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6편 강해-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

 

1.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누가 능히 여호와의 권능을 다 말하며 주께서 받으실 찬양을 다 선포하랴

3.정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공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5.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6.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처럼 범죄하여 사악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7.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니 그들을 인도하여 바다 건너가기를 마치 광야를 지나감 같게 하사

10.그들을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11.그들의 대적들은 물로 덮으시매 그들 중에서 하나도 살아 남지 못하였도다

12.이에 그들이 그의 말씀을 믿고 그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도다

13.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15.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16.그들이 진영에서 모세와 여호와의 거룩한 자 아론을 질투하매

17.땅이 갈라져 다단을 삼키며 아비람의 당을 덮었고

18.불이 그들의 당에 붙음이여 화염이 악인들을 살랐도다

19.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20.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21.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

22.그는 함의 땅에서 기사와 홍해에서 놀랄 만한 일을 행하신 이시로다

2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24.그들이 그 기쁨의 땅을 멸시하며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고

25.그들의 장막에서 원망하며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26.이러므로 그가 그의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그들이 광야에 엎드러지게 하고

27.또 그들의 후손을 뭇 백성 중에 엎드러뜨리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리라 하셨도다

28.그들이 또 브올의 바알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29.그 행위로 주를 격노하게 함으로써 재앙이 그들 중에 크게 유행하였도다

30.그 때에 비느하스가 일어서서 중재하니 이에 재앙이 그쳤도다

31.이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으니 대대로 영원까지로다

32.그들이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그들 때문에 재난이 모세에게 이르렀나니

33.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34.그들은 여호와께서 멸하라고 말씀하신 그 이방 민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35.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

36.그들의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들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37.그들이 그들의 자녀를 악귀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쳤도다

38.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

39.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더러워지니 그들의 행동이 음탕하도다

40.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맹렬히 노하시며 자기의 유업을 미워하사

41.그들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들을 다스렸도다

42.그들이 원수들의 압박을 받고 그들의 수하에 복종하게 되었도다

43.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낮아짐을 당하였도다

44.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45.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46.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

47.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48.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106편을 우리가 같이 읽었습니다. 48절까지 있네요. 오늘 우리 시편 106편을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좀 정리를 했습니다. “인간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선하심”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들이지요? 불순종, 하나님의 선하심, 그런데 이게 106편에서 어떻게 해명되는가 하는가를 좀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내용이 머리에 잘 정리가 되신 분은 이게 다 106편하고 좀 비슷하다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길이 자체도 좀 비슷하고요, 지난 주 105편이 45절까지 있고, 106편이 48절까지 있어요. 길이야 뭐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데, 그 내용이 일단 비슷합니다. 두 시편 모두 가을 농사 축제와 구원사 전승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조금 낯설지요? 이런 표현들이요.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지 그게 뭐, 가을축제, 구원사하고 복잡하게 되냐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성서는 구체적인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예요.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이렇게 오해 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말씀을 읽는데 이중적인 문제의 긴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말씀을 읽고 우리의 영에 분명히 양식이 되어야 되는 거구요, 그게 성경 읽는데 하나의 기준이고 또 하나는 우리 영적인 삶에 양식이 되기 이전에, 성서 텍스트 자체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가를 일단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 거는 딱 파묻어 놓고 그냥 큐티 하는 식으로 내가 받고 은혜 받는다 이런 식으로 하면 반쪽 읽기에 불과한 거죠. 농사축제에, 가을걷이 끝나고 하나님께 감사 찬송 드리지 않겠습니까? 예배 드리고 하잖아요? 그런 절기하고 연관된 거구요,

 

