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6편 강해-크신 일을 행하셨다

 

시편 126편입니다. 6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제가 먼저 1절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3.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4.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5.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6.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7.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이제는 같이 통독으로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3.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4.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5.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6.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7.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아멘! 시편 126편은 특히 5절과 6절은 나오는 구절로 유명합니다. 이런 구절이 여기에만 있는 건지 아니면 신명기나 다른데도 비슷한 게 있는지 제가 확인하지 못했는데요, 아주 익숙한 구절이거든요, 어떤 이들은 기도할 때도 이러한 구절들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말 자체만 보더라도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 똑 같은 이야기가 5절, 6절 반복되어 있어요. 약간 단어만 다르지요. 7절,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게 대비됩니다. 눈물과 기쁨, 씨와 결실, 이게 딱 대비가 되니까 확 전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구절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는 거지요. 여러분들도 딱 기억해 두셨다가 필요할 때 말씀 하셔도 되겠네요. 자녀들에게 가끔 교훈할 때도 적절한 것 같지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면 결국 기쁨으로 거둔다, 이 얘기입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인데 이게 과연 성서전체에 맞는 이야기인가, 맞는다면 왜 그런가? 아니면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인가? 그런 것들을 조금 우리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서에 나온 이야기라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거든요? 이 말은 오해하지 마셔야 되요.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맥락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한 두 구절만 딱 따다가 이렇다, 말하면 오해할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으로 사용되는 것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 헌금 같은 이야기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 하거나 창고에 차고 넘치게 해 주는지, 안 해 주는지 시험해 봐라, 라든지 라는 얘기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구절만 딱 따다가 어떤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용하게 되면 조금 왜곡된 경우가 많이 있는 거지요.

 

그런 것은 말라기가 살던 시대에 어떠한 다른 배경들을 충분히 배경에 둬야 하고 그리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회상, 그들의 종교와 정치가 일치 되었던 때의 시대상, 다 전반적으로 놓아야 되고 그러한 것들이 과부들을 위해서, 레위족속들을 위해서, 사회복지 문제와 연관된다고 하는 것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그냥 직접적으로 십일조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성경을 조금 잘 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모두 다 자꾸만 의심하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게 필요합니다. 성서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안목이 일단 필요합니다. 기독교 영성, 기독교 신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큰 틀에서, 전체거든요, 큰 틀에서 부분 부분을 이해해야만 이게 바르게 해석되지 큰 틀이요, 이건 보통 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이라고 얘기하는데 어떤 그 시스템, 어떤 전체 frame, 아니면 형이상학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작은 것들을 다 뚫고서 전체를 보는 눈, 그런 걸 이야기합니다. 그런 것들이 같이 연관 되어야 되는 거지요. 이 구절도 은혜로운 이야기긴 한데 어떤 걸까, 조금 속사정을 보자, 이야기입니다. 이 구절은 가나안의 농경문화의 흔적입니다. 씨를 뿌리고 거둔다고 하는 이것은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의 농경문화의 모습을 그대로 아주 여실하게 사실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목민이잖아요? 유목요, 요즘 들뢰즈(Gilles Deleuze)라고 하는 철학자가 하는 말을 빌리면 노마드(Nomad)라고, 노마드 정신(Nomadism)이라고 해요, 유목민 정신입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계속 떠나는 거예요. 탈주라고도 얘기하고요, 전문적인 얘기로 그렇습니다. 떠나는 거예요. 떠나고 새로운 곳으로 가고, 이게 불안하죠, 어떻게 보면요, 대개 사람들은 한 곳에 안정을 해야 되는데 농경문화는 한 곳에 정착하는 겁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계속 탈주를 하거든요? 상황이 그렇기도 하지요. 한 곳에 앉아서 살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이동을 하는데 그런데 그게 어쩔 수 없기도 합니다만 거기서 어떤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는 거예요. 참 사람이 이상해서요,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건데, 우리는 모든 것을 안정적으로 해야만 풍요롭고 생명을 경험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주 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설정해 놓은 그런 구도 안에서 이게 다 해결 되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본다면 이 유목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집도 없고 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거거든요? 계속 떠돌아다니는 거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떠남, 탈주 이런 것들이 불안하긴 하지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에너지를 공급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쉬운 말로 하면 매너리즘의 극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특이해서 똑 같은 것이 반복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이건 생명을 죽이는 거거든요? 똑 같은 집에서 계속 평생 살아 보십시오. 이게 처음 아파트 그런데 들어가면 편리할 것 같지만 살다 보면 거기에 젖어 버리거든요? 다 시시하게 보입니다. 아, 그런데 노마드는 그렇지 않은 거거든요? 유대인들은 계속 끊임없이 이동하고 떠나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했어요. 그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세속도시>라고 하는 책을 쓴 하비콕스(Harvey Cox)라고 그런 사람의 설명을 따르면 이러한 현대인들의 그러한 삶들이 자동차나 이런 걸 갖고 계속 움직이잖아요? 이런 것들이 이러한 유대인들의 유목민영성과 연관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정확한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유목적인 생활과 달리 가나안 농경문화는 안정감을 제공합니다.

