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2편 강해-예루살렘 성전

 

시편 132편입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8.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9.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10.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11.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12.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13.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5.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16.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17.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8.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아멘! 예, 까먹기 전에 미리 17절에 나와 있는 그 이야기를 해야 되겠네요. 하다 보면 또 놓칠 것 같아서, 이렇습니다.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했잖아요? 이 뿔이 난다고 하는 이게 화난다고든지 우리는 이런 말로 자주 쓰지 않습니까? 그게 표준어에 맞는 말인지 아니면 속어인지 모르겠네요. 뿔난다고 하는 게 어떻습니까? 선생님은? 뿔난다는 얘기하잖아요? 화난다는 얘기하잖습니까? 여기서는 화난다는 게 아니라 어떤 권위 명예 같은 것들을 줄이라 하는 것이죠, 사슴의 뿔 이런 것처럼요, 나쁘게 표현하면 교만한 거지만 좋은 뜻으로 권위, 명예 이런 것들입니다. 오늘 시편 132편을 같이 공부 하게 되었습니다. 이 132편은 좀 특별해요, 우리가 앞에서 쭉 공부한 것하고 좀 차이가 있습니다. 비슷한 것들은 물론 있지요. 있었어요. 이게 다 성전에 올라가는 기도, 내려가는 기도 성전 중심의 기도문들이 많이 있었고요.

 

순례자들의 노래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딱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래도 이것은 좀 특별합니다. 성전 봉헌식 때 사용된 기도문이라고 합니다. 조금 형식적이예요. 말하자면, 여기서 교훈을 받기가 좀 어렵습니다. 오늘은 영적인 교훈, 이런 것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던 하나의 정형화된 성전봉헌식 때 사용된 기도문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시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여기 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지요. 거기 예루살렘에 가 보신 분은 계신가요? 저도 가 보진 못했습니다. 사진으로는 언뜻 본 기억은 나는데 그림은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네요.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에 건축한 건 솔로몬이라고 합니다. 기원 전 10세기 때에 지은 거거든요? 그 때 기원전 900년대가 이스라엘에게는 황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 솔로몬 시대예요. 그러니까 성전도 일종의 건축기술 아니겠어요? 기술이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것도 문화라고 하는 겁니다.

 

이 문화라는 것도 먹고 사는 게 되야, 여력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들이라든지. 이러한 건축물들도 세계 문명의 중요한 유적입니다만 거기엔 그만큼 이집트가 물질적인 면으로써도 풍부했다는 것, 또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려면 물질적인 여유만이 아니라 통치자가 독재자하고 비슷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걸 하기 힘들거든요? 솔로몬이 독재자였다고 하는 건 아시잖습니까? 솔로몬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굉장히 기구한 데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대로요, 만약에 솔로몬이 그렇게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전제적인 정치를 하지 않았다면 나라가 반쪽 나지 않습니다. 계속 쭉 내려 올 수 있었는데 그가 너무 사치하고 독재였었고 또 더 나가서는 어떻게 되죠? 굉장히 우상숭배로 기울어졌어요. 이게 참 아이러니해요.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그러한지, 성전을 지을 정도로 신앙이 있었던 사람처럼 우리가 보는데 그러나 결국 그의 말년으로 가면 점 점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다고 하는 것, 이게 왜 이럴까, 참 아이러니입니다.

 

어쨌든 솔로몬이 처음으로 성전건축을 했어요. 그게 6세기에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됩니다. 느부가네살 왕이죠, 예루살렘이 멸망한 해는 기억하시지요? 기원전 587년, 그 때 다 그렇게 됬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가서 몇 년 정도 포로생활 했는지 혹시 조금 느낌이 오세요? 587년에 함락 되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거든요, 왕족, 귀족, 지식인들, 그 당시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이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게 제국들이 식민지를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동화시키는 거지요. 동화, 왠만한 사람들을 다 끌어가고 자기네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이민 오게 하고 그래서 다 그렇게 동화시키는 건데요?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서 대략 몇 년 정도 있었을까요? 그게 한 50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는 게 포로생활 50년 되고서 몇 차례 나눠서 하게 됩니다. 한 꺼번이 아니라, 포로생활 뒤에서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걸쳐서 돌아오게 되죠, 돌아와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겁니다.

