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9편입니다. 우리가 계속 시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29편까지 왔군요. 우선 제가 읽겠습니다.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 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야훼께 돌려 드려라. 거룩한 빛 두루신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야훼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야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4 야훼의 목소리는 힘차시고 야훼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5 야훼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뛴다.
7 야훼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8 야훼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거린다. 야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리고
9 야훼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숲은 벌거숭이가 된다.모두 주의 성전에 모여 "영광" 을 기리는 가운데
10 야훼,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야훼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힘을 얻고 축복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아멘.

한번 더 읽겠습니다. 시편 29편, 1절부터 11절까지 이제 이렇게 시작합니다.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 드려라.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 드려라.
2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야훼께 돌려 드려라. 거룩한 빛 두루신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야훼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야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4 야훼의 목소리는 힘차시고 야훼의 목소리는 위엄이 넘친다.
5 야훼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뛴다.
7 야훼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8 야훼의 목소리에 광야가 흔들거린다. 야훼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리고
9 야훼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숲은 벌거숭이가 된다. 모두 주의 성전에 모여 "영광" 을 기리는 가운데
10 야훼,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야훼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힘을 얻고 축복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아멘.

오늘 이 시편 기자의 노래가 유달리 힘차 보입니다. 특별히, 자연현상을 끌어들임으로써 하나님의 현현을 이야기하는 건데 아주 전형적인 종교 언어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일종의 자연 찬양시인의 시처럼 드리지만 그러나 그런 방식을 통해서 이 시인은 단순한 자연에 대한 찬양이 아이라 하나님의 현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29편은 한편으로는, 어떤 면에서는 이교적인 표현방식이 부분적으로 들어있다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그러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이교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선입관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요. 꼭 그렇게 볼 것은 없습니다. 이교, 다른 종교라는 뜻이겠죠. 다른 가르침.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 이교 사이가 근본적으로 다르긴 하지만 말이죠.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교합되는 부분들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게 야훼 하나님 신앙이 혼합주의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 구약의 야훼 하나님 신앙이 아주 독자적으로, 주변의 다른 종교와 아무런 교류가 없이, 고독하게 신앙을 발전시켜 온 게 아니라고 하는 거죠. 주변의 영향을 여러 가지 면에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거는 유대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사실 마찬가지요. 그런 종교사적인 흐름을  우리가 말하고자 한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시편공부에는 이런 것까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핵심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죠.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신앙과 신약의 삼위일체적인 하나님 신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래서 완전히 고립적인 그러한 신앙이나 종교가 아니라 역사 안에 확고하게 발을 딛고서 주변의 여러 가지 문화예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안에서 고유한 하나님 신앙을 끌어왔다고 하는 겁니다. 거기에서 이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은 성서가 그런 것을 담고 있는 흔적들이거든요. 이안에는 분명히 근본적인 그런 신앙, 구약으로 말하자면 유대교의 근본, 신약에는 구약에 근거를 두면서도 초기 기독교인들의 고유한 신앙, 이런 것들이 다시 앞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같은데요. 다른 주변에 있었던 가깝거나 멀거나 그러한 종교들과의 어떤 교류, 이 교류라고 하는 말이 정확한 것은 아닌데, 연결되었다고 하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다보니까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그 말을 한 것뿐입니다. 교류 소통 영향을 주고받음. 이런 관계성안에서 지나와서요.  이 성서 안에는 그 부분적으로 이교도적인 다른 표현방식들이 들어왔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래도 요거는 한 번 더 짚어야 되겠군요. 