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0편 강해-평화를 위한 기도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할 시편은 120절입니다. 1절부터 7절까지 있는 짧은 구절, 짧은 편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아멘! 우리가 지나 주 수요일은 쉬었습니다. 두 주 만에 다시 만났네요. 그 두 주 전에 우리가 119편을 읽고 공부했어요. 176절까지 있었던 대단히 긴 시편이었습니다. 우리가 소화하기도 쉽지 않았었는데요, 예, 되새기는 뜻으로 두 주간을 우리가 지냈습니다. 오늘은 120편입니다. 이러한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냐 하는 것이 숙제 아니겠습니까, 그냥 읽고 은혜 받으면 그만은 아닌 거예요. 제가 누누이 강조합니다만 은혜는 두 번째입니다. 그건 자칫하면 주관에 떨어 질 수 있거든요, 하나님을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거지요. 그게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있겠어요. 지금부터 2300,4,5백 년 전에 쓰여진 건데,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우리가 처음 말씀 드린 대로 은혜 일반주의, 은혜 만능주의, 은혜 일원론에 빠지지 않고 말씀 사건에 들어가는 게 중요하거든요.

 

그러려면 이걸 쓴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이게 공중에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고요, 그러니까 쓴 사람, 개인이 있을 수도 있고 어느 공동체가 쓴 것일 수도 있고요, 어느 한 순간에 쓴 것 일수도 있고, 오랫동안 세월에 걸쳐서 전체적으로 형성 된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구체적인 역사 안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이해하려면 이걸 쓴 사람의 ‘삶의 자리’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삶의 자리라고 용어는, 그냥 기억해 두십시오. 신학용어인데요? 성서신학을 공부할 때 꼭 나오는 신학개념입니다. 독일어로 지쯔 임 레벤(Sitz im Leben)이라고 합니다. Leben은 삶이예요. Sitz는 자리라고 하는 겁니다. Sitz im Leben 삶 안에 있는 자리, 보통 ‘삶의 자리’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이 시를 쓸 때 아주 기쁜 일이 있었나, 축제인가, 아니면 여러 가지 사정들이 있지 않겠어요? 자식이 죽었나, 전쟁이 일어났나, 아니면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나,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깊은 회의에 빠졌나, 아니면 신정론처럼요,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인데, 능력이 있으신 분인데, 이 땅 위에 왜 이렇게 죄가 많고 불안하고 그러냐, 그런 문제에 들어가 있는가, 그런 것들을 이 시편기자가 경험을 했을거란 말입니다.

 

