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3편 강해-하늘에 계시는 주

 

오늘은 시편 123편입니다. 짧은 구절 이예요. 이것도 주변에 쭉 같이 있는 시편하고 비슷하게 표제가 그렇게 되어 있지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고대 순례객들을 우리가 한 번 기억하면서, 회상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보십시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아멘!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아멘! 123편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성전은 예루살렘 성지를 가리키기도 하고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죠? 순례객들의 찬송입니다. 누가 어느 시점에 지었다기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 역사 속에서 쭉 전해져 내려오는 시죠, 성지순례자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아님 지지난주에 조금 설명 드렸나요? 긴 거리를 순례하는 거예요.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죠, 굳이 성지 순례 할 것 있냐,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자리인데, 맞는 이야기죠, 굉장히 우리는 합리적으로 생각합니다. 시간도 버리고, 또 거기에 나가는 돈이 얼마나 많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자기 돈 벌이도 할 수 없고, 그렇게 많이 소비하면서까지 성지 순례를 할 필요가 있냐,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아주 실용적으로 생각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생각이 틀린 건 아니고요.

 

무조건 성지순례가 옳은 것도 아니고요, 사리은 요즘의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은 옛날의 성지순례의 정신은 잃어버리고 성지 순례 자체가 상품이 되어 버렸잖아요? 최근에는 조금 뜸한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도 이 성지순례가 아주 유행하다시피 한 적이 있습니다. 교역자들도 많이 다니고요, 교회서도 단체적으로도 많이 갔는데, 그게 정말 순례의 정신을 살린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관광하듯이 가는 것은 글쎄요, 그렇게 큰 의미는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런 건 접어두고 진실한 의미에서의 성지순례를 우리가 우습게보면 곤란합니다. 사람의 영혼이라고 하는 게 말이지요. 늘 그렇게 실용적인 것만으로 만족이 안 됩니다. 여기서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으로 만족감, 그런 것이 아니라 생명의 충만감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요, 예, 우리 영혼이 그냥 밥 세끼 잘 먹고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저런 행복이라고 하는 조건들이 채워진다고 다 되는 건 아니고요, 당연한 거지요. 그리고 우리가 그 외 많은 것들을 소유한다고 해서 된다면 간단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 그렇지 않거든요? 영혼의 깊이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어떤 게 있습니다. 여러 가지를 투자하면서까지 고대인들이 성지순례를 했어요. 마치 성지순례라고 하는 것은 나무들이 햇빛을 향해서 나가듯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서 나가는 것 하고 비슷합니다. 그걸 억지로 누가 막아서 되는 건 아니거든요? 시켜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당연히 햇빛을 향해서 나뭇잎이나 어떤 가지를 뻗는 것 하고 비슷합니다. 그러한 영혼의 속성에 대한 한 표현이 성지순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이 123편이 그런 성지순례에 대한 노래입니다. 그 마음이 1절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이런 표현이네요. 주기도문에서도 나오고, 사도신경도 큰 틀에서 보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는 거지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단어인데, 공간적인 저 위를 꼭 뜻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고대인들은 하늘 꼭대기를 생각했지만, 그러나 거기 한정되어 있는 건 아니예요. 그들이 다른 걸로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 것 뿐이고요, 이 하늘이라고 하는 단어는 생명의 궁극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여러분들이 꼭 그렇게 정리를 해 두세요. 하늘은 생명의 궁극적인 차원이다. 궁극적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절대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상대적인 게 아닌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 아닌 영원하고 참된 것입니다. 이것도 다른 얘기로 하면 아직 우리들에게 다 드러나지 않은 생명의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연결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되요. 하늘, 궁극적인 생명, 그리고 또 그와 비슷한 개념으로 어떤 것들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많지요, 구원을 이야기해도 되고요, 또 영생이라고 할 수 있고요, 가장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활이라고 할 수 있고요, 또 종말 이것도 다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약간씩 그 단어들이 뜻에 차이가 있긴 있지만, 같은 맥락에서 연결될 수 있는 거예요. 하늘, 이런 것들은 전형적인 성서용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일반적인 용어로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은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 아직은 드러나지 않은 은폐된 생명의 세계, 또 다르게 말해서 종말에 우리들에게 주어질 그러한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이런 쪽으로 쭉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지요? 그렇게 생각을 해야만,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될까요? 깊어진다고 얘기할 수 도 있고, 저는 그 대답을 말씀 드리려고 한 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꾸만 생각을 하셔야 되요. 그래서 신앙이 더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구구단을 외우고 말면 안 되잖아요? 수학의 개념 안으로 들어가야 되지 않습니까? 그건 어떤 수학의 세계가 있는 거거든요? 음악에 어떤 세계가 있듯이요, 신앙에도 이런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가 고정 되어 있는 게 아니예요. 들어가면 창조적으로 만날 수 있고요, 해명할 수 있고, 꼭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위대한 신학자여만 되는 건 아닙니다. 차이가 있어도 약간 여러 가지 차이가 있어도 나름대로 다 고유하고 창조적인 신앙경험이 가능합니다. 어떤 때요, 어떤 성서의 세계, 신앙의 세계 그 안으로 들어가면 그렇습니다. 이 세계라는 말을 제가 공부할 때 자주 쓰는 건데, 설교 할 때도 그렇고 다른 글을 쓸 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꼭 생각하셔야 됩니다. 많은 경우에 신자들이 신앙을 세계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공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완전히 그건 신앙이 아주 죽는 거지요. 사실은 그건 매달리게 되는 거지요. 일종의 신앙의 강화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거기 실체적인 내용도 모르고 매달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 그렇게 종말론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다, 이런 것들이 다, 하늘, 생명, 은폐된 세계, 이런 것 하고 연관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무슨 질문을 했지요? 이거죠? 이런 성서적이고 종교적인 언어들을 우리의 일반적인 용어들로 해석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했는데, 왜 그래야 하면, 왜 그래야 되느냐, 하는 질문이었죠, 그래야, 신앙의 리얼리티, 현실성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알맹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이 막연하게 되는 거예요. 막연하게 추상적, 관념적으로 떨어지고, 아마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럴 겁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야기하는데 천당이 뭐냐, 설명해 봐라, 그러면 거의 설명을 못 할 겁니다. 몇 마디 말하고 말 거예요. 어린아이 동화 그리듯이 그렇게 하고 말 거예요. 그게 신앙이 문자, 교리, 공식 이런 데 떨어져서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생명의 궁극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말 자체도 어려운 거예요.