 

유대인들이 거기 가서 그걸 본 거지요. 가나안의 신은 바알이라고 하는데 풍년과 다산을 약속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는 그런 약속을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에게서 그런 경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농사를 지어야 하지요. 그게 아니라 목자처럼 돌보는 것,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부분적으로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신명기에도 그런 게 나오지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에 맞춰서 내려주시고 하는 것들이요, 이런 것들은 다 가나안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5절과 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 그리고 그렇게 씨를 뿌리면 나중에 기쁨으로 곡식단을 가져온다고 하는 이 표현이 가나안 농경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여기서 울면서 씨를 뿌린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니 그냥 눈에 쉽게 들어오는 대로 보면 고생스럽더라도 나중에 좋은 일이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그럽니다. 고대 여러 지역 에서는 씨를 뿌릴 때 우는 의식을 행했다고 합니다. 제가 성서주석을 보면서 참고한 거예요. 오시리스 신을 장례지내는 상징으로 장송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그랬다고 해요. 결국, 우리가 곡식을 나중에 얻는다고 하는 것은 땅에 떨어진 씨가 죽는다고 하는 것 아니겠어요? 죽어야 생명을 얻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씨가 죽는 것 마저 슬퍼하는 영적인 태도예요. 상당히 깊죠, 아주 깊죠, 가끔 TV나 이런데서 다큐멘타리 보면 그런 게 나오더군요. 시베리아라든지, 브라질 열대림에서 사냥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짐승을 잡은 다음에 죽일 때 일정한 의식을 행한다고 합니다. 굉장히 종교적인 의식이지요. 자기들이 키우던 양을 잡을 때도 마찬가지고 다른 데 가서 곰이나 다른 야생동물을 잡은 다음에도 그런 의식을 행하는 거예요.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생계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짐승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겁니다.

 

고대이스라엘의 번제라든지, 여러 가지 종교희생제사 들도 아마 이런 의식들하고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작은 씨의 죽음에도 연민을 느끼는 그런 고대인들의 영성이 오늘 우리들 눈에는 희극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필요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지난겨울에 구제역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만 그게 왜 그런지는 제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들 먹을거리를 수단으로만 생각한 거거든요? 구제역이라고 하는 소와 돼지만 걸리는 병인데 사람으로 말하자면 몸살감기라면서요? 사람 몸살 걸린다고 죽이진 않습니까? 그런데 소나 돼지는 죽인단 말이예요. 그 만큼 경쟁력이 떨어지니까 전염력도 강하고요, 그러나 죽는 소나 돼지는 그렇게 처리한다고 해도 병에 걸리지 않은 것까지 다 잡아 죽이는 것이 다 경제 논리거든요? 이러한 오늘의 현대문명이 정말 건강한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여기 이 집사님께서 아이들 가르칠 때도 생각을 참 많이 해야 될 것 같지요?

