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5편 강해-지금부터 영원까지

 

오늘 우리가 읽고 공부할 시편은 125편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만 있습니다. 짧지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읽읍시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한 번 더 읽겠습니다.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예, 3월 11일 대지진 때문에 일본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 보다 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 거지요. 묵시록적인 그런 사건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이 지구위에 붙어산다고 하는 것이 아슬아슬한 그러한 일들이거든요, 굉장히 토대가 탄탄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해일이 그렇게 밀려 올 줄은 아무도 생각을 못했고 방파제가 30년 만에, 2009년에 완성 되었고요, 굉장히 탄탄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이번 해일로 완전히 넘쳐 버린 거지요. 그건 아무도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 거구요. 예, 원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가 안전 시스템이 굉장히 탄탄한 나라인데요, 특별히 지진이 흔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다른 나라 보다도 안전에 대한 생각이 많아서 잘했지만, 정말 전혀 예상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원전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들이 고대 성서시대에도 사실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속 되는 거예요. 우리 후손들도 마찬가지일걸요? 아무리 세월이 가도 생존의 위협은 늘 따라 다닙니다. 고대인들이 좀 더 심했겠지요? 그 때는 전염병도 많았을 거고 전염병이 뭔지도 사실은 몰랐지 않겠습니까? 예, 그리고 지질학적인 변화 이런 것도 뭔지 몰랐고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더 심했을 겁니다. 전쟁들도 많았고, 요즘전쟁이야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하지만 옛날에는 교통도 발달하지 않고 통신도 없고 해서 언제 무엇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상황입니다. 굉장히 불안한 거예요. 성서사람들도 그런 생존의 두려움, 실존의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생존, 실존 비슷한 뜻으로요, 그런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성서 기자들도 그런 것을 늘 안고 있습니다. 성서 곳곳에 보면 그런 흔적들은 많이 있습니다. 예, 노아 홍수도 그렇고 욥기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대한 여러 많은 이야기들이 연관되는 문제거든요?

 

그러한 위기는 늘 경험하는 건데 성서기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서전체의 고백이지요. 이게 과연 무얼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다 안전 하냐, 사실 그렇지 않은 건 다 인정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일본의 그러한 대재앙을 다 당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 다 빠져 나온 거 아니거든요? 다 당합니다. 똑 같이 당합니다. 예,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데 그래도 성서기자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킨다,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모순인 것 같기도 한데 거기에서 성서기자들이 어떤 것을 붙잡고 있었을까? 그게 신앙입니다. 그게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할 초점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볼 때는 다 똑같지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들을 오늘 시편에서처럼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킨다고 하는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냐, 그들이 어떤 영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걸 우리가 배워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고유한 성서의 시각에 있는 거예요. 고유한 시각, 그런 고유한 시각을 놓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뭐가 잘 되고 만사형통되는 것처럼 이야기 한다면 이건 완전히 성서를 오해하는 거죠, 그런 일들이 우리들에게서 자주 벌어지는데요, 성서 왜곡하는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건 성서의 중심으로 못 들어갈 때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게 다른 시를 읽는 거나 음악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고요, 그렇습니다. 그냥 몇 가지 단어를 외운다거나 기술적으로 어떤 연주를 한다거나 그런 것하고 음악을 경험하는 거, 시를 경험하는 것은 다른데, 그렇게 좀 왜곡되는 이유는 그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게 나오는 거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전체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1절에서 5절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 내용이 어떤가를 한 절씩 따라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이요, 이렇습니다.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설명이 더 필요 없을 정도로 아주 분명한 이야기지요? 성서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지가 이 문장 안에 확실하게 드러나지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상태가 마치 시온산과 같다,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는 거와 같이 그와 같다, 탄탄하다, 걱정 없다, 이런 뜻입니다. 이러한 진술이 객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지질학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예요. 시온산도 결국 흔들리고요, 언젠가는 그것이 다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게 되고요, 이 지구 껍데기 판이 계속 움직이거든요? 이것이 판과 판이 맛 닿아서 약간 엇갈리면 그게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그 판이 더 힘세게 부딪치면 위로 솟아오르거나 밑으로 가라앉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게 산맥이 되기도 하고 밑으로 꺼지기도 해서 바다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온 산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고대인들에게는 그럴 듯한 이야기지만 지질학적으로 보면 옳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옳은 거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그 여호와 하나님, 구원 이런 것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하다고 하는 겁니다. 시편기자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생각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아무 근거도 없이 말하면 웃기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음 같이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한데요? 그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임한다고 하는 건데, 그게 어떤 근거가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조금 더 가 보지요.

