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9편 강해-여호와의 의로우심

 

시편 129편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2.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3.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4.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5.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6.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7.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8.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짧은 구절입니다. 비교적 짧은 구절입니다. 8절까지 있어요. 표제는〚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런 과정에서 부른 찬송이겠지요? 표제가 정확하게 성격을 설명하는 건 아닙니다. 아마 몇 가지 전통에 따라서 그런 제목이 붙여진 것 같아요, 시편들을 우리가 읽을 때마다 우리가 그냥 흘려 지나가지 않고 마음을 담아서 읽게 되면 이게 참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기는 힘들어요. 그러니까 영성이라고 하는 것도 실력의 차이가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과학에도 실력의 차이는 있잖아요? 과학의 세계를 더 깊이 아는 사람이 있고, 형식적으로만 알고 야트막한 지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는 것 처럼요, 과학만 그러겠습니까, 소설가들도 수준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이 시편기자들의 글들을 읽으면 참 수준이 높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걸 우리가 다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지 분명히 우리와는 그러한 영성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요, 자기들의 삶을 하나님과 아주 일치시켜서 생각했다는 거예요. 물론 우리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지요. 예, 또 그렇지 못할 때 반성도 하고 합니다만, 그런 정도로 아는 것 하고 아주 일치되는 것 하곤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 전문적으로 수도 생활을 하는 사람과 흡사할 정도로 자기 삶을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한 겁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보다 이 시편기자들은 사실은 더 수준이 높은 거예요. 수도원에 들어간다고 해서 다 영성가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 들어가서도 또 번민도 많고요, 그 안에서도 인간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작동되는지 모릅니다. 장소에 따라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마는 준비가 안 되면 어디에 가 있으나 불안한 거예요. 인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고요. 이 시편기자들은 수도원에 들어 가 있는 사람들은 아닌데, 아주 놀랍도록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살아갔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참 부러워요. 우리가 그렇게 되지 못해서 그렇지 그렇게 살아야 되죠, 또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편기자의 영성에 이렇게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주로 자기의 삶을 일상적인 것에서만 확인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이게 일상이 아주 소중하긴 한데 이제 거기에 파묻혀 버려 갖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느슨해지는 거예요. 멀리 느껴집니다. 맨 날 교회에 나와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실 거고요. 우리가 어디 있든지, 직장생활하든지 가정생활하든지 뭘 하든지요,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보해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거기에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기 좀 어렵지요. 두 번째는 거기서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더 나가는 건데 여호와의 본질을 깨닫기가 어렵다고 하는 겁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더라도 영성이 자라지 않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라고 하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결국은 자기 열망에 사로잡히거든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것은 정말 관심이 없어요. 그건 이미 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 건 몰라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요, 그냥 믿고 있다고 하는 자기에게 사로잡혀서 열정적으로 뭐를 하긴 합니다. 그렇게 평생 신앙생활 하더라도 여호와의 성격, 성질, 본질, 본성, 이런 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못 하고, 알아도 뭐, 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한국교회에서는 신학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질, 본성, 이런 것들은 신학공부를 통해서만 가능한 건데요? 그건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도 이게 이미 우리들의 삶에 와 있으면서도 동시에 아직은 아니다고 하는 아직은 종말론적이지만 이미 왔다고 하는 이 종말론적인 긴장관계를 이런 것들을 일반 신자들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 것들을 들어 보지도 못 했을 겁니다. 그걸 들어도 아예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들어도 하루 이틀에 깨달아 지는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한 두 번 들을 수는 있지만 그러한 신앙의 긴장관계 속에 들어가기는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아예 신학적인 생각을 않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는 겁니다. 몰라도 신앙생활은 되는 거지요. 그냥 그렇게 됩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결국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거지요. 따로 따로 놉니다. 이런 건 여러 번 들었기 때문에 여러분들 알고 계실 거예요. 이게 일치 되서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이걸 극복하려면, 신앙과 삶의 분리, 이건 불행한 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일치를 모르고 나눠져 있다면 불행한 거잖아요? 이걸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왕도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최선의 길이 있지요.