 

아이들에게 생명에 대한 연민, 일치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잘 가르칠까, 그런 것 말입니다. 이 오덕 선생님이라고 글도 많이 쓰시고,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경북 저 위 봉화 쪽에서 오랫동안 교장선생님 하시고 우리말 살리기 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던 그 분의 글에 그런 말이 나와요. 아이들이 시골아이들이라고 해서 천진난만하지 않답니다. 굉장히 잔인하고, 너무 이상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하면서 잠자리를 잡아갖고 꼬리에 꽂아 놓고, 잔인하게 사실적으로 말씀 하시면서 비인간화된 오늘의 행태들을 이야기 하더라고요, 우리 현대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커다란 시대의 소비문화 그리고 아주 편리성만 강조하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 드리고 있는 것 같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연민, 그리고 십자가를 지신 약해짐, 그리고 낮은 자리에 처하심, 이러한 하나님을 이야기 하면서도 우리는 이 세계를 다 도구화 시켜버리는, 도구로 이용해 버리고 마는 그리고 또 타자화 해버리고요, 나와 너가 분리돼버린다고 하는, 타자화, 도구화, 또 계량화, 수치로 모든 걸 다 계산해 내는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 평가 할 때도 점수로만 평가한다거나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내냐, 아니냐 하는 것들이 그러한 현상들이거든요? 사람의 그 근본, 본래의 가치를 보는 게 아니라 다른 것으로 도구화 하는 거지요. 제가 여기 본문을 잠깐 설명하는데 나온 것처럼 씨가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에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영성, 그런 사람들이 풍성한 곡식을 얻는다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런 영향을 받은 거예요. 5절과 6절이 잘 알려진 건데, 그러한 내용이 있는 겁니다. 이 가나안문화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그 본질의 문제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그 하나님 신앙이 아주 주변하고는 아무 대화도 안하고 온실 속에서 그렇게 자란 게 아니라 아주 광야에서 이리치고 저리치고 이집트, 바벨론, 가나안, 미디안 광야, 두루두루 여러 종교하고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대화하고 그러면서 아주 고유한 어떤 신앙의 세계를 형성한 거예요. 사실은 기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라는 모판에서 시작했지만 거기서 나와서 주변의 헬라철학 여러 정치 문화 이런 데에서 때에 따라서는 싸우고 때에 따라서는 도움을 받으면서 기독교도 고유한 신앙의 세계를 형성한 거지요. 그런데 본질은 훼손당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본질의 차이가 뭐냐 하면 다음과 같은 겁니다. 가나안 종교는 자연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을 숭배하는 거예요. 씨를 뿌리면 거기서 수 백 배 수 천 배 결실이 나니까 그걸 숭배하는 겁니다. 이집트 같은 데서는 태양을 숭배하고 태양은 모든 민족들이 다 숭배 했었지요? 자연자체가 숭배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고 통치하는 어떤 분을 믿은 거지요. 여호와, 혹은 하나님이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어떤 분’ 하는 게 사실은 가장 정확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 분을 이름으로는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비슷한 건데요? 그렇다고 이 ‘여호와 하나님’, 이 말이 잘 못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더 근원적이고 세계를 창조하신 그 분을 다른 것으로는 말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거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엘로힘’이라고 불렀고, 어떤 사람들은 ‘야훼’이렇게 부르면서 이름들이 조금씩 다릅니다. 거기 구약성서에 하나님에 대한 약간 차이를 두고 전승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얘기인데 접어 두고요, 자연숭배가 아니라 하나님경배라고 하는 것이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거둔다고 하는 가나안의 자연숭배가 오늘 여기 시편 126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승화된 겁니다. 참고적으로 한 말씀만 하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런 영향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러나 거기에서 하나님 신앙이 훼손 된 게 아니라 더 승화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21세기에도 그런 작업들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 거예요. 21세기에는 자연과학이 훨씬 더 인간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자연과학과의 대화가 아니면 그러면 기독교신앙이 왜소해 지는 거예요. 지금 자연과학이 풀어가고 있는 물리학, 생물학, 등등 포함해서요. 그런 생명의 세계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것은 준비를 많이 해야 됩니다. 예, 그러한 준비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소종파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그런데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안 하고요, 예수 믿고 구원받고 열심히 신앙적으로 살고 그러면 되지 않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교회 열심히 다니더라도 생각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가 되면 거기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젊은 지성인들이 교회에 못 붙어 있잖아요. 그런 건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되는데 하지 않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제가 다른 데서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해외 선교사 지금 너무 많이 보내는데 반쯤으로 확 줄이고 선교사 보내는 그 금액을 신학을 위해서, 번역자들을 위해서 쓰는 게 한국교회 미래를 위해서 제가 생각하기엔 훨씬 좋다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신앙의 핵심은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은 뭐, 여기서만 되는 게 아니라 전체 깔려 있는 거지요. 여기 126편에는 그 신앙이 대단히 소박하지만 아주 깊이 있게 다뤄지고 있다고 그래요. 이건 전적인 신뢰가 참 중요합니다. 그게 믿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냐, 믿으라고 하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건 아니예요. 그건 우리 심리적인 차원을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을만한 근거가 늘 있어야 되는데요, 하여튼 강의안을 좀 보십시오.

