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5편 강해-창조의 하나님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말씀은 시편 135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순례자의 노래’라고 하는 표제가 붙은 시편을 보았어요. 오늘부터 좀 다시 달라집니다. 표제는 따로 달리지 않았어요. 그 뒤에 표제도 또 나오고, 제목이 달렸다, 안 달렸다 그럽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어떤 전통에 따라서 그리 된 거예요. 그래서 “다윗의 노래”라고 해서 꼭 다윗이 부른 건 아닙니다. 그건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그런 이름들을 붙인 것뿐이죠, 135편, 우리 이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 같이 읽겠습니다.

 

1.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3.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4.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5.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6.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7.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8.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10.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13.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5.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18.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19.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1.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아멘! 어떻습니까? 이렇게 읽으면서 이 내용이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어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는 이러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또 이것을 너무 잘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어요. 그냥 길들여지는 거죠, 하나님의 말씀에 길들여져요. 그냥 습관적으로 아멘! 할렐루야! 여호와 찬양 이렇게 할 뿐이지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반응 하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조금 다 문제지요. 양쪽 다 한 쪽으로는 이게 남의 얘기처럼 낯선 거고요, 또 하나는 너무 익숙해서 별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그런 겁니다. 우리가 이 말씀이 일단 친근해 지면서 그러나 신선해 지는 것, 친근하면서도 늘 새로운 것, 그게 좀 필요한 것 같아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그런 거거든요, 부부관계도 그렇고 자식관계도 그렇고, 친구들, 참된 관계들은 다 정말 남이 아니예요.

 

정말 가깝게 느끼면서도 그게 너무 습관적으로가 아니라 낯선 것 같으면서도 새로운 그런 관계로 가야 됩니다. 쉽지 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우리 삶 전체는 구도와 같습니다. 도를 닦는 것과 같아요. 그런 것들이 없으면 사람이 하는 것은 다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거든요? 가르치는 일이라든지, 목사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정말 얼마나 매너리즘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신자들도 신앙의 깊이 보다는 자기 필요한 것만 받아 챙기기 때문에 그런데 맞추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걸 극복하면서 우리의 삶의 어제와 오늘이 똑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고 하는 사실을 잘 포착하면서 살아가야 되지 하나님의 말씀도 그와 같습니다. 135편 제목을 창조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읽으면서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찾으셨겠지요. 예,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의찬송입니다. 제의, 강의안에 있어요. 제사 드릴 때 부르는 찬송 이예요.

 

이 말은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아니 공동의 기도예요. 공동, 개인적인 탄원이나 호소, 중보 이런 것도 아니고 공동의식문 입니다. 의식, 형식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의식이나 형식에 따라서 부르는 찬송이나 기도, 이런 것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주일 대예배 때도 주로 개인 기도를 많이 드리거든요, 대표기도라고 하지요. 장로나, 장로가 없는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나 대표자들이 나와서 기도하는 데 제가 보기엔 그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일 공동예배가 아니라 삼일기도회라든지 다른 소규모 모임이라면 모르지만 주일 날 한 번 드리는 공동예배에 여기서는 개인기도 드리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훈련이 안되어 있으니까 주일 날 기도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오는 것 아시지요? 빈자리 채워 달라 라든지,

 

예를 들자면 그건 사실 기도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할 수 있지만 예배 때 드려야 될 기도가 아니거든요, 거의 잔소리 하듯이 아니면 푸념 하듯이 아니면 그런 식으로 기도를 드리다 보니까 예배가 중심에서 떨어 질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의찬송, 혹은 제의 詩, 우리가 주일 공동예배 때 기도드리잖아요? “오늘의 기도”라고 말이지요. 그건 개인기도 아니거든요?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아뢰어야 될 가장 소중한 내용들을 일정한 형식으로 담아내는 기도거든요? 이런 기도를 좀 더 많이 드려야 됩니다. 외울 정도로 일단 그걸 해야 되요, 그래야만 기도가 뭔지 학습이 되는 거고 그 다음에 학습이 된 다음에 개인적으로도 그 때는 기도가 바르게 나오는 거죠, 오늘은 제가 따로 기도문을 쓰지 않았어요. 여태까지는 찬송 하나 부르고 따로 기도문을 같이 읽었는데 거기에는 영적으로 성숙한 분들의 기도를 담아냈어요. 그런 것들이 도움이 되겠지요.