보통 11월에 추수감사절이 있는데 비슷한 겁니다. 그 때, 구약사람들이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지요? 그럴 때 불렀던 노래와 찬양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구원사에요. 구원사, 구원역사, 이게 신학용어로도 아주 중요한 거에요. 구원사, 독일어로 하일스게쉬히테(heilsgeschichte)라고 얘기하는데요? 구약은 전체적으로 구원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시편 106편하고 지난주에 보았던 105편의 일부를 역대기상 16장이 실제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105편과 106편이 농사축제, 구원사 전승과 연결 됬다고 하는 증거인 거지요. 이 두 시편 모두가 다 루고 있는 내용이 비슷합니다. 출애굽과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셨는가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거의 비슷하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두 개를 구별하지 말고 105편과 106편을 하나로 보는 게 좋다,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학자들에 따라서 좀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그건 전문적인 말이라서 제가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거의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또 있어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05편은 구원사를 이야기 하되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감사와 순종, 거기에 무게를 두었다고 한다면, 106편은 하나님의 은총이 그렇게 임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배신하고 불순종했다고는 사실에 무게를 둡니다. 그렇게 불순종, 배신했지만, 하나님은 또 은총을 내려 주셨다, 그걸 이야기 하는 거지요. 전달이 됬지요? 전반적으로 비슷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중심, 포커스를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서 106편하고 105편이 좀 차이가 있습니다. 106편은 인간의 불순종, 배신 이런 것들을 무게를 놓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가 읽다보면, 공부하다 보면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48절까지 있는 것을 큰 덩어리로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1절에서 5절, 이것은 일종의 서론으로 이 시편 전체를 이야기하는 송영이라고 할 수 있고요, 6절에서 46절은 인간의 불순종과 구원의 역사, 핵심, 중심내용입니다. 47절, 48절 마지막에 나오는 이 두 구절은, 이건 요약, 요약이 아니라 결론을 내리는 거지요. 인간이 그렇게 불순종했는데도, 하나님이 구원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세 단락으로 나눠서 좀 천천히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여기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와요. 1절에서 5절 봅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하지요? 이미 난외주에, 번역, 주석을 달아 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라, 할렐루야라고 하는 뜻의 번역이예요,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러분들은 성서 기자들이 왜 이런 말들, 할렐루야, 혹은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런 것을 자주 말하고 있을까, 모든 시편들은 이런 구절들이 많이 나올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이 부분만이 아니라 성서전체가 그런 건데요, 이유가 있어요, 그냥 막연하게 있는데, 뭐, 이런 말들을 써라, 그런 영감이 나와서 쓴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들의 삶에 어떤 고백 가운데서 나온 겁니다. 각자 여러분들도 그렇게 살잖아요, 일터도 있고, 앞으로 살아갈 걱정도 있고, 또 몸이 아프기도 하고, 등등 많은 것들이요, 인간관계에 얽히고 설킨 그런 것들이요, 또 더 나아가서는 국제정세에서의 한국백성들이 앞으로 살아갈 미래, 걱정들, 남북관계 이런 것들이요, 그런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겁니다. 그걸 생각하셔야 되요.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하는 말은 여호와를 절대적인 존재로 인정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거꾸로 하면 그 이외의 것은 다 상대적으로 여긴다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의 세계관이기도 하고 자기의 존체 전체를 담는 그런 신앙고백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상대적인 것에 우리가 부화뇌동 안하잖아요, 돈 같은 것도 사실은 상대적이라고 하는 걸 전제하고 하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으니까 돈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돈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죽는 것처럼 생각이 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송하라 라고 하는 신앙고백은 그런 많은 시련과 그리고 시련, 혹은 정말 우리 삶의 조건들이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이 그런 것들은 다 상대적인 것이고 하나님만이 우리 생명의 근본이다. 절대적이다 그걸 인정하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지요.

 