그걸 알아야 되는 거지요. 그렇지 않고 하다보면 이현령비현령식이 됩니다. 그런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가장 적당한 어떤 예를 들면 좋을까요? 성경에 있다고 해서 다 좋은 얘기는 아니거든요? 여러분들이 잘 아는대로요, 처음엔 미약했으나 나중엔 창대하리라고 하는 말씀들이 성구로 많이 붙이지 않습니까, 그게 사실은 욥을 비판하는 친구들의 약간 경박한 말이거든요? 그 말 자체는 좋은데 어느 때 사용되었느냐에 따라서 이게 죽이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살리는 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걸 집에 걸어 논다거나 하는 것은 자기가 읽고서 은혜 받는다고 한다면야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성서 안에서 볼 때는 조금 핀트가 안 맞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거든요? 엄격하게 들어가면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서기자가 처했던 삶의 자리를 알려면 가장 중요한 작업이 ‘역사비평’입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시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구체적인 삶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우리가 역사 안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나라가 작년부터 구제역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의 경험이란 말입니다. 그걸 직접 당한 축산업 하시는 분들, 소들을 자기자식처럼 키웠던 분들이 심지어 자살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영적인 안목이 있어서 시를 쓴다고 한다면 자기의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시편기자들도 다 그런 경험을 한 거예요. 그걸 알려면 역사적인 어떤 분석, 그걸 ‘역사비평’이라고 합니다. Historical Critic(ism)이라고 하지요? 예, 그것은 뭐, 학문적인 용어로 얘기했습니다마는 우리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당연한 거구요. 그런 작업이 없으면 아전인수로 해석될 염려가 많이 있는 겁니다. 오늘 여기 이 시편 120편은 어떤 삶의 자리였을까요? 그걸 찾기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 시편이 나왔을 때 이 시편이 어디서 나왔다는 자초지종을 설명한 글이 나왔다면 모르지만 그런 게 없거든요, 달랑 이것만 있는 겁니다. 이게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 쓰여진 건지 잘 모르고요, 전문적인 학자가 깊이 분석을 합니다. 깊이 분석을 해요, 신학은 여러분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상상한 것 보다 훨씬 정밀합니다. 지금 기독교가 안티기독교 등등에서 비판도 있고, 최근에 그런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런 것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제들은 이미 다 거쳤어요. 그 만큼 신학의 연조가 깊기도 하고 그리고 아주 정밀하고요, 정직합니다. 그냥 억지로 꾸며 갖고 없는 걸 있는 것처럼 생각 하지 않고 다 있는 사실 그대로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이야기 하는 거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대에 어떤 사상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성서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앙이 근본으로부터 흔들린 염려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굉장히 정밀하게 성서텍스트를 연구합니다. 세상에 여러 학문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서 신학이 분과가 제일 많을 걸요? 여러 가지로, 성서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조직신학을 잘 몰라요, 윤곽만 알고요, 조직신학을 한 사람은 성서신학, 원어, 아람어, 이집트어, 고어라든지, 헬라어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그런 것들을 다 훑고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것도 또 안 되는 거지요. 전문적인 신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120편은 평화지향적인 사람이 호전적인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을 때 겪는 영적인 갈등, 고민 고통,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강의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마는 우리는 지금 선하다, 악하다 이런 것이 쉽게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라고 하는 것도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이 군주들, 왕들 이런 사람들은 국내정치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을 때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애국심을 끌어 낼 수 있고요, 정치적인 문제점들을 뭐든 일시에 없애 버릴 수 있거든요, 그리고 국민들도 그렇게 전쟁을 해서, 모르겠어요,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건지, 상대방을 악으로 정리해 놓고 선악을 대립해 놓고, 우리가 악을 응징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거기에 굉장히 열정이 나기도 하고요, 어떤 흡인력 같은 것들을 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평화 지향적이다, 호전적이다, 이건 뭐 나쁜 거니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 했지,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훨씬 더 그러한 쪽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요, 예, 현재정권이 상당히 호전적이지 않습니까? 남북관계가 굉장히 경색되어 있고요, 지금 남북한이 군비를 다 늘리고 있습니다. 이게 북한은 하도 가난하니까 생활이 다 망가지면서도 그런 일을 하는 거고, 우리는 복지로 나가야 될 돈이 좀 돌려갖고 군비로 나가고요, 이렇게 되면 무기를 사와야 되는 게, (공부를 해야 되는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연관되는 문제예요.

 

무기를 사 오게 된다고 한다면, 지금 연평도 쪽에 아주 강력한 군사기지를 한다고 하는데요? 결국 미국에서 다 무기를 사 와야 되는 거거든요? 이렇게 남북이 경색되면 결국은 미국의 군수업자들 배불려 주는 일입니다. 사실은요, 이런 것들을 오늘 한국교회들이 어떻게 풀어 나가야 되느냐, 하는 문제지요. 오히려 부화뇌동한다거나 그걸 부추긴다거나 무찌르자 공산당 이런 식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한다면 참 부끄러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여튼 오늘 여기 120편에 나오는 시편기자의 어떤 영적인 고민이 그런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한 절씩 보겠습니다. 1절에 이렇게 이야기해요, 1.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이거 외워둘만 하죠? 멋진 구절이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받는 구절입니다. 기도 할 때마다 이런 걸 얘기 하지 않습니까? 부르짖었더니 응답하셨다고 하는 말입니다. 예, 설명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만으로도 상당히 감동적인 그러한 구절입니다.