이런 말씀들이 여러분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예를 더 들려고 합니다. 신약성서도요. 복음서는 일단 접어놓고요. 마찬가지이지만 일단 조금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바울의 편지들을 놓고 봅시다. 거기에도 기독교의 독특하고 고유한 신앙을 지켜내려고 그것을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로마와 헬라문화의 흔적들 그러한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러한 상황 속에서 지내왔거든요.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음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 게 아니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에서도, 그러한 신앙을 선포를 해야 하는데 받아들여져야 하잖아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 복음을 전달받아야 할 사람들은 당연히 로마와 헬라 이러한 문명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거죠. 갈라디아서같은데도 보면 거기에 성령의 여러 가지 열매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적 가치라기보다도 로마 사회에 있었던 아주 보편적인 덕이라고 그래요. 그런 것들을 교회가 부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나와 있는 성령의 열매들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거죠. 그러니까 기독교 역사를 담고 있는 성서는, 그렇지 않는, 신약성서요. 그렇지 않는 요소들도 부분적으로 들어와 있어서 그것을 해석해야 할 사람들은 본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는 것들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전달이 되었죠?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에도 이교적인 흔적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요. 이렇게 자연이 엄청나게 찬양 되는 것 같은 모습들을 보이지 않습니까? 이교들이라고 나쁜 게 아닙니다. 나쁜게 아니라기 보다도 엄청나게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이교란 것도 굉장히 고상합니다. 세련된 거예요. 아주 그럴듯한 거죠. 상당히 인간의 문명의, 정신문명 이런 것을 담고 있는 겁니다. 로마의 많은 시인들이 하는 행위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인간의 실존, 그리고 자연에 대한 찬양 얼마나 고상합니까? 그런 방식으로 신을 경험한다고 하는거죠. 이집트의 종교나 바벨론이라든지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이교라고 하는데 그런 것들은 우리가 보통 최고의 인간문명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그러한 이교적인 전통을 배경을 두고 있지만 그거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 29편은 제목을 이렇게 달면 되겠군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하나님의 현현, 보통 테오파니 라고 하거든요. 제가 참고 있는 시편 주석서를 쓴 사람이 독일사람이라서 독일어 단어들이 가끔 이렇게 거기에 번역 된 거지만 말이죠. 괄호를 해서 그게 무슨뜻이 정확히 나오더라고요. 현현, 테오파니 잘룸, 거기에 자연에 대한 노래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현현을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9편은 굉장히 활력이 있고 아름답고 그러한 찬양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절과 2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겁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 드려라. 여기서 하나님을 모시는 자들은 천사라든지, 신적인 능력을 가진 그러한 어떠한 사자들 그들과 같은 거겠죠. 천상의 존재들을 이야기하겠죠. 하느님 모시는 자들아 야훼께 돌려드려라. 뭐를 돌려 드립니까?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목적어가 생략되었거든요. 야훼께 돌려드려라라고만 하면 문장이 안되죠. 이어서 나오는 문장,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 드려라에서 무엇을 돌려드려야 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영광과 권능이라고 했어요. 영광과 권능, 사실 이러한 단어들을 우리가 자주 접하기는 하지만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계속해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다 궁극적인 것들이기 때문이기 그렇습니다. 폴틸리히의 표현을 빌리자면 궁극적인 리얼리티, 궁극적인 Ultimate concern 뭐 이런 것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성서기자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인간이 생산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그러한 세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영광이라고 하는 이 단어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거구요. 그게 구체적, 실질적으로 무엇인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확정해 낼 수 없습니다. 제가 자주 표현하는 그러한 것으로 바꿔서 말씀드린다면 생명의 가장 심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거룩한 현상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권능도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인간들이 한다고 하는 일들은 늘, 이것은 권능은 아닌 거죠. 우리는 주어진 것으로 그것을 조금 조작하거나 변경해 나가는 일만 하지만 권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능력, 부활능력 세계 심판에 관계된 것들을 우리가 권능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영광과 권능을 야훼께 돌려드려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찬양에도 나올만한 가사들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거 같기는 한데요. 이 말은 곧 인간에게 그것을 돌리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절은 이렇습니다. 그 이름이 지니는 영광 야훼께 돌려 드려라. 거룩한 빛 두루신 야훼께 머리를 조아려라. 1,2절 같은 뜻입니다.