 

궁극적인 차원이라니, 뭐냐는 거지요. 제가 아까 잠깐 설명하기도 했고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들과 연관해서 좀 생각해 보시는 게 좋아요. 그러니까 어떤 진리라는 하는 것은 삼각형이다, 사각형이다 딱 끊어서 얘기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 속에 있는 거예요. 그 속에서 자기가 가능한 정도를 설명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차원이라고 하는 것을 그러니까 다른 것 하고 비교해서 설명할 수 있는 거지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가는 거죠? 잠정적인 것 아니겠습니까? 이건 다 땅에 있는 문제들이거든요, 그러니까 땅은 한정적이고 유한하고, 일시적이고 무상하고 이런 것들인데, 그런 것들이 아닌, 더 근원적인 어떤 생명의 세계를 가리켜서 궁극적인 차원이다, 하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어요. 예, 이런 하늘을 공간적으로만 보시지 마시고요, 앞서 말씀 드렸듯이 고대인들은 하늘을 생각하긴 했어요.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의 물리학적인 세계를 다 모르니까 그렇게 말 한 거예요, 그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은 공간의 하늘이 아니라 자기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 세상에 지나가고 흩어지는 그러한 것이 아닌 절대적인 생명을 본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세계가 아니라면 우리의 생명은 허무에 빠질 수 밖 에 없습니다. 아무리 멋지게 산다고 하더라도 이게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 버리고 말 거니까요, 하여튼 부활, 영원한 생명, 새 하늘과 새 땅, 이런 것과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모른다면, 그리고 그걸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허무에 빠지게 됩니다. 참 된 생명의 세계를 무상하지 않은, 어렴풋하게 인식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쪽을 향해서 영적인 감수성, 촉수 이런 것들을 돌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거든요, 이게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계를 뚫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예요.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를 향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무상한 세계에서 참된 생명의 어떤 세계를 기다리고 있고, 그걸 느끼고 그래서 나무가 햇빛을 향하듯이 이 사람은 주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문제는 이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그런 질문이지요. 내가 눈을 들어 주를 향한다고 하는 이런 고백처럼 우리가 살고 있을까, 그리고 살고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질문들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이러한 영적인 긴장감이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나 있는지요, 이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가르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요, 흉내 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아주 실존적인 영성입니다. 이런 것이 안 되면 평생 그리스도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구원 받냐, 안 받냐는 접어두고요, 그건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니까 영적으로 충만한 것은 누리지 못합니다. 그건 불행한 거지요.