 

최소한도 두 가지 염두에 두고 이러한 구절들을 읽으셔야 되죠, 하나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기계적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 하는 시편구절이 여기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많이 나오는데 그게 그냥 간구했더니 되더라, 그런 차원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간구한 것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습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건데요? 참 어려운 문제예요.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간구한다고 하는 자체가 어려운 건데 그럴 때에만 그게 이루어지는 거라고 보고요, 제가 기도무용론으로 말씀 드리는 건 아닙니다. 기도를 어린아이가 부모를 졸라서 억지로라도 간청해 갖고 해결하시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건 참 곤란하지 않냐 하는 겁니다. 기계적인 게 아니다하는 것을 꼭 염두에 두시고요, 다른 하나는 이 시인이 지금 무엇을 부르짖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알아야지요. 그런 것 없이 그냥 내가 집을 하나 사고 싶다, 집 사겠다고 부르짖는다면 그게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거거든요? 아주 실질적으로 책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오해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무얼 부르짖었을까요? 전체 주제와 연관시킨다면? 평화예요. 시인이 부르짖은 것을 어떻게 응답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다 생략하고 있어요. 호전적이었던 사람들이 재가 되었는지, 아니면 이 사람의 영성이 더 경지에 올라가서 여전히 다툼, 폭력, 전쟁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영혼이 평화를 얻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을 텐데요, 여기 1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람이 평화를 부르짖은 그런 시인이다, 그런 사실입니다. 뭐, 꼭 그러냐, 말을 왜 그렇게 큰 주제와 연관 시키냐, 그러지 말고 개인적인 것을 부르짖었더니 응답된 걸로 보면 안 되냐, 오늘도 그렇게 살면 안 되냐, 그런 말도 가능합니다. 예, 그건 또 하나의 다른 문제니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절절한 삶의 자세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건 우리의 어떤 갈망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필요합니다.

 

어쨌든 그건 각자 처한 형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일관적으로 말씀 드릴 수는 없는 거예요. 다만 우리 삶에 어떤 환경, 그리고 조건 복지를 억지로 채워 나가는 것, 이런 것이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고 하는 것, 그거지요. 그리고 여기 1절이 말하는 것이 결국 이 전체하고 맥락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따로 뚝 떨어진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가 이건 전체로 볼 때 당연히 평화를 구하는 거다, 평화를 부르짖었다고 하는 겁니다. 한국 교회가 평화를 부르짖는 공동체로써 확 자리를 잡았으면 참 좋겠어요. 제가 1983년도 독일에 처음 유학 갔을 때 그 때는 동서독이 분단되어 있을 때인데요? 교회만은 일치였습니다. 동독교회하고 서독교회가요. 뒤셀도로프라고 하는 곳에서 서독이지요? 거기서 2년에 한 번씩 여는 선교대회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로마가톨릭교회하고 개신교하고 참 부러운데, 격년제로 돌아가면서 선교대회를 해요, 낱말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교회의 날”이라고 하는 뜻인데요? Kirchentag, 의역을 하면 선교대회입니다.

 

그 당시 독일과 유럽의 중요한 이슈, 이런 것들을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세미나도 열고 제 3세계 지도자도 불러다가 강연도 듣고 퍼포먼스도 하고 노래 등등.. 정말 축제로 일 주일 동안 합니다. 한 도시를 돌아가면서, 그게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돌아가면서 하는데요, 뒤셀도르프에서 열렸을 때 제가 하루 갔었거든요? 처음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동베를린에 있는 어느 여자 목사가 와서 개회예배 설교를 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와, 이건 우리로 하면 평양에 있는 어떤 여자목사가, 지금 북한의 기독교교회가 워낙 박살난 상태라서 찾아보기 힘들겠습니다마는 이제 남한에 와서 하는, 비슷하게 하는 경우인데요? 이렇습니다. 우리가 꼭 똑 같이 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래도 동서독의 통일에 물꼬를 튼 여러 흐름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동독에 있는 니꼴라우스 교회일거예요. 거기서 매일 촛불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거기에 궁중들이 많이 모이면서 그래서 점화가 되갖고 통일이 되었다고 합니다.

