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4편 강해-여호와는 우리 편

 

시편 124편입니다. 8절까지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청년시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때 복음찬송이 이 124편을 내용으로 한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CCM찬송하고는 조금 다른 찬송이었어요. 옛날에 70년대부터 복음찬송이 한국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주일학교에서도 많이 부르고 했었던 지금도 멜로디는 많이 기억나는데 가사는 정확하게 나지 않아도 그런 내용입니다. 예, 한 절씩 오늘은 읽어 볼까요? 제가 한 절씩 읽고 8명이니까, 한 절씩 읽으면 되겠네요. 시계방향으로 한 절씩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4.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아멘! 읽다보니까 멜로디가 좀 생각나네요. 오늘 우리 이 124편 제목은 “여호와는 우리 편”입니다. 이건 좀 노골적인 표현이죠, 이 시편기자가 1절과 2절에서 자기의 신앙을 노골적으로 그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이다”는 거지요. 우리 편, 내 편, 네 편, 이렇게 하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일단 그 말 자체만 보면 말이지요. 어릴 때는 대개 그렇게 하거든요? 짝꿍 그런 것도 있고, 내 편, 네 편 하고요, 그렇게 적과 자기편을 편 가름하고요, 그런 것들이 많은데, 좋고 나쁜 것도 굉장히 분명하고요, 나이가 들면, 세상살이를 좀 알게 되면 그런 것들이 아주 작아지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시편기자가 우리가 읽은 대로 1절과 2절에 반복해서 여호와를 우리 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영적으로 아직까지 미숙하다고 하는 뜻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성경에는 그와 비슷한 표현들이 제법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나오지요? 굉장히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건 일일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거의 전쟁할 때 적군하고 아군인 것 처럼요, 그렇습니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게 전쟁논리 아니겠습니까? 그런 방식으로 구약성경에 표현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건 그 당시 상황으로써는 어쩔 수 없었다고 봐야지요. 예, 정글의 법칙이라고 할까요? 생존논리라고 할까요? 그렇습니다. 완전히 같이 더불어서 살아 갈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정확한지 아닌지는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구약성서를 통해서만 보게 된다면 상당히 적개심에 많이 타고요, 그 당시 많이 당하기도 하고, 비인간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는데 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그렇게 느낀 부분들을 과장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지간에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보면 그 유대인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웠을 거다 하는 것은 우리가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게 많이 있지 않습니까?

 

팔레스틴 지역에서 유대인하고 PLO라고, 지금은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는데요, 같이 더불어서 있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도 몇 년 전서부터 담장을 쳐 놓고요, 서로 건너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제 삼자가 볼 때는 안타깝지요. 유대인들하고 팔레스틴 원주민하고 왜 서로 그럴까, 안타깝긴 합니다만 뭐,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고대인들만이 싸우는 게 아니라 현대인들도 사실 그렇고요, 어떻게 보면 이런 적군과 아군이라고 하는 오랫동안 적개심이 쌓인 그런 상태에서만이 아니라 어쩌면 개인 개인, 그런 것들도 많이 나타날 수 있을 거고요. 우리나라에도 극단적인, 아주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자들이 타종교에 대해서 갖는 태도, 그런데서도 나타나고요, 그렇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 싸우고 좀 지역감정들도 강하고 말이지요. 어떻게 보면 인류가 문명이 발달해서 어른이 된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만 어린아이처럼 미숙한 게 그대로 남아 있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예, 어쨌든 여기 우리 편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고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살아가는 삶의 형편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 것은 분명합니다. 예, 이것을 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사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 아니겠습니까, 그건 분명한 사실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서로 자기편이라고 얘기 한다면 그게 좀 우스운 거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자녀들이고, 자녀들이라고 하면 한 형제여야 되는데요, 서로 우리 편이라 얘기하면 우스운 거지요. 기독교 안에서도 그런 갈등들이 있고요. 조금 더 멀리 확장해서 보면 타 종교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종교가 여럿 있잖아요? 기독교하고, 가톨릭과 합해서 기독교라고 하는데 그게 25% 가까이 되는 것 같습니다. 불교가 그 정도 될 거고요, 그리고 일반 유교라든지 그런 것들도 제법 되고, 하여튼 여러 종교가 여기 어울려서 살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우리만의 하나님이라고 딱 끊어서 얘기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쨌든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은 우리만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뭐, 성서를 일일이 끌어다가 또 얘기 할 수 있습니다마는 적어도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상식적으로 보기도 하고 기독교 신앙의 어떤 큰 틀, 성서의 어떤 큰 틀에서 볼 때 그건 분명한 겁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모두 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고요, 동물과 식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그렇고요, 그러니까 사람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모두가 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라고 하는 사실, 이런 영성까지 우리가 들어 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예수 말고는 구원을 줄 만한 이름이 없다는 그러한 사실을 붙들고 모든 걸 배척하는 게 올바른 신앙일까요?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우리 편’이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차원에서 본다면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하는 것은 편협 된 거고 그건 사실은 옳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 시편 기자가 1장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옳은 거예요. 이게 우리가 성서를 해석할 때 어려움이기도 하고 우리가 꼭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어떤 말이 사실대로 옳고 그른 게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된 말이냐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이렇게도 해석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왜곡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언젠가도 제가 말씀 드렸듯이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요, 처음에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얘기도 욥을 반대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잖아요, 그 구절 자체만 옳은 건데 그게 어떤 입장에 있는가에 따라서 틀릴 수가 있는 거거든요, 그러한 성경구절, 어떤 사건들의 배경이나 그 맥락들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겁니다. 우리 편이라고 하는 이 편협 된 이 말이 이것만 갖고 보면 조금 문제가 있는 거지요.