 

이런 형식을 통해서 제사 드릴 때 부르는 노래와 기도가 바로 시편입니다. 이런 걸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심화시켰어요. 깊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일반생활에서도 시를 읽잖아요? 시를 읽으면 우리 삶의 깊이를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거든요? 경험이 되거든요? 그게 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에 힘이 있어요. 그와 같은 거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시편을 통해서, 공동의 예배기도문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심화시켰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게 뭐냐, 한 마디 제가 적었어요.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있어, 신앙이 깊어, 그런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무얼 보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들은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하나의 정의를 내린 거지요.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더 정확하게 이해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사건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 그게 신앙이 깊어지는 겁니다. 내 마음이 무조건 뜨거워지고 열정적으로 되는 것, 그건 개인적으로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고요, 그건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격도 다 다르잖아요. 조용한 사람이 있고, 과격한 사람이 있고요, 그런 걸 갖고서 뭐라고 얘기 할 수는 없잖아요, 중요한 건 인격 이예요. 약간 과격한 사람이라도 인격이 된 사람이라면 조용하더라도 인격이 안 된 사람이 있잖아요? 그게 퍼스날리티 아니겠습니까? 인격이에요.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그러니까 그건 성경이겠지요? 성경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우리가 그걸 아직 다 모릅니다. 지금 계속 계시중이고요, 종말까지 계속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고요, 그리고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계시를 은폐의 방식으로 하십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그렇게 기억해 두세요. 계시, 드러낸다는 뜻이죠? 노출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노출 시키시는데 그건 신학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하는 게 지금까지 계속 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막 드러내는 게 아니라 은폐의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그게 긴장관계에 있고,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어요. 그 비슷한 얘기는 다른 데도 했을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신학적 개념인데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조금씩 조금씩 설명하겠습니다. 은폐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신다, 그거죠, 그걸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신앙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냥은 안 되요. 그냥은 절대 안 됩니다. 그 이전에 선배들의 신앙을 배우는 것이 최선입니다.

 

좋은 물리학자가 되려면 이전에 쭉 내려왔던 물리의 세계를 알아야 되잖아요? 좋은 한의사가 되려면 그 이전에 있었던 많은 한민족의 한의학에 대한 공부를 해야지 그런 걸 공부하지 않고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가 성서를 읽되 그냥 읽는 게 아니라 이미 이것은 많이 연구 됬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것은 2000년 동안, 유대의 역사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요. 최소한 2500년 정도까지, 역사에서 하나님, 언어, 말씀, 이런 연구가 정말 많이 됬어요. 그런 걸 우리가 다 따라 갈수는 없지요. 부분적으로 하는 거고요, 그리고 그런 역할을 목사가 하는 겁니다. 평신도들은 전문적으로 신학 공부할 시간이 안 되니까 조금 더 미리 배운 목사가 어떤 안내를 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이 135편을 좀 더 보려고 합니다. 몇 단으로 좀 나눴습니다.

 

1절에서 4절은 일종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찬송의 반복되는 어떤 그, 후렴은 뒤에 나오고 19절에서 21절이 오히려 후렴인 것 같고요, 앞부분이 하나의 정형화 된 어떤 문장이 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4절과 뒷부분의 19절에서 21절은 거의 비슷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하나님을 송축하라, 그러한 하나의 정형화된 문장으로 앞부분과 뒷부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4절 먼저 잠깐 봅니다. 제의 찬송시답게, 제의찬송시, 제사드릴 때 드리는 의식적인 시다, 그렇지요? 이 시편은 찬송하라고 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고 하는 말이 1절에 있지요?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이름하고 실체는 동일 한 걸 이야기 합니다. 그의 이름이 아름답다 그런 표현도 나오지 않아요? 이름이 아름다운 게 어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이게 되면 이미 그걸 범주화 해 버리는, 제한하는 그걸 딱 어떻게 결정하게 되는, 나무하면 보세요. 나무라는 성질로 제한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제한 된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가 붙일 수가 없는 거예요. ‘여호와’가 하나님 이름 아니냐, 여호와가 하나님 이름 아닙니다. 하나님 이름을 붙일 수 없으니까 주님, 그냥 주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건 주인이라고 하는 뜻이거든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래서 그 분을 엘로힘, 야훼, 아도나이 이런 걸로 불렀는데 그게 우리와 같은 정용섭, 이런 구체적인 그런 이름이 아니라 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어떤 분에 대한 지시대명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있을 수 없어요. 그건 모세 전승에 정확하게 나왔지요? 당신이 누구냐, 내가 당신이 나로 하여금 가라고 하는 민족에게 가서 날 보내신 이가 누구라고 얘기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당신 이름을 알고 싶다고 얘기 할 때 이름이 없다, 스스로 있는 자다 그거죠,

