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7편 강해-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기억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3.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4.그들이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5.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

6.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7.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

8.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3.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4.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

15.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16.그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7.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18.그들은 그들의 모든 음식물을 싫어하게 되어 사망의 문에 이르렀도다

19.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21.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22.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가 행하신 일을 선포할지로다

23.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24.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25.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27.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28.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29.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30.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1.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32.백성의 모임에서 그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그를 찬송할지로다

33.여호와께서는 강이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이 변하여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34.그 주민의 악으로 말미암아 옥토가 변하여 염전이 되게 하시며

35.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36.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37.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38.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

39.다시 압박과 재난과 우환을 통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시며 낮추시는도다

40.호와께서 고관들에게는 능욕을 쏟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하게 하시나

41.궁핍한 자는 그의 고통으로부터 건져 주시고 그의 가족을 양 떼 같이 지켜 주시나니

42.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악한 자는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43.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편 107편이었습니다. 우리가 쭉 돌아가면서 이 말씀을 읽었어요. 긴 구절입니다. 우리가 읽으면서 부분적으로는 그 내용이 어떤가 하는 게 들어오지요. 그렇지만 전체적인 틀, 이런 것들은 조금 힘듭니다. 전문가가 아니면 힘들지요. 전문가라고 하는 것은 그냥 목사라고 하는 뜻은 아니고 또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다 들어오는 게 아니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이라고 하는 걸 특별하게 전공한 사람만 읽을 때 딱 딱 들어오지 그렇지 않으면 거의 부분적으로만 이해되지 전체적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가 공부하려고 따로 준비해서 여러분들에게 전체 구조의 어떤 내용들을 놓치지 않고 좀 전해볼까 합니다. 내용 하나하나를 다 말씀드린다고 하는 것은 아니고요. 우리가 공부하는 시간 안에서 이것의 핵심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 107편도 앞에 나와 있는 105편이나 106편과 마찬가지로 그 시작부분이 아주 전형적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는 거지요. 거의 똑같지요? 106편도 그렇고요, 할렐루야가 하나 들어갔지만, 그렇습니다.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인데요? 106편에서도 1.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찬송가 가사에 나오는 그러한 구절입니다. 107편도 똑 같구요.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하라고 하라는 말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성경 읽을 때 참 감사하라고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생각할 수 있어요. 왜 그렇게 이야기를 할까하고 말이지요. 왜 감사하라고 이야기를 할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이 시편을 부르던 사람들이 다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고 있다고 한다면 굳이 감사하라 얘기할 필요 없지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말하지 않아도 할 일 잘 하면 굳이 다른 이야기 하지 않는 것하고 비슷합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예요. 왜 그럴까, 이상하지요.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펼쳐 주셨는데, 왜 감사하지 않을까, 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절하고 우상숭배 한 것 아시지 않습니까, 그럴 때 마다 왜 그럴까, 궁금하게 생각되시지요? 그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걸 인간적인 예화로 잠깐 설명 드리자면 이와 같습니다. 아이들이 저쪽 부모 밑에서 내가 살았으면 정말 효도 많이 할 텐데, 지금 우리 집이 이래서 못한다. 그런 투정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나 가정형편이 좋은 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자녀들이 효도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입장이 된다고 하더라도 또 생각이 달라지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에 예언자도 많고 제사장들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울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여실하게 깨닫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고 그렇지 못한다고만 말하지는 못 하는 거예요.

 

말이 중심에서 조금 옆으로 나갔는데요, 다시 오늘 본문, 감사하라와 연관시켜서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에 감사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삶의 경험에서 감사하기 어려운 일들이 오히려 많았다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런 것들이 실제적으로 눈에 보였다고 한다면 감사한 생활을 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시편기자가 감사하라 그렇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이걸 아주 상투적인 말로 받아 드려서요, 불만스런 삶을 벗어나기 위한 자기합리와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가끔 일어나는 거거든요? 속으로는 불평불만이 많이 끓고 내 신세가 왜 이런가 생각하면서도 아니지 감사 해야지 감사 해야지, 그런 쪽으로 자기암시일수도 있고요, 입에 붙어 있는 말이지요. 다른 것은, 다른 또 하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에 대한 인식과 경험입니다.