1절을 제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1절만 가지고도 몇 시간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이게 이런 걸 이야기 하려면 그것과 관련된 성경 구절들도 또 설명을 해야 되고요, 성경 하나하나를 깊이 본다고 하는 것은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1절을 제가 서론부분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상투적으로 듣지 마세요,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그런 하나님을 절대적인 분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 생명전체를 의존시키면서, 그러니까 당연히 감사 할 수 있게 되는 거겠지요, 그 감사 이유를 1절에서는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나오지요? 선하심과 인자하심, 이런 고백도 단순한 종교적인 낭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이 선하시다, 이러한 이야기로 받아드리기 힘든 일들이 벌어져요, 벌어지죠? 실제적으로 경험합니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배신당하기도 하고 또 내가 잘못 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실수가 또 반복되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요, 이 세상 도처에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잔인한 사건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보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냐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냥 무조건 막연하게 하나님이 선하시고 인자하셔요. 이렇게 하는 것은 곤란한 거죠, 그런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거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이냐 하는 그런 절대적인 신앙고백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영적시각이 필요하겠죠, 이스라엘의 역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이 시편이 어떤 개인이 썼다기보다도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신앙고백인데요, 역사에도 그런 일들은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이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까지 이야기합니다.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변함이 없다고 하는 거지요. 이러한 영적인 시각까지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 가지고는, 자기암시, 그건 어느 정도는 되요, 뭐 그건 기독교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이라든지 이단들도 마찬가지고 남녀호랑개교 믿고 사람들도 계속 염불 외우고 하면 확신이 오거든요, 사람은 그렇습니다. 어떻게 자기가 이해를 못하고 전혀 말이 안 되는 것도 자꾸 믿는다 믿는다 얘기하면 자기 암시, 심리학적으로 그걸 믿어지는 게 인간입니다. 그런 점에서 쇄뇌가 가능한 거지요. 어떤 이상한 종교집단이나 이데올로기 이런 것들이 반복해서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면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하다가 점차점차 빠져 들어간다고 하는 건데요, 오늘 성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겁니다. 현실을 똑바로 보는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뚫어 보는 거지요,

 

그럴 때에 이 현실이 고달프고 때에 따라서는 난장판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그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펼치셨다, 그러한 시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것을 가리켜서 ‘구원사’라고 하는 거지요.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이스라엘 역사에 부침이 많았습니까, 조금 잘 난 척 하다가 수렁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포로로 잡혀가고 얼마나 일들이 많았습니까,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이긴 한데요,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보니까 여기에는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더라 그걸 말하는 거지요. 우리들에게도 여러분들이 인생을 각각 살아온 햇수가 있겠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있는가 그러한 시각으로 내 삶을 성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서론적으로 1절에서 5절까지의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6절에서 46절사이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듬성듬성 중요한 사건들을 짚으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 46절까지가 앞에서 우리가 105편 볼 때도 비슷한 거였지만,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사실은 다 있다고 봐야 됩니다.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입성이거든요, 그 뒤로 나오는 사사시대와 왕조시대 이런 것들은 어쩌면 그 앞에 있는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해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핵심은 출애굽입니다. 출애굽과 뒤에 나오는 또 하나의 해방 사건이 뭐라고 그랬지요? 바벨론 포로귀환, 이 두가인데, 이 바벨론 포로도 출애굽과 연관되니까요, 그리고 원형으로 보면 출애굽이 핵심이예요. 그러나 실제적인 사건에서는 바벨론 포로와 바벨론 귀환입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얽히고 저렇게 얽혀서 날줄과 씨줄처럼 연결되면서 구약성서가 기록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시편도 그렇고 잠언이라든지 그리고 여러 가지 문학적인 문서들도 사실은 다 바벨론 포로와 연관된 이스라엘의 고유한 거룩한 문학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46절까지 나오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원형이라고 보면 됩니다. 105편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으로부터 시작했지요, 그런데 106편은 출애굽전승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전승이라고 하는 말을 이제는 낯설지 않게 생각하시겠지요? 이런, 신학적인 단어들인데 이 언어라고 하는 것이 신기해서 처음엔 낯설어도 자꾸 이해하게 되면 개념으로 와 닿게 됩니다. 그럼 훨씬 폭 넓게 성경을 이해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도 언어를 배우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성모, 그 녀석이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봤습니다마는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단어 하나만 얘기 했거든요? 지금 문장으로 얘기를 하기 시작해요,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했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그 언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을 얼마나 강하게 하고 심화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출애굽전승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라고 하는 거예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106편은 105편과 다르게 이스라엘 역사를 좀 비판적으로 봅니다.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기억하지 않았고 지난주일 설교에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기억이라고 하는 게 성경의 아주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기억을 안 해, 자기 편리한 대로 기억을 해요, 꼭 기억해 될 것은 안하고 쓸데없는 것만 기억하는데 이스라엘이 기억하지 않았고 거역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애굽에 임한 재앙이 뭐냐 하는 거였습니다. 이건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될 텐데요, 출애굽당시 열 가지 재앙이 내렸다고 했지요?