 

영적으로 충만한 것 이외에는 우리의 삶에 어떤 원천, 행복한 원천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우리가 이 세상살이에 분주하게 쫓기면 영적으로는 더 공허하게 되거든요?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아시죠? 이건 생명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생명의 근원과 연관되어서 움직이는 우리의 활동, 이것을 영성이라고 하는데요, 그것이 없을 때는 다는 것은 정말 모래가 손가락 벌린 틈으로 빠져 나가듯이 다 빠져 나가고 맙니다. 시편 기자는 2절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직유법인가요? 이렇게 표현하며 설명합니다. 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그려지죠?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주인은 손이고, 종들은 눈이예요. 왜 그럴까요? 그 당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어떤지를 우리가 지금 다 파악할 수 없는데요, 머리로 그려 볼 수는 있습니다. 상전이 종에게 어디가라, 할 때 손가락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손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어떤 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판단, 결정,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할 겁니다. 그러니까 종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이 상전이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손, 혹은 결정에 따라서 자기의 운명이 달라지는 종이 그걸 얼마나 주시하겠냐 하는 거지요. 오직 그것만 보는 거지요. 주인의 손만 보는 거지요. 다른 것은 달려 들 틈이 없습니다. 그 순간에는 옆에 벌이 날아온다거나 뭐, 있어도 전혀 신경 안 쓸 겁니다. 아마, 자기 운명 전체가 거기 달려 있으니까요. 그러한 방식으로,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게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이게 우리 신앙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보통 불교에서도요, 화두를 붙든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보통 선승불교에서 많이 그렇게 합니다. 화두 붙든다, 화두는 어떤 한 가지 사실에 아주 몰두하는, 정신이 그 하나에만 몰두하는 그러한 공부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자면 여기 종이컵이 있잖아요?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잠깐 생각하고 마는 게 아니라 몇 시간, 몇 일, 그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말이 될까요? 이해가 됩니까? 뭐, 생각할 게 있어, 생긴 게 뻔 한데, 그러지 않습니다. 이거는 생각 할 게 많이 있어요. 이걸 통해서 우주 전체를 생각 할 수 있고요, 종이 컵 안에 든 물 한잔으로 어떤 사람들은 득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는 사물 자체 하나하나가 우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코엘류가 쓴 <연금술사>가 다시 기억이 나네요. 그 목동에게 연금술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납으로 금을 만들 생각하지 마라, 이 모래 한 알이 우주다, 이 세계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 그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금술이다, 그런 것을 그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한 거거든요? 우리는 잘 안 되잖아요? 잡다한 게 우리를 다 지배하는 겁니다. 그게 필요한 거긴 하죠, 먹고 살려면 그게 필요하니까, 그런 걸 다 때려치우고 우리가 당장 도사가 될 수가 없는데 우리는 너무 분산되어 있으니까, 교회 일마저 도 분산됩니다. 신앙은 어떤 영적인 생명에 집중 하는 건데 교회 일이 그걸 못하게 합니다. 그런 경험 여러분들이 많이 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거꾸로 되는 거예요. 신앙을 비 신앙적인 방식으로 따라 가는 거죠, 많습니다. 예,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는데, 최근에 누구한테 들었는데요, 그런 거예요. 신자들이 전도해야 된다고 하는 부담감이 많은 거예요. 그런 부담감이 있다고 한다면 그걸 벌써 영성이 훼손되는 거거든요? 그

 

런 방식으로 우리가 점점 근본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화두를 붙든다고 하는 건 어느 한 사실에 집중하는 건데요? 그래서 그렇게 설명하더라고요, 구덩이에 빠진 심정과 같다고요. 그 사람은 다른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구덩이 밖으로 나가는 것 하나만 생각하잖아요? 지금 우리가 이러한 태도로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일들로 우리 영혼이 혼란해져 있는가, 이건 심각하게 되돌아 봐야 합니다.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종교적인 전문가들, 목사나, 아니면 수도승이나 이런 사람들이 하는 거지, 일반신자들은 안하는 거다,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다 똑 같습니다. 신학자나 목사나, 아니면 일반신자나 어린 아이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일 뿐이지 누구에겐 이게 필요하고 누구에겐 저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능적인 면에서는 차이가 있어요. 목사가 해야 될 일이 있고, 누가 해야 될 일이, 은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는 다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게 카리스마의 원리거든요?

 

카리스마는 독자적이면서도 이렇게 구분이 되어야 되는 거지, 막 섞여 있으면 안 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저는 일반 신자들이 설교하는 것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게 설교할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도 카리스마의 원리, 교회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은 교회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것이고요, 여러 가지 또 문제도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는데요? 핵심적으로 이거예요. 이렇게 상전의 손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종처럼 하나님에게 온 영혼을 집중시키는 영적인 태도가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려고 하거나 우리를 교회에 얽어매려고 한다거나 그래서 다른 일은 못하게 하고 완전히 쇄뇌하는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근원적인 생명과 일치되는 거거든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게 좀 잘 안 되서 문제지요.