3-9절은 1절과 2절에서 말한, 그리고 29편 전체적 주제라고 권능과 영광, 영광과 권능, 하나님의 것이죠.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어떻게 계시되고 있는 것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 시편기자는 자연현상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나오는 엄청난 사건들을 말하고 있기는 있는데 이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현상인거예요. 이교하고 야훼 하나님 유대교 하고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거죠.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자연의 위대함은 똑같습니다. 누구에게나 태양, 별, 지진 바람 또 따뜻한 날씨와 추운 날씨, 계절 이런 것들은 똑같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교는 주로 이러한 엄청난, 우리 인간이, 인간이라고 할 때 여기서는 현대인보다도 고대인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똑같습니다. 고대인들이 자연에 대해서 우리보다 몰랐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컸다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들보다 자연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속된 말로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러한 문장들을 조금 더 잘 이해하려면 조금 더 와닿게 이해하려면 고대인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거죠. 그들에게는 자연히 훨씬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난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온 것은 분명합니다. 이교도들은 그것을 찬양하는 거죠.

거의 모든 세계 종교는 태양을 섬겼어요. 이집트도 당연히 태양이고 로마도 태양이고요. 그렇습니다. 태양이 비치고, 그런 점에서 보면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빛, 그것도 그러한 주변의 이교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성서라고 하기보다, 기독교 역사인데요, 성탄절이 동지가 지나고 태양이 이제 다시 낮의 기온이 좀더 늘어지기 시작한때 잡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아시는 거죠. 그런 것들이 다 다 태양신을 섬기는 로마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교는 자연을 그냥 숭배한 거예요. 이에 반해서 성서 기자들은 자연이 아무리 엄청난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그걸 피조물로 보는 거죠. 자연을 만든 그 창조자 하나님 그를 찬양하는 겁니다. 자연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이게 차이가 있는 거죠. 이교는 자연을 찬양한다면, 유대의 성서기자들은 똑 같이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엄청난 힘 앞에서 그러한 인간의 자기 초라한 모습을 느끼기는 하지만 자연을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만든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출애굽기이라고 하는 해방이라고 하는 이 사건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연결되는 겁니다. 엑소더스라고 하는 것은 이집트의 제국으로부터, 그러한 안전장치로부터, 정치적인 안전장치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로 들어가 버리는 거거든요. 물론 출애굽기에 보면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고난 받는 다고 하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을 이야기해서 이제 정말 자유롭고 괜찮은 그러한 세계로 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실질적으로 보면 정반대라고 할 수 있어요. 이집트가 오히려 복지의 차원에서 본다면 안전한 세계입니다. 광야를 관통해서 팔레스틴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이거는 근거가 없는 길을 향해서 떠나는 거죠. 확실하지 않는, 실증적이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집트의 삶에서는 여전히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불편이 있지만 이집트라고 하는 문명이 그들을 지켜주는거예요. 이런 이집트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건거거든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예요. 인간문명, 정치, 복지체제 이런 것들이 지켜주는 안락감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이집트에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광야에 나와서 마실 물이라든지 먹을 거리 라든지 이런 것들이 조그만 어려움이 왔을 때 이스라엘 민중들이 이집트의 고기국 끓이는 가마솥을 그리워 했다는 것은 정확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더 현실적인 거예요. 거기서 탈출했다고 하는 것, 그런 것하고 창조하고 왜 연관되느냐에 대해 제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건데요.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이 사실, 이것은 바로 자연 숭배로부터 탈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학자들의 신학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바로 탈 주술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불트만이 탈 신화 그런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엔트미틸로기어즘. 그런 것처럼, 성서기자들은 창조신앙을 통해서 자연 숭배로부터 탈출을 한 것이고 주술적인 숭배로부터 탈출한 것이고. 탈출했다고 해서 안정적인 것은 아닌 거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면 더 불안한 요소일지도 모릅니다. 자연이 위대하다. 그게 우리들에게 먹을 것을 준다. 자연하고 잘 관계를 맺고 살면 괜찮다. 이런 차원으로 나가는 것이 더 편안할지 모릅니다.  그게 더 안정감을 줄지 모르겠어요. 자연과의 일치입니다.

