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4편 강해-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편입니다. 지난주에도 아주 짧은 시편이었지요? 133편요, 3절로 되어 있습니다. 3절로 되어 있는 시편은 몇 개 없거든요? 그 중에 하나가 133, 그리고 134편입니다. 짧지만 깊은 영적인 어떤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같이 읽겠어요. 두 번 반복해서 읽겠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1.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3.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아멘! 모든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배경이 있어요. 모든 성경이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이런 데는 천지창조 이런 이야기니까 이런거야 말로 아직 사람이 없을 때니까 그렇잖아요? 창세기 1장이 이런거야 말로 하나님이 뚝 떨어뜨려 주신 말씀이구나, 그런 생각 하시면 오해입니다. 이 창세기 1장에 나와 있는 근원에 대한 이야기도 결국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해석에 불과 하구나, 생각 할 수 있거든요. 그게 미묘합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혼란을 겪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할 때 이렇게 지금 제가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렇게 착각을 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를 때도 “아브라함아!”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그거 아니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이해를 하면 성경은 스스로 모순에 빠집니다. 구체적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과의 어떤 관계를 여시고 거기서 특별한 어떤 영성가들, 그걸 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말씀이 역사 안에 살아나게 하는 거지요. 창세기가 그런 거고요, 시편도 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삶의 경험이 그대로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120편부터 134편까지 이 시편은 우리가 지금 공부 한, 그러니까 몇 달 동안 계속 본 거네요. 거의 우리가 똑 같은 표제가 똑 같은 성경으로 읽었지요?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하나의 묶음입니다. 이런 표제가〚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그렇게 묶여 있습니다. 보십시오〚성전에 올라가는 노래〛그러니까 그건 ‘순례자들의 노래’라고 하는 거예요. 일종의 ‘순례자들의 노래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별히 종교적인 사람들이잖아요? 근동의 사람들이 좀 종교적인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종교적이긴 하지요.

 

그런데 고대의 그런 종교적인 특성을 잘 구분해도 연구가 될 만하고, 이미 연구 됬습니다. 특징들이 다양한데 근동사람들은 그런 성지순례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을 했어요. 티벳트 불교도 성지순례를 많이 한다고 하잖아요? 라사라는 곳에 평생을 걸려서 오체투지 이런 걸로 가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라고 하니까, 참 우리가 볼 때는 왜 저렇게 하나? 참,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마는, 사람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게 그게 아니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점에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이슬람을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요, 일 년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세 번 정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거룩한 도시죠? 시온성이라고 얘기 합니다, 시온이 어디냐, 딱 구체적인 어떤 장소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상징적으로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적인 모태가 시온주의라고 하는데요, 시온이라고 하면 예루살렘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루살렘 성 자체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어요. 물론 거기에 가장 큰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고 하는 거지요. 그것 말고도 다윗 왕조의 뿌리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다윗서부터 이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됬습니다. 다윗보다 앞선 왕은 아시지요? 누군지, 사울이잖아요? 우리 시편공부가 다 끝나면 공부하는 방법을 좀 바꿔서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성경의 역사, 전체 개론적인 걸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성경을 읽는 방법은 두 가지거든요? 깊이 들어가는 것하고 개론적으로 쭉 넓게 보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지금까지는 우리는 깊이 들어가는 걸로 했거든요? 이게 서로 장단점이 있는데 넓게 전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사실은 깊게 들어 갈 수 있고, 또 깊이 들어가야 넓은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 됬고, 왕들의 역사 예언자들하고 왕들이 어떻게 투쟁을 했는지 그리고 출애굽사건과 바벨론 포로귀환이 사건들이 어떻게 성경을 구성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이었는지 등등 또 통일왕국과 분열왕국의 역사들, 그 안에서, 그 이전에 활동했던 사사들, 이런 사람들, 전반적인 겁니다. 일단을 우리가 시작을 했으니까 시편은 다 끝나고 하겠습니다. 150편까지 있으니까 앞으로 16편만 더 하면 되겠군요. 4달 정도 걸릴텐데, 미리 말씀 드려야 되겠네요. 7월, 8월은 쉬도록 하겠습니다. 작년엔 우리들이 8월만 쉰 것 같은데 이번에 7월부터 쉬도록 하고요, 금년 11월 말쯤엔 시편은 다 끝날 것 같습니다. 뒤로 구약 성경 전체를 쭉 survey 한다고 하나요? 쭉 훑어가는, 그런 방식으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서 개론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이 세 절기가 중요하거든요? 종교적인 의미도 있고, 고대인들에게 이 절기들은 모두 Fest 거든요?