 

이건 마치 시인이 참된 시인이 되려면 시를 쓰려면 언어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야 되듯이 영성의 깊은 세계로 들어 갈 수 밖 에 없습니다. 수영을 잘 하려면 물에 들어가서 물의 느낌을 알아야 되고 또 수영기술도 좀 알아야 되고요. 하여튼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지 않고 물이 무섭다고 해서 무릎팍 정도 차는 그런 수영장에서 바깥에서 그냥 물만 첨벙첨벙 대면서 수영 선수 되겠다, 이렇게 하면 좀 불행한 거 아니겠습니까? 영성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수 밖 에 없습니다. 이게 제가 방금 말씀 드린 깊은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이 무섭다라는 말씀 하고 연관되는 건데요, 이게 조금 두려운 문제입니다. 영성의 깊은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요, 이게 손에 딱 잡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게, 뭐라고 할까요? 조금 놀라운 거거든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어떤 생명의 세계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조금 두려운 겁니다.

 

어쨌든 이런 영성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것을 극복하는 바람직한 길입니다. 이런 공부를 위해서 우리가 지금 시편 공부를 하는 거거든요, 시편 기자들은 영적인 대가들입니다. 우리가 다 몰라서 그렇지 그들이 경험했던 어떤 영적인 세계, 마치 바흐나 모차르트의 어떤 음악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시편도 그러한 깊이의 세계거든요? 대가죠, 정말 대가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수 천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고 해석하고 또 거기서 삶의 의미들을 발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글들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이 최선입니다. 오늘 여기 129편 시편 제목을 제가 “여호와의 의로우심”이라고 잡았는데, 크게 두 단락 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129편이 125편하고 형식과 주제가 비슷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담대한 믿음, 신뢰,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 129편이 조금 더 확장 되었지요.

 

125편도 그렇고, 129편도 그렇고요, 이 시편들은 제의 의식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저작된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의 의식문’이라고 합니다. 표현이 너무 신학적이지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천천히 따라 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성서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홀 따옴표로 인용한 이 문장은 제가 참고하고 있는 성서주석에서 가져 온 건데요, 그걸 설명을 더 해야 될까요? 제의의식,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의식이예요. 거기서 사용하려고 만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계약 공동체,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 계약이라고 하는 말하고 공동체라고 하는 말이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약속을 해 주셨다고 하는, 그건 뭐, 아시잖습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노아 등등 전체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서 계약 공동체라고 얘기 합니다.

 

계약, 하나님과의 약속가운데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 공동체 의식문, 제사 드릴 때에 쓰이는 공식적인 문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예배 중에 암송하는 사도신경하고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 주신다는 그러한 사실, 특별한 방식으로 지켜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125편도 그랬고 129편, 여기에서 일정한 형식의 고백문으로 이렇게 작성한 거지요. 뭐, 이것만은 아닙니다. 거의 다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조금 더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는 뭐, 개인이 나 지금 죽겠다, 나 좀 구해 주십시오. 그런 얘기 아니잖아요? 공식적인 제사를 드릴 때에 그들이 함께 나눴던 의식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편이 여러 종류가 있어요. 그건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렸습니다. 개인적인 간구도 있고요, 탄원도 있고요, 지금 본 것처럼 의식문도 있고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절에서 3절까지에 있는 이야기는 이방이 그들을 괴롭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여기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여러 번 괴롭혔다고 하네요. 문학적인 표현이죠? 어릴 때부터 괴롭혔다, 그리고 3절에 보면,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마치 노예들이 채찍을 맞아 등이 갈라지듯이 아마 그런 표현들인 것 같습니다. 그 만큼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어려움을 당했다고 하는 걸 이야기하지요. 가장 큰 사건은 애굽과 바벨론 사건을 보면 되겠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신앙이 역사 안에 자리를 잡는데 핵심적으로 역할을 한 사건입니다. 애굽하고 바벨론이죠, 가장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이건 민족 전체의 어려움이었어요. 몇 몇 가족, 개인이 아니라 민족 전체가 애굽에 있을 때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을 때입니다. 이게 역사적으로는 긴 차이가 있는데 이게 이스라엘 신앙을 역사에 자리 잡게 하는 두 기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과 바벨론, 애굽과 바벨론은 사실은 여기서 해방이라고 하는 게 더 중요한 거예요. 애굽에서 고생했다, 바벨론 시절 고생했다고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이 상황에서 끌어 내셨다고 하는 사실이 중요한 거죠,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출애굽과 바벨론 포로 귀환, 이것이 하나님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백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그렇게 볼 수는 있어요. 본문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이야기에서 그런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시편 129편은 구체적인 역사적 계기, 어떤 시점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 귀환 그 순간에 이걸 기록했다, 그건 아닙니다. 힘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 보면, 앞서 제가 잠깐 짚었습니다만 탄원은 하지 않은 거예요. 내가 이렇게 죽게 되었는데 원수 갚아 주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하질 않잖습니까?

