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1편 강해-영적 만족과 겸손한 삶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시편은 131편입니다. 3절 밖에 되지 않은 짧은 구절인데 특이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이하다기 보다도 대단히 깊은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시편들이 물론 다 그렇지요. 이건 조금 특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괜찮은 시편인데도 그래도 많이 알려집니다. 먼저 이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두 번 읽겠습니다.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아멘! 어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었어요. 5월 10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대개 연등행사를 많이 하는데 어제 비가 와서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불교에 핵심은 수행이라고 보통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깨우침 인 거예요. 깨우침의 종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라고 하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거지요. 승려가 되는 길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선승 쪽이고 선을 붙드는 거고, 또 하나는 학승이라고 해서 불교의 교리를 배우는 겁니다. 이 두 개가 다 중요한데 그래도 특징은 선승 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속한 많은 스님들이 하안거와 동안거를 해요. 세 달 동안 합니다. 여름과 겨울에 바깥출입 전혀 하지 않고 화두를 붙들고 깨우침을 더 얻기 위해서 용맹 정진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붙드는 거지요. 나는 누구인가? 그게 뻔한 이야기 같지요? 그런데 뻔 하지가 않습니다. 그런 걸 붙들고 있기가 쉽지 않아요.

 

우리가 훈련이 되지 않아서 그런데요, 간단한 거로만 보더라도 백 년 전에 내가 어디 있었나, 이걸 생각하면 까마득하지 않습니까, 없었잖아요? 그런데 여러 가지 뭐, 난자, 정자, 아니면 더 나아가서는 그 어머니, 아버지 그 어떤 할아버지 대에 어떤 그러한 것들이 쭉 우리에게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생명현상이고요. 결국 그런 것들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이 지구 안에 있는 어떤 소립자들의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그런 작용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작은 세계로 들어가게 되면 생명하고 생명 아닌 것 하고 차이도 없을 정도의 그러한 세계가 있어요. 그런 것들을 계속 붙들고 내가 누구냐, 생각하면 굉장히 오묘한 거지요. 하여튼 그 화두를 붙든다고 하는 핵심은 그겁니다. 내가 누군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에 어떤 화두를 정진을 통해서 어떤 궁극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가 없어지는 거지요. 불교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없어지는 게 곧 이제 열반에 이르는 겁니다. 어디 집착하지 않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극도로 평화로운 삶에 들어가게 되는 거지요. 대개 우리가 경험하는 고집, 그리고 염려, 근심,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그러한 요소들이 자기집착이거든요? 그것을 넘어 서는 겁니다. 이러한 깨우침, 그리고 그 수행이라고 하는 불교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게 기독교가 다르다, 얘기를 많이 하지요. 수행이나, 깨달음보다도 믿음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얘기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도 말하자면 수행이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있는 거거든요. 수행을 빼 놓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놓치고 있어요. 지금 내가 뜨거워져서 열심히 뭐 열정적으로 무얼 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되고 이렇게 수행이라고 하는 성격이 많이 약화 되는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두 개가 궁극적으로 보면 수행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불교하고 붙잡는 화두가 다른 거예요. 수행은 화두 비슷한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게 특별히 이상한 게 아니고요. 다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는 거예요. 불교는 내가 누구냐를 찾는 거거든요? 내가 누구냐,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이 누구냐 여기에 있습니다. 근본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참된 자유, 궁극적인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이 131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고 싶으시죠? 불교가 얘기하는 그 열반,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보통 하나님 나라와 일치거든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 131편 시편기자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보십시오. 저도 이 공부를 준비하면서 저 스스로에게도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서기자들이 이미 오래전에 어떤 길을 이미 열어 놓았던 거거든요? 우리가 잘 따라가지 못해서 문제인거지요.