 

그게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건축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성전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몇 년도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로마가 시작되었을 때니까 기원 전 3세기, 4세기 그 정도 안 되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쭉 지나가다가 성전 없이, 성전이 허물어진다고 해서 완전히 허물어지는 게 아니고 대개 중요한 게 허물어지고요, 성벽 같은 건 남았을거고, 그런 정도입니다. 그게 헤롯왕에 의해서 다시 건축됩니다. 이게 제 3성전 이예요. 제 1성전은 솔로몬에 의해서 된 것, 제 2성전은 스룹바벨에 의해서 된 것, 제 3성전은 예수님 당시에 악랄했던 헤롯왕입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성전을 보고 예수님께 보십시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굉장히 그 위용을 감탄했던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성전이예요. 그것도 기원 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전쟁 마무리거든요?

 

유대전쟁은 70년에 완전히 끝나기는 했지만 그 전에 이미 전쟁이 거의 져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완전히 다 파괴되었거든요? 그게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은 이 시편 132편은 아마 처음 솔로몬 성전 헌당할 때 사용 된 기도문이라고 일단 볼 수 있는데, 딱 그런 건 아닙니다. 그게 쭉 역사가 흘러오면서 그 기도문에 여러 가지 내용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거기 녹아 든 거죠. 천천히 천천히 여기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이 층층이, 면면히 녹아들어 있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천천히 더 읽어 보겠습니다. 이걸 전체로 나누면 두 대목입니다. 하나는 1절에서 10절입니다. 문장 형식이 이미 구별이 되요. 1절부터 10절까지는 ‘간구’하는 겁니다. 간구요, 두 번째의 단원은 11절에서 18절로 ‘하나님의 약속’이지요.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성전에서 자주 읽었다는 걸 여러분들 머리에 넣어 주십시오.

 

하나의 형식문이예요. 아니 의식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사실적인 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하나님의 향한 기원을 담은 거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을 담아 낸 겁니다. 그게 하나의 fact, 객관적인 fact는 아닌 거예요. 그걸 좀 구분하셔서 여러분들이 읽으셔야 합니다. fact 만이 의미 있는 건 아니거든요? fact는 사실은 건조한 겁니다. 이 fact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역사가 바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시편 기자들은, 이사람들이 영성가이고 역사가이고 예언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사람들은 고유한 영적인 통찰력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한 겁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있는 거지요. 그냥 fact만 나열했다고 하면 그건 아주 건조한 역사문헌이 되고 맙니다. 첫 번째 단원 보겠습니다. 간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위한 기도로 시작합니다.

 

1.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이렇게 나오지요? 당연히 그럴 수 밖 에 없습니다. 지금 이 132편이 성전봉헌식 때 드리던 의식문 이라고 했는데 거의 일치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는 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적인 사람입니다.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죠,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사람이었어요. 성전 봉헌식인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언급되지 않고 이 다윗이 언급된 이유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이 다윗과 솔로몬의 관계를 더듬어 보면 아주 재미있을 거예요. 그걸 중심으로 하나의 성경 소설을 써도 멋질 것 같습니다. 둘의 관계라고 할까, 더 내려가면 솔로몬의, 하옇든 굉장히 드라마틱하거든요. 솔로몬의 아들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압살롬이든가요? 압살롬이 아니라, 제가 다 꿰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다 제거 되요.

 

막내인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 받거든요? 이 솔로몬이 밧세바의 아들입니다. 원래 간통관계가 있었던 밧세바를 통해서 낳은 첫 번째 아이는 죽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이거든요? 궁중에서 어떠한 알력들이 작용해서 결국은 다른 왕세자들이 다 제거되고 솔로몬이 왕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이 나단이라는 선지자고 또 한사람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입니다. 어쨌든 이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이름이 붙은 성전임에도 불구하고 다윗부터 기도가 시작합니다. 그럴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걸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이미 솔로몬이 짓기 전에 모든 재료들을 다윗이 준비했고요. 토대를 다 닦았습니다. 다만 이제 때가 되지 않았을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다윗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짓기 힘들다고 성서기자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긴 있는데 그건 성서기자의 해석이고요, 실제적인 어떤 이유가 있는지는 조금 더 분석을 해 봐야 되겠지요.

 

