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2편 강해-예루살렘의 샬롬

 

시편 122편,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아멘! 9절 번역이 좀 매끄럽지 못하지요? 이렇게 되어 있네요. 9.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위하여’라고 하는 전치사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말로는 어색하거든요? 어쨌든 대체적인 뜻은 우리가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그게 궁극적인 것인데, 그게 너를 위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복을 구해겠다고 하는 겁니다. 어쨌든 번역으로는 좀 매끄럽지는 못한데, 다른 번역으로는 다르게 되어 있을 거예요. 어쨌든 그러한 내용은 우리들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본문은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날 때 부르던 노래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보았던 것은 성지 순례 오는 중에 부르던 찬송이라고 한다면 성지순례, 성지순례가 요즘에야 뭐, 차를 타고 쭉 가면 되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잖아요? 일일이 다 걸어서 가지요. 지금도 특별한 종교적 행위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땅에 두 발을 딛고 걷는 것이 불편한 그런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훨씬 더 인간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이거든요? 우리가 너무 편리한데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편리한 것 자체가 나쁜 건 아닌데, 사람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산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거지요. 이게 그렇게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그 부분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데 예, 오늘 현대문명이라고 하는 게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데 방해 거리가 되는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현대문명이 양면적인 거예요. 우리 삶에 편리하게 하고 또 우리의 여러 가지 억눌렀던 상태를 해방시키고 특별히 장애인들에게는 현대문명이 큰 도움이 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장애인들이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거든요, 그런 점에서도 현대문명이 좋은 점이 있지만 인간의 본질, 이런 데서는 우리를 왜곡 시키는 일들이 없잖아 있습니다. 성지순례는 이런 점에서 가장 인간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태도예요.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본 것은 성지 순례하는 중에 부른 그런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영적인 상태를 여러분들이 좀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시편을 보시지요. 그런 것을 위해서 우리들에게 어떤 시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문학적인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볼 때도 상상력이 필요한 거구요. 비현적인 상상력이 아니라 사실적인 상상력이 성서를 읽을 때도 참 중요합니다. 이 122편은 성지순례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갈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합니다. 이 노래에 역사적 배경이 기원 전 4세기나 5세기입니다. 이렇게 쭉 걸쳐 있어요. 우리가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구약성경에 시편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그 각각의 성경의 배경이 6세기서부터 그 후대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라고 하는 그때 일어났던 587년부터 그 뒤로 오는 거예요. 성문서부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런 것들을 거룩한 문학이라고 하거든요. 聖文書들은 특히 후대로 옵니다.

 

고난 받고 힘 들 때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나타난 거룩한 문학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도 마찬가지고요, 욥기의 무죄한 자의 고난이라 하는 것을 담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왜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을 받아야 되느냐, 그런 문제들이 욥기라고 하는 문학으로 형성된 거지요. 이 시편도 그런 것을 배경으로 두고 여러분들이 읽으셔야 됩니다. 지금부터 2400,500여 년 전인데요? 그 때로 돌아가서 또 다시 한 번 문학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부터 2500년 전이면 우리나라가 언제쯤 될까요? 고조선인가요? 그 보다 더 됬나요? 하여튼 까마득한 옛날인데요, 아마 삼국시대보다 전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불안했을지 이건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당연한 거지요. 이 세계가 다 그들에게는 흑암과 같았습니다. 어둠이예요. 다 모르는 거였습니다.

 

며칠 전에도 뉴질랜드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야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몇 백 명이 죽었는지도 모른다는데요? 지금 첨단 지진 예측 이런 게 개발되었어도 언제 어느 때 지진이 일어나는 지 정확하게 예측하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옛날에는 어떻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을지, 화산폭발, 지금은 어느 정도 우리가 지정학적으로 알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거든요. 전염병도 돌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다 신의 노여움으로 일어 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가항력인 거예요. 그들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을 경험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도저히 상상 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 두려움, 출구 없는 방에 갇혀 있는 어떤 느낌인 거지요. 일식도 그렇고 자연재해 이런 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요, 편편하다고 생각했지요? 어떤 신화에 보면 지구를, 사람들이 사는 이 땅을 거북의 등으로 묘사한 데도 있습니다.

