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8편 강해-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편 38편입니다. 1절부터 22절까지 있습니다. 이 38편은 다른 6편과 더불어서 초기 기독교가 탄원시로 정리한 묶음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 안에는 전형적인 하나님에 대한 탄원이 절절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심정, 이런 것들은 한 사람의 신앙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류전체의 영적인 경험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실존적 고통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다 담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몇 번 반복해서 읽었고요. 또 주석서도 읽고 나름대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시편을 읽으면서 다가오게 되는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말로 형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진수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과 밀착되어 있는 어떤 영성가의 그런 삶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 38편인데요, 이 말씀을 제가 천천히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같이 읽으시고요, 없으면 들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다윗의 기념하는 시〛

1.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9.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10.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11.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12.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13.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14.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반박할 말이 없나이다

15.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16.내가 말하기를 두렵건대 그들이 나 때문에 기뻐하며 내가 실족할 때에 나를 향하여 스스로 교만할까 하였나이다

17.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18.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19.내 원수가 활발하며 강하고 부당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으며

20.또 악으로 선을 대신하는 자들이 내가 선을 따른다는 것 때문에 나를 대적하나이다

21.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22.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아멘! 이 사람이 당한 그런 형편, 그런 처지 우리가 그것을 다 따라 잡기는 쉽지 않죠, 그런데 여기 쓰인 단어나 표현력, 문장만 보더라도 이 사람이 거의 견디기 힘든 정도의 어려움 가운데 빠졌다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사람이 아마 문둥병, 그런 병에 걸렸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5절에 보면 그런 표현들이 나오잖아요.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이게 아마 사실적인 표현일수도 있겠고요, 6절, 7절에서도 계속 성한 곳이 없다고 하는 그런 표현들을 보면 그가 문둥병이 걸렸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떠났잖아요? 11절에 보면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왠만한 병은, 이렇게 사랑하는 자, 가족이겠지요? 친구, 또 친척들이 불쌍하게 여기고 안 됬다고 여길 뿐이지 떠나지는 않는데 이 떠난다고 하는 것은 천형이라고 하죠?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은 거라서 어떻게 인간이 구제 할 수 없는 그런 병이라는 거죠, 이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은 유대사회에서 그 전통에 따라서 같은 마을에 살지 못하고 따로 산속이라든지 하여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 됬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요. 그 전염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제가 의학적인 상식이 없으니까 말씀 드릴 수 없고요, 그 당시에는 약도 없어서 문둥병의 전염성으로 인해 가족이나 민족 공동체 전체가 파괴될 염려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따로 떼어 놓을 수 밖 에 없었지요. 여기서 죄에 대한 문제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의 죄가 견딜 수 없다고 하는,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문둥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징벌이라는 생각들이 그 당시에는 보편적이었습니다. 성서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요. 그것은 자기 본인은 실제적으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직간접적으로 죄와 연결된 결과로써 이런 일들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죄가 자기를 짓누른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38편의 주인공은 하나님에게 탄원하지 않으면 안 될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인데 구체적으로 문둥병에 걸려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지금도 문둥병이 나 불치병 등등..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어려움들, 그 시련들, 이런 것들을 당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겠는가, 하는 것 말이지요. 그런 문제들은, 예를 들자면 태어 날 때부터 심한 장애, 작은 장애도 힘들지만 심한 장애는 더 힘드니까요. 심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들과 부모들이 어떻겠는가, 그들의 삶의 운명이 어떻겠는가? 말이지요.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이런 문제들은 한 가정에 대한 그들의 책임으로 미루지 말고 이 사회전체가 공동의 문제로 떠안아야 될 것 같은데요. 이런 문제들이 선진사회에서는 비교적 사회보장제도로 어느 정도는 밑받침 되어 있는데, 우리는 옛날보다는 좀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요원한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공부의 결론 비슷한 말이 되겠군요. 미리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본인 스스로가 가장 삶의 밑바닥에 빠졌다고 하는 그 자리에서 놀라운 영성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되느냐, 그건 두 번째 문제예요. 지금 우리는 지금 그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더 여러 상황에 따라서 생각을 해 봐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가타부타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어쨌든 오늘 이 본문에 근거하면 완전한 절망밖에 없을 만한 상황에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아주 투명하고 밀도 깊은 그러한 영성이 작동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참 삶의 놀라운 신비인 것 같아요. 그 성령의 역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도 이러한 말씀들을 읽고,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그렇게 도전을 받고 있는데 삶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겁내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게 그런 거예요.

