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1편 강해-‘나의 도움은 어디서’

 

시편 121편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아멘! 예 시편 121편은 120편과 똑 같은 표제를 달고 있어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표제가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요. 표제가 내용을 담아내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얼추 들어맞는다고는 볼 수 있겠지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러니까 이건 성전 안에서 불렀다기보다도 보통 말하기를 예루살렘 성지 순례 할 때 길을 가면서 부르던 노래다,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성지를 순례 하면 얼마나 고됩니까? 긴 길을 가잖아요? 산도 넘어야 하고 들판도 있고요, 또 야생짐승들도 만날 수 있고, 그러한 길을 가면서 지루하기도 하고 그 때 부르는 노래다,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순례의 노래인거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인간의 삶을 순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생각이 있는 모든 스승들, 종교들은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 유대교도 있는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기본적으로 우리 삶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잖습니까, 순례를 한다고 말이지요. <천로역정>이라고 존 번연이 썼지요? 만화도 있고, 어린이용도 있고요, 청교도들의 신앙을 담고 있는 건데, 그 당시로써는 당연하다고 생각을 한 거죠, 장망성(將亡城), 죽어서 썩어 없어질 소돔과 고모라성과 같은 성을 탈출해갖고 길을 가면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알레고리 식으로 만든 작품인데요, 천성문까지 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한데 전체적인 흐름은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순례자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이 우리들에게 상당히 와 닿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이 121편이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쓴 거냐, 아니면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야기 설들이 있습니다. 그걸 제가 주석을 보고 조사를 해 봤는데, 중요하지 않아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지 않겠어요. 그냥 지나가도 되겠습니다.

 

이 문장 형식 한 가지만 짚고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절과 2절은 나의 도움이라는 식으로 나와요, ‘나와 여호와의 관계’로 이야기가 되는데, 3절부터는 딱 바뀌어서 ‘너와 여호와의 관계’로 되어 있어요. 특이하죠? 왜 이렇게 되어 있을까, 서로 주고받는 화답식의 찬송일 수도 있고요, 등등 예,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특징이 있다는 것을 참고적으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짧은 구절이기 때문에 한 절 한 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입니다. 1.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우리가 방금 부른 찬송에 나와 있는 겁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그림과 같은 이야기지요? 순례객들이 길을 가면서 산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넘어야 될 산도 있고 말이지요, 거기서 어려움을 당하는 거 아니겠어요? 때로 여러 날씩, 때로는 한 달씩도 걸어야 될 텐데, 이 팔레스틴 땅이 넓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오래 걸리는 건 아니겠습니다마는 그래도 금방 도달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하여튼 순례를 상당기간 가야 됩니다.

 

순례라고 하는 게 인간의 삶을 많이 나타내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TV나 이런 데서 가끔 보면 티베트의 사람들은 종교적이잖습니까? 티베트의 수도가 ‘랏사’거든요, 그들이 ‘랏사’ 한 번 방문 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으로 생각합니다. 랏사 방문을 하는 거예요. 성지순례죠, 예, 우리도 랏사 한 번 갔으면 좋겠어요. 비행기가 거기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작년엔가 언젠가 보니까 중국에서 거기에 기차를 뚫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가장 높은 지역에서 달리는 기차가 뚫렸다고 하는데요? 티베트 사람들이 그걸 무조건 좋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통이 편리해서 좋겠지만, 그 만큼 중국의 한 족이라고 그래요? 그 문명이 밀고 들어오면 티베트의 여러 가지 특징들이 혼탁해 지니까 이런 저런 문제가 많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정치적으로 연관된 티베트의 불교, 달라이 라마 비폭력, 비무장으로 독립운동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힘을 얻지 못하고 있고요, 계속 폭력이 가끔 벌어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상당히 종교적인 사람들인데 TV에서 언제 한 번 보니까, 여러분들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고향에서 랏사까지 삼보일배로 가는 거예요. 세 걸음 걷고 완전히 엎드러져서 가는데 저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됩니다마는 사람이 그런 거예요. 종교적인 열정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그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의 아주 그 특심한 열정이 거기 있습니다. 시편이 2천 4,5,6백년 전, 그 어간에 기록 된 건데 그 당시에 길을 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갈 것인가, 두려움에 많이 빠졌겠지요. 도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했습니다.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건 설교 제목을 삶아도 되겠네요. 얼마든지요,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사람의 영성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도움을 쉽게 얻을 수 있다면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런 영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우리가 옛날 사람들보다 좀 상황이 불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편리하니까요, 금방 해결하지 않습니까, 아픈 것도 약 하나 먹으며 해결하고요, 사실은 지금 죽음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요, 죽음과 담을 쌓고 살고 말입니다. 옛날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몇 가족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늙는다고 하는 것과 죽는다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문제로 느끼고 살았거든요, 지금은 아프면 병원가고 죽은 사람도 병원 가서 다 처리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죽음을 잘 이렇게 가깝게 느끼지 못하고 삽니다. 이게 행복한 것 같지 않지만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별로 도움이 필요 없는 이러한 물질만능의 이런 너무 지나치게 풍요로운 이러한 세계 말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그러한 기다림을 가진 사람, 어떤 영성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러한 삶을 불편하게 생각할 거예요.