어쨌든 이 다윗이 거의 모든 토대를 세웠다고 하는 점에서 다윗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도시를 세운 사람 자체가 이 다윗이었고요, 다윗 이전에는 가나안 땅에 여러 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하나하나 다 정복하고 사울 왕 시대에도 아직 통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예루살렘성이 굉장히 요새거든요? 거기 있었던 마지막 족속이 여부스족이라고 합니다. 그 마지막 여부스족을 몰아낸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수도로 할 수 있었고요, 성전을 지을 수 있는 모든 물적인 토대를 세웠었고요, 더 중요한 것은 이 이스라엘의 왕조를 세운 겁니다. 왕조라고 하는 것은 아들에게 그 왕조가 세습되어야 되잖아요? 사울의 아들이 누구지요? 예, 요나단요, 예, 거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얘기 잠깐하고요, 사울의 아들이 누군지, 뭐 등등 가장 초보적인 것도 탁탁 머리에 떠오르지 않지요? 우리 두 딸들도 성경에 대해 너무 몰라갖고 이제는 밥 먹을 때 철학이야기는 좀 그만 하고 아무래도 성경이야기를 많이 해야 되겠어요. 전반적인 흐름을 좀 이해해야 되느데 그게 없어서 지금 주일 학교 하는데 애를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저절로 본인들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안되는가 봐요, 사실은 열심히 하더라도 시간이 되면 다 잊어버립니다.) 예, 하여튼 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울왕조를 바꿔서, 어떤 면에서는 찬탈한 거예요. 새로운 왕조를 세웠고요. 이 왕조가 남 유다로 계속 이어집니다.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계속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정통성이 없는 거지요. 사실은 북이스라엘이 나라가 더 강했거든요. 여로보암이 잘 만 했으면 남쪽보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고 뭐가 됬을텐데 되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하네요. 그런데 겸손하다고 얘길 하잖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겸손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이런 것들이 다 어떤 신앙적인 표현입니다. 이 사람은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했어요. 정치, 권력 이런 것들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겸손해갖고는 되지 않는 거예요. 권모술수도 부리고요, 많이 그랬습니다. 아주 솔로몬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잔인한 일들도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신앙적인 면에서 겸손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으로 자기를 낮추려고 했던 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성전봉헌을 위한 기도문, 혹은 의식문 이런 것들을 쓰면서 다윗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다윗이 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겸손하다고 표현했습니다마는 실제적으로 가장 큰 일은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 온 거예요.

 

그 전까지는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습니다. 손을 대면 부정도 타고요,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일찌감치 다윗이 예루살렘 성으로 가져오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지 못했고요, 어쩌면 다윗도 조금 꺼림직하게 생각했을지 몰라요. 그게 조금 터부라고 하기엔 힘들고요, 뭐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가져오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언약궤가 있는 그 집 사람들이 복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이 다윗이 크게 잔치를 베풀면서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그 때 아마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미갈이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다윗이 춤을 추고 좀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그랬더니 주책맞게 채통 없이 그러냐, 그런 말을 했다가 다윗을 비난을 한 거고, 다윗은 그래 나는 그렇다, 네가 그렇게 나를 우습게 생각해도 나는 좋아서 한다, 그렇게 하면서 너와 이제 인연을 끊는다, 그래서 미갈에게 자식이 없게 됬다고 사무엘 하 어딘가에 나옵니다.

 

예, 어쨌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올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다음에 성전 안에 봉안했죠, 이런 사실들을 5절,6절에서 거론한 다음에 여호와를 예배 하겠다고 말하고요. 그런 아주 귀중한 일을 한 다윗 왕조를 지켜달라고 간구합니다. 고대시대에는 종교하고 정치가 하나였거든요? 왕이 거의 종교에서도 절대적인 수장노릇을 했습니다. 아마 영국여왕도 옛날에 그런 정도 되었을걸요. 그런 배경을 하는 겁니다. 제사장들은 늘 왕조가 살아 남는 게 민족이 살아남는 것 왕조와 국민의 일치, 짐이 나라다, 국가다 이런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아주 실질적인 거였기 때문에 이 다윗왕조를 지켜달라고 하는 간구는 이스라엘을 지켜달라고 하는 간구하고 똑같습니다. 그게 1절에서 10절까지 전반부에 나오는 간구의 내용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다윗부터 시작하지요.

 

11절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예, 다윗에 대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내용이 신명기 사관하고 일치합니다. 신명기사관, 그건 뭐, 그런 말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구약에 신명기가 있지요. 신명기 핵심역사관을 가리켜서 신명기 사관이라고 합니다. 그게 모세오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사상, 신학입니다. 신명기적인 신학이 모세오경의 기본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게 구약전체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단순한 거예요. 기본적인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따르면 너희에게 복을 내릴 것이고 듣지 않고, 청종치 않고 거부하면 멸망하리라, 징벌을 받으리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11절에서도 그런 얘기죠?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하고요,

 

12절에 보면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얘기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다윗의 후손들이 왕들이겠지요? 계속해서요.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가르침, 약속 그런 것들을 그대로 지켰을까요? 못 지켰을까요? 사실은 못 지켰습니다. 북이스라엘 왕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더 못 된 것으로 나오긴 합니다. 그러나 남유다에는 괜찮은 왕들이 가끔 나오긴 하는데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북이스라엘은 왕조가 계속 바뀌고 결국 빨리 멸망했는데, 남 유다는 왕조가 지속되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리고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하는 조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성서기자들이 해석을 하고 있는데 조금 더 일반 역사가들이 본다면 다르게 해석할 수 있겠지요.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남 유다가 그래도 왕조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정치 사회적인 이유가 있지 않느냐 말 할 겁니다.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겁니다.