 

평화지향적인 공동체 모습을 확실히 갖고 있지요. 우리들에게도 그런 모습들이 좀 있어야 되겠는데요, 아직까지 거기 가려면 멀었지요? 그것 보다는 통일이 되면 신의주나 평양 어디 가서 교회 세우겠다, 이런 쪽으로 생각만 하고 있거든요? 근본적인 발상 자체가 좀 다르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2절에 나오는 단어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입니다. 이것도 전체 주제와 연관 시키면 전쟁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거짓으로 말하는 거지요.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라고 하는, 문학적인 비유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거짓말이다, 속인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사실은요, 확 드러나면야, 뭐 문제겠습니까, 안 드러납니다. 시대정신도 우리들에게 안 들어난 거고요, 뭐가 잘 모르고 흐릿한 거예요. 역사가 훨씬 지난 다음에야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데요? 그리고 이게 또 하나는 잘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 스스로도 자기도 모르는 거예요.

 

이게 거짓말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중의 하나를 말한다면 이런 쪽에 있는 사람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적절하게 거짓말 하더라도 목적만 선하면 된다고 하는 거예요, 목적일원론적인, 목적지향적인 어떤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때에 따라서는 거짓말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자식을 키우다 보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요? 그런 거야 어쩔 수 없겠습니다마는 거짓말의 일상화 이런 것들이 문제겠지요. 거짓말이 세계관이 되어 버린 거예요. 자기 삶의 토대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 건 많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거짓말을 세계관 비슷하게 가지고 있을 때는 제가 보기에는 모두가 다 불행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3절과 4절은 재미있는 표현이지요? 속이는 혀, 무엇을 더 줄꼬? 3.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결과가 뭐냐 하는 게 4절에 나옵니다.

 

4.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나무의 숯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거짓말로 저 놈들이 쳐 들어오려고 그런다, 저 놈들 무기가 강해,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안되, 우리가 군비를 더 늘려야 되, 계속 호전적인 거짓말 방식으로 그렇게 하면 결국 그것이 자기를 향해서 화살을 쏘는 것이고, 머리에 숯불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들이 호전적인 사람들에게는 잘 먹히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야기는 덕스럽게 살기 위한 하나의 충고지, 실질적으로 이 세계에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관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이게 참 숙제입니다. 성경 말씀이 아주 실질적으로 와 닿아야 되거든요? 그게 쉽지 않은 거예요. 맨 날 믿습니다, 하고요, 그대로 살겠습니다. 하더라도 그게 따로 따로 놉니다. 사실은요, 그냥 보통 이야기해서 신앙 따로 삶 따로 라고 하는 것이 이게 우리의 어떤 모습을 가리키거든요?

 

이것은 뭐, 그 사람이 나빠서 비인격적이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요, 제가 보기에는 모르는 게 문제입니다. 모르는 거, 그러니까 앎이냐 모름이냐 그러한 문제예요. 이 세계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느냐, 아니면 상투적으로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리얼리티로 다가오느냐, 아니면 하나의 아이디어, 관념 이런 것으로 들어오느냐, 그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이 세계를 딱 보면 어떤 가시적인 힘, 이런 것들이 지배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보통 그렇잖아요?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 그러한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오늘 집에서 나오는데, 하양에 현수막이 몇 개 걸려 있어요. 하양 무학고등학교, 어느 대학 몇 명, 어느 대학 몇 명 이게 딱 걸려있어요. 자세하게는 못 봤는데, 포항공대도 나오고 서울대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이런 걸로 현수막 거는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확인해 보지 못해서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쇄뇌 당하는 거예요. 그게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적당하게 거짓말도 하고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억압적으로 학생들 가리쳐서라도 그리고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을 좋은 대학 보내려고 조작을 한다면서요? 어떤 평가 이런 것들, 그래서 몇 % 안에 들게 하는, 선생님들이 그러한 방식으로라도 우리아이를, 자기네학교 아이들을 어디로 보내겠다고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나마 낫겠습니다마는 그 아이는 A급의 괜찮은 데보다도 B급의 학교로 가는 것이 미래로 볼 때 좋을 텐데, 그런데 무조건 A급으로 무조건 보내려고 합니다. 왜냐면 학교 이름을 내기 위해서 그렇거든요,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일상화 되어 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말씀들이 현실적으로 느껴지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이걸 우리가 뚫고 나가야 되겠지요.

