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3편 강해-삶의 기초와 여호와의 복

 

시편 133편입니다. 3절로 된 짧은 시편이네요. 함께 읽을 텐데 두 번 같이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1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아멘! 예, 짧은 구절이네요. 짧은 시편입니다. 세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은 말 그대로 시예요. 신앙시입니다. 산문이 아니라, 시는 일정한 형식으로 기록되지요. 거기에도 여러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읽으면 비슷비슷한 이야기 같은데 꼼꼼히 읽으면 거기에 각 주제가 좀 다르게 나옵니다. 탄식이나 간구나 또 찬양, 지혜, 등등 여러 가지지요. 지금 우리가 읽은 말씀은 지혜에 속합니다. 그런 것들이 여러 편이 있어요. 어떻게 지혜롭게 사는 가 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 탄식하고 간구하고 그러한 찬양하고 그런 것만으로 사람이 사는 건 아니잖아요? 실제적으로 이 땅위에서 사람하고 부대끼면서 살아야 되는데 부대끼면서 살려면 지혜, 어떻게 보면 노하우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그냥은 되지 않아요. 서로 연관되기는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중심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새로워졌다면 사람관계, 또 이런저런 살아가는 일들을 일일이 다 알지 못해도 어떤 방향을 잡고 나갈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영성이 늘 그렇게 바르게 되어 있는 게 아니고요, 또 그것이 구체적인 삶에서는 흔들리기도 합니다. 지혜가 좀 필요한 거죠. 구체적인 어떤 삶의 방식들이요. 그렇습니다. 그게 신앙하고 완전히 연관이 없는 거 아닌데 구체적인 삶에서는 그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가족의 관계예요. 가정을 주제로 한 겁니다. 사람의 어떤 관계에서 가장 기초는 가정이겠지요? 모든 것은 가정에서 이루어지거든요? 어른들은 이미 성장한 다음에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니까 그런대로 왠만하면 잘 할 수 있어요. 잘 한다기 보다도 그냥 대충 합니다. 그런데 가정에 있는 아이들은 새롭게 인간관계를 배우는 것이라서 가정이 어떠냐에 따라 그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신앙 이런 것들이 크게 영향을 받는 거지요. 가정, 가족, 이런 주제로 한 건데요, 형제의 관계 이런 것들입니다. 127편도 가족의 관계였어요. 어떻게 보면 여긴 그렇게 우리가 깊이 생각할 거리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133편하고 134편을 오늘 같이 할까 생각했어요. 말씀을 읽다 보니까 그렇지만은 않다, 각각이 좀 다르기도 하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싶어서 오늘은 짧지만 133편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처음 이렇게 시작하지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연합한다고 하는 것, 하나가 된다고 하는 뜻일까요? 동거한다, 같이 사는 것, 이건 뻔한 이야기인데요? 그렇게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이 아름답다, 귀하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뻔 한 이야기인데 이렇게 쓸까? 이상하죠? 형제가 연합한다거나 동거하는 것은 이게 뭐, 당연한 것 같지만 본능적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가 혹은 자매가 또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와 부모 자식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쨌든 거기에도 문제는 있는 거예요. 있지 말아야 되지만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성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 사건이거든요?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들에 데리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인다고 하는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초장부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이게 이런 문제가 고대사회에서도 비일비재한 것은 아니겠지만, 있었다고 하는 걸 가리킵니다. 이게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어쩌다가 있어도 아주 큰 일로 생각되는 거지요.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어떻게 보면 동기는 사소해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시고 카인 자기 것은 받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그런 작은 시기심으로 결국 그런 형제살해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건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게 많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서로 그런 증오심, 시기심 이런 것들이 해소가 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그게 계속 쌓이면, 축적되면 사람은 그걸 감당을 못 하거든요? 그래서 형제살해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건 뭐, 실제적으로 많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서와 야곱이야기에도 형제가 대립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고 그러지요. 누가 먼저 나가냐, 그런 걸 시사해 주는 이야기예요. 야곱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다,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야곱의 형제들이 12명이 있잖아요? 그런데 11번째가 요셉이거든요? 12번째가 베냐민입니다. 이 두 아들을 야곱이 끔찍히 사랑했어요. 편애하고 비슷하지요. 배 다른 형제입니다. 라헬을 통해서 얻은 아들입니다. 같은 아들인데도 막내와 그 바로 위라서 그런지 야곱이 끔찍이 사랑해서 야곱의 큰 아들들이 시기심으로 동생 요셉을 팔아 버립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냐, 형제들의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고요, 큰 형은 동생을 구하려고 그랬는데, 그게 어떻게 잘 안 되갖고 팔리게 됩니다. 그런 성서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더라도 형제사이에 이러한 갈등들은 인류역사에서 계속되는 문제다, 볼 수 있습니다.