 

그게 모세와 바로의 어떤 기 싸움이라고 할까, 거기서 벌어진 열 가지 재앙인데 그게 뭐 열가지만이었겠습니까, 애굽에 있었던 여러 가지 천재지변, 이런 것들을 상징적으로 열 가지로 정리하고 있을뿐이예요. 그런 것들을 거기 이스라엘 민족이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보았는데도 그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7절이라고 그랬지요? 다시 한 번 보면요,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홍해에서 거역했다고 하는 것은 뭘까요? 홍해에서 거역했다, 바로 군사들이 뒤에서 따라 왔잖아요? 홍해가 가로막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그 때 거역했다고 하는 것이 딱 나오나요? 거역한 것은 이제 홍해를 건넌 다음에 주로 광야에 들어와서 많이 그랬어요. 홍해를 건널 때까지는 거역한 것이 많이 나오지 않는대도 시편 지금 이 부분에서 홍해에서 거역했다고 그럽니다.

 

그렇다면 홍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홍해를 건넌 그 이야기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있었던 것까지 거역한 일까지 포함하는 건지 모르겠고요, 아니면 출애굽기가 말하지 않은 어떤 사건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승되어 오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홍해가 딱 가로막히니까 늘 광야에서도 그랬듯이 광야는 아직 오기 전이예요, 모세나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왜 우리를 데리고 나와서 여기서 이 홍해에서 빠져 죽게 하느냐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뒤에는 바로 군사가 따라 오고요, 앞에는 홍해가 막혀있기 때문에 독안에 든 쥐다 그래서 자기들 출애굽한 것에 대해서 항거했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게 백 프로 확실한 것은 아닌데요, 여러분들이 나중에 출애굽기 이런 것들을 보고 더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의 인자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게 세 가지가 반복된 거지요?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거역했다.

 

13절에도 보면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잊어버린다 예, 여러분들이 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공부를 할 때에는 어떤 하나님에 대한 통치,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런 것들이 좀 남아 있다가도 나가버리면 다 잊어버리게 되거든요, 잊어버리지 않아야지요, 기억해야 되는 거지요, 그 기억하는 것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요, 그런데 기억하는 게 쉽지 않은 거예요. 당장 아프고 당장 화나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처럼 일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약속 그런 것을 기억할 수 있겠어요, 그걸 기억하는 게 영성인겁니다. 그게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했다, 잊어버리고 기다리지 아니했다. 이것도 참 재미있는 표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급하잖아요, 당장에 이루어져야 되고, 눈에 보일 정도로 화끈한 일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그렇지 않거든요, 기다리지 못하는 것도 불신앙인거죠,

 

