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편 강해-파수꾼의 영성

 

시편 130편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3.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5.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7.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아멘! 이 130편은 아주 익숙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거예요. 유명한, 잘 알려진 시편입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 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하는 겁니다. 루터가 쓴 찬송가 가사 중에 이 130편에 영적인 어떤 그 감동을 받아서 쓴 게 있다고 합니다. 그걸 제가 적어 놨는데요, 독일어입니다. 아우스 티퍼 노트(Aus tiefer Not)라고 되어 있어요. 아주 깊은 궁핍, 어려움 가운데서 슈라이에(schreie) 부르짖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히 주 디어(ich zu Dir) 당신에게 부르짖는다, “Aus tiefer Not schreie ich zu Dir”로 되어있어요. 루터의 찬송가인데 아마 우리나라 찬송가로는 없을 거고요, 우리나라 찬송가 중에서 독일 찬송가는 많지 않습니다. 있긴 있지요. 많지는 않고요, 대개 영국 미국이 제일 많고 대개 예배찬송보다는 부흥 찬송이 많습니다. 그게 우리나라 찬송가의 근본적인 한계인데요, 극복해야 될 텐데 잘 되지 않네요.

 

몇 번이나 찬송가가 나왔는데 예배찬송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주로 어떤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들이 많이 있거든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 찬송가는 은혜 받는 건 사실은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 건데, 그런 점에서 우리 찬송가는 약해요. 이 130편이 마틴 루터의 찬송가 가사, 시에 영적인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130편은 유대교의 어떤 영성가의 신앙고백이잖아요? 유대교와 우리 개신교의 어떤 신앙적인 접촉점이 여기서 가능하지요. 유대교,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동방정교회도 그럴 거고요. 우리 개신교, 그렇습니다. 그렇게 아주 중요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짧은 시편들은 외워 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130편요. 외워두면 좋습니다.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다고 하는 그리스도교 아니면 성서신앙의 핵심을 엑기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으면서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깊은 곳, 부르짖음, 죄악, 사유(赦宥), 용서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경외, 기다림, 파수꾼, 아침, 인자하심, 속량 이런 등입니다. 짧은 구절에도 중요한 단어들이 많이 나왔어요. 제가 지금 인용한 단어들, 10개 단어군요. 10개만 따로 설명하려고 하더라도 시간은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의미가 다 있는 거예요. 예,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렴풋이 알거나 교리적으로 알아서 성서가 우리에게 딱 와 닿는 게 아니라 좀 따로 놀 때가 많이 있습니다. 혹은 오해 할 때도 많이 있고요. 실제로 이렇게 와 닿지 않습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하는 것처럼 하고 지나가는 경우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 130편을 저는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눴습니다. 하나는 기다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속량(贖良)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연결될지를 생각해 보세요. 전체제목은 “파수꾼의 영성”입니다. 여기 구절에 나오는 단어, 파수꾼이로고 하는 단어를 그대로 따 온 거고, 그의 영성이 무어냐고 하는 것을 배우자 하는 거지요.

 

파수꾼의 영성이라고 제목아래 두 단락으로 나눠서 공부합니다. 첫 번 단락은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한 번 읽었을 때 나왔잖아요? 그 느낌이 확 오지 않습니까? 기다린다, 여호와를 기다린다, 5절과 6절에서 특별히 더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여호와를 기다린다, 혹은 말씀을 바란다, 그의 영적인 상태가 어떤지를 여러분들이 느끼셔야 되는 거예요.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 우리가 과연 기다리고 있는가, 여호와가 너무 멀게 느껴지죠? 어떻게 보면 우리들에게는 그렇습니다. 그것도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간절함보다 더 간절하게 여호와를 기다린다 얘기 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밤을 지키는 자입니다. 밤이요, 아침이 와야만 파수꾼의 임무가 다 끝나지요. 자기의 영적인 상태를 그렇게 지금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주 강렬하게 아침을 기다립니다. 이 밤은 유혹의 기간일 수도 있고, 시험의 기간일 수도 있고 불확실성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밤 중에 성을 지켜야 되는 그 사람의 입장 이예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입장에서 1절에서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서의 밤은 깊은 곳 이예요. 어둠이니까 깊다는 느낌이 오지요? 깊은 곳에서 부르짖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느 때 깊은 데를 느낍니까? 심연이라고도 하거든요, 이게 어떤 사람에게는 확실하게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렴풋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삶을 평면적으로만 보통 많이 생각합니다. 반복되는 거예요. 똑 같이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채워나가는 방식대로 하는 거예요. 평면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삶이 그렇지 않잖아요? 어떤 깊음이라고 하는 어떤 그러한 상황이 우리들에게 옵니다. 간혹 가다가는 난치병이 걸린다거나 큰 어떤 생존의 위기, 그런 것을 통해서 느낄 수 있고요,