 

그러나 지금 이 124편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기자가 개인, 혹은 공동체일 수 있는데요, 오랫동안 역사를 통해서 그들이 그렇게 신앙고백을 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이런 말을 했는가를 보면 옳은 이야기인 겁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예요. 계속해서 이 사람들은 억압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는 것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인 거예요. 끊임없이 그러한 고난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아무데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는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약자예요. 약자들의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 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이건 교만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앞에서 모든 사람들은 형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독교에 들어 온 사람만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형제거든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다 형제인데 그 형에게 매일 두드려 맞는 막내가,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우리 편이야, 이렇게 이야기 한다면 이건 옳은 이야기거든요? 매일 두드려 패는 형의 입장에서 아버지는 우리 편이야, 나는 이렇게 해도 돼,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건 심각한 왜곡인거죠, 그러니까 우리 편이라고 말한 이 사람의 상황이 어떤지, 영혼의 궁핍함이 어느 정도인지 그걸 우리가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이해해야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 사람의 형편이 어떤지 혹은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떤지가 3절에서 5절까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124편의 표제를 보면〚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그렇게 되어 있지요? 순례자들이 부를 만한 노래이기는 한데요, 우리가 앞에서도 몇 개 그런 시편을 공부했습니다.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부르는 노래도 있었고, 나오면서 부르는 노래도 있었고, 등등인데 이 124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부르는 감사시,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1절에 그렇게 시작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이렇게 제사 때, 예배 때 같이 교독하는 거라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기도,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 전체 민족의 기도이기도 하고 또 그것이 어떤 개인의 기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들이 당한 상황이 어떤지가 3절에서 5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그들이라고 얘기 한 거지요?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여호와가 우리 편이 아니시라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다면 그랬을 거다, 그런 위기가 많았다는 거죠, 이 표현이 굉장히 적나라하죠?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다, 그림이 그려지지요, 얼마나 절박한 상태인지가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나이브하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아주 안일하게 이해하면 안 되고요, 아주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당했던 생존의 위기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됩니다.