 

예, 지금 그러니까 자기들이 고생했다고 하는 것이 핵심은 아닌 거예요. 지금 이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릴 때 그들이 함께 부른 찬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켜주신다는 을 강조하는 거죠, 이 129편을 두 개로 나눈다고 앞서 말씀 드렸는데 하나가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부분을 보고 있어요. 1절에서 3절까지는 자신들이 어려웠었던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고요, 4절에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의롭다고 얘기하네요. 의롭다, 이게 시편기자의 독특한 영성입니다.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일 수도 있어요. 왜 그럴까요? 그렇지 않은 일들이 사실은 세상에 많이 벌어지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그들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의롭다고 하는, 그 의로우신 여호와께서 악인들의 줄을 끊으신다고 말하죠, 이건 거꾸로 얘기하면 악인들의 줄을 끊으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시고요, 또 그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는 의롭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그냥 보면 뭐, 그렇구나, 맞다 그런 것 같다고 다 하는 이야기지, 뻔하지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얘기로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만을 이야기할까요? 예, 이런 표현들은 다른 구절에 나오기도 하고 또 이 성경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이 할 겁니다. 우리 신이 우리를 지켜서 우리가 이번 전쟁에 이기게 하셨다,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그런 건 많잖아요? 그건 옛날부터 계속 민족과 민족이 싸울 때 자기네 신에게 울부짖고 매달리고요, 이런 대명천지에도 백악관에서도 기도하면서 전쟁 하러 나가고 이슬람권에서도 다 그랬을텐데요, 참 그런 것 보면 우습기도 한데 오늘 이 구절도 어떻게 보면 그렇게 이해 할 수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악한 사람들을 다 없애 주신다고 하는 거죠? 민족주의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좀 이기적이기도 하고요, 자기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런 부분을 우리가 인정을 하면서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거죠, 그것을 우리가 찾아내야 되는데 제가 보기엔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의를 말하면서 자기들도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를 의롭다고 말하는 것 자체도 앞서 얘기한대로 쉬운 것은 아닌건데요? 자기들도 억울한 일 많이 당했잖아요? 사실은 여호와께서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다고 오늘 여기 이렇게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주변에 강대한 나라들이 많았습니다. 제국들이 많았습니다. 결코 이들이 주변에서 어려움이 없이 산적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느낌도 많이 있었을텐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생각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정말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 죽겠는데도 여호와는 의롭다 이걸 전제하는 거예요. 놀랍지요?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밑에서 수 백 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흔들리지 않았어요. 약간 힘들 때도 있긴 있지만 결국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다, 의롭다, 우리를 지킨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참, 그게 어떨까,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신비롭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찾기는 전 세계적으로 좀 어려울걸요? 다른 데 여러 종교들이 있습니다만, 이런 쪽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민족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의롭다 이거 말이지요.