 

나름대로 다 자기들의 설명이 있어요. 여러 가지 신화로 이 지구, 하늘 이런 것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이 그만큼 그것들에 대해서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하늘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비가 왜 오는지 그들은 몰랐지요. 그들은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거의 깜깜한 세계 속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오늘 현대인들도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리학적인 사실, 지질학적인 사실을 우리가 좀 알고 있지만, 근원적인 데에서 모른다고 하는 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말들이 그냥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물리학자들 스스로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거고요, 우주가 얼마나 클까요? 지금 우리가 전자망원경 이런 걸로 어떤 우주의 세계를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이 은하계를 벗어나기가 거의 힘듭니다. 태양이 속해 있는 게 은하계거든요? 은하계 한 귀퉁이에 태양이 있고요. 태양에 돌아가면서 있는 같이 있는 식구들이 태양계에요.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에 불과한 거구요. 태양이 별입니다. 그건 무수한 은하계 안에 있는 작은, 아주 작은 건 아니고 중간쯤 되는 별에 불과하고요, 그런 것이 수 없이 모여서 안드로메다인가, 뭔가, 그런 거를 형성하고 또 그런 것들이 수 없이 펼쳐지고 이게 얼마나 클지, 무한한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지금 그런 것들을 지구의 큰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오는 빛을 받아 드리며 학자들이 연구하거든요? 굉장히 정확하긴 합니다마는 그거는 커다란 코끼리의 털 하나 요걸 붙들고 있는 것보다도 못하면 못했지 크지가 않은 겁니다. 근원적인 점에서는 2500년 전 사람이나 지금 우리나 모르는 건 마찬가지다, 그 멀리 우주세계에 나갈 없이 인간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물질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가 이게 분간이 잘 되지 않는 거예요. 이 모든 생명과 세계자체가 신비로운 거지요. 사람의 인식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안한 거죠, 지금도 사실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간혹 어떤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될 경우가 있어요. 말이 안 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그러한 교회에도 많은 지식인, 전문가들이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는데, 그게 가능합니다. 사람들도 불안하거든요. 의사, 변호사 대학교 교수 등등.. 사회엘리트들도 자기 운명 하나가 불안 한 거예요. 그게 열광적으로 어떤 데 빠질 수 밖 에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 것들을 종교적이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확 사로잡는 거지요. 사이비 이단들이 빠지는 경우도 다 그렇게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살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한 불안을 예루살렘 순례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사는 모습도 그렇고 세계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예루살렘에 들어와 보면 대단하거든요,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지요? 예루살렘 성전이 있지요? 대단한 거거든요? 그리고 다윗 궁이 있지요. 그리고 임금들마다 자기 궁을 만들어 놨지요.

 

그 예루살렘 도시에 들어오면 뭔가 하나님이 거하는 것처럼 느낄 수 밖 에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그 당시로써는 그러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심리한 심리가 작용 하는 것 같아요. 자기는 왜소하니까, 큰 건축물, 이걸 세워서 만족을 느끼는 거지요. 콜로세움, 원형경기장, 고대인들도 이런 걸 많이 세우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만이 아니라요, 그게 편리하고 꼭 필요해서 만이 아니라 그게 일종의 종교행위입니다. 그런 걸 건축함으로 영생에 대한 갈구들이 건축물로 나타나게 되는 거죠, 그런 건물들이 유럽에 가면 많이 있습니다. 구경할 건물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인간 삶에서 그렇게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백조의 성’이라고 하는 달력에도 많이 나오는 성이 있습니다. ‘백조의 성’이라고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독일하고 스위스의 경계인 휘센이라고 하는 곳에 있거든요? 저희가 2000년도 베를린에 있을 때 거의 마지막 단계에 가 본 곳인데요?

 

그걸 어느 영주가 지은 겁니다. 거의 반쯤 미쳤었구요. 그 지역의 재물들을 모두 갖다가 거기다 쏟아 붓고서 지은 거지요. 후손들은 그걸 보고 즐겁기도 하고 그게 관광지가 되어서 돈 벌이도 하긴 합니다만 그걸 지을 때 거기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의 피와 땀이 들어갔는지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피라미드도 마찬가지고요,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거기에는 불행한 역사가 거기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구경하는 것은 좋지만 부러워할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에 비해서 인디안들 이든지, 아프리카 사람들은 건축물을 짓지 않았습니다. 뭐, 거기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인지, 능력이 없다? 피라미드는 북아프리카에 있지요. 그건 지중해 문명입니다. 아프리카하고는 좀 다른 거예요. 그들의 문화는, 그들은 문화라고도 볼 수 없지요. 자연 속에서 살았으니까, 오히려 그들의 삶이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더 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건축물과 인간의 종교성, 이런 것을 비교해서 연구를 하면 재미있겠지요? 만리장성,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요,

