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8편 강해-복 있는자

 

시편 128편 1절부터 6절까지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3.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5.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아멘! 이 시편 128편은 127편하고도 비슷한 점이 있어요. 127편 3절에 보면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여호와의 기업, 또 태의 열매, 그의 상급, 이런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 128편에도 아내, 그리고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네요. 오늘 제목을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작을 하죠, 복이 있다, 복에 대한 축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약성서의 팔복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복 있는 자”라고 하는 제목입니다 제가 준비를 하면서 다른 걸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1절을 그대로 따르는 건데 “여호와 경외와 구도“ 그의 길을 걷는다고 하는 게 구도적인 삶이니까요. 두 가지가 그것도 오늘 말씀의 핵심주제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오늘 ”복 있는 자“라는 제목으로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어요. 이 고난 주간이라고 하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가 인류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절기죠.

 

우리가 교리문답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알고 있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게 실질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늘 질문하셔야 되요. 사실은 이 문제만 만은 아니죠, 기독교 교리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가 교리로써 알고 있는데 그 창조의 영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냥 교리로 아는 차원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이 세계가 없지 않고 있다고 하는 사실,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 그런 어떤 충격, 인식의 근원적인 전환, 이런 게 없으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는 말은 사실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외의 모든 기독교의 교리가 그런 거예요. 칭의론도 그렇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로워진다고 하는 이야기, 늘 들은 구구단과 같은 그런 교리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주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요, 죄라고 한다면 대개 실정법을 어기냐 아니냐, 그런 정도의 차원에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도덕, 습관, 이런 걸 얼마나 지키냐, 안 지키냐에 따라서 이렇게 죄다 아니다 얘기하는데 성서가 얘기하는 죄는 더 근원적인 거거든요? 이런 칭의론, 창조론 등등 기독교 교리 전반이 사실은 우리의 삶과 분리 되서 따로 놀 수 있습니다. 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이 고난 문제도 마찬가지거든요? 현대인들은 누가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런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굳이 인간을 구원하시는데 고난과 십자가를 선택하신 이유가 딱히 없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한다면 말씀으로 세계를 구원할 수 있잖아요? 병이 없어지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다 해결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그냥 줄 수 있고,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일단 이렇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말이 안 되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 겁니다. 기독교 교리는 이런 상식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건 아니예요.

 

그걸 연결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무턱대고 기독교 교리를 그냥 주장만 하게 되면 결국은 우리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상식적인 그런 것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정신적으로 분열 증세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이건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른 주제니까요. 제가 오늘 여기서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이런 고난과 십자가의 영성이 별로 진지하게 받아 드려지지 않는 세태에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야 되는 것처럼 ‘복 있는 자’라고 하는 이 시편이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냐고 하는 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는 거죠. 예, 강의안에 있습니다마는 시편에는 자기가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해 달라고 하는 탄원도 있고요, 시편 109편 22절을 제가 잠깐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복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이게 서로 상반되는 것 같은데 사실은 크게 다른 건 아닙니다.

 

예, 서론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시고, 128편이 복을 이야기 하는데 그게 뭔가, 본문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저는 세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이건 성서학자들이 주로 이렇게 나누고 있기 때문에 그걸 따른 겁니다. 1절이 한 대목이고요, 그리고 2절에서 4절이 한 대목이고 5절과 6절이 한 대목입니다. 1절이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를 끌어가는 키(Key), 테마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1절만 주석하더라도 오늘 공부로써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기독교에 대해서 그리고 성서에 대해서 가르쳐야 되잖아요? 꼭 목사, 전도사만이 아니라 일반 신자라도 자녀들이랑 성서에 대한 대화도 해야 되는 거고요, 이렇게 저렇게 평신도 지도자로 살려면 성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나름대로 시각이 있어야 되거든요? 이런 말씀들을 허투루 생각하지 말고요, 좀 더 실질적으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아, 두 가지가 필요하겠군요. 하나는 이런 성경구절을 신학적으로 일단 이해를 해야 되고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네요, 지금까지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 역사를 일단 알아야 되고요. 그거는 이 텍스트 자체에 대한 이해입니다. 두 번째는 오늘 내가 살아가는 삶과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됩니다. 연결시키는 것은 단지 QT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아니고요, 핵심은 이 성경 말씀에 놓는 거고요, 그것이 우리 일상의 내용하고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을 깊이 있게 보자고 하는 겁니다. 두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로는 교회 목사님들이나 지도자들, 일반 평신도들도 마찬가지고 이 두 가지 문제를 다 소홀하게 대합니다. 그냥 거의 들은 풍월에 머물러 있어요. 이 말씀들이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끌어가는, 추동한다고 그러지요? 혹은 견인한다, 그런 힘으로 작용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1절만 보세요. 1절을 여러분들이 오늘 우리 같이 공부하지만 나중에 집에 가서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복이 있는 사람 얘기하잖아요? 복이 있다, 얘기하는데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하잖아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또 그의 길을 걷는 것, 경외한다고 하는 것하고 길을 걷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떠세요?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다고 한다면 이렇게 굳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경외하는 것 자체가 사실 은 어려운 문제거든요? 경외한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 하는 거예요. 그냥 낱말 뜻으로 본다면 경외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높이고 두려워한다’ 그런 뜻입니다. 외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을 하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생명외경사상’으로 아프리카에서 활동하지 않았습니까? 그거는 사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거예요. 생명경외, 외경입니다. 그게 슈바이처라고 하는 사람의 영혼을 끌어갔기 때문에 자기가 확보 했었던 여러 가지 학위, 신학박사, 또 파이프 오르간 박사, 철학 등등 정말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굉장히 인정을 받을 만한 그런 것들을 쉽게 접어 둘 수 있는, 정말 작은 거니까,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사실 속으로 우리가 뛰어 들어간다고 하면 다른 건 다 작게 되는 거예요. 말하자면 숨을 쉬는 거하고 비슷한 거예요. 숨 쉬는 것, 이것보다 더 절대적인 것 있어요? 친한 친구나 가족이나 이런 건 다 두 번째입니다. 사실은, 이 숨 쉰다고 하는 것, 고대인들이 성령을 가리켜서 숨이라고 생각했잖아요? 루아흐라고 하는 숨, 그 상태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그냥 자기 주관적인 확신, 자기연민, 그런 것하고는 전혀 다른 겁니다. 이건 오빠부대를 쫒아 다니는 소녀들의 센티멘탈리즘, 종교적인 센티멘탈리즘이 아니고요,