 

이 형제관계는 실제로 피를 나눈 그 형제 가족 관계만이 아니라 좀 더 나가는 거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혈연중심의 형제에 우리가 너무 거기에 묶여 있거든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본능적이기 때문에 다 그렇습니다.누구도 거기에는 개입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한데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생각할 때는 모든 세계 사람들이 다 형제거든요? 그러니까 실제적인 가족으로 살았던 형제관계에서 그 형제사랑을 이렇게 퇴행적으로 자기들끼리가 아니라 넓혀가는 그런 일들이 필요하지요. 세상 사람들이 사실은 다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그냥 좋은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될 텐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문제이긴 합니다. 형제죠, 이 세계 사람들이 다 충돌하잖아요? 힘 있는 민족이 힘없는 민족을 폭력적으로 지배하고요.

 

그리고 또 소말리아 해적들 이야기도 우리가 들었습니다만, 정말 살아 갈 수 있는 근거가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적질을 한다거나 심지어 테러도 하고 말이지요. 이 세계가 그렇게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형제가 연합하여,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는대로 동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가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형제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확장된다는 거고요, 한 걸음 더 나가서 지구 안의 모든 생명체는 형제관계예요. 이런 걸 말한 스승들은 많이 있습니다. 대개 정신적인 스승들은 다 그런 얘길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책들도 읽었고요, 실제적으로 또 그런건데 실제적으로 그게 확 닿지 않아서 문제이긴 합니다. 이 지구가 우주 안에서 얼마나 외로운 별인지를 알면 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미물까지 형제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요? 그 우주를 탐험하는 무인우주선들을 과학자들이 쏘아 보냅니다. 계속 반복해서 해요. 이 태양계 안에 돌아다니는 것들도 있고요,

 

태양계를 벗어나는 무인우주 탐사선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우주 탐사선이 지구를 찍어서 전송하거든요? 그렇게 보면 은하수와 같은 커다란 별들 무리 속에 지구는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아주 외로운 별, 점 하나로도 표시하기 힘든 거죠, 지구는 사실은 빛이 나지 않기 때문에 멀리 가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태양만 보이게 되는데요, 어쨌든 우리는 지구 안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서 돈도 벌고 뭐도 하고, 대단한 것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지식자랑도 하고 이런 저런 것들이요. 그런데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게 되면 하는 일들이 정말 우스운 거예요. 많은 그런 희망과 꿈과 야망을 품고 있지만, 그게 우주차원에서 보면, 우주가 막연한 게 아니라 옛날에는 막연했었는데 지금은 실제적으로 와 닿거든요? 그런데서 보면 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보다도 안 되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거든요?

 

참, 그런 차원을 우리가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의 삶, 그리고 인간관계, 이런 것들을 의미 있게 끌고 나가야 되는데 이게 안 되는 거지요. 서로 지배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고 또 하여튼 또 비인간적인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 이런 것 없이 확장하는 성장주의 이런 쪽으로 나가는 것 같습니다. 예,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어떻게 하면 형제처럼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이게 어떤 고도의 정신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만 있는 건 아닙니다. 꼭 필요한 건데, 모든 일반사람들에게 필요한 건데 그게 좀 제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원당 농가에 가서 일도 하고 글도 쓰고 하는데요? 뭐, 그 자연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많이 생각했습니다마는 직접 그 하나하나 층계도 만들고 또 나무도 옮겨 심고, 날아오는 벌, 새, 이런 것도 보고요,

 