이렇게 말을 해놓고 보니까 조금 극단적인, 에콜로지, 에콜로지스트들의 입장과 자연숭배의 입장 이런 것들이 이렇게 서로 연결되는 느낌이 드네요. 이 지구를 지속가능한 그러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을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로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도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생태가 파괴되는 것을 최대한도로 막아야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거기까지는 생태학자들과 기독교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 같이 가기는 하지만, 고 다음이 좀 달라지는 거죠. 이 생태 문제. 특별히 이 지구, 여기에 기독교 신앙은 목숨을 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태학자들은 여기에 목숨을 건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표현이 적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러한 자연주의자들이죠. 인제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같은 동지적인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어느 부분까지만 그런 것이 가능할 겁니다. 그게 이교도들하고, 구약성서의 차원에서 볼 때,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교도라고 해서 나쁘다고 생각하면 곤란한 거예요. 굉장히 고상한 거예요. 복지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휴머니즘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고상합니까? 생태학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이교도들이 말하는 것이 구약 성서기자들과 늘 충돌하는 것은 또 아니었어요. 그럴 수가 없죠. 또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죠. 우리 앞에 놓인 삶의 현실들을 보면 같이 풀어가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들, 자연의 두려움, 이런 것들을 우리가 극복해나가야 하는 것은 주변의 휴머니스틀,  운동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고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교도와 유대인들이 그렇게 모든 면에서 갈라지는 것이 아닌 거예요. 그러나 어떤 지점에서 이제는 달라 지게 되는 거죠. 그것이 오늘 우리 기독교 신앙과 일반 도덕주의자나 생태주의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창조신앙은 이러한 자연숭배에 대한, 자연에 온전히 우리의 모든 존재근거를 맡기려고 하는 그러한 생각, 그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엑소더스라고 한다면, 이집트부터 탈출은 정치적인 안전장치로부터의 탈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인간에게 굉장히 중요한, 굉장히 매력적인 요소들입니다. 정치적 안정과 자연의 풍요로움, 자연이 주는 그러한 안정감 이런 것들이요. 유대교는 그런 거로부터 나온 거예요.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막연한 거거든요. 삿실은요. 불확실한 거거든요. 손에 안 잡히거든요. 계속 거기서 충돌해요. 예언자들은 바로 그 사실에 전적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시대가 시작되면서 왕들은 다시 이집트 정치, 바빌론적인 문화, 자연숭배 통틀어서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둘이 계속 충돌했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하는 것은 물론 정의로와라, 평화 이런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치인들이 말하는 것과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충돌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에 개인과 민족의 운명을 걸어야 된다고 하는 사실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눈에 보이게 잡을 수 있도록 실증적인 것이 아니라서 민중들은 예언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 창조신앙, 앞에서 이야기하면서 제가 그것을 주술적인 자연숭배로부터 엑소더스리고 이야기했죠. 창조신앙은 바벨론 신화에도 데미우루고스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 나오거든요. 창조설화가 바벨론의 데미우로고스 정확한 스펠링이 맞는가 모르겠네요. 하여튼 그러한 설화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출발, 출발은 그렇게 되어 있는데 유대의 성서기자들은 꾸준히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 신앙을 더 깊이 있게 들어갔다고 할 수 있어요. 바벨론 신학, 제가 종교학자도 아닌데 자꾸만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밑천이 딸리네요. 그들은 야훼 하나님신앙이 아니라, 지금 야훼냐 데메우르고스냐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으니까요. 어쨌든 그러나 서로 다른 문명가운데서 호칭이 서로 다른 것뿐입니다. 지금 제가 야훼 하나님이라고 불렀느냐? 데미우루고스라고 불렀느냐 그 차이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각각 경험하고 그리고 경험에 심화하는 과정 그런 것들이 달라지는 거요. 야훼 하나님 신앙은 계속 인격적인, 하나님의 계시론적인 그러한 쪽으로 점점 더 확장발전 되어 갔다고 볼 수 있고요. 바벨론 신앙은 거기서 머물러 버리는 거죠. 거기서 나가지 못하고 주술적인 데서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예언자 사상은 아주 독특하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점에서 유대교에서 기독교가 나올 수 있는 모판의 역할을 한 겁니다. 바벨론이라든지 이집트라든지 이러한 종교, 처음에는 비슷한 점들이 부분적으로 많이 있었지만 그러한 그들은 거기서 머물러 있어서 그런데서 기독교 신앙이 나올 가능성이 없었던 거죠. 유대교의 예언자 신앙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바탕에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능한 것인 거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가능하게 된거죠.