 

아주 안정 되어야지, 사는 모습도 그렇고 노후대책도 그렇고 모든 게 안정되어야 행복한 거지, 늘 이렇게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좀 불편하다, 불행하다 생각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우리들의 인지상정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면 편리하게 지내려고 하는 거니까요, 그걸 부정할 수는 없는데, 그러나 자기만족에 떨어진 삶이 오히려 더 불행할 수 있습니다. 이게 굉장히 지루한 거거든요? 삶이요? 아무리 생활조건이나 복지 이런 것을 향상시켜도 그 자체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 그러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라고 이런 영적인 민감성, 예민성 이런 것들이 오늘 우리가 시편기자들에게서 배울 게 아니냐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2500여 년 전 그런 사람들하고 똑 같이 불편한 삶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 영적인 차원에서는 너무 자족하는 데 빠지지 말아야겠다, 그 얘기지요.

 

2절은요, 대답을 하는 겁니다. 2.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했습니다. 예,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죠, 이런 게 사실은 그냥 쓱 지나 갈 수 있는 구절입니다만, 자기 어머니 가족 누구 찾지 않고요, 창조자 하나님을 찾는 거거든요? 참된 도움은 그에게서 밖에 올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 바로 그 분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리고 우리가 어려우면 사람을 찾잖아요? 아내나, 남편이나 등등.. 당연합니다. 그래야 힘든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요. 교인들끼리도 서로 그런 친교가 있어야 되고요, 교회공동체라고 하는 게 늘 신앙본질로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차원에서도 서로 돕는 일들도 필요하지요, 하여튼 그건 전제되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사람은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조금 돈으로 도와준다거나 따스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사람에게는 기대하지 않고 사는 게 나을 겁니다.

 

결국은, 제가 다른 데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대신 숨을 쉬어 줄 수는 없거든요, 스스로가 숨을 쉬어야 되기 때문에 의사도 우리 숨을 다 쉬게 해 주지 못합니다. 조금 도와주는 거지요. 호흡이 막혔을 때 의학적으로 조금 도와 줄 뿐이지 결국은 자기가 숨을 쉬어야 된다는 거거든요? 삶도 똑 같습니다. 같이 모여서 돕고 어려운 가운데서 사는 건 좋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도움은 하나님 밖에 없다, 이건 설교조로 말씀 드리는 게 아니라 우리 실존, 정확한 실존이라고 하는 점에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 시편 121편을 기록한 영성가의 고백이고 우리도 그러한 고백에 동의합니다. 3절과 4절, 이 시편은 어려운 게 아니기 때문에 많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긴 합니다. 도움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얘기 한 다음에요, 아까 처음에 말씀 드린 대로 이 문장 구조가 ‘나에게서 너’로 바뀌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3.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않는다, 졸지 않는다는 표현이 재미있어요. 4절에서도 졸지 않고 주무시지 않는다. 똑 같은 말이지요. 실족한다고 하는 것은 발을 헛디딘다고 하는 거지요? 순례객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가 실족일겁니다. 아주 위험한 지역에 다닐 때는 물론이고요, 제가 아까 예로 말씀 드린 티베트 이런 사람들이라든지, 아니면 에베레스트, 그런 산악지대에 사는 사람들, 산악길이 아주 좁다고 합니다. 그런 데를 양들을 몰고 다니고 그러거든요? 발을 헛디디게 되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실족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야 이런 평지에 다니니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마는 그들에게는 대단한 문제지요. 이게 실족하는 것은 집중하지 않을 때 그렇거든요? 평지를 가로질러 가면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순례객들에게 많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냥 똑 같은 거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똑 같이 걷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걷기도 하고요, 똑 같이 그렇게 걷다 보면 걷다가 졸수도 있습니다. 예, 그게 가능해요. 저도 30년 쯤 전엔가 1980년 봄에 군목을 가기 전에 광주에서 훈련을 받았거든요? 보병학교라고 있어요. 거기에 훈련 3개월 받았는데, 유격훈련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마지막 일 주일 동안 굉장히 위험한 훈련을 받는데요, 처음에 시작이 행군 이예요. 아주 일찍, 밤늦게던가요? 밤새도록 걸었습니다. 밤 10시쯤 떠난 거 같아요. 밤새도록 걸어서 어느 지역인지는 제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유격장까지 40 몇 킬로 걷게 되는데, 너무 졸려서 앞에 사람만 보고 걸어가는데 거의 무의식으로 걷게 되었습니다. 순례객들도 아마 그러한 경험들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졸게 되는 거지요. 졸게 되고 집중하지 못하고 실족하게 되고, 그러지요.