 

하여튼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루살렘에서 그런 어떤 만족감, 일종의 불안을 극복하려는 보상심리가 거기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 게 아닙니다. 이건 성경자체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이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이 아니었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조가 원래 아브라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사람은 가나안 사람이 아니거든요? 갈대아 우르, 바벨론 사람입니다. 바벨론 사람, 바벨로니아요, 그 사람이 가나안으로 이주해 온 거예요. 이스라엘 신앙이 순수하게 이스라엘 신앙으로만 있는 건 아닙니다. 바벨론문명의 영향을 받고요, 그게 뭐, 성서가 다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영향을 받았다면 어딜까요? 이집트지요. 이집트에서 300년 정도 살았으니까, 그건 성서가 증언하는 대로요, 그 미디안에서 40년 걸쳤고, 미디안에도 유목민들의 어떤 종교성들이 있거든요?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이었으니까 당연히 그 영향을 받은 거고 제가 어느 글에도 썼습니다마는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호렙산이 원래는 미디안 종교의 성지입니다. 그래서 장인의 이야기를 듣고 미디안 종교의 성지인 호렙산 근처에 가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종합적으로, 이스라엘 종교가 혼합주의라고 말씀 드리는 건 아니예요. 여기 영향을 받은 것하고 혼합적인 거하고는 다른 겁니다. 고유한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갖고 있되 외톨이 식으로 자기만 잘난 식으로 전혀 주변하고는 대화하지 않는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들을 같이 받아 드리면서 하나님의 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농축 되었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이게 그리스도교로 넘어 오면서 그리고 또 주변에 헬라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쭉 내려 왔습니다. 이 세상이 완전히 순수한 것, 순수하다는 것보다도 처음부터 변하지 않는 그 원초적인 것은 없습니다.

 

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남이 살고 있는 것을 빼앗은 거지요. 거기 살고 있던 민족을 가리켜 여부스족이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 분쟁시대가 사사시대거든요? 머릿속으로 그려지시지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족장시대가 시작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그런 족장시대가 몇 백 년 되고 그 다음에 이집트로 가서 300년 정도 이민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40년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몇 백 년 동안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됩니다. 그 때를 가리켜서 부족사회라고 보면 됩니다. 아브라함 시대 이후로는 씨족사회고요, 일반 역사로 분류하면 그렇습니다.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넘어오고 그 다음엔 왕조시대가 되잖아요? 이스라엘도 그러한 흐름을 통해서 계속 발전해 왔습니다. 그건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는 말입니다. 이 사사시대에 부족사회지요? 그 때를 걸치면서 그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과 영토분쟁을 계속 한 거예요.

 

다른 민족들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데, 이스라엘이 정복한 거지요. 예루살렘에 있었던 여부스족은 마지막까지 몰아내지 못했습니다. 원래 거기가 천연요새라고 해요. 결국 거기는 이스라엘이고 용장이고 지략가인 다윗에 의해서 함락되었습니다. 첫 왕은 사울인데 사울도 하지 못했고요, 결국은 다윗이 함락시키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몰아냈어요. 다 몰아내진 못했겠지요. 그러니까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이라고 하지만 지금도 여러 민족이 모여 살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옛날도 마찬가지였어요. 순수 하게 이스라엘 사람들만 살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자기네 땅으로 하고 다윗왕조가 거기서 정식으로 시작한 거죠, 이것은 마치 제가 강의안에 쓴 겁니다만 영국의 청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 사람들이 북 아메리카로 가서 거기서 인디안들을 몰아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하고 비슷합니다. 북아메리카, 지금의 미국, 주인은 인디안들이잖아요? 그런데 많이 죽었지요?