 

2절, 이렇습니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표현이예요. 예루살렘은 요새라고 합니다.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대구처럼 앞산이나, 팔공산처럼 이런 높은 산이 있던 것은 아닐거예요. 제가 그걸 지금 다 조사해 갖고 오진 못했습니다만, 언덕이라기 보단 조금 더 높은 산들이 있었겠지요? 그래도 그런 것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었서요, 침공당하기 힘든 곳이라고 합니다. 2절이 표현한 것은 일단 옳습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다, 그렇게 예루살렘이 천연요새처럼 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처럼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렇게 안전하게 지키신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도 객관적으로 보면 옳은 거 아니거든요? 예루살렘이 많이 함락되었지요?

 

그리고 이 시편이 기록되던 시기, 보통 기원전 4세기, 5세기 그 정도인데요? 바벨론에 의해서 아주 초토화되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도 위기가 많았습니다. 앗시리아에 의해서도 거의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에 식민지 비슷하게 타협해서 겨우 모면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그렇게 탄탄하지 못한 거였습니다. 그런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 없이 당했거든요, 주변의 나라들은 제국이었습니다. 강한 나라들이었고요,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수모, 절망감 이런 것은 말 할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시편기자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이렇게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러 준 것처럼 안전하게 두르신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로 좀 정리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딱 정확한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렇게 좀 해석할 수 있지 않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야 여러분들이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난 시절에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련이 많았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그런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금부터 영원까지, 과거에 그렇게 되었던 일들이 그렇게 인정해 놓고 그러나 지금부터는 안전하다, 그런 뜻으로 오늘 시편기자가 말한 게 아니냐,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정치,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이스라엘이 또 다시 반복해서 어려운 일이 있을지 몰라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구분이 될까요? 정치 사회적인 부분하고 영적인 부분 말입니다. 정치 사회적인 점에서는 계속 힘든 일이 있어도 영적인 차원에서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이해하려면 그 두 가지가 구분 되어야 되는데 가능할까요? 사람들이 이게 잘 구분이 안 됩니다. 실제로 살 때는 이게 어려움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요, 우리 다 가난하다고 봅시다, 저녁 끼니마저도 힘들 정도로 힘들다고 한다면 빚이 많다고 한다면 그런 상태에서 영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을까요?

 

당연히 풍요로워야 되고 풍요로울 수 있어야 되는데 실제적으로는 어렵지요. 또는 반대로 우리의 생활 조건들, 복지 이런 것들이 정말 넉넉하다고 한다면 그러면 영적으로도 또 풍요로울 수 있을까요? 어떨까요? 이건 뭐 어떻다고 딱 단정 지어서 말하기는 힘듭니다. 이건 서로 연관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격하게 얘기하면 되지 않아야 되요.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팔복가운데서도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그런 거거든요? 그게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게 가난하면 무조건 복이 있다는 뜻으로 받긴 힘들지만 거기 어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일단 그런거는 좀 접어두고 이게 사회적인, 우리가 실제적으로 당하는 삶의 여러 가지 조건들, 이런 차원하고 영적인 차원 이런 것들이 다른 차원이다,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있고, 보아야 되고 그렇게 또한 살아야 됩니다.

 

쉽지는 않은 건데 당연히 그래야 됩니다. 영적인 차원이라고 하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해야 될까요? 여러분들이 아시지요? 제가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죠? 그냥, 우리가 쉽게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밥은 우리가 많이 먹어도 또 배고프거든요? 반복해서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어떤 구원, 평화 그런 세계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은 우리가 좀 배가 고프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차원인 거지요. 영적인 차원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생명의 차원이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그건 말만 그렇지 실제적으로는 안 그렇다, 생각할진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그것을 제 개인적인 문제로 연관시키면 개인적인 것 보다는 우리 교회 문제로 연관시키면 교회도 커야 신나고 재미있고 뭐가 되는 거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도 많이 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작은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아니면 오히려 더 영적으로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거예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교회가 작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관심들이 잘 정리되어 있으면 그건 영적으로 풍요로운 것이고요, 그렇지 않고 교회가 큰 걸 목적으로 하게 되면 그건 기분은 납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이예요. 신앙의 본질이 어떻든지간에 교회가 계속 늘어나고 커지면 그게 재미는 있으니까 거기에 뭔가 흥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마는 그 둘은 다른 거거든요, 그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인데 우리가 그걸 놓치는 경우가 많지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의 이야기가 그런 차원이 아니냐, 그런 거지요. 세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고백은 어떤 역사적인 사실을 말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것하고 연관되기는 한데 그냥 구분해 봤습니다. 아직 그게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러길 바란다고 하는 거지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탄탄한,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를 희망하는 것을 거기 담은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3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악인의 규(규는 지팡이이예요. 옛날 성경에는 홀이라고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요)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여기서 악인과 의인이 비교됩니다. 물론 예루살렘을 파괴하려고 하는 이들이 악인이지요. 이 이야기가 앞의 1절, 2절과 연관되는 겁니다. 1절과 2절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이 영원하고요, 그리고 그 안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였잖아요? 그것은 1,2절에 말하고 있는 것은 3절에서 두 가지 의미로 해명되는 겁니다. 첫째는 악인이 권세를 누리지 못한다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고 참된 세계이니까, 당연히 거기에서는 악인이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악이 득세하지 못하는 거지요.