오늘 제가 본문 말씀을 별로 말하지 않고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3-9절까지 여기에 여러 가지 자연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현현을 전하려고 했었다 그 이야기를 말씀드린 거예요. 자연에 대한 묘사가 이교적인 그러한 흔적들이 있기는 있지만 결국은 그것을 말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테오파니, 하나님의 현현 그러한 방식으로 문학적, 문학이죠 그러한 방식으로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 자세한 한 절 한절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 나무들이 뒤틀리고 이런 것들 3절에서 9절이 있습니다.
 
세 번째 10절에서 11절은 야훼 하나님이 차안을 넘어서 존재하신다. 차안 너머. 소제목을 붙인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네요. 차안 너머. 비사이즈. 인자이즈 독일어로는 그렇게 표현하는데요. 차안과 피안. 3절부터 9절까지 이 자연현상을 문학적 상상력, 이교적 그러한 문학에 근거해서 말하면서 결국 그 것은 자연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강조였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끝 부뿐에서 아무리 자연세계가 요동치고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결국 그것 너머에 존재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10절 읽겠습니다. 야훼 거센 물결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이 세상이 어떻게 요동친다고 하더라도 그것 너머에서, 피안, 자리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삼위일체론적,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조금더 보충설명이 필요한데 오늘은 거기까지 나가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 피안, 차안 너머라고 해서 꼭 현실의 삶과 전혀 상관없는 그러한 아주 이원론적인 차원의 그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성서에서는 조금 희미한데 신학으로 넘어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조금더 명확하게 되는거거든요.  예수님 자체가 성육신이라고 하니까요. 하늘의 무소불위하신 그러한 하나님의 불변의 존재가 구체적인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성육신 신앙에서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피안과 차안, 초월과 내재 이런 것들은 기독교신앙에서 조금더 변증법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 강의를, 성경공부나 다른 강의를 들으시면서 조금  하나님 신앙이 처음부터 체계가 잡혀 있는 건데 자꾸만 당신 이야기를 들어보면 변화되는 것처럼, 발전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냐? 하나님이 그럼 그렇게 변화한다는 거냐? 그러한 오해도 있을수도 잇는데요. 그러한 뜻은 아닙니다. 아. 이것참. 어떻게 다 설명해야 될까요? 그냥 간단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이 변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인식하는 범주가 확장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를 들어내 주는 것만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 계시의 과정이 바로 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표상,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발전되어 온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쨌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요. 하나님이 물결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있다고 했잖아요. 하나님은 지상의 변화 가변적인 사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 부분은 방금 말씀드린 대로 신학적인 차원에서 역동적인 관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초월적인 차원으로 있는 분이시거든요. 제가 생태론자들을, 운동권이라 적합하지 않으니까요. 휴머니스트라고 하는 것이 좋겠군요. 휴머니즘 극단적인 에클로지 하고 기독교 신앙이 어느 단계 까지만 같이 길을 가지 그 다음에 달라지는 선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이러한 단락인거죠. 이 지구가 파괴되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생명완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지구가 계속 보존되었으면 좋긴 하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근거는 흔들리는게 아니거든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이 생명을 유지시킨다고 하는, 완성시킨다는 그러한 사상입니다. 이것을 초월하는 피안적인 차원에 하나님의 옥좌를 잡으셨다고 하는 겁니다.

말씀을 마쳐야 되겠네요. 이런 차원에서 오늘 결론은 11절 마지막 문장입니다.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이런 걸 주욱 말했잖아요. 1절과 2절에서 하나님께 권능과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의 현현이 우리의 지구안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하나님의 테오파니라고 했고요. 그러니까 그걸 통해서 이 시인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러한 초월성, 영광, 이런 것을 통해서 우리가 평화의 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만 우리가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조건이 다 파괴된다고 하더라도, 오늘 본문에 나온 설명처럼 가변적인 모든 사건들이 다 이상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옥좌를 잡고 계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맡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평화의 복을 누린다 평화의 복에 들어간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생각을 더 많이 해야되겠지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시편 29편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이것을 아는 사람은 평화의 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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