 

예, 3절에서 시편기자는 은혜를 내리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게 종처럼 주인의 손을 갈망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은혜를 베푸소서, 이것을 2절 후반절에 그리고 3절에 두 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럴 정도로 은혜에 대해 갈급하다고 하는 겁니다. 공동번역엔가 다른 번역에서는 ‘은혜’라고 하지 않고 ‘긍휼’이라고 번역했어요.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비슷한 얘기입니다. 긍휼,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이 사람의 영혼이 갈급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러한 갈급한 영혼의 상태를 사람들은 오해 할 때도 있습니다. 맨 날 은혜, 은혜, 긍휼, 긍휼, 이렇게 긍휼타령, 은혜타령을 하고 있는데, 자기 삶에 책임이 없어서 그렇지 좀 비굴하지 왜 저렇게 살아, 그러니까 저렇게 은혜, 은혜 하지, 현실도피적인 거야, 그렇게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것은 은혜만능주의, 현실도피적인 은혜 만능주의,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교회만 붙어갖고 일절 다른 것 안 하고 입에 은혜만 붙어있다, 그런 차원은 아니라는 건 아시겠죠,

 

이 시편 123편에 참여해 있는 이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 싶은 마음은 분명합니다만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닌 거예요. 거기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벗어나 있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어려운 점이 많이 있잖아요, 거기만 매몰되어 있으면 이건 사실은 은혜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일단 거기서 빠져 나와야 뭐가 보이거든요, 삶이 보이거든요, 은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구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처해 있는 어려운 형편에 빠져 있지 않고 더 깊은 세계를 향해서 영혼을 집중 시키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앞에 나와 있는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이 종의 눈하고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정말 필요한 거고요. 다시 반복합니다만 쉽지는 않은데 그거 말고는 우리에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계속 만날 수 있습니다. 좋은 일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좋은 일들만 있으면 인생이 지루합니다.

 

아시지요? 계속 그렇게 있으면 그것도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일이다, 나쁜 일이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 당할 수 밖 에 없는 일인데요, 그것도 사실은 어렵죠, 어려운 건 어려운거지요, 정말 극빈상태에서 아이들이 굶거나 교육도 못 시키고 그러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 건 당연히 어려운 일이긴 한데, 그건 또 우리가 구체적으로 해결을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상태의 어려움으로 힘들어 하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영혼의 시선을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두는 거지요. 그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원한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인 겁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다고 해서 즉시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해결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또 간구하지 않아도 해결될 수 있는 거구요, 중요한 건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씀 드립니다마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희로애락과 같은 많은 문제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로 자기 삶을 옮기는 거죠,

 

옮긴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그 삶 전체를 그 은혜로 감싸는 거예요.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로 다 받아 드리는 거죠, 그래서 어려운 문제들은 완전히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제 강의안에 그렇게 정리를 했는데 보십시오. 문제 자체가 해소된다고 하는 겁니다. 핵심적인 건 문제자체가 해소된다고 하는 것이다, ‘해결’과 ‘해소’의 차이를 제가 거기서 말씀 드리려고 한 거예요. 내가 큰 병에 걸려서 그것이 완전히 해결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문제 안 되는 상태 말이지요. 이게 가능합니다. 전혀 다른 차원으로 우리 삶을 바라보는 거죠, 가난한 게 너무 힘들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아예 문제가 아닐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한 상태까지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영적인 삶이죠, 아시겠죠?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무엇을 달라고 하는 데에 너무 많이 빠져 있어요. 순수하게 우리가 간구하는 건 필요합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안심하고 신뢰하면서 정말 그렇게 간구하는 건 당연히 필요한 거고요.

 

기도 무용론에 빠지면 또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전제되는 건데, 그렇게 기도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 이게 전제 되어야 됩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무엇을 간구하더라도 정말 자유롭게 간구할 수 있고, 거기에 아주 집착하지 않고 간구할 수 있는 거죠, ‘집착’이라고 하는 것하고 ‘집중’이라고 하는 것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면서 집중하면서 간구는 필요합니다.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그렇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는 거죠, 마지막 4절입니다. 이 시편기자는 실제적으로 조소와 멸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개인 일수도 있고, 민족일 수도 있습니다.

 

이 조소와 멸시가 다른 나라로부터 온 것일 수도 있고, 예를 들자면 페르시아나 바벨론에서 온 것 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일어난 일 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는 없어요, 어쨌든 조소와 멸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요, 힘든 상황, 멸시와 조소를 영혼의 문제로 접근한다고 하는 겁니다. 삶의 대한 이 차원이 우리하고 완전히 다르지요. 영혼이 힘든 거예요. 그러한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힘든 것도 힘든 거겠지만, 여기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명, 삶, 인격 전체를 이야기하는 거겠지요. 거기에 넘치는 겁니다. 결국 조소와 멸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의 영혼을 건져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그런 고백이겠지요. 예, 짧은 구절이었는데, 굉장히 진지합니다. 구절들이 다 중요하고요, 오늘 다시 한 번 1절에서 4절까지 읽겠습니다.

 

1.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아멘! 예, 잠시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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