 

같은 연장선상에서 두 번째인데요, 의인들은 죄에 물들지 않아야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전하고 흔들리지 않고, 그러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세계는 의인이 죄에 물들지 않는 그러한 상태라고 하는 거지요. 악인과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딱 눈에 보이게 구분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해서 늘 의를 행하는 것만도 아니고요, 다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기인 거죠, 여기 3절에 시편기자의 고민, 아니면 불안 이런 것들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롭게 살아야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증거인데, 그렇게 못 사니까 계속해서 악에 노출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냥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본다면 죄악이 뭔지는 우리가 알지요. 실정법을 어기는 것, 그리고 아주 부도덕한 일들, 반사회적인 것, 파렴치한 행위들, 그런 것들은 압니다. 그런 것들은 사실은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니예요.

 

어떻게 보면, 다 드러나니까, 저건 나쁜 거, 다 나타나니까 조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잘못하면 자기도 죄 값을 받으려고 하잖아요? 그것은 어떻게 보면 근본적으로 이 사회를 흔드는 위험요소는 아닙니다. 확 드러나기 때문에 우리가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어요. 문제는 우리가 눈치 채기 힘든 구조적인 악, 그리고 시대적인 악, 시대자체가 악한 것, 그 안에 들어가면 그 구조,시대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다 그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느끼고 사는 겁니다. 이게 사실은 더 어려운 건데요. 의인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정말 무기력합니다. 아무리 개인이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살려고 하더라도 이 사회와 구조와 시대정신이 이게 부패해 있으면 벗어나기는 정말 힘든 거지요.

 

예를 들자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같습니다. 경쟁력을 높이는 게 지금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모든 걸 경쟁시키는 거예요, 학교선생님들, 대학교선생님들도 다 경쟁시켜가지고, 거기서 이제 경쟁시킨다고 하는 것은 당근을 따로 준다거나, 하여튼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거거든요? 그래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행위, 가부장적인 제도로 인해서 벌어지는 정신적인 폭력, 이런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지금 또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마는 군수산업, 이게 국제적으로 로비도 많이 하면서 세계정치를 아주 흔들거든요? 군수사업을 하는 기업체에서는 어디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고요, 또 전쟁이 일어나게도 만듭니다. 부추기고 해 갖고요, 그래야 자기네 기업이 사니까,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근무하게 되면 이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도 모르고 사실, 악에 휩쓸리는 거거든요? 그것 만이 아니라 판검사나 변호사 업무에도 그런 위험적인 요소는 늘 있습니다.

 

민사재판에서 분명히 A라는 사람이 잘 못했는데, 자기가 수임료를 많이 받고 이 A를 변호해야 된다면, 그렇게 해서 A가 잘 못했는데, B가 잘 못한 걸로 판결이 난다면 이건 정말, 정말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이런 구조적인 시대정신적인 어려움들이 이걸 뚫고 나가기가 의인들에게도 힘든 겁니다. 개인적으로 영적인 분별력을 갖고 정말 양심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해야 되지요. 일단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사회제도가 변화되어야 의인들로 하여금 오늘 본문에 이야기 하듯이 죄악에 손을 대지 않는 그러한 세계로 나갈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시편기자도 그런 고민을 많이 안고 이런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4절 이렇습니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선한 자들과 정직한 자들을 위한 기도지요? 성서는 이걸 다 밑바탕에 깔고 있는데 정직하고 선한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여호와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본이 되게 사는 것, 도덕적인 사람, 이게 참 왔다 갔다 할 때가 있어요.