 

축제입니다. 말 그대로요. 브라질에도 축제 이런 것 하고 유럽에 가면 사순절 있기 전에 축제를 많이 하거든요? 사육제(Lent)라고 해서 말이지요. 이런 모든 것들이 종교적인 것이고 동시에 정치적인 것이고, 또 뭐가 있을까요? 이건 그들이 살아왔던 농경문화하고 연결됩니다. 그런 것들이 다 통합적으로 되 갖고 삶을 끌어가는 에너지가 되고요, 그것을 축제로 승화시킨 거거든요? 축제를 또 하지 않으면 안 됬습니다. 그 만큼 삶이 고단하기 때문에 어느 때에 그 모든 것을 다 무장해제한다고 할까요? 긴장이나 이런 걸 다 풀어버리는 그런 게 있지 않으면 인간은 생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러한 축제를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이 세 가지 축제가 있는데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때 예루살렘을 한 번씩 방문했습니다. 한 번 가려면 날이 많이 필요하겠지요. 그래도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야 되는 이유가 축제도 축제입니다만 제사를 드리려면 예루살렘에만 가야 됬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날 제사를 드렸겠어요? 안 드렸겠어요? 안 드렸습니다.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제사를 지키는 게 아니었습니다. 동네마다는 이 성전이 아니라 회당이라고 있었거든요? 회당에 모여서 말씀을 읽고 뭐, 그건 제사가 아닙니다. 그건 성경공부 불과한 거예요.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번제를 드려야 되고 하여튼 그러한 형식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건 예루살렘 성전에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습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드릴 수 없거든요? 이제 축제 때 가거나 아니면 개인적으로 일 년에 한 두 번 방문합니다. 그 때 부르던 노래들이 구전되고 이렇게 기록되면서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에 하나의 묶음으로 편집된 거죠, 그게 바로 순례자의 노래집이고 그리고 우리가 몇 달 동안 공부한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의 이러한 노래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잘 생각할 것도 없죠,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도 그들이 무엇을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성전에 들어가면서 혹은 성전을 나오면서 그들이 어떤 생각을 했겠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걸 잘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그들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불안했을지 생존의 위기를 많이 겪었는지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적인 노래를 부른 거거든요? 예, 그러한 내용들이 시편에 다 녹아 있어요. 오늘 여기 3절,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도 우리가 그들의 영적인 태도, 영적인 실존, 이런 것들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세 절이라고 그랬지요? 각 절마다 키워드를 뽑는다면 송축, 1절도 그렇고 2절도 그렇고 송축하라, 송축하라 이건 찬송하라 라고 하는 똑 같은 얘기입니다. 송축하라, 외쳐라, 찬송하라 그거고요, 3절은 복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네요. 송축, 찬양, 송영 이예요.

 