오늘은 날씨가 이래서 그런지 바람 부는데 가을처럼 흔들리고 소리가, 잎사귀의 흔들리는 소리가 느껴지더군요. 곳곳에 있는 그 야생초 그런 것들도 귀하고요. 그 안에 있는 지렁이 곤충들, 이런 것, 약간 가까운 게 있고 멀게 있는 게 있는데 다 이 지구 안에 다 살아가는 생물체라는 것을 절실하게 더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 이러한 이야기가 낭만, 종교적 감상주의 이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 삶을 끌어 갈 수 있는 영적인 에너지, 힘, 동력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지금 그럴 수 있을까요? 가능할까요? 거기서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현상에서 인간이 무슨 역할을 해야 될까요? 이 먹이사슬에서 인간이 꼭대기에 있잖아요? 사실, 아래다 위다 할 수 없는 건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생각으로 하니까, 모든 동물들은 우리 밑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쨌든 인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거든요?

 

이게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담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 세계를 다스려라, 이름을 붙여라, 다 그랬잖아요? 그런 것을 잘 못 해석하면 인간 중심으로 모든 걸 지배하고 자연을 억압하고 이용해서 인간 중심으로 해서 해석하는데 그게 서양에서 많이 그랬거든요? 그런 말씀도 인간이 세계 자연을 지배하는 차원이 아니라 봉사의 차원으로 당연히 그걸 받아드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독특한 그 능력이 사유가 있고 언어가 있고, 그리고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총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예술과 문화를 축적해 가는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이 있는데 이걸 어떻게 선하게 우리가 사용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지구 생명을 정말 생명체답게 만드느냐, 하는 거 말이지요. 이런 건 예수 믿는 사람은 당연히 생각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계속 계발하고 만들고 물론 계발을 하긴 해야 되거든요. 그러나 무조건 그렇게 하니까, 무조건 인간중심으로 하니까 분제인 것 같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지구에서 사람과 사람사이가 형제로 연합하고 그리고 모든 동식물에 이르까지 형제 연합으로 나가는데 주어진 사명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2절은 지금 말씀 드린 그 이야기가 정말 귀하다고 하는 사실을, 선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건 1절에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그걸 더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옛날에는 머리에 기름을 발랐던 거 같아요. 우리 동양에서 여자분 들은 기름을 발랐지요? 일반 평민들은 얼마나 발랐을까요? 그래도 바르긴 했을 겁니다. 기름의 종류가 달랐겠지만, 동백기름 이런 것도 있었을 거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요. 그 기름이 수염, 아론의 수염에까지 흐른다고 하잖아요? 수염, 이건 남자의 수염이 어떤 위엄, 명예 이런 것이었어요.

 

근동 사람들은 다 수염을 길렀습니다. 지금도 수염을 다 길러요. 여러분 중동사람들 보면 사실 나오잖습니까? 이슬람사람들도 다는 아니겠지만 거의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건 다 손질을 해야 하거든요? 기름을 바르는 겁니다. 아론의 수염이라고 했지만, 이건 꼭 아론을 이야기는 하는 건 아니고요, 제가 정확하게 전문적으로 연구를 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아론의 수염’이라고 하는 것은 숙어 비슷하게 사용될 겁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잖아요? 제사장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아론이라고 하는 자연 한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명예, 그리고 권위, 영적인 권위라고 할까,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표현하는 일종의 관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수염’이라고 하는 단어가 그런 거지요? 예, 그건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니까 너무 문자적으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그런 전통들을 가지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네요. 수염을 기르고 복장도 많이 그렇게 전통적으로 합니다.

 

옆으로 좀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한 번 짚는 거예요. 그 유럽사람 들과 근동사람들, 그리고 아프리카 사람들도 전통적으로 복장, 이런 거 다 하잖아요? 인도나 그런데도 거의 많이 합니다. 대한민국만은 그렇지 못해요. 그래도 일본도 우리보다 조금 나은가요? 하여튼 북동 아시아, 대한민국, 일본, 타이완인가? 홍콩 들은 전통을 다 잊었습니다. 복장도 그렇고, 우리는 지금 다 서양사람 흉내를 내잖아요? 가끔 각국 수장들 모임 하는 걸 보면 다른 나라 대통령이나 수상들은 자기네들 옷 입고 많이 가더라고요, 인도도 그렇고 등등 여러 나라, 우리만 주로 양복을 입던데 특별히 어떤 행사를 위해서는 한복을 입긴 입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거의 하지 않아요. 아마 우리들에게 고유한 미학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아쉽게 생각이 됩니다.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였습니다.

