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8편 강해-주의 오른손

 

시편 138편, 1절부터 8절까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2.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3.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4.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6.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7.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8.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아멘! 우리가 두 달 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이예요. 우리가 몇 년 동안 계속 보고 있습니다. 150편까지 있는데요? 이게 한 주에 한 편씩만 보면 1년에 52편, 중간에 쉬니까 50편하기 힘든데 3년 이상 공부하는 게 되겠습니다. 우리가 꾸준하게 했지요? 이 시편은 문학적인 완성도가 아주 높습니다. 특별히 그런 거예요. 문학적인 겁니다. 다른 성경들은 서술적이고 산문적이고 단편적이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시편은 아주 문학적인 완성도가 높은 거거든요? 그래서 이건 그냥 외워도 좋을 만한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을 하는데 무조건 읽는다고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을 자주 읽는 건 필요하고요, 더 나가서 그걸 외우는 것, 성경을 외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언어라고 하는 게 특이해서요. 우리가 다 몰라도 자주 대하고 외우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게 어느 세계를 열어 주거든요, 그런데 성경을 외우는 부분 중에서 이 시편이 제일 좋지요.

 

저는 암기력이 많이 떨어져서 잘 외우지 못합니다. 시를 외우듯이 시편을 외우는 것도 참 좋습니다. 문학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거예요. 내용도 충실하고 표현, 문학적인 수사도 뛰어납니다. 시편의 특징 이예요. 그러니까 이게 어느 날 누가 뛰어난 사람이 혼자 쓴 게 아니라 이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갈고 닦아진 겁니다. 마치 보석을 연마하듯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갈고 닦여지고 그리고 소화되고 해석되고 그러면서 살아남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내용도 내용이고 영성 이런 점에서 아주 탁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경일수록 문학적인 완성도가 높은 이런 성경일수록 읽을 때 조심해야 됩니다. 자칫하면 이걸 오해 할 수 있고요. 또 하나의 위험성은 중심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제가 두 가지로 구분했어요. 이 시편을 오해 할 수 있고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니까 오해 할 수 있고 정작 중요한 것은 놓치고 다른 것에 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요, 시편에 있는 이야기들을 상투적으로 받아 드리면 좀 곤란하다, 그럴 위험성이 참 많다고 하는 겁니다. 다 아름다우니까 좋으니까요. 읽으면 그냥 은혜가 되는 걸로 느껴지니까 상투성에 떨어 질 수 있는 거예요. 사실은 이 138편만이 아니라 성경전체가 사실은 그렇습니다. 상투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뻔하다, 뻔한 걸로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다 알고 있는 걸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상투성이거든요? 그것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은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뻔한 이야기로 떨어지지 않고 더 들어가야 되는 게 성경읽기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또 우리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요. 여러분들의 삶이 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심한 거예요. 삶이, 늘 그렇고 그렇다고 생각되니까 자꾸만 우리는 다른 걸로 자극을 받으려고 하잖아요? 다른 것, 그렇죠? 산다거나 아니면 내가 업적을 남긴다거나 아니면 내가 누구를 공격적으로 대한다거나 하여튼 자학적으로 한다거나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삶이 왜곡되는 것처럼 성경도 그럴 염려가 좀 있습니다. 특별히 시편처럼 아주 아름다운 언어로 기록된 말씀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시편에 자주 나오는 용어, 예를 들자면 여기 오늘 우리가 읽은 138편에도 있습니다마는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8절 중 반절에 있어요.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이건 반복된 거 아시지요? 수 없이 나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문장, 이걸 우리가 얼마나 새롭게 이해하느냐, 하는 거지요. 뭐, 하나님이 인자하시지 영원하지, 그런 정도로 넘어 갈 수 있는데요, 그걸 염두에 두십시오. 예, 그리고 7절 후 반절에 나오는 그 구절도 그렇습니다.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런 것도 자주 나오는 건데 이런 것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 있는 거예요. 오늘 공부의 제목이 “주의 오른손”입니다. 시편기자는 왜 주의 오른손이 자기를 구원 하실거라고 얘기했을까,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른손이 왜 자기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표현했는가, 이건 표현했지만 거기 어떤 내용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표현이 아름다우면서도 그게 어떤 영적인 깊이가 있는 것, 이런 것도 우리가 잘 찾아서 생각을 해 야 될 것 같습니다. 1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1.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신들 앞에서 이 표현이 약간 이상할 겁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들이 있다는 말이냐, 그렇게 생각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 이외에 신은 없습니다. 아예 없어요. 그러니까 우상을 섬기는 것은 진짜 신이 아니니까 아닌 걸 섬기는 거거든요? 그것도 다 피조물을 섬기는 거고요.