독솔로지라고 해서 하나님에게 자기 생명과 미래를 완전히 맡기는 영적인 태도 이런 것들을 송영, 찬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정에 치우쳐서 나를 발산하는 것, 이런 것을 찬송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여기 두 가지예요. 송축과 복 이예요. 이 두 가지가 순례자들에게 최대 관심사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인생도 사실은 어떻게 보면 순례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순례자, 나그네길, <천로역정>, 밀턴이 썼나요? 오래전에 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이야기하고 근현대의 어떤 영성가들도 인간의 삶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고요, 이미 우리는 진작에 그걸 알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썼나요? 어느 책에 나오는지 모르겠어요.(*알리스터 맥그래스<내 평생 가는 길>)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런 것하고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했더라고요, 길 가다가 차를 세워서 타고 가는 걸 뭐라고 그러죠? 히치하이크(hitchhike) 하는 것과 같다, 누구하고 동행하느냐, 누가 차 세워주느냐? 제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의 묵상인가에 쓰긴 쓴 것 같은데 아니면 옛날, 제가 하양에 있을 때 주보에 짧은 글들을 썼는데 거기에 썼는지는 모르겠어요. 히치하이크를 해서 동행하는 삶을 살아 갈 때에 그런 등등입니다. 하여튼 그런 순례자의 삶이라고 하는 게 맞거든요? 중요한 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하고 복 이거든요? 두 가지입니다. 1절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보라 이렇게 얘기하고요, 이건 찬양에 나오는 첫 마디로는 어울리는 거지요. 보시오, 보세요, 보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밤에 서 있다고 그랬어요. 이건 가을축제에서 거행되던 밤샘의 제사를 배경으로 합니다. 우리가 쉽게 얘기하자면 철야예배 이런 거와 비슷한 거지요. 이 축제는 가을축제니까 아마 초막절이겠지요? 가을추수를 마치고 드리는 축제 때에 많은 성전 중심의 종교행사가 있었겠지요. 밤 새워서 무엇을 맡은 사람들이 있었든가 봅니다.

 

순례자들이 와서 그런 노래를 부르는 거죠, 아, 밤새워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그들, 종들아, 얘기하는 겁니다. 이 가을걷이의 축제가 얼마나 즐거웠을지 상상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축제는 바로 말씀 드린 대로 초막절이예요. 지금으로 하자면 9월인가, 10월인가, 그 쯤 될 겁니다. 이 추수는 생존의 토대입니다. 우리나라하고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추석 때 축제 열지 않습니까? 각 가정마다 우리도 제사도 드리고요, 그런 것들이 다 인류생존과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보다 고대에는 생존이 더 취약했잖습니까? 지금이야 어느 정도 예측하잖아요? 미리 준비도 하고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이야 복지도 어느 정도 되어 있고 한데 2000여 전, 이 시편은 2500년에서 3000년 전에 기록된 거니까 까마득한 옛날,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때 수리시설도 별로 없었고요, 그냥 천수답만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이 뭔지도 모르고요, 전염병도 많이 있었을 것이고, 의료행위는 물론 거의 없고 주술적으로 사람을 겨우 치료하던 때에 봄에서부터 여름을 거쳐서 추수 했을 때 그 감격이 어떠했을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흉년이 들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죠, 그 때는 건강한 사람보다 노약자들, 어린아이들, 병든 사람들이 먼저 죽죠,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했을 겁니다. 끔찍한 그런 상태를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추수해서 어느 정도 낟알을 건졌다고 하는 것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을 누리는 거죠, 앞으로 1년 정도는 생존이 보장된다고 하는 것이 확인 되는 거니까 얼마나 놀랍겠어요? 그래서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여호와를 송축하라 얘기합니다. 이들의 송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요?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삶으로 빠져 나왔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적인 상태, 그걸 얘기합니다. 그 때 정말 우러나오지요. 찬송 송축이 우러나오지요.

 

2절에도 다시 송축하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금 더 문학적으로 표현을 하네요. 성소를 향해서 얘기를 합니다. 물론 이 성소는 예루살렘 성전을 이야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만 있겠어요? 이것은 상징 이예요. Symbol입니다. 이 상징이 무의미한 건 아니예요. 상징이 실체는 아닙니다. 그 예루살렘에 있었던 여러 기구들, 지성소 등등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실체는 결코 아닙니다. 이 성전을 우상화 하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론이 예언들에게서 많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두 사상이 각축을 벌였어요. 이스라엘 신앙, 유대인의 신앙, 그들의 철학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몇 마디로 폄하할 수 있는 아주 그러한 민족이기주의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독선, 이걸 뛰어 넘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예언자들, 제사장들 등등 그 사이에서 말하자면 논쟁이죠, 학문적인 논쟁이기도 하고요, 학파의 논쟁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계속 됬습니다.