 

핵심적으로는 다윗이죠. 다윗의 권위가 아주 막강했기 때문에 그 다윗왕조가 해체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씨 조선이 이런 저런 문제가 있더라도 계속 마지막까지 올 수 있었던 거하고 비슷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왕조에 대한 약속이 먼저 있는 거고요. 이어서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으니까 똑 같은 이야기예요.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거예요. 다윗왕조, 예루살렘, 예루살렘성전, 다 한 통속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그랬습니다. 약속이 이어집니다. 14절에 이렇게 되어 있네요.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그리고 그 뒤로 계속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은 모든 것이 풍족한 성이 된다고 하지요? 누구나 다 바라고 있는 약속들입니다. 그렇게 됬으면 좋은 거지요. 되고 싶은 거지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예루살렘에 있는 그 지역은 좀 지정학적으로 풍족할 만한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제사장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주어지고요, 또 성도들에게는 삶의 환희가 넘친다고 하는 약속이 이어집니다. 16절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예,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간구에 이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정말 이스라엘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역사에서 대대로 그대로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이 쭉 나열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네요. 18절입니다.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그 앞에것까지는 그냥 이스라엘과 다윗에 대한 복, 축복 이런 걸 이야기 했는데 18절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요, 배타적으로 복을 주네요. 원수들에게는 수치로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을, 이게 대조되고 있지요. 강조하는 거 겠지요. 강조, 이런 것들을 너무 문자적으로 읽으면 참 곤란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백성들에게는 늘 수치가 간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왕관이 빛난다, 이렇게 가기 시작하면 성경을 오해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완전히 어떤 공존, 평화가 아니라 제로 썸(Zero-sum)이예요. 제로든지, 아니면 썸 전체든지,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 너와 나가 공존하는 그런 것보다도 정글의 법칙이 지배한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서 많은 민족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잖아요. 그래서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얘기할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이걸 갖다가 오늘 시대에 그대로 적용해서 배타적이고 적대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면 좀 오해인 거예요. 이건 이스라엘과 다윗 왕조의 축복에 대한 강조를 표현한 거다, 그런 정도로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공부를 시작 할 때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132편은 특별히 영적인 교훈을 받을 만한 것이 많은 건 아니다라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봉헌할 때 의식문이라서 굉장히 형식적이고 그들의 고유한, 그러나 배타적인 그러한 신앙이 담겨 있다고 말씀 드렸어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하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간혹 보면 예루살렘 성전 모형을 그려 놓고 거기서 어떤 신앙의 교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그런 거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그건 전혀 다른 신앙의 태도인데 거기서 뭐, 이방인의 뜰이 어떻고, 지성소가 어떻고, 언약궤가 어떻고, 이런 것을 통해서 영적인 교훈, 이건 완전히 이현령비현령이고요. 그건 알레고리라고 할까, 그런데 빠지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전자체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엄격하게 구약성경을 보면 성전중심의 이스라엘 민족을 이야기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다른 전통이 있어요.

 

이건 예언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통입니다. 성전중심의 전통은 제사장적인 전통이라고 한다면 반대되는 입장은 뭘까요? 당연히 예언자적 전통이거든요? 예언자들에게는 이런 장소라고 하는 이 성전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인데 왜 성전이라고 하는 여기에 한정되느냐, 그래서 그 성전중심주의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요, 성전세를 거둬드린다거나, 이런 저런 많은 것들 그런 것에 대해서 예언자들이 날카롭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약성서 안에도 성전중심주의와 반성전주의가 같이 병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십시오. 이 성전 얼마나 어마어마합니까? 그렇게 얘기했을 때 허물라 내가 삼일 만에 지으리라, 비유적으로 말씀 하셨습니다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전은 바로 우리 몸이니까요. 그리스도의 몸이거든요? 우리 삶이거든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요,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 성전, 새로운 차원으로 성전이 고양된 것, 지양된 것, 들어 높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느냐, 그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제 강의안에 썼습니다. 이 시편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성전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려고 했었던 그들의 진정성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 전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봉헌식 때 불려 지던 이 찬송, 이 기도문, 이 의식문을 읽었습니다. 저들에게 예루살렘성전이 절대적이었지만,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절대적인 분임을 믿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이들의 이러한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했던 저들의 신앙적 열정,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을 배웁니다. 우리에게 일상에서 열심히 살지만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을 향해서 예민하게 반응하고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