 

그러니까 그건 우상은 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신들 앞에서, 그렇게 표현되어 있잖아요? 왜 그럴까요? 이게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그걸 좀 구분해야 되요. 사실적인 표현이 있고, 문학적인 게 있고요. 그리고 상징적인 게 있고, 또 알레고리도 있고요, 또 여러 가지 많은 문학적인 장치가 여기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나가면서 하는 이런 대화가 아니라 이건 근원적인 하나님을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아주 문학적으로 당대에 가장 의미 있었던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밖 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놓치고 문자적으로만 이걸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어디로 빠져 들지 모르지요. 신들 앞에서라고 하는 것은 아주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이렇게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읽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천성법정, 하늘나라에 많은 주심판사가 있고, 부심들이 있잖습니까, 쭉 그러한 것을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시면 됩니다.

 

이건 고대인들이 생각했었던 어떤 생각들 인거죠. 사실적인 게 아니라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그런 천상법정을 염두에 두고 이 시편기자가 신들 앞에서, 그러니까 많은 권위 있는 하늘의 그 천사, 예를 들자면 그쯤 되겠지요. 앞에서 하나님만 찬양한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조금 옆으로 나가서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 신으로 자기를 생각하는, 신으로 자처하는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1절은요, 핵심이 이겁니다. 오직 하나님만 찬송을 받을 뿐이라고 하는 거죠, 이런 말씀을 서론에 말씀 드렸듯이 상투적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이게 쉽지 않아요. 하나님만 찬송하고 산다는 게 이게 쉬우면 성경이 이렇게 이야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외에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을 찬송하면서 삽니다. 다른 걸 섬기면서 사는 거지요.

 

우리가 그걸 좀 벗어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영적인 세계로 들어갈 수 없는데요, 참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것, 우리는 대개 하나님이라기보다도 다른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명예나 우정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소중한 것 다 전제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만 찬송한다고 하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그렇게 얘기 할 수 있어요. 예배드리고, 그런데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그건 어쩌면 핑계고 속으로는 다른 걸 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2절입니다. 2.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곧 예배하는 거니까요. 2절에서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전을 향해서 예배하는데요, 아, 세 가지가 연결되는군요.

 

1절에 나와 있는 찬송, 2절 전 반절에 나와 있는 예배, 그리고 중 반절에 있는 감사, 감사는 1절도 나오고요, 이게 다 통하는 이야기예요. 그렇죠? 감사, 찬송, 예배, 이게 다 통하는 얘기입니다. 그걸 지금 반복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여기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 중에서 핵심은 예배겠지요. 이 사람이 예배를 한다고 하는데 예배의 근거는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입니다. 인자와 성실, 이것도 시편에 여러 번 반복된 단어예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저 사람 착해 이런 수준에서 보면 안 됩니다. 저 사람 인자하지 그런 정도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본질 자체가 인자하신 분인 거예요. 우리가 볼 때에는 인자하게 보이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인자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좀 잔인하게 보여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일들을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우리가요, 자식 문제라든지, 자기의 살아가는 과정이나 아프고 죽고 등등 뜻하지 않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보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인자를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피하고 싶은 것을 만난다 하더라도 그게 하나님의 인자라고 하는 단계까지 우리가 나가야 되는데 불가능할까요? 그게 가능할 겁니다. 갑자기는 안 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면 그런 영성이 가능합니다. 이건 사람을 속이려고 하는 것 아니예요. 정말 이건 끔찍한 일이라서 안 되는 건데, 불행한 건데,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게 아니라 다른 거죠, 그건 뭐, 제가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을 본질로 아는 겁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다 인자한 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실하심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 이것을 깊이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이 그대로 이야기하잖아요?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그 차원으로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一喜一悲 할 때가 많잖아요?

 