 

우리가 어떤 것으로도 조금 상황을 낫게 만들거나 근본적인 해결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거든요? 그게 영적인 경험에 이르는 첩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들이 우리 뜻대로 잘 돌아가면 그렇게 하기 힘든 거예요. 뭔가 자꾸 붙들려고 하는 거지요. 자기가 자꾸 만들어 내려고 하고 거기에 우리의 어떤 삶의 많은 부분들을 거기에 묶어 놓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요동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된다면 그 때 이제 참된 평화가 가능한 거지요. 이렇게 궁극적으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죽음만이 우리를 참된 휴식으로 안내한다고 말이지요. 이건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원리라고 할까요? 그런 거지요.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상태고 오늘 여기 문둥병 걸린 사람의 탄원이 거기서 나오는 거거든요. 다른 어디에도 기대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쏟아내는 탄원과 그러한 기다림들, 그런 것들이 바로 영성의 본질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편 38편 기자가 그걸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자기에게 임하는 극심한 고통과 좌절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책망으로 이해한 거지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천형, 이런 것들은 죄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는 그 당시에 일반적인 생각, 일반적인 기도문에 따라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의 정형화된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그 당시에 관용적으로 사용되었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적인 표현이기도 하지요. 2절 보면,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자기에게 오는 고통과 시련들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받아 드리고 있는 거지요. 4절에 보면 1절, 2절, 3절 내용들이 4절에서 조금 더 구체화 되는 거지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자기에게 오는 고난과 시련 이런 것들을 죄의 결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5절과 6절, 7절, 문둥병 걸린 사람의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거기서 8절에 보면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오는 불안과 신음, 참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음하듯이 기도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집안이 풍지박살 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니까 그냥 생존에 급급해 있었으니까요. 그 때는 아마 구체적으로 신음하듯이 기도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게 제 마음속에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른 것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 거기에 매달리는 거지요. 9절이 중요한 말씀입니다.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주님 앞에 모든 것들이 드러난다, 기도가 드러난다고 하는 건데요. 그 번역을 다른 걸로 좀 읽어 보겠습니다. 제가 보는 주석서에 조금 더 알기 쉽게 번역이 되어 있어요. 9절, 이렇습니다. 주님, 나의 모든 바람을 주께서는 아시나이다. 바람, 소원 우리 번역으로는 소원으로 되어 있고요, 나의 한 숨이 주께 감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 나의 바람을 주께서는 아시나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이미 아신다. 이 탄식을 하면서도 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거예요. 놀랍지요? 자기 삶은 정말 저주스러운 상태인데 사람들도 다 떠나고 그리고 그런 죄의식 같은 것, 내가 어떻게 잘못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는 그런 죄의식? 죄의식이 실제로 있었는지 아니면 그런 것들이 일반적인 생각이라서 그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있었지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람, 소원이 무엇인지를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 앞에 있사오며로 되어 있잖아요? 직역이니까 그렇겠지요? 제가 참고하는 주석에서는 나의 바람을 주께서 다 아신다, 탄식도 아신다, 감추고 있지 않다, 드러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에서 나온 그런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보십시오. 자기 삶의 문제들, 완전히 절망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의 바람을 다 아신다고 하는 그런 신뢰가 분명히 있잖아요? 잘 보십시오. 중요한 핵심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제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그렇게 느껴져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삶의 운명들, 이런 것들을 무관심하고 관념적으로 저 세상, 초월적으로 그 쪽만 바라봐라, 그런 것은 아니고요. 그런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 중요하죠,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근원적인 어떤 세계와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고 할까요? 의미가 있다고 할까요? 그런 거지요. 이 땅에 살면서 내가 당하는 어려움이나 받게 되는 즐거움 같은 것도 그 자체만 우리가 매달리게 된다면 어느 한시도 편하게 있을 수 없습니다.

 

안식이 불가능한 거예요. 그 근원과의 관계로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거든요. 탄원시의 내용들을 잘 보시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괴롭고 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그가 자기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그걸 확신하고 있다면 그럼 이제 그러한 시련과 어려움들은 아무것도 아니죠, 아무것도 아니라기보다도 이미 넘어서는 거지요. 예, 넘어서는 거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한 반에 아이들이 있는데 서로 싸우고 오해하고 그래요. 선생님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선생님이 이 아이가 억울하다고 하는 것을 알고 계시다고 하는 것, 그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친구들에게 오해 받는 것 때문에 크게 좌절하지는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생명의 영, 창조자, 그 분과의 관계에 깊숙이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문제들,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넘어 설 수 있습니다.

 

다시 여기서 질문을 드린다면 그리고 이런 질문들이 나올 거라고 저는 예상되는데요? 그렇게 되면 그건 너무 개인주의적인 영성이고 구체적인 사회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예를 들어서 팔레스틴과 이스라엘의, 복잡한 문제라서 제가 그걸 지금 누가 옳다 그르다를 딱 끊어서 말씀 드리는 건 아니고요, 뿌리로 올라가면 복잡한 관계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강한 군사력으로 팔레스틴 주민들이 무지하게 죽어가고 고통당하고 있잖습니까? 이런 폭력들에서 모든 생명과 가족과 재산과 삶의 미래들을 다 파괴당하고 있는 이런 상황이란 말이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만 괜찮으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냐,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그걸 지금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불의 이런 것들을 우리가 투쟁을 해야 되는 거지요. 그건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라고 할까요?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이 땅위에서 잠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받아 내야 될 그리고 견디어야 될 책임감이라고 할까요?