 

이건 그러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를 하는 것 만 이 아니라 그들도 의롭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요. 물론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의롭게 살았는지는 우리는 뭐, 그건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기도 합니다. 지금 팔레스틴 지역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좀 박해하고 하잖아요. 그런 건 보기가 좀 좋지 않습니다마는 시편이 기록될 때가지는 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기만 했는데요? 어쨌든 그들이 방향을 그렇게 잡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인정을 해야 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불평 불만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끝이 없습니다. 이 세계는 완전히 정의로워 질 수가 없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통해서도 모든 것이 다 우리나라 개인당 일 년 수입이 5만 달러 된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해결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상대적이라서 좀 뭐가 풍요로워진다고 해도 만족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억압, 구조, 불의 이런 것들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정의롭게 이끌어 가시고 정의를 심판하신다고 하는 이 신앙을 놓치지 말아야지요. 이건 억지로 놓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실제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됩니다.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우리가 마음 상해하면서 사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세계가 불평불의한데 하나님이 의롭게 세계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무엇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럼 우리가 일부러 꾸며서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될까요? 여우가 포도를 먹을라고 하니까 높아서 못 먹으니까 포도가 시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 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것저것 능력이 없으니까 자기합리화,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나님을 그렇게만 말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제가 지금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두 가지만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참된 삶의 안식을 허락하시거든요? 그건 분명한 겁니다. 우리에게 정말 우리의 안식, 평화, 자유, 해방, 이게 중요하다고 한다면 이게 본질이라고 한다면 그건, 좀 돈이 없거나 빼앗기거나 내가 능력만큼 대우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원통할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두 개를 얘기하려고 하는데 뭐, 거의 비슷한 것이라서 그만 두겠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그렇게 풍요로워진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의로워지지 않는다고 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네요. 어쨌든 그런 쪽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의이고 그와의 일치를 통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더 나아가서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약과 연관시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의를 좀 생각해 보자고 하는 거지요. 두 번째 단락은 5절에서 8절입니다. 1절에서 4절에는 이방인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이제 벗어났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의다, 그걸 얘기했다고 한다면 5절에서 8절에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어떤 판단이 나와요. 1절에 4절에 나오는 악인들과 5절에서 8절에 나오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좀 다릅니다. 그런데 그냥은 눈에 잘 안 들어 올 거예요. 저도 그냥 볼 때도 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구나 생각을 했는데요, 성서주석학자들의 책을 읽어 보니까 그게 구분된다고 하네요. 1절에서 4절은 이방인들, 정말 적대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5절에서 8절에 나오는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시편은 남 유다에 속한 사람이 쓴 거예요. 그렇게 딱 끊어서 말하기는 쉽지는 않습니다만 전반적으로 그렇습니다.

 

