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7편 강해-헛되도다

 

시편 127편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내용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예, 오늘 공부 제목을 “헛되도다”이렇게 잡았습니다. 사실은 헛된 거가 핵심주제라고 할 수 없겠지요? 간접적인 주제예요. 그러나 또 그걸 모르면 오늘 본문을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한 번 정했습니다. 헛되도다! 아마 이 ‘헛되도다’ 이 단어를 보고 전도서가 기억나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전도서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한 번 읽어 볼까요? 전도서 1장 2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고 하는 말이 다섯 번 연속되어 있습니다. 해 아래서 사람이 행하는 일이 그 만큼 근거가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서가 기본적으로 니힐니즘은 아니예요.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지요? 그건 뭐, 생각할 필요도 없죠? 성서가 허무주의가 아닌 이유는 가장 핵심적으로는 이 세상, 이 삶,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는 허무는 없어요. 그게 개입 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전도서 기자가 헛되다고 얘기했고 또 우리가 오늘 같이 공부할 시편 127편 기자가 이 헛되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을까, 그러한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공부하면서 천천히 드러날 거예요. 본문이 짧죠, 1절에서 5절까지 있는데 이게 둘로 나눠져 있습니다. 짧은데 서로 다른, 이질적인, 물론 완전히 이질적인 건 아니지만 딱 연결되지는 않은 하나의 시편 안으로 끌어 드리기에는 좀 곤란할 수 있는 내용 이예요. 1절과 2절은 방금 말씀 드린 헛됨에 대해서 얘기하고요, 삶의 헛됨, 이 둘의 긴장을 잘 생각하셔야 되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고, 하나님의 모든 통치가 깃들어 있어서 이건 정말 중요한 사항인데 다른 한 편으로 그 곳에 허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긴장이거든요? 허무하다고 하는 것, 그 깊이로 들어가는 것은 순전히 허무주의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딛고서 더 근원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거지요.

 

1절과 2절은 허무하다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고요, 다른 한 토막은 3절에서 5절까지인데 이 구절은 가정이 생존 밑바탕이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자식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거든요? 굉장히 어떻게 보면 세속적인 기대감,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두 대목 시편구절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거라고 하는데요? 그 이유는 이 두 가지가 지혜의 말씀으로 묶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허무하다고 보는 것도 지혜고요, 그리고 가족, 가정 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지혜다, 그런 차원에서 이 두 시 구절이 한 편으로 묶였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야기인데 ‘지혜’라고 하는 관점으로 묶어낸 시편이 127편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로 앞 대목을 볼 생각입니다.

 

1절과 2절, 이게 중요한 거예요. 시편기자는 인간이 행위가 헛되다고 하는 것, 그냥 있으면. 이미 답은 나왔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을 때에는 헛될 수 밖 에 없는 인간의 행위를 1절에서 두 개 이야기하고 2절에서 하나 이야기 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세 개예요. 1절을 우리가 먼저 보는 데 여기에 두 가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예요. 그대로 나온 겁니다.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하는 거예요. 집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자기 거처를 마련하는 거잖아요? 안전하게 거기서 살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 머릿속에 그림들이 그려지고요, 고대 유대인들도 어떤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집을 마련하고 짓는 것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사람 들에게는 자기소유의 집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잖아요?

 