 

이제는 조금 남아 있는데 하여튼 그게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도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다윗왕의 눈에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하면 왕조가 번성하리라는 생각을 했겠지요. 어떤 나라든지 새로 왕조가 시작하면 천도라고 하나요? 수도를 옮기잖습니까? 새로 만드는 거요, 고려는 평양에 했고, 이씨조선은 서울에 했고, 맞나요? 개성은 어느 나라지요? 아, 개성이 고려군요. 평양은 고구려인가요?(아니예요? 아, 그럼 정리를 한 번 해 봐야겠네요.)그런 것처럼 다윗왕조도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하고 시작했습니다. 쭉 지내오지요. 그러다가 손자 대에 이르러서 나라가 갈라지게 되요. 솔로몬까지는 겨우 버텼는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좀 있었고요, 원인은 솔모몬에게 있었고요, 남북으로 갈라져서 남쪽 다윗왕조는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요,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장군에 의해서 시작한 북 이스라엘은 세겜으로 수도로 하고요,

 

두 군데 정도가 중요한 성지였었는데, 그렇게 해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그래도 정통성은 남쪽 작은 나라예요. 나머지 북이스라엘은 훨씬 컸습니다. 예,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편이나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을 때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서 다윗 왕조의 터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걸 종교적 낭만으로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어떤 정략적인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고 하는 것, 폭력적인 부분이 있는 거지요.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딱 끊어서 얘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마는 어떤 때 성서기자들이 그렇게 이해를 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 몰아내고 자기들의 수도를 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폭력적인 역사가 있다, 어쨌든 성서의 배경이 된 이스라엘 민족들도 어쩔 수 없이 결국 고대인들과 비슷하게,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서로 힘겨루기로써 싸워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되겠습니다.

 

이 122편을 우리가 읽는 이유는 유대인들이 성지순례 장소였던 예루살렘 찬양숭배를 따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그 지리적인 장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을 그렇게 찬양하고 굉장이 거기에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이 있을 것처럼, 하나님이 거기에 정주하고 있을 것처럼 노래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편 122편을 읽는 이유는 그런 고대인들의 어쩔 수 없는 생존 경쟁 가운데서 빼앗고, 빼앗기고 하는 가운데서 살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추구했다고 하는 사실,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 거지요. 제가 강의안에 그렇게 비유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고대인들인 대개 천동설을 믿고 있었듯이 나름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민족주의 세계관에 머물러 있을 수 밖 에 없었습니다.

 

그걸 늘 전제해야 되요. 이스라엘 민족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다 그랬으니까요. 아까 제가 예를 든 아프리카라든지, 아프리카보다도 북아메리카인 인디안 쪽이 더 바람직한데 그건 뭐, 민족주의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연주의 세계관에 있었어요. 아프리카인들은 종족들이 굉장히 배타적으로 싸우기도 한 것 같은데, 인디안 들은, 모르겠습니다. 제가 거기에 대한 공부가 많이 있지 않아서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그 분들의, 인디안 들의 문화생활, 인디안 들의 정신세계를 기록한 책들을 간접적으로 보면 그들은 인디안 들끼리의 싸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들하고도 거의 같은 차원에서 살았어요. 그러나 유럽에는 특히나 종족끼리 싸움, 민족끼리 싸움, 피비린내 나는 싸움, 여리고를 두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일 수 밖 에 없었던 세계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거기 안에 살았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중요한 것은 샬롬을 하나님의 통치로 믿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구약성서를 읽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를 좀 구분해야 합니다. 구약성서에는 이 두 가지가 결탁되어 있어요. 고대 이스라엘의 배탁적인 민족주의 세계관이 있어요. 분명합니다. 그런 것들을 그대로 받아 드려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계를 그렇게 적대적으로 봐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면 이건 성서의 비본질적인 것을 신앙의 본질로 삼는 어리석은 거지요. 그런 게 하나 있고요,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하나님 신앙에 있습니다. 이걸 구분해야지요.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일종의 그릇과 같은 거예요. 형식이지요. 형식은 잘 못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 그릇 안에 담긴 음식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음식을 바로 식별하고 그걸 끌어 낼 수 있어야 되는데요? 이게 막 결탁되어 있어갖고 잘 안됩니다. 그냥은 잘 안 보이는 거예요. 십일조만 보더라도 그건 그들의 형식이거든요? 그릇이예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물질,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왜 필요했는가, 그리고 구제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에 종속된 여러 제사장들의 먹고 살아야 될 호구지책의 문제, 이런 것들을 위해서 유대인들의 사회에 형성된 하나의 형식이거든요? 예, 먹을거리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돼지고기 먹지 말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형식들입니다. 그 당시에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선택한 최선의 방식인거죠, 그런 걸 갖다가 오늘 그대로 주입시키면 참, 옛날 방식으로 먹고 살라는 말하고 똑 같은 거거든요. 이건 기초적인 건데 이런 것 마저 우리들은 구분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형식을 다 파괴해도 된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좋은 형식은 여전히 다 갖고 있어야 되겠지요. 오늘 우리는 이 샬롬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하는 것이 핵심 이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면서 평화를 노래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에 평화가 깃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샬롬을 그들로부터 배우는 거예요. 무엇이 평화인가, 오늘 세상은 성서시대의 평화보다 더 많이 담보하고 있는가, 갈구하고 있는가, 평화 지향적인가, 아닌가 하는 그런 문제 말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의 교회는 어떻게 샬롬 공동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가 말이지요. 특별히 남한 교회는 특별하게 이런 문제를 신학화 해야 합니다. 샬롬, 에이레네라고 하는 거예요. 샬롬은 히브리어이고 에이레네는 헬라어입니다. 이게 성서의 굉장히 중요한 하나님의 통치의 속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북이 특별히 이렇게 대립되고 현 정권이 들어서고 남북한이 더 티격대격 하고 있잖습니까, 불안한 이런 남북 상태에서 이 교회가 어떻게 평화공동체로써 어떤 빛을 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말이지요.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평화의 출발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찾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풀어야 될 대목은 이런 거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평화의 근거라고 하는 사실을 어떻게 해명해 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자칫하면 교리로 떨어지게 되거든요? 교리도 맞습니다. 이건 궁극적인 면에서 아까 예로 들은 대로 교리는 형식인 거예요.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 그릇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안에 든 본질들을 해석해 내야만 이 그릇들이 옳다고 하는 게 증명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도 하나의 그릇이라고 그랬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요. 예루살렘이 얼마나 평화지향적인 도시가 되었냐 하는 것을 그들이 증명할 수 있으면 그 말이 옳은 건데, 실제로는 굉장히 적대적으로 살면서 말만 예루살렘에 평화가 있으라, 그렇게 말하면 우스운 거 아니겠습니까? 예, 이것을 좀 교리적으로 설명해 볼께요.