 

그러니까 존재의 근거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 있는 분, 자존자 거든요? 우리는 다 외부에 있는 거예요. 바깥으로부터 규정되는 거죠, 물을 마시거나, 뭐 하거나, 공부하거나 내가 되는데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 범주화 하거나 규정할 수 없어서 이름이 없는 분입니다. 어쨌든 그러나 이건 문학적인 거예요. 자,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말과 똑 같습니다. 또 공부하는 뜻으로 4절을 보면 야곱 곧 이스라엘 이렇게 불렀지요? 똑 같은 뜻입니다. 야곱은 족장의 역사에서 아브라함의 손자, 이삭의 아들로 나와 있거든요? 그리고 아들이 열 두 지파 아들을 낳았고요, 그게 이스라엘의 족장(역)사 입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어떤 에피소드가 있어요.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다고 하는, 거기서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고 하는, 특별하게 이름을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리라 그렇게 했어요.

 

엘이라고 하는 뜻이 신이라고 하는 뜻이거든요? 중동언어로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이해 할 수 있겠지요. 똑 같은 뜻입니다. 찬송하라, 그걸 반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건 실제로 제사 드릴 때, 예배드릴 때 찬송 부르는 것이기도 하고 또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형식적으로 찬송은 꼭 불러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찬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연관되는 거예요. 예배는 우리 삶의 고백 이예요. 예, 살아 있는 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 바로 그거지요. 찬송은 이런 점에서 삶의 문제 생명의 문제입니다. 늘 이런 걸 염두에 두고 시편을 읽으셔야 될 겁니다. 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어디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함께 훈련을 받는 게 정말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우리가 근본적으로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실수를 많이 한다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죄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수, 그게 아니라 자기만족, 자기연민, 자기집중이 죄의 속성이거든요? 이걸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이 뭔지를 이제 훈련을 받고 분별하고 살아야 되겠지요. 그러한 능력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단원은 5절에서 14절입니다. 여기가 말하자면 고기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할 수 있네요. 이게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찬송해야 될 이유와 근거들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제목도 거기에 담겨 있는 거예요. “창조의 하나님”이요. 창조와 구원, 두 가지입니다. 창조와 구원, 그냥 내용을 보기 전에 창조와 구원이 어떻게 연결될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신앙적인 에세이 쓸 수 있을까요? 그런 걸 한 번 연습 삼아서라도 해 보세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창조는 물리의 세계이기도 하고요, 이 세계 자연 과학의 문제이기도 한데요? 그거하고 성서가 말하는 고유한 세계이해, 이런 것이 하나님의 구원과 어떻게 연관 되냐, 그런 거죠, 그냥, 여기 본문에 나와 있는 것으로 대답을 드린다면 창조의 능력이 있는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또 가나안의 여러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실 수 있었다고 하는, 그게 구원인거지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입니다. 그렇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 이외도 창조와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거기까지 나가지 말고 본문 안에 있는 걸 중심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 찬송을 드려라, 앞부분, 1절에서 4절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이 단순히 감정이 도취 되서 나오는 게 아니라 아, 예수님이 날 구원하셨다고 하는 감격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먼저 중요한 게 있어요. 우리는 너무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에 빠져 있는데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더 먼저 중요한 게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분이 누구냐 하는 거죠, 우리를 구원하실 만한 능력이 있냐, 없냐, 그 고백이 먼저입니다. 사도신경도 보면 그것부터 시작하잖아요? 나를 구원하셨다, 할렐루야, 찬송하자,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로 나가지 않습니까? 그게 핵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한국사람의 정서가 정적이기도 하고 또 개인주의적인가요? 우리는 역사 같은 것을 생각하고 살아 와서 그런지 모르지만 신앙도 굉장히 감정적이고요, 그 하나님의 역사 그런 것에 대해서 듣기는 듣지만, 알기는 알지만 너무 멀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성서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이야기 하고 있어요. 반복해서 그걸 강조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기억해라, 신앙은 기억 이예요. 어떤 일이 있었는가의 역사관이거든요? 단순히 자기감정에 도취 되서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분명한 근거에서 나옵니다.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근거 없이 무조건 찬송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이 근거는 바로 오늘 본문 앞부분에 따르면 위대하신 거예요. 위대하시니까 찬송하는 거지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분이 여호와다, 그래서 그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대시대에는 각 민족마다 신들이 달랐거든요? 지금도 많이 그런데요? 신들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옛날에는요, 지금도 그건 간접적으로 그러기는 한데요. 그런 걸 굉장히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시편과 구약성경 기자들도 그걸 염두에 두고 기록한 거예요. 가나안의 바알숭배, 그리고 이집트에 있었던 그러한 태양신 숭배 바벨론에 있었던 신에 대한 그러한 문제들이 다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 그런 표현이예요. 그걸 좀 까다롭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그렇게도 생각하실 거예요.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다른 신들보다 위대하다 그렇게 말할 게 뭐 있냐, 그런 거죠, 그건 방금 말씀 드린 대로 그 당시를 전제하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모든 민족들이 신이 있다고 생각했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렇게 말한 것뿐이지 신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두 가지로 해명합니다. 하나는 창조예요. 창조, 그걸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잖습니까, 6절과 7절에 나오네요. 6.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창조사건입니다. 그리고 7절에도 보면 7.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곳간이 따로 있겠어요?