 

짤막하게 3절인데요, 각 절을 나눠서 보겠습니다. 1절에서 이 시편기자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하는 거예요. 교만과 오만, 자기를 높이는 자세이지요. 자기를 절대화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높이는 거지요. 자기가 높아지는 거예요. 사람들에게는 본성적으로 그렇습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 말이지요. 이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하고의 비교의식에서 나오지요. 만약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된다면 그런 거 하지 않겠지요. 교만이고 말고도 없어요. 높아지고 말고도 없어요. 비교의식에서 나오게 되거든요?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서 좀 나은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하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많이 벌어지는 일들 이예요. 그의 의식적으로 나타나고 무의식적으로도 많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자기외모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갖는 거라든지, 그것도 결국은 다 비교의식이거든요? 직업이라든지 이런 것도 말이지요?

 

다른 사람 보다 연봉이 많은 것, 적은 것으로 상당히 우리가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끊임없이 비교의식과 거기서 또 교만하고 그런 상태에 빠지는 거지요. 그런 것은 경쟁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면 교만하고 높아지고요, 지면 반대로 낙심하고요. 만약에 경쟁이라고 하는 자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가능한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일반적인 이러한 세상살이에서는 이런 것, 경주에서 이기면 교만하고 자기만족하고 지면 낙심하는, 그런데서만 삶의 동기를 부여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들은 일종의 소여성(所與性)으로 우리에게 작용해요.

 

제가 어려운 단어를 일부러 썼어요. 모르셔도 되는데 철학용어거든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게게벤하이트(Gegebenheit)라고 독일어로 게벤(geben)이라고 하는 게 ‘준다’는 뜻이거든요? 영어하고 비슷합니다. give 인데요? 그것을 과거분사로 만들고 추상명사화 하는 어미를 붙여 갖고 Gegebenheit라고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본질적이라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생 아벨을 살해한 카인의 그러한 마음이 있는 거지요. 이게 성서가 인간을 이렇게 정확하게 짚고 있어요. 형제살해를 할 정도로 인간은 비교하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아벨을 제사만 받았다는 걸 갖고 그게 이유가 돼서 동생을 죽인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보면 웃기는 얘기다, 말이 되냐, 동생하고 싸우는 게 말이 되냐,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게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어떤 교육이나 이런 걸 통해서 절제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꼭 형제만이 아니라 세계 사람들은 피를 나눈 형제만이 아니라 모든 세계는 다 형제라고 볼 때 증오심, 경쟁의식에서 나오는 형제살해가 우리 인간의 본성에 거의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창세기 부분에도 나오고 다른데도 많이 나오는 그러한 이야기들이 헛 튼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정확하게 인간의 삶을 뚫어 본데서 나오는 어떤 분명한 해석이고 직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에 따라서 아주 강하게 나타나는 사람이 있고요, 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라고 할 수 있고, 욕망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실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게 과도하게 나타나는 사람들의 영혼은 좀 흐리죠, 그건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리트머스 시험지를 가지고 딱 표시 나게 시험할 수는 없는데 영혼이, 영적인 세계가 혼란스럽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옆에 있으면 대개 불편한 거죠, 아주 구체적인 사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런 게 있습니다. 주변사람들까지 혼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요, 그 시편기자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건 겸손을 얘기한 거거든요? 이 말은 곧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겠다고 하는 이미 그런 세계로 들어갔다는 고백인거예요. 예, 그건 당연히 겸손할 수 밖 에 없는 거지요. 비교하지 않는 것, 쉽지는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거든요? 우리가 어느 교회보다 작다, 크다 이거 사실은 거의 무의미한 일들입니다. 우리가 무의미한 것에 집착하긴 해요. 우리가 살아가면서도 그런 것은 매일 느끼는 거니까요. 제발 좀 비교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잘 안되지요? 시편기자는 이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걸 알고 있어요. 눈에 보이면 누가 잘 나고 못나 보이는데 그럼 마음이 동요되지요.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게 되느냐, 안 되느냐, 따라서 결정되어야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의 삶, 이것을 영성이라고 할 수 있고요. 그 쪽을 향해서 부단히 길을 가는 걸 불교용어로 바꿔 말하면 수행, 선, 참선 이런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 얘기하면 그런 거예요. 자신을 보는 거지요. 가능할까요? 여러분들 그게 됩니까?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와 이웃을 보는 거지요. 이게 그냥 그렇게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추상적이지 않다고 하는 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확보해야 되는 거예요. 영성가들은 그걸 갖고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렇게 자기의 눈높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럼 무얼 알게 되지요? 주제파악이 되는 거거든요?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습니다.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 능력을 과대 포장 하는 것, 이런 데 신경 쓰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거지요.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것을 더 부풀리고 없는 것 까지 끌어내려고 하다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우리 삶이 계속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시편기자는 그러한 영적인 상태를 일컬어서 놀랍게 표현하잖아요? 1절 후 반절입니다.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굉장히 실질적인 이야기지요? 오늘 우리 현대인들의 삶, 옛날에도 대개 그랬을 텐데 인간들의 삶하고는 반대되는 길인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가 못할 일을 억지로라도 하려고 얼마나 기를 씁니까? 그래서 사람들을 자꾸만 놀래게 하려고 하잖아요? 내가 이만한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 그렇게 기를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여기 대구샘터교회에 50명이 주일날 예배드리는 모습하고 5천명, 5만명이 모여서 드리는 교회모습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떨까요? 이건 아무 차이가 없는 겁니다.