 

 

4절과 5절은 물이 넘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4절,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홍수 만나 본 적 있으세요? 쓰나미, 이런 거 일어나지 않습니까? 동남아에서 주로 일어났지요? 거기 휩쓸릴 때에 거기 아무 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휩쓸리고요,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절에서 그게 반복 되고 있습니다.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떤 사건을 말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성서학자들도 이 124편이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 졌는지는 역사적인 흔적을 찾기는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벌어진 어려운 일들, 아마 그 중에 하나겠지요. 이집트 시대나 아싯리아, 바벨론, 페르시아이지요. 성경의 역사에는 안 나오지만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로마의 지배, 그런 것들입니다. 이게 이스라엘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고대 시대에 이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요, 이게 아주 절대적인 힘이거든요, 제국에 의해서 사라진 민족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 제국들 틈에 이스라엘은 살았습니다. 여러분들 구약 역사에서 알고 계시듯이 그랬습니다. 계속 멸망했어요. 지금 이 시편기자가 물이 우리를 휩쓴다,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실질적인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북 왕조도 망하고 남 왕조도 망하고 바벨론 포로 귀환 했지만 여전히 뭔가 해 보려고 했지만 안 되고요, 주변에 있는 여러 제국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수탈당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곤고했을지 얼마나 처절했을지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 아무것도 할 능력은 없는데 거대한 제국들의 힘이 자기들의 모든 삶을 파괴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죠, 어떤 방식으로든 뚫고 나갈 힘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기는 최근의 뉴스에 나온 이야기들입니다마는 대학에서 청소용역회사에 속한 여성노동자들이라든지 2년 전에 한국의 고위층에게 성적인 노리개가 됬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삶이 파괴되어서 자살한 탈렌트인가요? 그러한 이야기라든지 하여튼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죠, 절박한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북한도 그렇지 않을까요? 일치시키기는 힘듭니다만 어쨌든 절박한 거죠.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죠, 예, 이 시편기자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노래한다고 합니다.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어요. 6절과 7절입니다. 6절 이렇습니다. 6.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그것도 굉장히 리얼한 표현이죠? 씹힌다, 껌 씹듯이 껌이 이에 씹히면서 꼼짝도 못하잖아요? 아니면 포식자의 아가리에 든 토끼나 노루나 이런 짐승들요, 이건 뭐, 끽 소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게 해 주셨다, 그 얘기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거지요. 7절도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7.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예, 이러한 경험이 그들에게 얼마나 놀라웠을지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정말 즐거웠겠지요, 정말 하늘을 나는 것 같겠지요. 아마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는 별로 없을걸요? 일단, 정말 물이 넘치는 경험, 그리고 사냥꾼의 올무에 묶인 것 같은 경험을 우리가 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냥 무난한 거죠, 조금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 그게 죽고 살고의 문제는 아니고요, 조금 내 욕심을 부리냐, 안 부리냐, 그런 차원이지 시편기자의 이런 상황하고는 거리가 먼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면 기분이 좋을 정도뿐이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경험들은 조금 힘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무조건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가능하면 여러분들이 편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마는 무조건 그게 절대적인 조건은 아닌 것 같애요. 그렇게 사나 이렇게 사나 한 평생이 똑 같거든요? 금방 지나가고 마는데, 그냥 그러한 상태, 무난하게 사는 것으로 우리가 머문다면 자유로운 새 같이 되는 경험이 없으니까 그 만큼 우리의 삶이 밋밋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이게 우리는 가능한대로 편안하고 좋게 살기를 원하는데 그것이 우리 삶을 밋밋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하는 자체 모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게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편기자가 여기서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8절입니다. 8.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정확한 인식이죠,

 

그러니까 저 혼자 좋아서 일이 잘 풀렸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정확히 전제되는 거예요. 도울 수 있는 분은 누굽니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거든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분 본질 자체를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이름이라고 하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여호와, 여호와의 행위, 여호와의 섭리,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우리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그런 여호와에게 있다고 하는 겁니다. 놀라운 고백이지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지나 갈 수 있어요.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도움은, 이렇게 바꿔서 이야기해야 되겠습니다. 참된 도움이 뭔지를 알려면 천지, 온 세상,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의 차원에 들어가야 되는 거지요.