 

아니면 깊은 철학적 생각 속에서 죽음이 뭐냐, 인간의 실존이 뭐냐 그런데서도 어떻게 벗어 날 수 없는 그러한 느낌을 갖습니다. 말 그대로 그렇습니다. 심연은 자기가 벗어 날 수 없는 어떤 깊은 곳이지요. 성서적으로 표현하면 우리 피조물의 한계, 피조물의 한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벗어 날 수 없는 그러한 한계 있잖아요. 그 안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이 시편 기자는 그러한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그런 경험을 하셨잖아요. 아주 절절한 경험입니다. 그것 보다 더한 심연은 없을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 어떤 심연 이렇게 하면 멀게 이게 좀 느껴지지요? 멀다기보다도 어렴풋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와 닿진 않습니다. 그걸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얘기 할 수 있을까요? 궁극적인 생명과의 불일치를 얘기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지금 완성시키진 못한 거예요. 그 어떤 것으로도 완성되지가 않습니다. 그건 그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는 생명과의 불일치 상태인 거죠. 사람들은 누구나 이걸 다 경험합니다. 아무리 행복한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허하고요, 불안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하고 친한 친구들하고 같이 있거나 매일 저녁에 술 마시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계속 좋은 일만 많이 있다하더라도 결국은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여기서 제외 된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정신병자나 자기망상에 빠진 사람 말고는 다 그렇습니다. 성서적으로 표현해서 피조물,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실존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명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같은 연장선인데요? 우리의 삶이 그림자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각자 살아온 인생살이가 30년, 40년 50년 쭉 될 테인데, 그림자와 같잖아요?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뭐냐,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아직까지 생명을 완성하지 못했다 할 수 없고요. 심연입니다 어떻게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서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시편기자도 똑 같이 그 원인을 죄에서 찾습니다. 죄에서 찾습니다. 3절에 그렇게 나와 있네요. 3.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이런 글을 읽으면서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내가 누구 것을 도둑질 했구나, 자꾸만 그런 생각으로 떨어지면 성경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이건 더 근원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거예요. 몇 가지 실정법, 도덕적인 규범, 이건 상식적으로 다 그렇게 처리하면서 살아갈 문제고 성서는 더 근원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거거든요? 이게 혼란스러우니까, 성서읽기나 설교나 QT나 이런데서 오해가 되고요. 아주 낮은 차원에서 성서를 이해하게 됩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 놈 죄 지었나, 안 지었나 살펴보신다는 얘기일까요?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우리 감시인입니까, 아니거든요? 우리의 영적인 실존을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자고 우리는 피조물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의 그 원래 뜻대로 살지 못하고 타락한 그러한 상황을 얘기하는 거거든요, 이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을 더 예민하게 느끼는 거예요. 조금 바로 전에 얘기한 것 하고 연관됩니다. 생명의 충일을 느끼지 못하는 그 근원적인 이유가 뭐냐고 하는 것을 이 죄의 관계에서 접근하는 거지요. 저는 이러한 성서의 진술이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 모든 인간을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데서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 성서는요, 그냥 누가 기도 많이 해 갖고 불쑥 받아 적은 게 아니라 인간의 삶의 깊은 통찰,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수 백 년 동안 수 천 동안 그러한 검토를 거쳐서 나온 말씀이예요.

 