 

상황은 똑 같은 거예요. 어떤 상황이요, 감사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어려운 일들이 많은 게 아니었고 거의 비슷합니다. 모든 민족에게는 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이건 개인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고 그런 한도 안에서 살지 특별히 다른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똑 같은 삶이었었는데 감사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감사하지 못하니까 그냥 감사해야지 라고 하는 자기합리화 그건 아니겠지요. 시편이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째 말한 겁니다.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삶을 인식하고 경험한 겁니다. 예, 이게 요 부분만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전반적인 것에 연관된 거예요. 새로운 차원의 삶에 대한 인식과 경험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정리되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합리화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이 현실적이지 않아, 이상적이야, 너무 추상적이야 말이 되지 않아, 이런 얘기 가끔 듣지 않습니까?

 

그건 바로 자기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또렷하지 않는데서 나온 우리들의 신앙형태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지요. 감사하라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왜 감사해야 되는가 그 이유가 본문에 나오는 거예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성서 안에서 아주 명시적으로 찾을 수도 있고 숨어 있을 수도 있고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찾아내는 것이 성서읽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절, 15절, 21절, 31절에서 거의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8절 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8절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15절도 그렇지요? 예, 제가 말씀 드린 네 구절이 똑같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이유는 이 네 번에 걸쳐서 반복되고 있는 구절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사람들에게 행하신 기적입니다.

 

여기서 그 분의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인자하신 거지요. 왜 인자할까요? 그러니까 건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도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으니까 건져주셨다, 그러기 때문에 인자하시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눈에 보이시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구약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말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아시지요? 그리고 이것이 인간개인과 인류와 종족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라고 하는 것도 이해하시겠지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아니면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러한 깊이로 들어가야만 우리의 영성이 확보되지요. 그렇지 않고 아, 내가 어떤 걸 했더니 축복을 주었더라든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다보면 이것은 계속 악순환이 됩니다.

 

새로운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성서에 근거해서 우리의 삶과 역사를 우리가 찬찬히 뚫어 볼 수 있어야 되지요. 이것은 학문적인 게 크게 요구되지 않습니다. 열린 눈만 가지면 사실은 눈에 보이는데, 영적각성이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왜 안 되는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제가 언젠가 설명했을 거구요.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안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영혼이 어디에 길들여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시대정신, 시대가 요구하는 것 그런 것에 습관이 되어 버려있기 때문에, 성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생명을 이해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게 손에 안 잡히는 거지요. 말은 하는데, 그렇게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하는데, 실제적으로 모르면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예, 하나님의 자비, 여호와의 인자하심, 그것은 곧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울부짖는 거지만, 하나님이 그럴 때마다 건져주셨다, 정말 무모할 정도로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다고 하는 것이 구약성서의 아주 일관된 증언입니다.

 