그게 거처하는 공간으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투기의 대상까지 가기 때문에 우리 한국사람 들에게는 조금 왜곡 되어서 자리를 잡혀 있는 거죠, 어떻게 하면 그걸 극복해야 할 것 같은데 그 길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집을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고 거처의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되는 거거든요? 그게 소유까지는 괜찮고, 아까 말씀 드린 투기까지는 가지 말아야 되는데 여전히 거기 가 있습니다. 특별히 서울 강남 이런 지역에 집값이 무지하게 비싸지 않습니까? 아마 거기 아파트 한 채 팔면 여기 대구 오면 서 너 채도 더 살지 모를걸요? 10억,20억 한다고 하니까 말이지요. 크지도 않은 건데 그렇습니다. 그게 다 왜곡현상인데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고대 유대인들도 집을 세우는 것은 큰 일 이었거든요? 그리고 모든 경제활동도 집을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얘기 하듯이 저도 거기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헛된 일입니다. 집은 언젠가 되면 허물어지거든요? 자기가 살려고 전원주택을 수 억 원, 수 십 억 원 들여서 짓는다 하더라도 인간이 거기서 얼마나 살겠어요? 잠깐 살다 가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짧은 거구요. 죽은 다음에 자기가 이고 가는 것도 아니고요, 답이 뻔하게 나오는 대답인데도 마치 거기에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우리가 매달려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 헛된 거죠, 사 말하자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니 잠깐 생각해 봐도, 참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냐, 오늘 현대사회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집이 없으면, 시골이나 여기 변두리는 좀 괜찮습니다만 서울 같은데는 전세 값이 폭등하고 1년 사이에 몇 천 만원씩 뛰고 한다니까 말이지요. 자기 집이 없으면 불안 한 것,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게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긴 한데요?

 

그래도 우리가 근본만은 놓치지 말고 있어야 되는 게 아니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 자체로는 헛된 거다, 다 빠져 나가는 것에 불과하다, 예, 다른 하나는 1절에 나와 있는 바로 두 번째 항목인데요? 파수꾼의 일입니다. 파수꾼의 일, 성을 지키는 일을 파수꾼이 하잖아요? 파수꾼이 성을 잘 지켜야 안전하고 또 주민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재산을 보존하는 거죠, 잃을까봐 계속 우리가 신경을 쓰는 겁니다. 뭐, 오늘 우리들도 그렇게 삽니다. 자기재산을 조금이라도 잃지 않거나 확보하려고 잠자지 않는 파수꾼처럼 살거든요?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이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하면 사실은 그런 노력들이 허무할 수 밖 에 없습니다. 예, 우리가 도사가 아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으로서 재산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맘에 여유가 있다는 걸 우리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좀 다른 문제거든요? 현실에서도 우리가 살긴 하지만 그 현실이 가지고 있는 허무, 그 부질없는 것, 그건 알고 있어야지요. 아무리 그 안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걸 놓치게 되면 우린 맹목적으로 살게 되거든요?

 

예, 그런데 영적인 시각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금 말씀 드린 그 두 가지 허무한 행위, 집을 세우는 수고와 성을 지키는 일, 이것을 우리가 허무한 거니까 게을리해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아 갈 수 없고 그렇게 게으르게 사는 것 자체를 합리화 할 수 없는 거예요. 아마 이 127편, 시편을 읽었던 고대 유대인들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을 겁니다. 집 짓는 것, 열심히 지어야지요. 그리고 파수꾼일도 잘 해야지요. 그런 것 하지 않고 하나님만 찾는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현실 삶에서는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완전히 사막의 교부들처럼 현재 삶을 다 포기하고 산다면 모르지만 저자거리에서 이렇게 부대끼면서 가족과 함께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일에는,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 일은 열심히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도 상대화 할 수는 없습니다.

 