 

모든 지구에서 벌어지는 자연현상들, 특별히 여기 있는 자연현상은 이건 생명과 연관됩니다. 사실은 이 지구에서 벌어지는 것 중에서 생명과 연관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 안개, 이런 것들이 식물을 아침에 소생시키잖아요? 또 비를 위해서 번개를 만드신다고 했는데요? 비를 뿌리기 위해서 번개가 치는 것, 천둥 번개가 나와야 비오지 않습니까? 비가 내린다고 하는 것, 이건 우리는 지금 그걸 물리적인 현상으로 알지만 고대인들은 그게 뭔지 잘 몰랐습니다. 하늘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그게 있어야 식물도 살고 동물도 살잖아요? 고대인들이 이런 것들을 얼마나 신비롭게 생각했을지 우리가 상상이 갑니다. 바람도 마찬가지고요, 따뜻한 바람이 와야 식물이 살고요, 찬바람이 오면 다 죽고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바람이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영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똑같잖아요? 루아흐 라고 얘기하거든요?

 

고대인들이 좀 신화적인 세계에 살았지만 자연과학적으로는 우리보다 많이, 많이 일수도 있고 조금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하고 차이가, 현재 있는 것만 보면 굉장히 큰 차이가 있는 거 같죠, 우리는 비행기도 타고 다니고 그러니까, 그러나 더 길게 역사를 보면 앞으로 1억년 후까지 내다보면 지금이나 2천 년 전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어쨌든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이 차이가 좀 있지만 그러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제가 보기엔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고대인들의 방식으로 ,지금 표현하고 있는데 이게 다 근원,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거죠, 지구 안에서 벌어지는 자연 현상 중에서 생명과 관계없는 건 없다고 제가 아까 말씀 드렸잖아요. 지진도 우리에게 큰 피해를 주기는 합니다만 생명현상 이예요. 이게 판이 움직이거든요, 지구의 껍데기가 이것이 비껴나가면 충돌되고 떨리면 지진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런 판들이 일어나야만 지구의 생명이 가능하답니다.