 

어떤 생명과 존재하는 것과 우주와 시간과 이 모든 것의 심층에서 활동하는 하나님 통치와의 일치거든요, 이런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끌어가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일치, 그럴 때 이제 경외가 가능한 거지요. 그러니까 이게 그냥 되는 건 아닙니다.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경외할 수 없습니다. 보통 그런 것 있잖아요? 열정적으로 예배드리고, 열정적으로 봉사하고, 단기선교 떠난다, 이런 많은 것들 있잖습니까? 그건 여호와 하나님 몰라도 가능한 거예요. 사람은 이상해서요.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요? 자기에 대한 집착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은 이러한 포즈, 이러한 시늉도 얼마든지 취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때도 한 번 인용한 구절입니다만 사도바울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대단한 거잖아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 산 같은 믿음이라고 하는 복음성가도 있듯이 그리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대단한 자기희생이잖아요? 그걸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얘기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말한 게 참 신비롭지요?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 뭘까? 이건 하나님의 존재론인데요,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없어도 사람에게는 그런 열망이 가능하다, 우리가 무조건 신앙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 때에 따라서는 사람이 교회에 열정적인 게 필요하기도 해요. 너무 밋밋하고 열정이 전혀 없이 교회가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그런 요한계시록의 표현대로 따르면 그런데 머물러 있어도 문제이긴 합니다만 제가 지금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열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니다, 하는 거지요. 예, 이걸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삶, 삶 있잖아요? 삶, 생명이라고 하는 거예요. 굉장히 신비롭지 않습니까? 밥 먹고 소화시키고 그런 것으로 생명이 다 들어오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사랑과 미움과 그리고 창조와 종말에 이르기까지 다 연결되어 있는 정말 깊이 있는 그런 것인데 그 생명을 계량화하고 계량화라고 하는 것은 숫자로 계산한다는 거데요, 저 사람은 월급 얼마짜리, 예를 들면 그런 식이죠? 도구화 하는 것, 저 사람을 잘 이용해서 잘 해야지, 순전히 그런 방식으로 이 현재 세계가 돌아가잖아요? 사실은 교회 안에서만 해도 그런 건 많습니다. 나쁜 뜻이라고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로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우리가 그런 데 철저하게 젖어 버렸기 때문에 이런 상태에서는 경외의 세계에 들어가기는 힘듭니다. 예, 1절의 두 번째 항목은 그의 길을 걷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길을 걷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건 그런 삶을 구도적으로 추구한다고 하는 겁니다. 求道, 길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구도, 이게 없으면 우리의 삶은 정말 뼈다귀만 남아요.

 

형해화(形骸化)된다고 그러거든요? 정말 살벌한 거지요. 무미건조하게 되고요. 이게 과정 이예요. 도, 길을 찾아가는 과정, 예술가들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림을 그리거나 시인들이나 음악을 하거나 계속해서 어떤 근원적인 세계를 향해서 구도적인 자세가 안 되면 금방 표시가 납니다.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쉽지 않죠, 목사들도 쉽지 않지만 일반 신자들은 더 하죠, 금방 세상 속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는데, 세상은 완전히 다른 방식, 매카니즘이 다르잖아요? 계속해서 들들 볶고 어떤 경쟁력을 찾아내야 되고, 그런 쪽에서만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구도, 정진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아요, 하여튼 우리 삶이 척박해집니다. 그러니까 일반 평신도들은 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이렇게 하나님 경외, 아시죠?