 

여러분들이 아시는대로입니다. 그리스도교 성서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평화가 궁극적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예요. 하나님과의 불화가 문제가 되는 거지요. 그게 죄가 원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궁극적인 평화라는 걸 전제하는데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불화가 일어나 버렸어요. 그 원인은 죄입니다. 이것은 불순종이고 죄고 자기연민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라고 하는 전승들이 담고 있는 그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이 죄로 인해서 이 원인은 하나님과의 불화라고 했잖아요?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늘 이제 상투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되요. 그러면 이게 내용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다, 뻔한 이야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불화가 죄다, 늘 그런 얘기를 듣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생명이라고 하는 말로 바꿔 보세요.

 

생명과의 불화가 죄, 그것은 자기연민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불화다, 이것은 생명과의 불화다, 생명과 끊어지는 거지요. 끊어지면 죽는 거지요. 이 죽음을 우리는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물질을 아무리 소유해도 도덕적인 행위가 아무리 좋아도 심리치료를 아무리 잘 해도 그래서 인격적으로 굉장히 원만한 사람이 된다 해도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차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가 그 대답이지요. 예수그리스도는 인류에게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신 그러한 분이십니다. 왜 그러냐 하는 건 제가 많이 설명해야 되는데 생략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걸 전제하고 그리고 그것은 아는 걸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문제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받고 참된 생명의 길이 열렸다, 아주 초보적인 교리, 가르침입니다. 이런 것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전제한 이야기예요.

 

많은 것들이 검증되고 그 지나온 다음에, 해석된 다음에 나온 결론입니다. 왜 의로운 자가 고난을 당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전능과 침묵 이런 것들이 다 검증 되서 나온 것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받고 참된 생명의 길이 열렸다, 우리는 그 신앙 가운데서 삽니다. 그것이 오늘 이 세계 평화의 왜 핵심적인 열쇠인가, 핵심인가를 우리가 더 생각해야 되죠, 그것이 왜 오늘 현대인들에게 진리인지를 바르게 해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 오늘 여기까지인데요? 시편 122편이었습니다. 제목은 “예루살렘의 살롬”입니다. 예루살렘은 형식이고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살롬입니다. 하나님의 살롬을 추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시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들이 불안한 방식으로, 그리고 불안전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찾았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들 오늘 아주 오래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순례를 하고 돌아가면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역사, 시행착오가 담긴 그러한 노래들입니다. 거기서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평화를 향해서 끊임없이 영혼을 열고 있었던 이 시편기자의 고뇌, 외침을 저희들이 듣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의 근본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우리가 참여한, 소속된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평화공동체로 자리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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