 

그건 그것대로 가는 거고요. 지금은 다른 차원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지금은 혼란, 막 섞어놓고 생각하시면 그러면 우리는 곤란하게 됩니다. 개인윤리냐, 사회윤리냐, 또 윤리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 이런 것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될 문제고요, 지금 우리는 영성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자기 육체가 다 파괴되고 있고, 그리고 그 당시 일반적인 가치관에 의해서, 신앙관에 의해서 자기의 심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참된 신뢰가 쌓이기만 한다면, 그것이 토대하고 있기만 한다면 그러면 정말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고 하는 거지요. 이건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서는 그걸 바탕에 두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에게 운명을 맡기라고 권고, 충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입장이 어떠냐, 하는 것이 그 뒤로 10절 이하로 쭉 내려가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15절, 그렇게 하면서도 이 사람이 다시 이것을, 새로운 번역을 다시 봐야 되겠네요. 우리 개역성경으로는 좀 느낌이 덜 오는 구절입니다. 15절이 개역성경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그랬잖아요? 바랐사오니 무슨 뜻인가요? 바란다, 희망한다, 기다린다, 이런 뜻이겠지요? 제가 참조한 책에는 그 구절이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 주님, 내가 기다리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대답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내가 기다리는 분은 주님이시다. 결국 이 사람의 삶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서 모든 영적인 집중력을 모으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주를 기다린다, 내가 주를 기다린다는 이 시편기자의 이 고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허물어져 있는 상태인데,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무고한 자의 고난인데 여기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에게 탄원을 하면서 정말 살려 주십시오. 하는 그런 거지요.

 

그러면서 그런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근원적인 문제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를 기다린다, 이해하시겠죠? 오늘 다른 건 잊어버린다고 해도 이 구절만이라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내가 주를 바란다, 주를 기다린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문둥병자, 가장 어려움 가운데에 빠진 사람, 이런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큰 탈없이 살아가는 입장일지 모르겠는데 그런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거예요. 해당된다고 하는 말 정도로 안 되고 바로 그것이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무엇을 하든지요, 즐거우나 어려우나 기쁘나 슬프나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그냥 그런 걸 흘려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이건 이 땅에 있는 삶들의 한계를 아주 또렷하게 뚫어 보려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다 썩고 부패했으니 세상 보지 말고 주만 바라보자고하는 그런 차원은 아닌 거예요.

 

이 삶에 대한 냉소주의도 아니고 허무주의도 아니고요, 그런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내가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사람은 더 열심히 사는 거지요.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그런 기다림인 거예요. 최선으로 우리가 파수를 봐야 되요. 일을 해야 되요. 숨을 쉬어야 되요, 우리가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를 해야 되지요. 그러나 이러한 삶들은 새벽이 오듯이 지나가게 되는 거거든요. 신랑이 오는 때, 새벽이 오는 때, 주님의 재림의 때, 생명이 완성되는 때 그런 것에 대한 기다림인 거지요. 그런데, 이 기다림이, 그러니까 이 세상이 너무 즐거운 사람들에게는 좀 어려운 거지요. 신앙적으로 그래도 된다, 말할 수 있어요. 물론 당연히 그래야 되지요.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쉽게 휩쓸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 말의 표현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지요?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 더 사실적인 이야기일까요? 환경이나 이런 것들이 너무 잘 돌아가게 되면 긴장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더 영적인 긴장감을 가질 사람들이 있긴 있지만, 쉽지는 않은 거죠, 이런 자기의 삶이 파괴되는 것 같은 상태에 빠진 사람이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기 때문에 주님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꼭 그렇다고 그런 건 아니예요. 파괴되니까 절망해서 모든 것들이 다 풍지박산이 되는 그의 영혼이나 몸이나 모든 것이 망가져 버리는, 독일어로 망가진다고 하는 것을 카프트라고 하는데요, 카프트, 독일어 배울 때 단어가 기억에 나네요. 카프트,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어려운 가운데 빠진 사람들에게서 주를 바라는 마음들이 많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또 우리가 형편이 좀 넉넉하다고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정말 촛불 앞에서 바람처럼 쉽게 없어지는 것을 직면하는 사람은 주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겁니다.

 

예, 이제 말씀을 마치겠어요. 이 사람의 결론이, 결론이라기보다도 마무리가 결국은 여호와를 향한 간절한 탄원입니다. 21절,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이러한 구절들을 아주 진지하게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버리지 마소서, 하나님을 향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하나님이 멀리 하지만 않으면 이 사람에게는 다른 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둥병에 걸렸어도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이 가능한 거거든요. 그러면, 구원에 아주 가까이 있는 거지요. 온 몸이 너무 건강해서 이걸 어떻게 이용해서 즐겁게 살까, 그렇게 빠져 있는 사람보다 모든 건강을 잃어서 죽음과 직면에 있다고 하더라도 숨쉬는 순간에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가 가능한 겁니다. 마지막 22절,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도우소서, 구원하소서, 그 분의 도움이 그 분의 구원이지요. 귀한 말씀입니다.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 이시여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일상과 앞으로의 일생의 양식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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