 

그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행하는 일들이 크기 때문이다, 그냥 낭만적으로 아주 나이브하게 믿습니다, 믿습니다. 사실, 뭣을 믿는지도 모르고 믿고 있는 심리적인 자기에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독교 신앙, 성서신앙은 그게 아니거든요? 신뢰는 신뢰할 만한 어떤 것을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26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크다, 하신 일이 크다고 하는 겁니다. 무엇을 얘기할까요? 크다, 하나님이 크신 일을 행했다고 하는 이것이 출애굽기에도, 신명기에도 많이 나오고, 이건 성경에 많이 나오는 얘기입니다. 크다고 하는 것은 새롭다고 하는 것, 놀랍다고 하는 뜻입니다. 어떤 것을 그들은 본 거예요. 참 이상하죠? 이 세계가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세계가 맨 날 똑 같애, 별거 없어요. 그러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눈에는 늘 그게 애니메이션처럼 늘 새롭게 경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일은 오늘 1절에 이야기하기를 꿈꾸는 것과 같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크고 놀라운 거지요. 이게 지금 꿈이야, 생시야, 하는 정도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겁니다. 놀랍지요? 이제 그런 것도 있어야 그게 영성이고요, 그런 것들이 있어야 이 허무한 세상, 어떻게 보면 그런 세상에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꼭 힘을 얻기 위해서만 아니라 이건 사실이니까요. 우리가 보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꿈을 꾸듯이 새롭고 놀랍게 하나님의 일을 경험하는 것, 이게 영성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포로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하거든요, 바벨론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할 거고 그 전에도 이런 일들은 많았으니까요. 안식년이나 희년 이런 제도들은 노예들이 다 원래대로 돌아가는 그런 제도예요. 그런 것도 다 여기 연결 되어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참 특이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우리들에게 구약성서의 놀라운 영성을 유산으로 물려준 민족이니까 한 편으로는 고맙게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문제들, 그런 건 또 다른 문제입니다만 어쨌든 그런 민족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 있지만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인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놀라운 사실들을 우리들에게 얘기하고 있거든요, 그러한 일을 본 사람들은 2절에 보면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혀에 찬양이 가득 찼다고 얘기합니다. 이 웃음과 찬양은 5절과 6절에서 짚은 대로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는 것 하고 비슷한 거죠, 웃음, 찬양, 기쁨 이런 것들이 126편의 중심에 있는 단어들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크신 일을 본 사람에게 이러한 일들이 있다고 하는 것들이죠. 그런데 사실, 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거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시편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주는 이 사람들은 웃을 일보다 그렇지 않을 일들이 사실은 더 많았어요. 실제적으로요, 늘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이 비옥하다고 합니다마는 우리 삼천리 반도에 비하겠어요?