제 강의안에는 수도원의 수도사들도 그 일상은 무시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는데요, 그들은 특별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우리처럼 돈을 저금한다거나 부동산을 자기이름으로 등기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런 일들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탁발 수도를 하든지, 어떻게 해서든 노력을 해야 하거든요? 수도원 같은 데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일을 한다고 하잖아요? 하나는 노동합니다. 그들이 실제적으로 밭을 갈고요, 소를 키우고 젖을 짜고 육체노동을 합니다. 수도사들이라고 해서 육체노동 안하고 가만히 정신노동만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거고요, 기도, 찬송 이런 것들이요, 두 가지가 우리 시장바닥에 사는 우리하고는 구별된 곳이지만 거기에서도 일상은 소중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상을 포기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말씀 드린, 1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그 두 가지, 집을 세우는 것하고 성을 지키는 일은 치열한 일상의 일이거든요?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포기 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고, 이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에 다 드러나기는 했습니다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겁니다.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염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그런 것 말이지요.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입을까, 이건 필수적인 요소예요. 그것을 벗어난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서 서로 노력해야 되고 농사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협조해야 되고, 당연합니다. 생존의 기초들이예요.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는 거고, 문제는 그것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삶을 소진하는 겁니다. 그 두 가지를 구분해야 됩니다. 일상을 치열하게 사는 것 하고, 그것으로 염려하는 것 차이 말이죠, 아주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일상을 치열하게 사는 것, 이건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에서 간접적으로 이미 전달이 됬습니다만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되고요, 자동차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노동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되고, 전업주부들은 가정 일을 잘 해야 되고요. 하여튼 각각의 일들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정말 거기에는 말 그대로 치열하게, 자기의 일이 힘들어도 그런 일을 해야 되는 거지요. 삶의 요소들입니다. 그것까진 참 좋은 건데, 오늘 우리들은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아니 그렇게 살지도 못하지요. 치열하게 살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염려하며 사는 거거든요? 그건 아주 큰 차이입니다. 목회도 비슷하게 적용되지 않을까요? 목회자들이 열심히 교회 공동체를 돌보고 끌어가는 거하고 그게 목적이 되 갖고 염려해서 들들 볶는 식으로 어떻게 하는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데 이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걸 우리는 구분하고 살아야 합니다.

 

2절로 넘어가면요, 여기에 헛된 일상의 세 번째 항목이 거론됩니다. 수고의 떡이 헛되다고 얘기합니다. 표현이 재미있어요.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다고 하는 것,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런 것들은 앞서 말씀 드린 일상의 치열한 모습이라기보다도 매달리는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고대인들의 어떤 문학적인 표현으로 여기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일찍 일어나서 늦게까지 계속해서 일만 하는 것,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OECD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의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가 근면해서 그런 걸까요? 그런 부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다르게 보면 거기에 너무 매달리는 거예요. 아참 그렇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건데요? 적절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하여튼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해서 자기 삶 전체를 돈 버는 데만 집중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지금 대통령도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하게 일한다고 자랑하고 있거든요? 이런 것들이 자랑할 거리도 아니고 사실은 대통령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방향만 제시해 주면 되고, 일은 참모들이 해야 되는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 갖고 지금 장관이나 비서진들이 소신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한 말씀 드린 거예요. 하여튼 너무 부지런해서 문제가 되는 게 많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참 부지런하지요? 한국 그리스도인들 정말 부지런하지요? 여기 우리 모인 사람들도 부지런한 사람들인가요? 수요일 날 힘든데 이렇게 모였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부지런한 게 아니라 최소한도 나와 있는 겁니다. 정말 여기 표현한 대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정말 수고합니다. 예, 제가 그걸 냉소적으로만 말씀 드린 건 아니예요.

 

거기 열정이 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들을 전제하면서 그 근본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자칫 자기 열망에 빠지는 거고 자기 학대고 자기 확신에 빠질 수 있는 거예요. 그 자체가 불행한 겁니다. 사실은요, 남는 게 없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서 세계 경제대국이 되고 있는데 지금 자살률이 제일 높잖아요, 학생들 중에서 특히 자살률이 높다고 그러네요. 우리가, 카이스트 대학, 대학원인가요? 금년 들어 3명이나 죽었다고 하네요. 경쟁압박이 너무 심해서 견뎌내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심리적으로 약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제도적으로 그걸 느슨하게 여유를 주면 목숨을 끊지 않거든요? 여러분들이 보셨는지 모르지만 카이스트 총장이 성적 떨어지면 등록금 내게 하고,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뭐, 하긴 초등학교서부터 학생들을 들들 볶는 식으로 우리가 나가고 있고요, 중국 속담에 의하면 호랑이 등에 탄 격입니다. 달려가기 때문에 이제 내려 올 수가 없어요.