 

그래서 4절에 그런 표현을 한 거 같아요. 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졸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졸지 아니하신다, 주무시지 않는다, 문법적으로 의인화라고 하나요?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하면서 졸지 않는다, 주무시지 않는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럼 말씀을 좀, 다른 것하고 다 포함되는 건데요? 이 시편기자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뭐 해 주십시오. 뭐 해 주십시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이렇게 고백만 하잖아요? 상당히 차원이 높은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 내가 순례하는데 발이 아프니까 발이 안 아프게 해 달라든지, 아니면 그러한 쪽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은 졸지 않고, 주무시지 않고, 하는 이런 신앙고백을 하는 차원으로 들어갔어요. 바람직하지 않냐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 잘 못 된 것이 아닌데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전이해가 참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여기 있었던 거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주 실제로 신뢰하게 된다면 많이 간구하게 되지는 않게 됩니다. 중보기도는 많이 드릴 수 있어요. 이웃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등등.. 그런데 자기를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게 될 겁니다. 이미 하나님과의 신뢰관계에 들어갔기 때문에 말이지요. 이건 아마 부모하고 자식관계하고도 조금 연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는 철부지이기 때문에 자꾸 뭘 해달고 자꾸 이야기 하지만 철이 들면, 정말 부모하고 신뢰관계가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다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지요? 오늘 여기 121편 시편 기자는 그러한 신뢰관계 속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3절, 4절, 그 패라그래프입니다. 중간쯤에요, 여호와께서 어떻게 실족하지 않게 하는 말인가? 그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질문하셔야 되요. 뻔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호와를 따르는 사람들도 실수하고 사업에 실패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편기자는 실족하지 않게 여호와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 하는 걸까, 그런 질문이지요. 예, 그건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큰 신뢰를 가리키는 겁니다. 이 사람도 순례하면서 왜 자잘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잠자리를 구하기 힘들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는 거지요. 그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전혀 만나지 않는 것이 행복한 삶도 아닌 거고요, 그러한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인도하신다고 하는 그러한 신뢰지요. 예, 그런 신뢰가 우리들에게 당연히 있습니다. 그게 좀 흔들릴 때도 있어서 문제입니다만 기본적으로는 그게 있는 거지요.

 