 

예루살렘의 성소가 하나님의 실체는 아니지만 상징으로써 중요했습니다. 예, 이 상징을 절대화 하면 우상이 되는 거고, 상징을 냉소적으로 보면 우리 영성이 해체된다고 할까, 그런 거지요. 성만찬도 상징이기도 하거든요? 또 학자들에 따라서 다른 입장이기도 합니다. 가톨릭 같은 데서는 성만찬을 화체설이라고도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뀐다. 사제가 축복 선언 하면 바뀐다고 얘기합니다. 물론 그들이 그 자체가 물질이 변해갖고 예수님의 살로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고 예수님의 살과 피와 똑 같다, 그런 걸 얘기하는 거지요. 눈에 보이는 건데 어떻게 고집을 피우겠습니까? 그런데 굉장히 거기에는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는 거고요, 마틴 루터 같은 사람들은 화체설을 인정하지 않고 임재설이라고 얘기했어요. 임재, 그리스도가 거기 임재한다 얘기하고, 쯔빙글리나 이런 사람들은 기념설이라고 하든가? 칼빈은 상징설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제가 누가 누군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쯔빙글리, 뮌처, 칼빈이 조금씩 다른데 하여튼 큰 흐름으로 보면 화체설, 임재설, 기념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다, 기념설, 상징설,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가톨릭: 화체설(化體說Transubstantiation), 마틴 루터: 공재설(共在設,Consubstantiation), 존 칼빈: 영적임재설(靈的臨齋設,Spiritual presence/Virtualism), 쯔빙글리: 기념설(記念設, Memorialism) 예, 너무 그 쪽으로 나가지 말고요, 일종의 상징이예요. 하나님을 향해 있고, 그 다음에 손을 들어라, 손을 든다고 하는 겁니다. 손을 든다고 하는 것, 이건 무슨 뜻일까요? 그건 뭐, 정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준비를 하다가 ‘기쁨과 평화’라는 이러한 것으로 봤습니다. 손을 든다고 하는 것은 손을 드는 사람의 기쁨과 평화, 이러한 태도거든요? 여러분들도 기쁠 때 손들지 않나요? 그렇잖아요? 손들고요, 기쁩니다.

 

기쁨으로 한다, 그리고 또 평화라고 하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이게 손을 들면 어떤 공격적인 의사는 안 하는 거거든요? 칼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거니까,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손을 든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기쁨,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 이웃과의 평화 그런 것으로 송축하는 거지요. 예, 그것하고 연관시켜서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쁨과 평화로 받아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송축합니다. 다시 기쁨과 평화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쁨과 평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기쁨과 평화의 관계를 누리는가, 하는 거 말이지요. 예, 이건 존재론적인 기쁨과 평화거든요? 어떤 것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없이 이미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미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지금 눈에 보이는 어떤 상황에 관계없이 아주 근원적으로 기쁨과 평화의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럴 땐 누가 옆에서 시키지 않아도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고백을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설교조로 드리는 건 아니고요, 실질적으로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잘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데 있겠지요. 그래요. 현대인들은 기쁨과 평화를 좀 상실했습니다. 그걸 제가 앞에서는 바로 존재론적인 기쁨과 평화라고 얘기 했어요. 여기서 다시 생존의 기쁨과 평화라고 표현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예요. 존재론적인 기쁨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어떤 깊이에 기쁨과 평화를 얘기하거든요? 그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한 어떤 삶의 상태, 그걸 가리켜서 생존이라고 합니다. 살아 있음, 누가 예쁜 옷을 입었느냐가 아니라 살아 있음, 이렇게 있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누가 큰 집에 사느냐, 그거에 좌우되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하는, 생존해 있다고 하는 이게 존재론적인 기쁨과 평화인데요, 이게 우리 밑바탕에 있어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그런 거고요, 맨 날 그런 방식으로 도사처럼 살 수 있느냐, 물론 그렇게는 못 삽니다. 그런데 이리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 뿌리가 잡혀 있으면 약간 흔들리다가도 다시 돌아오고 이게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는 어떤 당위라고 할까, 그런 차원이 아니라 아주 실질적인 거예요. 이것 아닌 데에서는 우리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 요즘은 생존의 조건이 좀 좋아졌는데도 우리 삶의 근본이 허약해졌습니다. 이게 참 문제인 것 같아요. 요즘 젊은이들을 우리가 젊었을 시대와 비교해서 생각하는 건 좀 어울리지 않습니다마는 그런 젊은이들도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을 것 같고요, 하여튼 젊은이들만 아니라 우리들도 어떤 삶의 조건들, 이런 것들은 좋아졌는데, 기쁨과 평화 이런 것들은 거리가 멀게 살지 않습니까? 이런 걸 놓고 본다면 삶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생존조건과 직접적인 어떤 연관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영향을 받긴 받는데 직접 근본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거꾸로 해서 우리 삶의 조건이 좀 열악할 때 우리 근본이, 근본은 생존의 기쁨과 평화를 얘기하는데 풍요운 것일 수 있습니다. 예, 이게 참 역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삶의 조건이 애를 쓰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우리 영혼이 더 깊어진다고 하는 이 역설을 우리가 어떻게 잘 받아 드리면서도 극복해 나가고 할 수 있을까요? 완벽한 건 힘들겠지요? 어떤 방향은 잡고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송축하기는 힘들지요. 척박한 현실에서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우리는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인 건 분명합니다. 시편기자는 3절에서 송축해야 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밝힙니다.