 

5절과 6절입니다. 여기는 메섹과 게달이 나오거든요? 지명입니다. 이것을 보고, 이것을 쓴 사람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메섹과 게달이 팔레스틴에 있던 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요, 그건 정확한 해석은 아니라고 하네요. 메섹과 게달이라고 하는 표현은 주변에 있었던 호전적인 민족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하고 같이 지낸 것이 결국 화라고 하는 거지요.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 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위기가 처할 때는 보통 비둘기파, 매파 그런 얘기 있잖아요? 보통 매파 쪽으로 기웁니다. 대게 그렇습니다. 크게 대중심리이기도 한데요? 이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제가 참석하지 거의 떠나온 상태입니다만 지방의 노회나 이런데 보면요, 거기도 매파들이 힘을 쓰게 됩니다.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있었던 경험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 이번에 우리 지방에서 개척교회를 두 개 하자, 그러면 한 쪽에서 지금 개척교회 있는 것도 자립하지 못하고 힘든데 이런 걸 살리는 쪽으로 해야지, 지금 개척교회를 또 하냐, 그러면 안 된다, 믿음으로라도 해야 된다, 교회가 늘어나야 된다,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상당히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고 어떻게 하면 된다고 하는 말이지요, 이게 남북관계도 그렇습니다. 2003년에 일어난 부시의 이라크 침략전쟁도 사실은 그런 거거든요? 이게 적당한 예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미국에 너무 붙어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게 전략적으로도 지혜로운 게 아닙니다. 중국이 우리하고 지정학적으로 훨씬 가깝고 경제적으로도 우리하고 훨씬 많은 관계를 갖고 있는데 지금 정부가 너무 친미쪽으로만 가서 중국과의 관계가 지금 굉장히 껄끄럽게 되어 있거든요? 이건 전략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5.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예, 메섹과 게달의 장막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그런 말이 지금 우리 상황하고도 비슷해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여기도 제가 정확하게 성서를 적용시키는 건 아니고요, 제가 느낌으로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들이 크게 비중을 두지 말고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7절입니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어떤 형편이었을까요?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조건 평화해야 되냐, 전쟁하지 말아야 되냐, 아주 특별한 상황에 있지 않느냐,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무조건 비폭력, 평화절대주의, 이것이 과연 악을 근절할 수 있겠냐, 그런 일리가 있긴 있어요. 더 큰 악을 막기 위해서 작은 악인 전쟁을 피치 못해서 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점에서 말씀 드린다면 전쟁은 패한 쪽만 아니라 승자 쪽에도 이건 정말 어렵습니다.

 

전쟁해서 이기는 승리보다는 전쟁을 피해서, 전쟁 없이 손해를 보는 것이 훨씬 지혜롭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직접 죽고 사는 것도 물론이고요, 인간성 자체가 훼손되거든요? 우리가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요? 많이 죽여야 되잖습니까? 이게 사람이 제 정신으로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제 정신으로는 전쟁 못 합니다. 그런데 전쟁 이겨서 노획물 끌어와서 그것이 재산이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인간성 자체가 훼손되기 때문에 전쟁은 어느모로 보나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예, 소말리아 해적들, 자꾸만 말썽을 부려서 본 때를 보여 준 것은 좋은데, 아,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게 그런 면에서 정치지도자는 참 머리 빠질 겁니다. 이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제가 보기에는 그들이 원하는 보상금인가, 뭔가, 돈을 주고라도 그런 방식으로라도 인질들도 구해내고 아직도 인질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구해내고, 이런 인질이 되지 않도록 최선으로 미리 예방하는 것 이게 낫지 않나, 생각입니다.

 

하여튼 이거 뭐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각자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걸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이건 늘 생각하셔야 되요. 하나님은 우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두까지 하나님의 자손들이거든요? 우리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인데, 그걸 믿는다고 한다면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전쟁만은 막는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지금 지구의 수 많은 나라 중에서 이 대한민국 북한이 가장 어려운 상태로 빠져 있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예, 이 시편기자가 호전적인 세력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 가장 어려웠을 텐데요, 그래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 거겠지요. 예, 거짓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구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이러한 평화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 전 고대 이스라엘에 살던 한 영적인 시인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호전적인 세력 속에서 얼마나 외로웠을지 우리들이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온전히 생명을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평화의 호소가 담을 향해서 말하는 것처럼 막히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주님, 2011년, 대한민국 교회가 한 반도의 평화를 위해서 힘들지만 그리고 외롭지만 기도하고 외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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