 

판이 그대로 있으면 죽은 거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불가능하다고 하네요. 속속들이 지질학적인, 물리적인 이유를 제가 설명할 제가 없는데요, 하여튼 학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들이 다 생명과 연관되는 거예요. 죽음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생명현상인 거지요. 죽지 않으면, 죽음이 없으면 그러니까 썩는 게 없으면 그러면 이 지구는 모는 게, 총체적으로 죽음의 땅으로 되는 거지요. 죽음마저도 생명현상이다, 그런 시각으로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걸 행하신 분이 여호와다, 그러니까 위대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감상적인 차원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거예요. 우리 생명에 대한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 그런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그 분이 위대한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구원입니다. 구원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요, 이건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헌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을 이야기 할 수 밖 에 없지요.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에굽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을 말하지요. 8절에 보면 처음 난 사람과 처음 난 짐승, 장자와 맏배 짐승을 다 치셨다, 출애굽 사건 때 있었던 이야기지요. 그런 징조들, 바로와 모든 신하들에게 보였던 바로는 그 당시 최고 제국의 왕이거든요? 그가 꼼짝 못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하는 그런 증거입니다. 그리고 10절과 11절을 쭉 보면, 가나안에 있었던 민족들을 미디안 광야를 거치면서 시작해서 가나안까지 이르는 여러 부족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제거하셨다, 그겁니다. 그게 아주 놀라운 일이지요. 그건 천지창조를 한 것 같이 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너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 시각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걸 좀 거꾸로 읽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한다고 그래도 그렇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방 사람들을 모두 다 죽이는 거, 이집트에 있는 모든 장자들,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는 거,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냐,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이게 해명이 안 되는 문제예요. 그리고 장자와 맏배가 사실은 다 죽은 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죽은 일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뭐 자연과학적으로 가능하죠, 어떤 전염병이 돌게 되면 어린아이들에게 취약한 전염병이 싹 돌게 되면 그 중에는 많은 아이들이 죽으니까 장자가 죽을 수도 있고 한데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이 이집트를 쳐서 우리로 하여금 해방하게 됬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거죠. 그러면 성경이 꼭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거 아니냐, 뭐, 그런 것 까지 제가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런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했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모든 걸 그대로 받아 드리면 안 되는 거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그러한 영적인 태도 그런 걸 배워야 되는 거지, 그들의 시각으로 본 그 당시 근동에서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참된 거라고 고집을 피우면 곤란한 겁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성에 있는 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하는 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명령을 내렸잖아요?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곧이곧대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좀 어렵습니다. 일반 신자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따라서 이해하기도 힘든데 거기에 어떤 신학적인 것을 찾아 내냐, 어렵지요. 어쨌든 하는 데까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구약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사의 관점으로 본 어떤 해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구원사예요,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자기들이 그렇게 민족을 지탱하고 살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들을 약속의 후손으로 살아가게 선택해 주신 하나님 때문이다.

 

그 신앙고백에 도달한 거죠, 그러한 이스라엘의 고유한 구원사의 관점에서 읽어야 되는 거지요. 그 정도 이야기를 하고요, 전달이 됬겠지요? 하여튼 우리는 구약을 읽으면서 이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이거든요? 초기그리스도교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서를 그대로 받아 드렸습니다. 거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사라고 하는 걸 늘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그들의 시각으로 세계를 보는 거거든요,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팔레스틴 원주민들하고 계속 싸우고 있는데 그 이스라엘사람들이 무력적으로 난폭하게 하는 경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걸 우리가 지금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거든요, 구약도 상당한 부분은 그러한 시각으로 그러니까 이방인들은 나쁘다, 이런 시각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좀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그래도 구약성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이예요.

 