이러한 큰 신뢰요, 작은 삶의 순간들이 흐트러진다고 하더라도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하는 그런 신뢰, 이건 우리들에 없어서는 안 될 신앙이고요, 계속 우리가 풍성하게 만들어야 될 그런 신앙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계속 우리가 노력은 필요합니다. 신앙은 억지로 해서 되는 건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훈련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이런 신앙을 유지하는 점에서는 긴장감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예술가들도 그렇지 않아요? 아주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은 하루만 노래연습을 하지 않더라도 그 차이가 있답니다. 그 만큼 정밀한 거거든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강의안에 제가 그 패라그래프의 끝마디에 하나의 질문을 이렇게 달았는데, 제가 답도 달지 않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우리가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안전하게 되는 것은 분명한데 여호와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완전히 팽개치신 것인가,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이건 제가 꼭 답을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여러분들이 꼭 답을 찾으라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도 아니고요, 여러분들이 한 번 쯤 생각해 보시면 어떻까 싶어서 이렇게 적어 놨습니다. 이따가 잠깐 쉬었다가 토의 하는 시간에 얘기 해봐도 좋고요. 다음 5절에서 7절입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신다는 말은 지키신다고 하는 말하고 똑 같지요? 그 내용이 5절에서 7절에 반복 되서 나오고 있습니다. 비슷한 내용입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오른쪽에 있다고 했잖아요? 5.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우편입니다. 우편은 늘 중요한 자리입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예수님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그런 표현이 있고요, 시편 다른 편에서도 오른쪽이라고 하는 표현들이 자주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오른편에서 그러니까 나를 지키시는 분의 위치예요. 그 분의 우리를 지키신다. 그늘이 된다고 그랬잖아요? 그늘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빛을 가려주는 거니까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것을 상투적으로 읽지는 마시고요, 아주 실질적으로 느끼셔야 됩니다. 그리고 실제 삶에서 이런 것들이 자리를 잡아야 되요. 8절에는 낮의 해와 밤의 달이 나옵니다. 낮의 해가 뜨는 게 좋은데, 해가 상하지 않게 한다든지 밤의 달도, 밤에 달이 있어야 좀 보일 텐데, 해친다, 그런 얘기가 나오냐,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 해와 달 이런 것들이 사람의 몸을 해치는,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힘으로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밤의 달 때문에, 어떤 주술적인 차원이겠지요. 사람들이 그런 쪽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는 해는 그 당시는 거기가 광야기 때문에 순례객들에게 이 해는 정말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해와 달, 그러니까 낮과 밤, 24시간 어떠한 상태에서도 그리고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네가 상함을 받지 않는다, 그런 얘기죠? 앞에 있는 이야기들이 쭉 이어지는 말입니다.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7.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두 가지로 나오네요. 환난을 면케 하고 영혼을 지킨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말들도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마셔야 되요. 환난을 면케 해 주신다고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연히 그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와의 신뢰관계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그런 이야기예요. 하나님과의 그런 신뢰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조건들이 전혀 새로운 빛을 발하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환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 힘든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그게 새롭게 우리들에게 다가올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말씀 드리다 보면 그럼 믿기만 하면 모든 어려운 일도 가벼워지고 문제가 하나도 없고, 쉽게 살 수 있느냐, 늘 그렇게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느냐,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거는 어떻게 그렇게 되겠어요?

 

우리가 몸을 갖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사는데 어떻게 그 이러한 고통이나 이런 것도 없는 것처럼, 천사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걸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들건 힘든 거예요. 아프면 아프고, 또 눈물 날 건 눈물 나고요, 그건 억지로 안할 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 거지요. 그게 우리의 신앙 안에서 녹아지고요, 그게 하나님과의 관계없는 사람들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 되는 겁니다. 그런 정도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마지막 8절입니다. 8.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결론적으로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지키시는데 그것이 영원까지라고 그랬습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굉장히 시적인 표현 이예요. 그러니까 여호와의 도움이 얼마나 근원적인지, 얼마나 존재론적인지를 뜻하는 겁니다.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억지로 끌어내리거나 우리가 어떻게 꾸민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차원, 어떤 성격들을 가리키거든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적당하게 무늬를 만들어서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근원적인 아주 창조적인, 창조의 완성에 닿을 만한 그런 차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영원까지 이른다고 말하잖아요? 놀라운 고백들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조금 확장시켜서 제가 이렇게 좀 설명 해 봤습니다. 여호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이게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시겠지요? 여호와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간단한 건 아니지만, 물론 우리가 그걸 전제해요.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고요, 여호와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마치 음악가가 음악과의 관계가 깊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관계가 이루어지면 우리는 실질적으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거니까요. 하나님의 속성자체가 영원이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관의 관계에 들어가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영생을 얻는다, 영원하다고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계산하는 시간방식, 이런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24시간으로 따져서 앞으로 천 년 산다, 일 억년 산다,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본질 안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지요. 그게 우리들에게 다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종말이 되어야, 종말은 새로운 시작인데요? 전적으로 새로운 게 시작 될 텐데 그 때가 되어야 완전히 드러납니다마는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배우는 이러한 용어들이요, 하나님의 도우심, 영생이다, 그리고 부활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러한 것들이 다 통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구원 생명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거든요?

 

오늘 제가 여기 본문에 따라서 제가 그렇게 연결 한 겁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영원까지 이르기 때문에 우리를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를 영원으로 이르게 하시는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강의안 끝 부분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지금과 영원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 신비한 거지요. 이게 하나님의 존재신비인 거예요. 지금과 종말, 마지막 그 궁극적인 생명의 때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게 눈에 보이냐, 그게 눈에 보이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걸 우리가 잘 깨닫고 그러한 삶을 실제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예, 이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21편, 아주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지금부터 영원하다고 하는 놀라운 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여전히 때로 배고프고, 배부르고 아프고 즐겁고 이러한 삶을 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영원함을, 그리고 참됨을, 궁극적임을 잊지 않고 살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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