 

이게 더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마는, 아, 내가 어디 직장에 들어간다, 이런 것도 도움이 되긴 하는데 그런 것들은 천지하고는 거리가 있는 거거든요? 삶을 좀 편리하게 사냐, 덜 사냐, 돈을 좀 더 많이 가지고 사냐, 적게 가지고 사느냐 하는 건데 뭐, 그런 걸 가지고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하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모든 걸 다 하나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마는 그 정도에 머무르게 된다면 시편기자의 영성으로 들어가기는 힘듭니다. 우리의 영적인 관심이 천지창조, 전체세계, 이런 데 이를 때만, 거기에 이를 때만 이 시편기자의 영성에 우리가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다 이걸 전제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출애굽, 가나안 땅, 자유와 해방 이런 것들을 쭉 말할 수 있는 거지요. 예, 우리들이 일상에 거의 머물러 있기 때문에요. 천지, 하늘과 땅, 온 세계, 시작과 마지막, 이것에 대한 생각을 갖기가 힘들지요.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이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런데 성서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그 사실을 기억하라고 얘기하거든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크신 능력, 이런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깊어지지 않으면 사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뭔지를 깨닫기 힘듭니다. 그렇게 못하고요, 그냥 내가 살아가는데 뭐 편리한 것을 주는 그러한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데만 머물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서 신앙생활 건전하게 하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다 영적으로 고도의 경지에 다 들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안 해도 결정적으로 큰 문제가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들에게 덧입혀지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점에서 우리가 그렇게 영성에서 고도의 경지에 올라가지 않아도 구원의 문제 이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려면 따라가야 되는 거지요.

 

거기 강의안 마지막 패라그래프 좀 보십시오. 오늘 결론 부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상대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절박감에서 나온 시편 124편 기자의 영성을 따라가지 못한다. 우리가 삶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인 거거든요?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잘 진행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영혼의 절박감, 이런 것들을 잘 느끼지 못 하는데 다 착각인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간다. 이건 어느 순간에 교통사고 나서 죽는다, 아니면 돌연사 한다, 그런 것만을 말씀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런 걸로 두려움을 느껴야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정말 순간이고요, 몇 번 숨을 쉬고 나면 모두 죽는거와 같은, 여기서 떠나야 된다고 하는, 나그네와 같은 사실, 이게 실존이거든요?

 

이걸 우리가 망각하고 삽니다. 이것보다 더 절체절명이 어디 있을까요? 제가 뭐 아직 60은 체 못 되었습니다만 살아 온 것들도 이게 손아귀에 한 줌 밖에 되지 않거든요? 절체절명인 거예요. 이러한 우리의 생존? 실존? 우리의 운명? 여기에서 아무도 함께 해 주지 못합니다. 이건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거든요? 아시지 않습니까? 친구가 있어도 그렇고 가족이 있어도 그렇고, 사랑하는 자식들이 있어도 그렇고 그런 걸로 채워지지 않는 문제입니다. 이건 혼자만 가야 되는 건데요, 그러한 우리 운명과 더불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세계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어요. 예, 우리의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 같은 일반 평범한 사람만이 아니라 아주 사회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도 어떤 권력을 갖거나 고위직에 오르거나 아니면 수입이 많은 사람들이나 그건 정말 차이가 없습니다. 아시지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부러워 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 근본적인 삶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는 그런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도움이다, 라고 하는 그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세계를 완성하실 하나님, 종말론적으로 생명을 우리들에게 선물로 주실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참된 하나님의 도움이 가능하다고 하는 그러한 고백입니다. 지금 부터 2300년 내지 2400년 전에 가나안 땅에 살았던 어떤 사람들 그의 의한 신앙고백인데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은 꼭 성경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반 문서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시죠, 우리는 여기 이러한 시편기자의 고백에 머무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훨씬 더 구약에 있는 사람들보다도 그리고 지금 구약만 따르고 있는 사람들 보다도 훨씬 더 하나님의 도우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24편의 말씀을 같이 나눴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성가의 진솔하고 그리고 정곡을 찌르는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풀어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아는 것만큼 나눈 그 말씀들이 우리 영혼에 귀한 양식이 되도록 주님, 역사해 주옵소서, 오늘 이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와 같은 참된 자유와 해방과 기쁨이 우리 영혼 가득히 채워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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