 

하늘과 땅을 지은 이라고 얘기하지요? 창조주 바로 그가 여호와고 그 여호와가 창조주입니다. 이 말을 제가 쓸데없이 쓴 건 아니예요. 말장난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요, 창조의 능력이 여호와인거예요. 창조의 능력, 만약에 유전공학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명을 잘 끌어가게 된다면 그 힘들이 하나님이죠, 제가 단정적으로 말씀 드리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미 어떤 결정된 분으로만 자꾸만 머리에 넣기 때문에 좀 오해가 생겨서 그걸 좀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라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초끈 이론이 이 세계의 모든 물리적인 궁극적인 근원이라고 최종적으로 결정해 나가게 된다면 초끈이 바로 그게 창조주이고 창조니까요.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말은, 그걸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뜻을 인정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상호적인 거예요. 이걸 받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창조주로만 계속 찬양한다고 하는데 자기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입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로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건 창세기부터 계속 나온 인간의 죄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교만이거든요? 자기가 피조물이라고 하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거죠. 이걸 쉽게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바꾸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어떤 걸 소유함으로 우리가 존재 할 수 없다는 것을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소유함으로 자기를 자꾸만 인정하려고 하는 방식이 피조물이라고 하는 걸 거부하는 삶의 태도거든요? 예, 마지막으로 이 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송축하라, 이렇게 얘기한 다음에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온 예루살렘, 여기서요. 순례의 길에 나선 이 사람들에게 복을 준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복이라고 하는 것도 오해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전혀 다르다고 하는 걸 일단 전제하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걸 받으려고 하면 이제 유치한 신앙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이 복이다, 이런 것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나에게 난치병이 왔다, 힘들지요, 견디기, 그러나 그것도 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거든요? 바울이 이미 그런 이야기를 했고요, 바울은 자기 병을 위해서 두 번 기도하고 안 했습니다. 그게 더 이상 나에게 하나님이 더 겸손하게 뭘 하라고 하는 그런 차원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다 선한 것, 내가 보기엔 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한 것, 예, 그거죠, 예, 그런 사람은, 그걸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송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강의안에 썼습니다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세상, 인간의 삶, 역사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신앙입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거고요. 저도 그렇게 믿고 있고, 때에 따라서 시행착오도 좀 있어서 그렇습니다마는 다 거기 밖에 길이 없다, 저도 그렇게 믿고 살아 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고대의 이스라엘의 어떤 영성가와 그 무리들이 우리들에게 전해 준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편 134편,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하는 놀라운 외침을 듣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는 삶이 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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