 

3절이요. 이거는 1절, 2절을 다 연결시키는 건데요? 1절은 기초적인 인간관계의 소중함, 이걸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삶의 지혜죠, 2절에서는 그것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문학적으로 수사학적으로 설명한 거고요. 3절에 들어와서 그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요.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헐몬산, 헬몬산 일 텐데요. 그건 번역이니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굉장히 아주 그림처럼 다가오는 표현이예요. 헬몬산은 높거든요? 높은 산이니까 밤이 되면 기온이 낮아지잖아요? 그러면 이슬이 맺혀지지 않습니까? 그게 시온의 산들이 내림 같다고 하는 거예요. 싱그러운 여름의 숲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런 경험들이 있으시겠지요. 저도 어렸을 때 아침 일찍 숲속에 들어가서 보면 바지가 다 젖어요. 밤에 차거워졌던 공기가 낮의 뜨거운 공기가 섞여서 이슬이 숲속을 다 적십니다. 생명의 충만한 그런 장면이죠, 그것같이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까지 정리가 되었습니다. 시편기자는 바로 이것을 자연주의적으로만 아니면 인간관계의, 인간학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지 않고요. 이것을 이렇게 신학자의 전문용어를 빌리며, 제의적 차원으로 끌어 드립니다. 제의(祭儀),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형식으로 어떤 걸 나타나는 것’, 이것이 제의거든요?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한 거예요. 예, 그런데 여기에 지금 바로 읽어 드린 그 문장에 우리 말 성경에 생략된 접속사가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라고 하는 거예요.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거잖아요? 왜냐하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그렇게 된다,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제관계를 맺으며 사는 그러한 삶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영생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그렇게 받아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일상이 제의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거지요. 일상의 형제, 자식, 부모관계, 동료, 사회 일상적인 모든 삶들이요, 이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그렇게 귀하게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데 그게 왜냐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이 일상이라고 하는 것은, 이게 순식간에 파괴되기도 하거든요? 아무리 우리가 노력하더라도 형제가 연합하거나 동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하고 또 그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것을 성서가 무조건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안 되는 것을 요구하는 건 아니예요. 여기서 우리가 조금 더 이 문제를 밀고 나가면 더 생각할 거리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도대체 형제가 연합한다고 할 때, 형제가 뭐냐, 서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냐, 혈연을 나눈 관계냐, 아니면 전혀 관계가 없는 이방인까지냐, 이런 걸 우리가 쭉 생각할 수 있는데, 이방인들까지 포함되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까지 지금 여기서 확인하기는 힘듭니다.

 

이 시편기자가 어떤 걸 염두에 두고 형제라고 부르긴 했겠지요? 모든 사람들하고 여기서 이야기는 하는 것과 같은 형제연합, 동거, 이런 것이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문제예요. 그러나 원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지금 단순히 형제관계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전체를 포함해서요. 이런 것들에 하나님이 신비한 방식으로 영생, 그리고 복, 이것을 허락하신다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옳은 얘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결국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마땅히 찬양을 해야 되는 겁니다. 일상의 삶에서 그런 거지요. 칼 바르트는 그런 얘기까지 했어요. 예배가 단순히 교회 안에서 예배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예배도 필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잖아요?

 

정치적인 게 아닌 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교육문제나, 이런저런 노동문제나, 이런 저런, 이런 것들이 다 정치와 연관되기 때문에 일상이거든요? 그러한 삶을 우리가 사는 거지요. 일상은 곧 하나님의 은총인 거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더 이야기 한다면 그냥 은총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받아 드립니다마는 우리가 그렇게 살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에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받아 드려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소외되면 안 된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되겠고요, 교회가 맡은 일들이 단지 교회확장으로써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사람들의 일상에 개입된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뭔가, 그런 것도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33편 말씀을 보았습니다. 짧은 구절인데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지혜가 있음을 저희들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매 순간의 일상에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명령이 있음을 저희들이 기억합니다. 우리가 일상에 치우쳐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각성하고 성찰 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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