서 비슷한 말씀을 반복하면서 말씀 드리는 거예요. 여기에는 물론 세련되지 못한 신앙적이지 못한, 아주 덕스럽지 못한 표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원수 갚는 것과 같은 똑 같은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이 늘 그렇게 인자한 말만 하고 살수는 없거든요. 그렇게 살 수 없어도 그렇게 살도록 해야 되는 것 아니냐, 그게 신앙이 아니냐, 그런데요, 그건 신앙은 아닙니다. 훈련은 통해서 좀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문제 되는 것도 아니예요.

 

화 낼 때 화 안 내는 것, 이게 굉장한 신앙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싸울 때 싸우고 감정적으로 폭발 될 때 하더라도 그게 결정적으로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어떤 특별한 사람은 많은 훈련을 통해서 수도원적인 영성을 통해서 세련된 교양, 그런 걸 통해서 늘 마음이 평정한 상태로 덕을 보여 줄 수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도 아니고요, 그 자체가 신앙의 기준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잘 못하는 일들도 있고, 또 실수하는 일들도 있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내버려 두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회가 허물어지고 정말 상대방에게 파렴치한 일을 행하게 하면 문제가 아니냐, 문제 맞습니다. 그런 일들을 하지 말아야하지요. 그러나 그것하고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 그런 아주 그렇게 바람직스럽다고 볼 수 없는 표현들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간절한 호소, 기대, 탄원, 그리고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다는 그게 중요한 거예요. 노파심으로 말씀 드립니다.

 

악질적인 데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만 하면 되냐, 여러분, 그것은 아닙니다. 그게 왜 아닌가는 이미 여러분들에게 전달 됬으니까 더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이 사람이 앞에서 읽은 7절, 8절에 이어서 웅덩이에 빠지게 해 달라고 하는 이어서 9절에 보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이게 좀 맞지 않는 것 같지요? 원수가, 상대방이 웅덩이에 빠지게 해 달라고 하는 탄원을 하다가 갑자기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우리가 구약성서, 특별히 읽으면서 시편을 읽으면서 당황하게 되는, 모순되는 것과 같은 부분들이거든요. 그런데 모순되는 건 아닙니다. 지금 이 사람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상황인 거예요. 어느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그런 상황에서 그것을 면케 해 달라고 하는 호소를 드리는 거예요. 어쩌면 그 사람은 실제로 원수가 웅덩이에 빠지는 것을 원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하지 못하니까 호소를 하는 거지요. 호소를, 그런 원수가 정말 잘 못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은 아니고 자기가 당하는 이 어려움이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그냥 갑자기 몽둥이로 팔을 맞았을 때 방어하듯이, 그걸 치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요, 영적인 태도, 기본적인 영적인 태도가 있어서 이 사람이 9절에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이렇게 노래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사람이 원수들이 웅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어쩌면 실제로는 원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제가 말씀 드렸는데 그것을 우리가 유추해서 생각할 수 있는 구절이 13절에 그렇게 나옵니다.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그 상대방이 어려움이 당했을 때 금식하고 고난을 함께 참여했는데, 그렇게 기도했는데, 그런 기도로 내가 지금 위로를 얻고 있다, 이런 말씀이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는지 이해하시겠죠? 이 사람이 비록 거칠게 표현하는 부분들이 있긴 있지만 핵심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자기 영혼을 맡긴 신앙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9절에서 방금 말씀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원수가 올무에 들어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할 수 없이쏟아내는 하소연이었고요, 여호와를 즐거워하고 여호와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전혀 차원을 달리 하는 거지요. 그래도 그는 실제로는 어려우니까,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이 어려우니까 17절이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어느 때까지, 이건 아주 애절한 이 사람의 하나님을 향한 호소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19절에서 다시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다시 찬양으로 돌아가잖아요.

 

원수 갚아 주십시오. 저 놈들 멸망당하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서도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사실은 많지 않습니다. 상황자체가, 어려운 거지요. 어느 때까지 나의 어려움을 제가 기다려서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계속 호소를 하면서 그래도 주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겠다고 하는 겁니다. 참 놀라운 신앙고백 이예요. 그런 것들이 그러한 찬양과 감사와 구원의 기쁨 이런 것들이 험한 언어들로 쭉 나가고 있는 이 탄원시의 중간 중간에 마치 보석처럼 박혀 있어서 아주 살아 있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절, 28절에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 28.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그렇지요?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결국 우리는 시편 35편 시를 쓴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의에 대한 관심, 정말 공의로운 의, 지금 자기가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이 억울한 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러한 영적 각성과 그런 믿음을 분명하게 가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몇 번 반복해서 찬송한다고 하는 말이 나오잖아요. 놀랍습니다. 시편 35편 이 기자처럼 여러분들의 삶도 이와 같은 이 사람처럼 그렇게 어려운 상태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오히려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런 시편을 통해서 우리가 간접적으로라도 그런 상태가 뭔지를 배워야 되겠지요. 현재 우리의 삶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삶이 찬송으로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좋은 대림절, 평화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시편 공부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