이렇게 저렇게 실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했지만, 그런 거기에는 타 민족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고유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창조와 구원 문제를 이야기 했어요. 그 하나님의 구원받은 민족의 시각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 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어떠한 신앙고백이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는 이러한 신앙고백, 또는 하나님에게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신앙고백은 이방의 우상을 거절한다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상반된 거예요. 늘 그걸 전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거듭해서 얘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우상을 많이 섬겼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계속 악순환이 됬어요. 사실 그건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겁니다. 바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조차도 힘들고요, 그렇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상을 거절한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시편기자가 여호와와 우상을 대비 시켜요. 문학적입니다. 여호와는 위대하고 천지를 창조할 정도로 전능한데 우상은 어떻다고 그럽니까, 아주 무기력하다, 얘기합니다. 15절에 보면 우상을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듯한 거예요. 일전에 설교에서 그런 얘길 했을 것 같은데요, 사도행전 본문에 나오는 거거든요? 아덴에 들어갔을 때에 그 보이지 않은 신을 위하여 라고 하는 단에 대한 바울의 설교를 중심으로 한 겁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된 것을 섬기는 거예요. 피조물을 절대화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의 어떤 공학문제, 인간이 만든 어떤 것들을 절대화 하는 것들도 사실은 우상입니다. 예, 그걸 무조건 거부할 수 없어요.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 이예요. 기술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면 그건 우상숭배입니다. 그걸 시편기자가 무기력하다고 합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이건 호흡이 없다, 굉장히 리얼하게 표현하죠? 입, 눈, 귀가 제 역할 못한다, 그건 만든 거니까, 호흡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예, 이것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볼만한 내용이네요. 오늘 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영적인 깊이가 있는 거예요. 입, 눈, 귀, 호흡이 없다고 하는 게 대체 뭘까, 라는 거예요. 이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황금만능주의라고 해서 돈이 우상처럼 섬김을 받잖아요? 지금 돈이 입, 눈, 코, 귀가 있어요? 없어요? 그건 있습니다. 딱 보기에 있습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 할 것 같거든요? 그것만 있으면 못할 게 없거든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말이지요. 감옥에 갈 사람도 꺼내고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상은 입, 눈, 코, 귀가 없다고 하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더 근원적인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 근원적인 생명, 이것에 대한 어떤 인식, 혹은 감수성, 그게 없으면 신앙은 깊어 질수가 없습니다. 예, 그러한 우상들은 겉으로 볼 때는 그럴 듯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명의 차원에서 보면 무기력하고요, 오히려 우리를 가짜 생명에게 눈 속이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소비되는 거지요. 예, 가짜 보석을 끼고 있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마지막 19절에서 21절입니다. 마지막 송축하라 예요. 그건 앞부분에 한 이야기가 다시 반복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135편은 찬송에서 시작해서 송축으로 끝납니다. 찬송이나 송축은 똑 같은 말입니다. 여기 찬송하라, 찬송하라, 송축하라 하는데 그 대상이 몇 족속으로 나와요, 19절에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이렇게 나오지요. 또 아론의 족속아 이렇게 나와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앞에서는 야곱하고 연결 되었지요? 야곱족속아, 이스라엘 족속아, 이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제사장입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 때 부르는 찬송이라는 걸 전제하면 이게 이해가 되죠, 우리들이 예배드릴 때 그런 부분들이 있지요. “여기 모인 형제자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함께 임하기를 바랍니다. 주의 종에게도 함께 하기를”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제사장인 아론의 족속에게도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런 서로 교독하는 그런 걸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레위 족속아, 여기 나오지요? 이 레위 족속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아론은 그 안에서 특수한 제사장 직분을 맡았고요, 레위는 성전의 모든 많은 일들을 두루두루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쭉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 21.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니까 예루살렘과 시온은 똑 같은 뜻입니다. 예루살렘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하는 그 지역이고요, 시온은 그 안에서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전반적인 전체를 이야기하는데 시온 성 이야기하잖아요? 그것도 유대지역 전체를 일컸습니다. 예수살렘이나 시온이나 똑같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까지입니다. 1절에서 22절까지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 드릴 때 부르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찬양시가 대단히 거시적이지요? 우주론적이지요? 세계 전체의 천지창조, 그리고 국제질서 가운데서 제국을 치고 약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지요. 크신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거다, 그러한 신앙고백입니다. 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 우리들에게도 똑 같지 않냐,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여기서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오래 전 이스라엘의 한 제의 찬송시를 함께 읽고 공부했습니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여러 가지 일에 분주히 쫓기느라 이 사실을 중간 중간 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다시 이 근원적인 문제에 우리의 삶의 중심을 돌리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가 실체화 됬고 구원이 현실화되었음을 저희가 믿습니다. 우리의 현재 살아 있는 삶과 죽음과 그 이후에 미래까지 창조의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됨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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