그러니까 일반 심리학, 사회학이나, 인문학이라고 얘기하는 윤리 도덕관념 이런 것들보다도 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차원에서도 해명이 가능한 거예요. 이런 것들을 똑 같이 일반 윤리규범 도덕 같은 것하고 맞상대해 갖고 거짓말 하지마, 이렇게 얘기하면 정말 우스운 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 죄의 관점에서 죄는 생명과의 단절이잖아요? 죄는 생명과의 단절이고, 하나님과의 불일치, 이걸 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성서가 얘기하는 죄예요.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고 생명 자체가 하나님 이예요. 그걸 이해하시지요? 궁극적인 생명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게 우리에게 완성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것을 깨는 근원적인 존재론적인 힘이 죄다,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죄의 결과로 나온 것들 이예요. 놀라운 성서기자들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자기가 죄인의 괴수다, 그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파렴치해서 그런 얘기를 했겠습니까, 자기의 영적인 실존을 더 깊이 뚫어 보는 거예요. 이건 어떤 것으로 채워 질 수 없는 생명의 불일치 속에 들어가 있고, 그리고 여전히 원하는 바의 선을 행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행하는 이중적인 자기의 모습을 뚫어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지요. 이 130편 시편기자도 그러한 차원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니까 이것은 죄와 일치 됬냐, 일치되지 않냐, 하는 것을 보고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일치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 하나님은 생명자체신데요, 그런 차원에서 자기의 영성이 예민해지면 자기가 얼마나 생명으로부터 멀리 있는지를 명확하게 깨닫는 거지요. 방금 앞에서 제가 이러한 성서의 진술이 그냥 이렇게 신비하게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수 백 년 수 천년동안 영성가들의 신앙적인 고민, 논쟁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말씀 드렸어요.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말하는 윤리, 철학, 인문학, 이런 것에 못지않게 더 인간을 뚫어 본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걸 잘 기억하시기를 바라고요, 이제 그런 연장선 속에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생명과 일치되지 못해 있느냐를 깊이 있게 뚫어보는 영적인 자세가 죄에 대한 어떤 예민한 감각, 영적 감수성 이런 걸로 나타나는 거지요. 우리 안에서 생명과의 일치, 불일치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설명이 똑 같은 걸 제가 반복하는 것 같은데,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다 보니까 반복이 됬습니다. 그 강의안 첫 번째 단락은, 세 번째 패라그래프의 뒷부분을 좀 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를 단순히 부도덕성과 실정법의 위반으로 보면 곤란하지요. 더 근원적인 겁니다. 우리는 상식과 교양으로 사는 것을 얘기하는 건 아니예요. 그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요, 그것은 그냥 되는 거고요. 더 근원적인 걸 얘기하는 겁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생명자체이신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힘이 바로 죄지요. 하나님과 분리가 죄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결국 시편기자가 어디에 희망을 걸어야 될까요? 결국은요. 자기 자신을 보니까 깊은 심연에 빠져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건 아마 우리들도 다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그걸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그걸 더 성찰하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그러한 우리의 내면세계를 더 성찰하는 삶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이 깊은 심연에 내가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것은 아무리 내가 아닌 것처럼 모양을 내고 가리려고 해도 가릴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시편기자가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해결책은 다른 데는 없으니까요. 파수꾼의 심정,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그러한 심정으로, 여호와를 그리고 말씀을 기다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 여호와가 누굴까요?

 

그 말씀이 무얼까요? 우리를 심연으로부터 들어 올릴 그분이 누굴까? 천천히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직 확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 시편기자가 이 심연가운데서 마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외치듯이 여호와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구원이 그에게서만이 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희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그 분에게서만 온다고 한다는 것을 알았고, 또 희망할 수 있었던 거지요.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참 생각을 해 봐야 되겠지요. 구원이라고 하는 건 여기 오늘 본문에 이야기에 따르면 속량입니다. 죄를 씻어 준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속죄라고도 얘기합니다. 8절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8.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여기서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이걸 다른 말로 바꿀 수도 있겠지요. 그가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심연에서 건지시리라, 얘기 할 수 있겠고요. 그가 그러한 희망을 그가 안고 있었습니다.

 

죄가 씻겨 진다고 하는 것은 생명과 일치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거든요. 이 말은 이미 곧 9절에 다 나와 있습니다마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말을 또 거꾸로 하면 여러분들이 그것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명제가 있을 때 그건 그것대로 생각을 해 보고 또 다른 관점에서 보고, 여러 복합적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으면 좋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란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속량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더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를 하셔야 되요. 우리는 말로는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못해, 그게 뭐야, 그렇게 말하면 말할 게 많이 없습니다. 인간은 한 게 아니라고 하면서 계속 우리가 뭔가 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있고요. 그거 안 되면 큰일 날 것처럼 수선을 피우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하고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분리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가능성, 속량의 가능성, 생명의 일체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만 바라야 된다고 얘기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도 내 삶의 프로그램들은 내가 중심으로 되어 가고 있으니까, 결국 우리는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성서는 이 죄 문제를 단순히 행동을 바꾸는 수준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수준에서 접근합니다. 존재론적이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풍이 우리들에게 몰려오는 것 하고 비슷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풍이 오는데 우리가 딱 몸으로 막아 설 수 있겠습니까? 아니잖아요? 아주 근원적인 어떤 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고 죄의 지배를 당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도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게 다 그러냐, 물론 성서 구절에 따라서 죄가 그렇게 강하지만 죄를 지배하라, 타협하지 말아라, 우리들에게 권면하는 구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우리는 피조물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논리를 이해하시겠죠? 죄가 극복 못되면 죽음도 극복이 못 되는 겁니다. 죄와 죽음은 하나예요. 이런 것들도 다 실질적으로 느끼셔야 되요. 뭐, 내가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죄를 좀 짓긴 하지만 죽지 않았는데 그러나 이렇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을 죽지 않는다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는 전혀 다른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죽음과 삶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걸 전제하고 지금 대체적으로 정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어떤 성서신앙의 가장 중요한 골격을 제가 지금 말씀 드린 거예요. 그래서 130편이 중요합니다. 이런 것들을 자꾸만 여러분들이 듣고 생각하면서 정리하면서 신앙의 틀들이, 좋은 뜻에서의 틀이예요. 고정되었다고 하는 틀이 아니라 구조를 세워간다고 하는 뜻에서 역동적인 구조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의 틀이 세워지는 겁니다.