 

하나님 경외 두렵고 떨림, 생명의 근원 앞에서의 떨림들, 이 세계가 돈과 물질 이런 것으로 다 정리되지 않은 더 근원적인 사태가 있다고 하는 그런 것을 알고 거기에 대한 두려움과 경배하는 자세를 갖고 사는 그런 삶들이 매일 매일의 삶의 과정으로 나타난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얘기하잖아요? 이 말이 거꾸로 어떤 뜻인지 알죠? 다른 건 복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인 거예요. 사실은요. 예, 그게 1절이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이 전체아래 구절을 끌어가는 핵심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 째 단락은 2절에서 4절입니다. 시편기자는, 전체가 짧은 구절이죠, 그래도 굉장히 짜임새 있게 얘기를 잘 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4절까지 나오는 이야기는 복 있는 사람의 삶을 노래하는 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요,

 

그 복 있는 사람의 삶이 예상외로 평범한 대단한 게 아니예요. 우리가 그런 얘길 듣긴 듣죠, 뭐, 인생이 대단한 거 아니다, 그냥 일반 세속적인 그런데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요, 신앙적으로도 우리 일상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는데 그런데서 참된 영성을 알고 사는 사람들은 많이 없습니다. 2절에 보면 그런 얘기를 하잖아요? 2.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별거 아니네, 복이 있는 게, 말하자면 노동의 대가를 어느 정도 받고 오래 사는 것 이런 정도, 크게 출세한다거나 사람들에게 이름을 많이 날린다거나 그런 걸 이야기하지 않아요. 시편 다른 어디에는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많지도 않을뿐더러 오늘 여기 128편을 중심으로 본다면 전혀 그런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지요. 이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앞장서게 출세해서 좋은 일이 벌어지게 한다는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크게 실망을 할 거예요.

 

이건 이 구절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걸 빨리 벗어나야 되요. 한국 교회에서는 자꾸만 그것을 강조하죠? 예수 믿으면 잘 안 되는 것도 잘 될 것처럼 얘기하고요, 하여튼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된다거나 그런 표현들입니다. 그것도 성경구절에 있긴 있지만 그것도 어떤 상황이 있어서 나온 이야기인데 그걸 무조건 토막만 끊어다가 굉장히 앞장서는 삶만이 괜찮은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 못 인거죠, 간단하게 노동의 대가로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로만 지금 얘기하고 있어요. 이건 틀림없이 성경 구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돈 많고 출세해서 행복했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비슷하게 신나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건 다 허위의식이 틀림없습니다.

 

3절, 이렇습니다. 3.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모든 복 있는 삶의 내용이거든요? 이것도 평범한 일상입니다. 대단한 것 아니잖아요? 그냥 가족이 둘러 앉아서 식사 나누고 같이 가족들이 앉아 있는 겁니다. 여기서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고대 유대인들에게서 실제적인 삶이나 종교적인 차원에서 큰 의미가 있었어요. 포도나무에서는 포도주가 나오고 감람나무에서는 감람유가 나옵니다. 이 두 가지가 고대인들에게는 삶의 소중한 그런 도구였어요. 포도주하고 감람유가 그렇습니다. 지금 4절에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거지요. 4.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이게 성서가 말하는 복은 이와 같이 평범하다, 일상적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사회적으로 큰 능력을 발휘하거나 그런 사람들의 삶은 무의미 하냐, 절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런 형편이나 저런 형편이나 다 주어진 거예요. 그것은 뭐, 살아가는 과정이니까 운이 좋게 큰 자리에 올라 갈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낮을 자리 갈 수도 있고요, 그것은 신앙하고는 직접 관계가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의 일상, 아주 소박하다고 생각 할 수 있는 그 일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확인 할 줄 아는 그리고 그 복을 누리며 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지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일상이 매너리즘에 빠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은 어쩔 수 없습니다. 똑 같은 것들이 반복되면 못 견딥니다. 그 어떤 것이나 다 마찬가지예요. 옛날에 비하면 지금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편해졌습니까? 저도 어렸을 때 먹을 끼니가 없어서 식은 밥을 죽 같이 만들어서 형제들 나눠먹던 일이 있거든요? 대개 우리 60년대,70년대는 많이들 그랬습니다. 그 때는 소고기 국 정말 그거 한 번 먹는 게 몇 달에 한 번 될까요? 얼마나 그게 맛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특별한 경우 아니라면 성실하게 살면 그런 거 걱정 안하는 시대가 되었단 말 이예요? 그러나 그런 일상이 똑 같이 반복되면 그것을 사람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일상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러한 일상의 반복되는 삶의 뭐라고 할까요? 지루함이라고 할까? 사람들은 그걸 많이 느끼잖아요? 그걸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이거는 굳이 제가 여러분들에게 대답을 드릴 필요도 없죠, 오늘 본문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1절로 다시 돌아와서 여러분들이 보시면 되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구도적으로 걸어가야 됩니다. 이걸 우리가 어떻게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일상을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받아 드릴 수 있을까요? 그래야만 이게 새로워지거든요, 그러니까 밥은 똑 같이 먹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영성은 성장할 수 있어요. 점점 어른이 되면 그게 맛있는 거예요. 그게요,