 

우리에 비해서는 그 가나안 근처 그 부분만 그렇고 다 광야와 같은 곳인데요?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데 그건 과장된 것이고 실제적으로 사람이 편하게 살 만한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종교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들은 그렇게 지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곳에서 사신 분들 같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마호멧트도 그 광야고요, 에베레스트 산 쪽에도 성인 비슷한 사람들이, 거기도 척박할 테고요, 인도? 그래도 거기는 자연이 풍부한데, 예,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별로 좋지 않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살았는데도 웃음, 찬양, 기쁨 그런 일들을 합니다. 그건 현실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 할 수 있는데, 그건 제가 끊어서 말씀 드리기는 힘든데요, 어떻게 말씀 드려야 될까요? 이러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세가 잘 되어 있기만 하다면 김치와 된장찌개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풍요로운 식단이라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경험 할 수 있잖아요? 그게 안 되면 호텔 뷔페에 가더라도 이거 마음이 도대체 짜증스러울 수 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혼이 이렇게 척박한 조건 가운데서도 웃음과 찬양, 기쁨 이런 것을 담아 낼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니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중요한 거지요. 지금 우리가 계속 어렵습니다. 일본의 원전사고도 있는데요, 그게 다 에너지를 우리가 다 풍요롭게 써야 된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후손들에게 원자쓰레기가 어떻게 영향을 끼칠 지도 확실하게 모르면서 계속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전폭적으로 에너지 사용을 줄이지 않는 한 해결의 실마리는 없으니까요. 예, 어떻게 우리가 에너지도 줄이고 먹는 음식도 육식중심에서 조금 줄이고 총체적으로 삶이 살아가는 그 과정이 필요한 것들을 양적으로 줄이지 않으면 해결의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그게 되어 있는 거지요.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본인들에게 웃을 일, 그리고 찬양할 일들을 허락하신다고 하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전적인 신뢰지요.

 

그러니까 이런 전적인 신뢰를 가진 사람은 지금 당장 좋은 일이 있냐, 없냐, 그것에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그건 분명한 겁니다. 예, 이것은 제가 강의안에 쓴 대로 낭만적인 희망은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사람을 살리는 일인지를 우리는 모르고 하나님만 알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 할 때만 이런 신뢰가 가능한 거죠, 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는 사실에 우리의 미래를 거는 거니까 비록 현실적으로 좀 불편한 일들, 잘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웃음과 기쁨과 찬양은 우리 삶에 존재론적으로 자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만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릴 수 있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이죠, 하나님이 크신 일을 하신다고 하는 말의 의미죠, 사람을 살리는 것 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충 되었습니다. 공부할 내용은 정리 되었는데, 마지막 짧게 두 패라그래프를 제가 정리를 했는데요, 잠깐 보겠습니다.

 

시편기자의 희망은 포로들이 ‘남방의 시내들’ 같이 자유를 얻는 데까지 이른다. 남방은 사막이고 광야다. 그곳의 시내는 생명의 젖줄과 같다. 이런 일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가당치 않다. 거기에 사막과 같은 곳에 시내가 흐르게 하는 일들은 자기들에겐 불가능한 거예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오직 여호와께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인 신뢰로부터만 이런 간구가 가능하다. 이러한 간구가 요한 계시록 같은 데에 보면 다 나오는 거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들, 사람의 힘으로써는 불가능한 그러한 새 예루살렘에 대한 희망이예요. 그리고 예언자들의 예언에도 그런 희망들은 많이 있습니다. 어린 양들과 사자들과 어울려 있고,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하는, 그러한 희망들입니다.

 

마지막 패라그래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런 신뢰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다 이뤄진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은 늘 참된 것이 아니다. 그거야 뭐 우리가 다 인정하는 바죠? 옳은지 아닌지도 모르고 무조건 구하니까요, 오히려 우리를 헤치는 경우도 많다. 참 우리가 어리석은 것 같아요, 주기도에 나오듯이 하나님의 뜻을 기대하는 것이 참된 신뢰가 아닐까, 마치 어머니 가슴에 안긴 아이가 자신을 어머니에게 완전히 맡기듯이 말입니다. 이런 신뢰가 없으면 초조하고 불안해서 세상을 못 삽니다. 자꾸만 불안하니까 그걸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른 자극적인 것을 성취하려고 무지하게 우리가 애를 쓰거든요, 이건 악순환입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분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들은 바고요, 그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26편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경험하고 거기서 하나님을 참되게 신뢰하는 고대 이스라엘 신앙을 보았습니다. 주님, 지금 우리가 조금 잘 사냐 못 사냐 하는 것에 우리의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누가 나를 인정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해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집중하게 주님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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