예, 이스라엘의 정통성이 남 유다에 있거든요, 왜 남 유다에 있는지 아시지요? 솔로몬 아들 대에 분리가 되어잖습니까? 나라가 200년 동안 남북분리가 되었거든요? 분열왕국이라고 하는데요, 남쪽이 정통성이 있냐, 하는 것은 이 다윗의 후손이 남 쪽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쪽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여로보암이라고 하는 어떤 왕이 일종의 반역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거예요. 우리 한 민족하고 비슷합니다. 정통성은 비교적 우리나라의 남쪽에 있잖습니까? 조금 차이가 있긴 있는데 지금 우리 남북한 갈라져 있는 것처럼 남 유다, 북이스라엘이 갈라져 있었어요. 남쪽에 있는 사람들은 좀 주류하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윗 혈통을 가진 사람이 대대로 왕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왕이 계속 바뀌었어요. 왕조가 계속 바뀌었어요. 여로보암 왕조였다가 아합 왕조, 오모리 왕조 그래갖고 많이 바뀌었습니다. 남쪽은 제가 알기로는 거의 다윗의 혈통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 남쪽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볼 때 북에 있는 사람들은 시온을 무시하는 자죠, 시온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합니다. 시온, 시오니즘, 예루살렘 다 비슷한 뜻인데요? 북 이스라엘은 훨씬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리고 열 두 지파 중에서 열 지파가 다 북 이스라엘에게 속 했었고요. 그들이 사실은 국력이 더 강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한 가지 예루살렘이 남쪽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조그만 땅, 유대지역에요. 그래서 사마리아를 수도로 해서 이 남쪽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완전히 분리되는 거지요. 시온을 무시하는 거예요. 그걸 배경으로 놓고 읽으면 5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이 들어 올 겁니다.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 북 이스라엘이예요. 수치를 당하고 물러간다,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다, 땅위에서 나는 풀이어야 되는데 좀 나다 말잖아요? 그냥 말라 버린다, 그리고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그러니까 아무리 그건 해 봐야 소득이 없으니까, 풀들을 베는 농부들의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 별 거 아니다 얘기하죠, 8절에서 계속 그런 얘기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다고 얘기하거나 축복한다, 그런 얘기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축복은 거리가 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읽어 보면서 들어오겠습니다만 이 5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들은 좀 온순한 거예요. 약간 시온을 무시하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완전히 이방처럼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3절은 좀 사납죠. 어렸을 때부터 괴롭혔고요. 등을 고랑을 내게 했다고, 양쪽에 대한 시편기자의 시각이 좀 차이가 있습니다. 예, 다른 구약성경도 다 그렇고요, 신약도 그런데 이 시편도 역시 구체적인 어떤 삶의 자리에서 기록되었어요. 삶의 자리라고 하는 걸 잘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구체적인 삶이다, 삶 자체다 얘기하시면 되요. 그런 것 없이 뜬 구름 잡듯이 한 건 없습니다. 공중에서 떨어진 건 없어요.

 

다 어떤 상황이 있어요. 거기서 나온 겁니다. 아주 굉장히 구체적인 거예요. 구체적인 삶의 자리지요. 힘들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또 들뜨기도 하는 그러한,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우여곡절도 많았던,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상황과 똑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그런 흔적들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는 다 한계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대를 많이 받게 되면 성격이 조금 삐뚤어 질 수 있거든요? 성경에는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낱말 하나 토씨 하나 다 완벽하다,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그 구체적인 어떤 삶의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는 가운데 나왔기 때문에 한계가 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129편에서도 그런 거예요. 이 시편기자는 여호와가 의롭다고 하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예, 그런 게 관념적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하나님은 의로우시지, 그렇지 당연하지 그런 정도가 아니라 그걸 실질적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때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하고는 다른 각도로 생각해야 되겠지요?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계이해와는 다른 각도로 세계를 이해해야 되겠지요? 예, 그렇습니다. 이 새로운 세계이해에서만 여호와께서는 의롭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을 아주 실질적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은 참 자유롭습니다. 참된 해방이 가능하지요. 그냥 한 마디만 더 붙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의로운 거예요. 우리 눈에 조금 불만스러운 것도 의로우신 건데 그 분이 하신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걸 이해한다면 나의 삶의 여러 가지 조건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한 번 보면, 우리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등등 두루두루 말이지요.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시다고 하는 이 시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우리의 삶, 한 평생 영적으로 더 풍요로워지고 참된 안식과 평화에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에게 귀한 말씀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생각하지 못했던 귀한 말씀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의로우시다 하는 이 고백을 듣습니다. 이것이 그냥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능력임을 저희들 또한 믿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우리의 모든 삶을 걸게 하시고 어떠한 조건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주님, 또 우리 같이 공부하던 00성도가 또 내일부터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먼 곳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을 잘 감당하게 하시고 주님 날개 가운데서 주님께서 지켜 주실 줄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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