 

그걸 전제하고 이제 마지막 질문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속량을 받았을까, 라고 하는 거지요. 여기 130편에서는 속량 하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도 그러냐, 아니냐 라고 하는 겁니다. 속량이라고 하는 말을 생명이라고 하는 말로 바꿔도 되는 거예요. 똑 같습니다. 죄를 용서 받으면 생명을 얻는 거고 죄가 열매를 맺은 사망도 해결되니까, 생명을 얻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이런 질문에서 우리는 부정과 긍정, 두 가지 대답이 다 있습니다.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대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말을 썼습니다마는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니예요. 변증법적이라고 그게 부정과 긍정이 연결되면서 그게 다시 새로운 것으로 올라가고 다시 또 부정되고 긍정되면서 또 새로운 세계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는 거를 이야기합니다. 긴장이라고 얘기해도 좋아요. 그러니까 일단 부정이예요. 우리가 속량을 받았을까, 우리가 생명을 얻었을까, 우리가 죽잖아요,

 

아직 우리가 속량 받은 건 아닙니다. 구원받은 건 아닙니다. 지금 여전히 우리는 위태롭지요. 그러니까, 일단은 부정의 부분을 피할 수 없는 겁니다. 우리의 현재 삶은 그렇습니다. 일종의 중간 시기라고 할까, 그 마지막 오기 전까지 이런 중간시기에 우리는 속량과 생명을 온전하게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긍정이예요. 우리는 부활생명을 얻게 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생명을 얻은 거고 속량 받은 거지요. 구원과 생명은 실증적으로는 아니고 약속으로 받은 거예요. 실증적이라고 하는 것은 확인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책, 희색이고 무거게 어떻고 이런 거죠, 아주 실제적인 어떤 사물처럼 이런 증거로 나타나는 건데. 이런 방식으로가 아니예요. 구원, 생명은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건 마치 여기 전체주제로 나오는 파수꾼의 이야기처럼 아침이 이 파수꾼에게 아직 오지 않았어요. 밤중인데, 아직 오진 않았지만 아침이 온다고 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너무 확실한 거예요.

 

그게 아직 실증으로 오지 않았어, 시간으로는 아직 오지 않았어, 그러나 약속으로는 이미 온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긴장인데 이게 말장난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글쎄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뭐, 할 말은 없습니다. 삶 자체가 그렇게 신비로운 건데 그것을 다 실증적으로 확실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대화가 불가능한 거거든요. 파수꾼에게 아침이 약속으로 주어진 것 하고 비슷한 겁니다. 이 약속은 일단 밤이 끝나야 실현되는 거예요. 그게 밤이 끝나는 순간, 우리로 말하면 종말, 그 때 실질적으로 실현되지만, 지금 우리의 현재삶에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그냥 말로가 아니라 아주 실제적으로 느껴져야 되는데요,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우리 영성의 문제인거예요. 2000년 동안 많은 그 영성가들, 신앙의 선배들은 그러한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아주 곤란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내면적으로는 대단히 역동적으로 살았어요. 이러한 능력, 어떤 능력요,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 현재 여기에 우리의 삶으로 들어온 생명과 구원의 그 약속, 그런 능력을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 이게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명백한 사실인데 오늘 시편의 표현을 빌리면 바로 파수꾼의 영성입니다. 아직은 어둠 때문에 힘들어요. 스스로도 한계가 있고 유혹도 받고, 그렇지만, 정말 심연에 떨어진 것과 같은 상태이지만 그러나 아침이 온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희망, 그리고 인식을 가진 거지요. 이 파수꾼에게 아침이 현실, 리얼리티예요. 현실이 되듯이 종말의 완성이, 아니 종말의 생명이 오늘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 말이 조금 까다롭게 되어 있는데요, 좀 생각을 해 보십시오. 아직은 밤이지만 아침을 간절히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아직까지 우리 삶이, 우리생명이 완성되지 못했지만 완성의 순간이 우리들에게 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그 약속을, 아주 실질적으로 우리가 깨우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지요. 파수꾼의 영성을 가슴에 새겨야 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오래전 어느 영성가의 이 파수꾼의 영성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전히 심연을 삽니다. 어두움을 삽니다. 부서진 생명의 한 파편들을 붙들고 삽니다. 그러나 피조물이요. 또한 죄로 인해서 생명과 불일치되는 우리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마지막 때에 온전한 영원한 생명이 우리들의 약속으로 주어졌음을 믿습니다. 오늘의 이 어둠과 심연을 그리고 불일치를 뚫고 나가게 저희들에게 참된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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