 

우리가 그런 걸 이룩했다고 하는 자체가 조족지혈(鳥足之血), 새 발의 피, 이렇게 문자를 써 봤습니다. 재미있으시라고요,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일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걸 어렴푸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아셔야 합니다. 이게 실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에 담아 둬야 되겠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쓸데없이 힘쓰지 않는다, 쉽지 않습니다. 2절에서 이 시편기자가 또 아주 정확하게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인 태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 그것을 지금 얘기하기 전에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강의안에 나와 있습니다. 참된 겸손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라고 얘기를 했는데요, 이 문제도 오해하지 마셔야 되요. 이게 대충 살아서 된다, 무기력하게 살아도 된다, 그런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생명 충만한 삶을 부정하는 건 전혀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세계 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되거든요?

 

예수님도 제자들을 내가 너희들을 세상에 보낸다고 하셨거든요? 세상이 그림자와 같은 세상이긴 하지만, 아주 구체적인 세상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는 이야기도 이 세계 역사 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얘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거지요. 노동할 때 노동하고 글을 쓸 때 글을 쓰고 또 때에 따라서 노동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투쟁할 때 투쟁하고 등등 우리 인간 삶에 벌어지고 있는 거기서 우리가 최선을 다 해야 되는 건 분명합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이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더 근원적인, 영적인 차원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2절에서 젖 뗀 아이로 이런 비유로 설명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겨서 젖을 빠는 아이라고 하지 않고요, 젖을 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있는 거와 같다, 얘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충분하게 젖을 이 아이는 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그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상상이 되죠? 더 이상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어머니 품안에 있기만 해요. 완전히 자기를 거기다가 놓아 버리는 겁니다. 자기 힘을 주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까 배고프니까 젖을 달라고 떼를 쓰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충분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상태인 거예요. 그것이 영적인 만족인 거고요, 그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평화가 가능합니다. 굉장히 표현이 멋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이 그와 같다고 얘기하는 거지요. 부럽지요?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내 영혼은 젖 뗀 아이와 같다. 이것도 꼭 기억해 두셔야 할 구절입니다. 1절에도 있는 구절, 정말 중요한 구절 이예요. 놀라운 일을, 내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공연히 그건 자기를 드러 내려고 하는 거니까요,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다, 그런 상태 말입니다. 중요한 영적인 표현인데요, 두고두고 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그 반대로 살아요. 이 젖 뗀 아이는 어머니에게 더 요구하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꾸 요구만 하는 거예요. 그걸 자꾸만 신앙이라고 얘기하거든요? 기를 쓰고 받아 내려고 하는 그러한 상태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미 충분하게 우리에게 영적인 젖을 먹여 주었는데도, 그래도 우리는 더 달라고 하는 그래서 욕망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그런 일들이 많을 걸요? 조엘 오스틴이라고 하는 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았습니까? 비슷한 책들도 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신앙들은 이미 구약성경이 경계하고 있는 바알 신앙하고 다를 게 없습니다. 바알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긴 게 아니거든요?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다른 설교시간에도 얘기했기 때문에 아시지요? 대단히 그럴 듯한 겁니다.