 

어떤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것만을 말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개인, 사회, 윤리적인 면을 다 포괄 할 때도 있고요, 기본적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거지요. 그래서 성서가 자기들을 선민이라고 얘기했잖습니까? 하나님이 지킨다고 얘기했잖습니까? 누구나 다 따르겠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여호와를 따른다고 하는 것, 왜 그들이 정직하고 선한자들이냐, 하면 자기자신들의 한계를 늘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가 돕지 않으면 정직하고 선한 길을 갈 수 없다고 하는 걸 아는 거지요. 그게 기본적으로 핵심이예요. 기본적인 겁니다. 제가 조금 아까 시대정신이나 사회구조가 악하면 개인이 아무리 거기서 발버둥쳐도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일단 그것을 아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그러니까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겸손 할 수 밖 에 없고요, 자기 하는 일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떤 악한 일로 가지 않도록 늘 자기를 성찰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게 이제 정직하고 선한 사람의 가장 핵심적인 성격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 5절입니다. 불의한 길로 치우치는 사람들은 앞의 선한 사람들과 대비되는 것으로 여호와를 찾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죄를 범한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시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만 보면 애매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네, 그렇게 볼 수 있는 거죠, 나쁜 놈들은 나쁜 놈들끼리 다니게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구나 그리 생각할 수 있지않겠습니까? 그건 아닌 거거든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그들을 다니게 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나쁘게 말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불행이 임하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갖고 있는 것을 성서기자들은 다른 말로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면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는 걸 전제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정의롭다고 하는 걸 전제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의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렇게 악한 일을 하는 이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표현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세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지 않았잖아요? 그럴 때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 얘기하잖습니까? 그건 바로의 마음이 그렇게 강팍했다고 하는 걸 이야기하는 거지 하나님이 일부러 그 사람의 마음을 강팍하게 해서 죄를 짓게 하는 건 아닌 겁니다.

 

예, 굽을 길로 치우치는 자들, 그래서 자기들끼리 죄를 범하는 자들끼리 몰려다니는 사람들, 혹은 그 무리들도 사실은 자기들이 그렇게 악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들을 정당화 합니다.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고 의도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자기도 정의를 실행한다고 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을 걸요? 앞에서 한 이야기하고 연관됩니다. 죄악이 뭔지 확실하게 드러나는 거라고 한다면 악으로 간 사람들은 오히려 해결하기가 쉬운데요? 나는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한다, 정의를 실행한다고 하는 이게 사실은 더 어려운 겁니다. 인류역사에서 보십시오. 전쟁을 일으킨 모든 사람들은 다 나름으로 그것이 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003년에 일으켰나요? 부시가 이라크 침략할 때도 정의를 실현한다고 얘기 했거든요? 백악관에서 기도하고 목사님들이 거기 가서 기도해주고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고 하는 증거가 확실하다고 해서 공격해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거기에 그게 없었거든요? 없었다고 하는 정보도 확실한 것이었는데 하여튼 그게 이렇게 저렇게 연관되어서 벌어진 겁니다. 인류역사에서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됬습니다. 정의를 실현한다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행위라고 하는 게, 생각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짧은지, 얼마나 자기착각에 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옳다고 생각한 게 사실 옳지 않은 게 너무나도 많고요, 참으로 그런 점에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는 그런 기도를 교부시대 때 부터 기도 할 때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반복해서 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할 때에도 사실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우리의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구절은요, 이스라엘의 평강을 바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 샬롬입니다. 샬롬, 그게 결론인데요, 이 결론이 전체 주제하고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아시겠지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샬롬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냥 신뢰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필요에 따라서 취사선택하는 게 아니라 아주 근원적으로 신뢰하는 거 말입니다. 오늘 여기 1절에서 5절까지 신뢰가 어떤 차원인지 다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는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상투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경험하면서도 다 아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것으로 샬롬을 경험합니까? 그게 잘 안되요. 교회 안에서도 샬롬 있기가 힘듭니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서 잘 하다가도 부지부식간에 사람사이에는 틈이 벌어지고요, 이게 잘 안됩니다.

 

이건 선물인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요, 전혀 다르게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고요, 그리고 참된 샬롬에 이르기도 힘듭니다. 이건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없어요. 우리가 공장에서 찍어낼 수도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행복한 가정을 누린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아주 궁극적인 어떤 생명의 세계이거든요? 성서기자들을 그걸 지금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다시 말씀 드리겠어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만이 가능한,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샬롬,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이해하시면 될 것 같네요.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 전 우리와 거의 손이 닿기 힘들 정도로 오래 전 멀리 떨어진 팔레스틴 지역에 어떤 영성가들의 기도를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오늘 저희들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선과 악을 넘어서서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그 구원과 그 평화에 우리 전체 삶을 맡기는 사람들이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이 혼란스럽고 복잡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의 영혼이 샬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일치되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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