조그만 것으로 너무 좋아하고 또 조그만 것으로 너무 낙심하고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긴 있는데요, 그래도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더 승화되어야 되겠지요. 그러려면 억지로 되는 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 분이 인자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세요. 변함이 없으신 분이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분이 우리가 관계를 맺기만 하면 그 분이 하신 일은 나에게 다 선하다, 인자하다, 그리고 변함없이 성실하시다, 그 얘기입니다. 후 반절의 번역이 좀 애매합니다. 2절 후반절요. 각주도 달려 있어요.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이게 주의 이름과 주의 말씀이 막 엇갈리는 것 같지요? 말씀이 높고 이름이 낮다 그렇게 생각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같은 이야기예요. 난외주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난외주/주의 모든 이름대로 주의 말씀을 크게 하셨음이라) 공동 번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공동번역/언약하신 그 말씀, 당신 명성보다 크게 퍼졌사옵니다.) 약간씩의 차이는 있긴 있어요. 그런데 왜 이런 차이가 있냐 하면 사본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게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이기도 하고요, 또, 구약성경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원래 유대인들의 히브리어성경이 있고요. 또 하나는 70인역(Septuaginta)이라고 있어요. 이건 헬라어로 된 거거든요? 그게 옛날에 구약시대 때에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70명의 학자들이 번역했어요. 그걸 70인역 이라고 합니다. 이게 약간씩의 차이가 있어갖고 우리나라 성경은 70인역에서 번역하지 않았을까요? 그건 제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 부분적으로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아시면 되겠습니다. 3절에서 이 시편기자는 더 자기신앙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응답하시는 분, 또 힘을 주시는 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한 구절만 가지고도 설교 한 편은 가능하겠지요? 응답,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좋아하는, 응답받았다 그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자기 뜻대로 된 것을 자꾸만 응답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자기 뜻과는 어긋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거든요? 하나님은 더 근원적인 것을 내다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겁니다. 그것은 또 우리들에게 궁극적으로 좋은 거고요, 우리는 자꾸만 계속해서 자기 판단으로 세상을 생각하잖아요? 일단 그건 내려놓아야 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에게 뭐가 좋은 지도 정확하게 모르고요, 뭐, 교회문제 결정할 때도 그렇고 아무리 기도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게 하나님의 바른 뜻인지 우리는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박사고 기도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모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아버지만 안다, 이렇게 말씀 하신 건데요, 그 비교는 적당하진 않지만 그냥 말씀 드린 겁니다. 일단 내 생각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응답인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 응답 이루어졌다, 안 이루어졌다, 생각하지 마시고, 다 하나님의 응답인 거지요. 그런 정도의 차원에 우리가 들어가야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들어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남묘호랑게교 다니는 사람들 주문 외워갖고 자기 원하는 것 하고 그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내 뜻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내 삶과 우리 교회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하는 그 신앙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되죠,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대단히 긴밀하다, 역동적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내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응답하신다고 하는 사실에서 그렇습니다. 됬고요,

 

1절에서 3절까지만 보더라도 참, 말씀들이 참 중요합니다. 아주 귀합니다. 이런 한 구절만 이야기하는 것만 우리가 잘 따라 간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 아주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4절요. 이렇습니다. 4.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더 강조되는 구절입니다. 세상의 왕들조차도 주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주의 성실과 인자를 가리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앞에 나온 응답, 이런 것도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 이런 것과 연관됩니다. 5절요, 좀 더 앞으로 나가네요. 시편기자가 신앙을 조용조용 시작하다가 점점 상승되는 방향으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5.그들이 여호와의 도(여호와의 길)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앞에는 인자하시는 분, 성실하신 분, 응답하시는 분, 힘을 주시는 분인데 한데 다 모아서 한다면 영광이거든요.

 

여호와의 영광이 크다 이야기합니다. 오늘 그래서 제목을 “여호와의 영광이 크다”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핵심이기 때문예요. 그러다가 그건 다른 시편을 공부하면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 좀 특이한 제목인 “주의 오른손”으로 했어요. 실제로는 여호와의 영광이 전체를 끌어가는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크다고 해요. 이 영광이라고 하는 단어, 이것 하나만 이해해도 성서의 모든 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로 카봇이라고 하거든요? 카봇, 혹시 기억하는 분 계세요? 이 카봇이라고 하는 단어가 어디 나왔는지요? 여러 군데 나오긴 하는데 아주 유명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 이런 것들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할 때 나온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이걸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그런 신앙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한다, 하나님 됨은 뭡니까, 그건 여러 가지로 얘기할 수 있지 않겠어요? 지난 번 수련회 때 주제로 이야기한다면 창조사건이라는 말입니다. 無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끌어가고 종말에 이 세계를 부활의 세계에서 경험한 절대적인 생명으로 완성하실 그 분을 그렇게 인정하고 우리가 찬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대단히 어마어마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냥 뭐, 내가 즐거우니까, 좋은 일 있으니까 내가 손 올리고 찬송 부른다, 아니면 하나님께 헌금 드린다, 이런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운명, 우리의 삶 전체가 결정되는 그런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이 크다, 하나님이 크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하나님, 그렇게 머물지 마시고요, 성경은 훨씬 더 깊은 어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합니다. 영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게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 할 수 없는 거룩한 어떤 존재이시기 때문에 ‘카봇’이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한 거예요.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경험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끔 하나님 경험했다고 말들 많이 하는데 과연 그게 과연 하나님 경험인지 아닌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검증받아야 됩니다. 성찰 받아야 되고요,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됩니다. 사이비 이단들도 다 하나님 봤다고 하니까, 하여튼 자기주장만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 드리고 서론적으로도 말씀 드린 겁니다마는 일단 자기의 판단생각을 작게 만드는 게 필요합니다.