 

우리의 겉모습은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자리 모습 하는 게 다행이예요. 제 자리 모습 못 하죠, 사도바울이 그대로 얘기했군요. 우리 겉모습은 후패(朽敗)합니다. 늙어갑니다. 아무리 그걸 뜯어 말리려고 해도 되지 않고요, 그건 일상 자체가 지루한 거예요. 그 겉모습만 보면 그렇습니다만 맨 날 먹고 자고 쓸고 배설하고 이모저모 사는 데 신경 쓰고 다 똑 같잖습니까, 예, 우리 영혼은 하나님의 경지까지 성장할 수 있거든요, 그런 표현도 신약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까지, 바울의 표현처럼, 우리의 속사람은, 영혼은 나날이 새롭게 성장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할 텐데요, 가능하다고 봅니다. 삶의 방향을 그런 쪽으로 일단 바꿔야 해요. 그런 게 있다고 하는 걸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딱 멈춰 버려요. 대개 보면 평생을 신앙생활 하더라도 영성이 자라는 사람들을 보기는 참 힘들어요. 장로가 아니라 장로 할아버지가 되도 오히려 딱딱 해지기만 하지 경직되고 율법적으로는 되지 정말 영혼이 순전해지고 더 풍요로워지고 그런 사람들을 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 방향이 잘 못 돼서 그런 거지요.

 

마지막 단락 5절과 6절입니다. 축복의 기원입니다. 일종의 축복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복이 국가의 차원으로 연결됩니다. 앞의 2절에서 4절까지는 일상에 있는 것이고요, 5절과 6절은 국가까지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이것도 복있는 사람의 모습이거든요, 예루살렘, 그리고 6절에 보면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이렇게 하죠? 후손이 번성한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의 평강과 연관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식이 있어야 국가가 존립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이스라엘의 평강이다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2절에서 4절까지의 개인과 가정 중심의 일상이 복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5절과 6절에는 국가의 차원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을 두고 이걸 일종의 국가주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 국가가 그렇게 중요하구나 생각하면 안 되죠, 결국은 국가도 다 해체됩니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보면 대한민국, 일본, 중국,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 민족이라고 하는 게 중요하지 하나님 나라에서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나님 나라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죽은 다음 시체를 보면 미국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죽은 시체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가끔 토픽이나 뉴스에 보면 미이라 보잖아요? 이집트에 있는 파라오들의 미이라나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미이라가, 가끔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잖습니까? 어떤 토질이 통풍이 잘 되서 저절로 미이라가 된 촌부들도 나오는데 똑 같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국가주의에 빠지면 우리가 곤란한 거예요. 우리가 아직은 국가는 필요한데 국가주의는 아닌 겁니다. 지금 여기서 본문이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국가중심주의 그런 게 아니라 복 받은 사람이 일상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공권력을 행사할 그런 국가가 필요하다, 그런 차원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국가는 일상보다 두 번째 순서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위해서 국가가 필요한 거지 국가를 위해서 개인의 삶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국가는 오늘 본문이 얘기하는 있는 일상의 내용처럼 노동의 대가가 바르게 주어지고 최소한도로 우리가 먹거리를 준비해야 되니까 그리고 가정이 유지될 수 있도록 정의와 평화를 책임 진 기구예요. 어떤 상태에서도 성서에서는 국가목적론적인 세계관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예,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네요. 복 있는 자는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경외를 구도적으로 추구해 가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얻는 복은 세상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제공 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세계라고 할까요? 그러한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정말, 평화, 안식 그러한 게 확장될 거예요. 어떤 걸 부러워하지 않고, 일부러 고난 받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오는 고난, 이거 불평하지 않고요, 놀라운 영적인 자유를 누리게 될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러한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28편을 들었습니다. 2500년 전, 한 유대인을 통해서, 혹은 유대공동체를 통해서 준 이 말씀이 어찌 이리 놀라운지요! 오늘 우리들의 삶의 중심을 꿰뚫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바로 생명의 주인, 생명의 완성자만을 예배하고 두려워하며 그러한 경외의 마음으로 일상을 거룩하게 두려움을 갖고 겸손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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