 

이렇게 몇 십 년 지나면 다 정신병 걸리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요. 그래도 뭐, 돈 버는 재미도 있고, 옛날에 가난하게 살다가 문화도 즐길 수 있고 하니까 이것도 재미있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게 계속 나가게 되면 축적 되서 대한민국 전체국민이 정서적인 불안으로 깊숙이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예, 이런 점에서 교회만이라도 조금 천천히 갑시다, 더 근본을 생각합시다, 그런 차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이 사회를 주저앉혀야 하는데 옆에서 더 하게 만드니까 지금 우리는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론 아주 가난 할 때는 먹고 사는 것 자체가 힘들 때는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때는 그렇게 좀 뛰어야죠, 어떻하겠습니까? 안 하면 당장 굶어 죽는데요? 그러나 이제 우리 대한민국정도 되었다면 조금 속도를 늦춰도 얼마든지 속도를 늦추고 분배를 하고 복지를 좀 하고 기초학문을 더 쌓고 말이지요. 이런 식으로 되어야 좀 더 멀리 나갈 수 있는데 이게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해야 될까요?

 

여기 말씀이 참 재미있는 표현이라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고 일만하고, 그렇게 하고 수고했다고 먹는 것, 이게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것이 헛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재미있는 표현인데요? 그게 이제 수고의 떡이라고 했잖습니까? 수고의 떡, 수고의 떡 하면 앞에서 수고 했으니까 그 만한 떡을 먹어야지 그렇게 될 수 있는데 그게 염려의 떡이라고 보는 게 정확합니다. 그러니까 먹고 있는 게 걱정거리예요. 마틴 루터가 번역한 시편 그 구절을 보니까 염려라고 되어 있더라고요. 우리말로 된 건 수고인데 조르게(Sorge)라고요, 염려 떡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염려, 주식 값이 올랐냐, 내렸냐 라든지, 전세 값이라든지 아이들 교육경쟁, 그리고, 하도 많이 반복 되서 뭐, 말할 거리도 없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학교 갔다 와서 두 군데, 세 군데 계속 사교육 받고요, 어린 아이 때부터 계속 염려 하는 것, 이런 게 정말 떡이겠냐, 우리를 살리는 떡이겠냐, 아니면 염려, 걱정거리지 않냐, 그건 헛된 거죠, 성서가 말하는 건, 헛되다.

 

지금 그런 것하고는 달리 여호와와 연관된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잠을 주신다,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니까 잠을 잘 수 있는 거예요. 실제적인, 생리학적인 차원에서 하루 8시간, 9시간 잔다, 그런 것은 아니고요, 참된 휴식, 안식을 갖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염려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는 겁니다. 예, 우리가 실제적으로 일상으로 살아가는 건 똑같습니다. 하루 세 끼 먹어야 되고, 뭐, 이런 등등 여러 가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염려로 채우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똑 같은 어려운 일들이 있긴 있겠지만 거기서 참된 안식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차원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뭐, 우리가 쉽게 신앙적으로 얘기해서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긴다, 그런 얘기가 될 수 있겠고요, 예,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하고 연관되지 않을 때 혹은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아닐 때, 우리가 그 분의 손에 붙잡힌 게 아닐 때, 우리가 하는 모든 열정적인 그러한 일들은 결국은 헛되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조금 설명을 하긴 해야 될 텐데, 여러분들이 이해하신다 생각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하냐면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고 하는 것이 어떤 뜻이냐라고 하는 거예요. 그건 더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우리의 모든 일상이 헛된 삶으로 빠질 수 있고요, 참된 안식, 참된 쉼, 이런 쪽으로 이끌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시는 그러한 영적 안식에서 우리 삶을 생각해야 되겠지요. 그건 모든 삶이 다 그런 거니까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자식교육부터 우리의 노후문제까지 현재 삶까지 다 그렇습니다.