1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사실은 광야에서 욕심을 낼 게 없지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 사람들은 욕심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늘 그렇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욕심을 내고 ,없으면 없는대로 욕심을 내고 인간의 본질인 것 같지요? 하나님을 시험하고 광야에서 그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마실 물과 양식이 떨어지자 모세를 비판하고 차라리 이럴 바에야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런 어떤 과거지향적인 생각, 복고주의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많았지요. 그걸 뚫고 모세가 이합집산과 같은 삼 백만 명인가요? 그 사람들을 끌고 광야를 횡단했다고 하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광야에 있었던 일들을 이 시편기자가 정리하면서 15절에 아주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들이 욕심을 내고 마실 물 없다, 먹을 것 없다, 계속 그랬잖아요?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데, 이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그랬어요.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15절에 보면 성서기자가 아주 정확하게 지적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물과 양식을 얻는 것, 뭔가 살아갈 어떤 토대를, 쉽게 말해서 오늘 날로 말하면 돈, 이런 것들이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오늘 15절의 표현에 따르면 하나님이 물질로는 축복해 주시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한대로,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더 쇠약하게 됬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불행이죠, 우리에게도 지금 그럴 가능성들은 많이 있습니다. 무조건적인 기도의 응답을 요구하지만, 그리고 그러한 요구와 응답이 반복되어서 그러한 호기심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유지하게 되면 그러면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경쇠약증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예,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이런 것이 잘 못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중요한 건 우리 영혼이 건강해져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의 생활조건을, 그리고 생활형편을 향상시키는 것에만 우리 신앙이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면 참, 억울한 일이다, 다른 건 풍부하게 주어졌는데, 영혼이 궁핍하게 되는 거 아니냐, 하는 거죠, 이건 마치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 하는 거 같습니다. 지난 70년대, 80년대, 아주 어려운 시절을 잘 견뎌서 세계 몇 위가 되는 정도의 경제대국이 되긴 했는데, 우리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 이런 데서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16절에서 46절까지 그 뒤로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건 일일이 구약성경하고, 출애굽기나 신명기, 이런데서 연결해서 찾아 볼 수 있는건데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핵심 되는 단어들만 추렸어요. 질투하고, 금송아지 만들고, 기쁨의 땅을 멸시하고, 이게 무슨 뜻이예요? 광야와 가나안 땅을 무시하고 말씀을 믿지 않고 원망하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이상하죠? 구약에는 지금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 하시는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또 생각해 보시고요, 이런 상황에서 모세까지도 망령된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하나님과 일치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 썩이니까 몇 가지 말을 한 게 있거든요. 그런 모세의 실수를 이야기합니다. 이방인들의 삶을 모방하고 우상에게 자식들을 바치고 음탕하게 살았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이 43절이예요. 그렇게 잘 못하면 나락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떨어졌거든요, 그런데 그 때마다 하나님이 건지셨어요.

 

그런데 43절에 이야기하기를 여호와께서 여러 번 그들을 건지시나 그들은 교묘하게 거역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 교묘하게 라는 말이 의역을 한 건지 히브리어에도 그 뜻인지 제가 확인을 못해 봤습니다. 일단 있는 그대로 본다면 똑 같은 뜻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뉘앙스로 가진 단어로 되어 있겠지요? 교묘하게 거역한다고 하는 게 뭘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거기에 대답을 드릴 필요는 없을 거구요. 자기합리화 하면서 거역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참 그렇습니다. 결국 그래서 망하게 됬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그들을 건지셨습니다. 시편기자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거예요. 이 이스라엘 민족은 정말 하나님이 아무리 은총을 내려줘도 배은망덕하다 오직 그걸 기억도 안하고 그걸 금방 배신하는 그런 민족이다, 그들은 아예 망해서 없어져야 될 정도이다.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고통가운데서 울부짖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셨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여기서 어떤 결론에 도달합니까, 하나님의 인자와 선하심이 영원하도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밖에 없는 거지요, 구원의 역사를 보니 이것은 다른 걸로는 도저히 해명이 안되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의 구원역사를 끌어간 토대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 그건 뭐 우리 개인에게도 똑 같은 이야기이지요, 교묘하게 우리가 불신앙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이 있지요. 이게 또 신앙이냐, 불신앙이냐를 우리는 분간도 못할 때가 많구요. 또 힘들어져도 하나님께 호소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고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47절과 48절은 앞에 있는 내용을 다 전제하고 결론을 내리는 부분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구원의 토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가 말하는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래서 우리가 그를 감사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다, 이거지요. 예, 이런 것들을 그냥 수학공식처럼 외우지 마시고 실질적으로 여러분의 삶과 일치시켜서 이해하고 또 그 신앙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공연한 것으로 우리가 염려 안하게 되지요. 어떤 것이라도 결국은 다 하나님의 선하심이거든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수준에서 염려하고 불안해 하고 그렇게 삽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서는 죽음까지도 은총이다 라고 말이지요, 죽음의 세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우리가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근거해서 말해도 그건 옳은 이야기입니다.

 

예, 마지막 절만 읽고 오늘 공부 마치겠습니다. 이런데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말하는 신약공동체도 구원을 나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예,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차 한 잔 하시고 질문응답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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