 

이게 거꾸로 가요. 자꾸만 사람들이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기 생각이 많아요. 자기가 재단하고 판단하고 자기경험을 절대화 합니다. 자기경험이 얼마나 작은지를 아셔야 되요. 경험이 없어도 되냐, 그거 아닙니다. 경험이 중요한 문제예요. 그러나 주관적인 경험보다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경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이것도 수 백 년 동안 유대 영성가들의 하나님 경험이 축적되면서 하나의 단어가 된 거거든요, 처음부터 있었던 단어가 아니고, 이 언어라고 하는 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깊은 어떤 영적인 경험에서 그런 얘기로 나가게 된 거지요. 예, 그렇게 영광이 크신 분이기 때문에 이제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얘기합니다. 영광은 전체니까요. 세계 전체니까요. 낮은 자를 굽어 살피시고 도우시고, 교만한 자를 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파악하시는 분, 숨길 수 없죠, 성경 곳곳에 그런 표현이 나오지요. 숨길 수 없어요.

 

그 분 앞에서는, 사람 눈은 숨길 수 있지만, 그 분은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두려운 분이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굉장히 신뢰할 만한 분입니다. 그 분만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분 안에 들어가면 궁극적으로는 평화로워지는 거예요. 자기의 약점, 이런 것도 다 아시는 분인데 감추고 말고도 할 것 없잖습니까, 그런 하나님이시지요. 예, 시편기자의 영성이 7절에서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 다 살피신 분, 다 아시는 분, 이야기하면서 7절에 나가서 더 구체적으로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7.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그렇게 고백을 하네요. 이 시편기자의 영성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들을 오해해갖고 우리가 환란 만나도 환란이 다 해결된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환란이 없겠습니까, 만나서 금방 실질적으로 다 해결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환란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험 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이제 살아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 논리가 분명하지요? 결국 사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흡사 우리가 숨을 쉬어야 되는 것처럼, 아무리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 안 쉬면 죽고요,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숨을 쉬면 일단은 살잖아요? 비유적으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이게 우리가 사냐, 죽느냐의 핵심이기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럼 환란은 물러간 거지요. 이건 아주 옳은 이야기입니다. 성서기자들이 헛소리 하지 않습니다. 아닌 걸 그것처럼 이야기하지 않고요, 아주 실질적인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혹은 오해하거나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오늘 여기에 공부의 제목 단어가 나오지요?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주의 오른손, 오른손은 권능의 표지입니다. 오른 손, 옛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우편, 예수님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우편은 똑 같은 권위가 있는 자가 앉는 자리거든요? 이렇게 경험한 거예요. 이 사람은요,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환란 받으면 완전히 세상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자기 인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그런 단계로 들어갑니다. 그게 핵심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조건들을 억지로 좋게 만들려고 하지 말고 그건 자기한테 잘 풀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건 하나님의 뜻대로 지나가는 거고요, 하나님 경험, 하나님 오른손 경험, 예, 그것이 우리가 놀라운 구원을 경험합니다. 평화, 혹은 기쁨, 희락 이런 것들이죠, 마지막 8절입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기도로 끝내요.

 

8.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주의 손으로 지은 것을, 오른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7절에 나와 있듯이요. 권능의 손이예요. 아버지의 손은, 주의 손은 오른손이고 권능의 손이고 창조의 손이고 심판과 구원의 손입니다.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전능하고 권능의 손으로 지으신 것은 당연히 구원받아야죠, 그런 대상들은요, 그리고 그렇게 지으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앞에서 전문적인 용어로 뭐라고 그랬지요? 영광요. 영광, 영광을 드러내는 거지요. 이 시편기자의 마지막 기도 이해하시겠죠? 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고 붙드시고 그가 놀라운 하나님 구원을 경험하게 해 달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이고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봤습니다.

 

오늘은 2011년 후반기에 시작했습니다. 138편부터 시작하는데 오늘 했으니까 12편 남았습니다. 11월 마지막 수요일까지 가면 이게 다 마치게 되겠고요, 12월에는 성서개론, 전체적인 걸 공부해야겠다 싶어서 준비하고 있고 거기 관계된 책을 전도사님이 따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 오늘 말씀의 결론을 어떻게 내릴까요? 특별히 따로 결론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 그대로입니다. 제목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 드리면 되겠네요. 주의 권능을 드러내는 오른손이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나 어느 때나 우리를 다 지키신다는 믿음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주의 말씀 아주 오래전, 벌써 2500년 전에 살았던 한 시편기자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귀한 시편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오른 손의 권능을 말하고 있는 시편기자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다시 한 번 드러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의 삶에 주의 권능이 서린 주의 오른 손이 늘 함께 하실 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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