 

예, 두 번째 대목은 3절에서 5절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첫 번째 대목하고는 다른 성격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식들 이야기네요. 자식은 여호와 기업의 태이고 등등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가정, 자식들이 있고, 가정이 행복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유대교의 국가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가정마다 자식들이 있고, 그래야 국가가 살아 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국가가 튼튼하게 되는 법이거든요? 그런 것을 뭐라고 할까? 속담 비슷하게 여기에 기록한 겁니다. 고대 유대인들의 가족관이예요. 국가관입니다. 그걸 우리들에게 똑같이 적용 시킬 수 없습니다. 그 당시하고 지금하고 국가가 뭣이냐, 하는 것도 다르고요, 개인의 삶의 의미, 이런 것도 다른 거고요, 또 결혼이다, 뭐다 이런 것도 다 다른 의미이기 때문에 성서 시대에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어떤 그 형식들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 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구약을 넘어서서 신약의 차원으로 본다면 궁극적으로 가깝게 핏줄을 나눈 가족을 뛰어넘어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예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또 국가를 뛰어 넘어 온 가족이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실로 나가야 합니다. 예,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긴장했습니다. 우리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있으면서 그걸 넘어서 온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긴장입니다. 독도문제로 인해서 일본하고 어떤 긴장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입장에 서야 될까요? 당연히 우리 한민족이라고 한다면 독도는 우리 땅, 이렇게 해야 되는데, 더 궁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우리 것도 아니고 일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서요. 그걸 그렇게 국가주의적인 차원에서 무조건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독도, 글쎄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지금 우리 정부에서 거기에 시설을 많이 설치하겠다고 얘기하거든요?

 

실효적지배(實效的支配)를 위해서 거기에다 이런저런 건물도 많이 짓고 철제빔을 통해서 우리 것이라고 하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꼭 그렇게 해야 될까 하는 생각이 저는 듭니다. 독도는 독도대로 놔두고 일본이 잘 못 된 것은 학문적으로, 그리고 국제법적으로 우리가 논리를 제시하면서 거길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까 큰 문제도 아니고요, 그런 쪽으로 나가는 게 낫지, 거기 있는 외따로 나와 있는 섬에다가 자꾸만 인공으로 지어 놓는다고 하는 게 크게 바람직할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그리스도인은 온 세계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고 하는 그 전제 안에서, 그리고 한 민족이라고 하는 특성, 이런 것들을 어떻게 균형 맞게 해 나가냐, 참 생각할 꺼리 입니다. 그런 점이 있는 거고요, 오늘 이 9절을 설명한 겁니다. 다른 한 편으로 이 말씀, 간접적으로는 앞 대목과 연관이 됩니다. 앞 대목이 집, 재산 노동, 이런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연관 될 때에만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헛되다고 말한 거잖아요?

 

지금 바로 여기서 드린 말씀 드린 대목은 가정도 마찬가지라고 하는 겁니다. 뭐라고 그랬어요?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호와의 기업이 되어야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자체로써가 아니라 창조자, 여호와 그 분의 기업이 될 때에 의미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앞대목하고 뒤대목이 서로 연결되는 거지요. 예, 오늘 우리의 삶은 사실 오늘 공부의 제목처럼 헛됩니다.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사랑했어도 다 지나가고 열망들도 다 지나가고, 또 아무리 다 그래도 한 사람은 먼저가고 또 가야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랑도 다 그런데 다른 물질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아무리 집이다, 뭐다, 다 오죽하겠습니까? 예, 그렇다고 해서 허무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것의 한계를 우리가 인식을 하면서 이 궁극적인 생명의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러한 삶을 유지해 나가야만 의미가 있다, 헛됨을 벗어 날 수 있다, 그 뜻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 전, 고대 유대인들의 시편 127편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해 아래서 행하는 그 모든 일들, 집을 세우고 성을 파수하고 일찍 일어나 떡을 빚어서 먹고 하는 일들이 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그런 것들은 지나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우리의 모든 일상들이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