 

긍정의 힘과 거의 비슷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뭔가 삶이 화려하게 살 것 같은 그런 힘들입니다. 이게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하고 똑같습니다. 총체적으로 지금 경쟁에 몰두하고 있잖습니까? 대학총장들도 CEO가 되고 목사들도 CEO되고 밑에 사람들 적절하게 이게 뭐예요? 때에 따라서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몰고 가거든요? 여기서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는 것은 뭐,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만큼 우리에게 거꾸로 말하면 영혼이 굶주려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현대인들인 많은 것들을 소유하지만 점 점 더 영적으로는 굶주려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한 참된 만족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1절과 2절을 우리가 연관시켜서 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1절이 이야기하고 있는 참된 겸손은 2절이 말하고 있는 참된 만족으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면 어디선가 터지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이 해결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의 영적인 만족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그 안으로 점 점 들어가고 있는지 아닌지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3절은요, 앞에 있는 내용하고 좀 다른 것 같죠?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인의 영적인 만족과 겸손을 이제 좀 전문적인 용어로 제의 공동체와 연결시키는 구절 이예요. 제의 공동체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걸 이제 제사 공동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냥 막 사는 게 아니라 막 산다기보다도 그냥 일상으로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일정한 형식을 통해서 제사를 드리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지 않습니까? 제의 공동체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이 3절이 바로 그걸 이야기 합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게 일종의 제사 드릴 때 부르는 찬송과 같은 거지요. 우리도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르는 것, 사도신경 낭송하는 것, 이게 모두 제의공동체의 모습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말에 1절 2절에 나오는 내용들이 다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다가 여호와만을 바랄지어다, 하면 더 좋았을 텐데 하여튼 그 뜻이 다 들어 있겠지요. 여호와를 통해서 참된 영적인 만족에 거하고 그럴 때 참된 겸손이 나온다고 하는 사실을 자기민족의 제의공동체 안에 연결시켜서 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성 이예요. 이스라엘 사람이라기보다도 성서의 특징입니다. 개인의 신앙하고 민족전체의 신앙이 이렇게 잘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예, 이러한 가르침들이 한 개인도 그렇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도 그렇고 아마 그런 내용이 되어 있습니다. 결국 숱한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렇게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거지요. 오늘 우리도 일종의 예배공동체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유지되는 거거든요? 우리 예배공동체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는 이런 거지요? 영적인 만족과 겸손을 제의적으로 전승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제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영적인 만족과 겸손이라고 하는 영성의 내용을 제의적으로, 예배형식으로 전승해 나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후손들에게 쭉 연결되어야 되지요.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하고 모르는 사람들, 실질적으로 깨닫고 사는 사람들하고 그냥 변죽을 올리는 사람하고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는 아주 확실히 두드려 지고요, 그 영혼이 더 건강해 지느냐, 황폐해 지느냐 이런 점에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방향이 일단 중요합니다. 신앙의 방향이 바른 쪽으로 되어 있으면 시간이 가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신앙이 건강해지는데 이게 잘 못 되어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더 이게 더 혼란스러워진다고 할까요? 겉모양은 어떨지 모르는데 내면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예,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서 131편이 굉장히 짧은 구절이지만 짧은 시간이지만 하여튼 중요하다고 말씀 드렸어요. 제가 지금 충분하게 설명은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도 별로 많지 않고요, 그리고 일단 영성이 시편기자에까지 닿아야 충분하게 풀어내는데 제가 수준이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제 한계 안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꾀나 중요한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잣대라고 할까, 방향침이 될 만한 구절입니다. 한절 한절이 다 그렇네요. 다시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1절에서는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은 하려고 힘쓰지 않는다, 2절에서는 젖 뗀 아이와 같은 내 영혼을 유지한다. 3절에서는 그러한 신앙을 제의적으로 갖춰 나가고 전승한다, 얘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2천 몇 백 년 전 팔레스틴에 살고 있었던 어떤 한 영성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전해 준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하나의 신앙적인 정보로가 아니라 우리 삶의 내용으로 삼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만족과 참된 겸손이 가득하도록 그리고 그 쪽을 향해서 나가도록 우리에게 지혜와 용기를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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