예, 그렇다면 그들의 모든 문제들, 굶주림이라든지 병마 이런 것들을 다 해결해 주었다고 하는 거냐,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고통에서 건져주셨다고 하는 거니까요. 예, 그건 그렇기도 하고, 또 좀 안 그렇기도 하는 겁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는 것은 비록 그런 것을 담아내면서, 어떤 것을요,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일용할 양식을 얻고요, 어떤 침략자들 가운데서 다시 평화를 얻게 되고 등등.. 구체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 그런 것들도 포함하면서 더 근원적인 차원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고통에서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그러한 풍요, 물질적인 풍요, 안녕과 번영, 그런 차원이라기보다는 우리 생존을 책임지신다고 하는 겁니다. 설명이 쉽지는 않는데요, 어쨌든 넘어갑시다. 안 되는 부분요, 하나님이 우리 생존의 책임자이시지 우리가 자꾸 부자가 되게 하는 그런 분은 아니다, 그거는 오히려 바알숭배예요. 그래도 나는 바알숭배라도 좋다, 부자가 되고 건강한 게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행복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은 그냥 그럴 듯한데, 결국은 놓치는 겁니다. 성서가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는 부분이예요. 그래서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광야를 기억하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광야, 거기는 최소한의 생존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보장된 곳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넘쳐 버리면 어떻게 되요, 쓸데없는 욕심이 많아져요.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하양에서 우리 가족하고 네 다섯 명이 예배드릴 때가 엊그제 같았거든요? 진량 가서 20명 정도 예배드리고, 여기 와서 훨씬 많이 예배를 드리니까, 최소한도 규모를 갖는다는 게 좋기는 하면서도 조금 더 커졌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또 드는 겁니다. 그건 사람들의 인지상정이니까요. 계속 그러는 거예요. 끊임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100명, 200명 만약 된다고 한다면 거기서 만족이 안 됩니다. 하나님의 큰일을 하려면 뭐가 더 필요하지, 이런 쪽으로 나가게 되요.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우리의 영혼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 영적만족이거든요? 이게 자기도취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생명의 알맹이와 일치되는 건데요? 그것은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철저하게 자기의 운명을 맡기는 그럴 때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방법이거든요, 그 뿐만 아니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 다음에 나오는군요. 9.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9절이예요. 9절,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참, 우리가 외워두어야 될 만한 구절이라서 제가 공부 강의안에 인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가 행한 기적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이예요. 그게 우리를 그렇게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것하고, 실제적인 삶에 근거들을 제공해 주셨다고 하는 것하고요, 더욱 근본적으로는 영혼에게 만족과 좋은 것으로 채워주셨다고 하는 얘기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연관되는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영혼의 만족이 없으면 생존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게 연관된 문제거든요? 내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다, 내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하루를 산다, 지탱한다, 그러한 영혼의 소박함이라고 할 수 있고요, 이게 낭만적인 뜻에서 소박하다는 뜻은 아니고요. 실질적인 삶을 뚫어 본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은 소박한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영혼의 만족, 하나님과 우리가 소통하는 통로인 영혼의 만족, 이것이 된다면 더 부러울 것이 뭐가 있을까요? 이 구절에서 사모하는 영혼, 주린 영혼이라고 표현한 형용사처럼 쓰여 지는, 사모한다, 주렸다고 하는 거 말입니다. 이게 뭘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상태에 가기가 쉽지 않을걸요? 다른 시편에도 나오는데, 목마른 사슴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목이 마르다 이건 목이 마를 때는 잡생각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거든요,

 

한 가지만 생각하거든요, 물을 마셔야 되는 거예요. 정말 목이 갈했을 때, 그럴 때는 수돗물도 벌컥벌컥 마실 겁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걸 잘 안 마시려고 하지 않습니까, 생수같은 걸 마시지 않습니까? 정수, 자꾸만 가리잖아요? 예, 목이 갈한 거 같은 영혼이 뭘까? 어디 집중하는 거지요. 생명의 주인이신 그 분에게 집중하는 거지요.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사실은요. 우리는 사모하는 영혼이 아니고 주린 영혼이 아니고 너무 퍼져 있는 거지요. 말뜻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강의안에서 그렇게 표현했어요. 오직 여호와께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절실한 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안하지 않습니까, 말만 여호와께 맡긴다고 하지 실제적으로는 세상사는 여러 가지 요령이 우리에게 습관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개인에 따라서 달라요. 영적으로 순전한 쪽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쪽으로 자꾸만 갑니다. 이런 점에서는 나이가 먹는다는 게 참 좋습니다. 늙어간다고 하는 것은 영혼이 더 순전해 질수 있는 가능성들을 많이 열어 줍니다. 이게 실질적으로 그런 거예요. 젊었을 때는 할 일도 많아 그리고 욕망도 많아 그리고 육체도 따라가고 많은 것들이 소용돌이를 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저절로 정리가 되거든요, 그리고 심지어는 시력도 줄어들기 때문에 자세하게 보면서도 대충 보면서도 살 수 있고 말이지요. 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우리의 육신이 이렇게 후폐해가지만 우리 영혼은 더 새로워진다고 말이지요. 사람에 대한 아주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고백들이지, 그러니까 성서기자들은 위대한 영성가이면서, 영성가는 인간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인간에 삶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지 구름잡는 식으로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표현은 구름잡는 거 같아요.

 

그러나 내용은 아주 리얼한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럴 때만 참된 만족이 가능합니다. 시편의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구약성서 전체가 이야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경험한 초기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이야기한 핵심입니다. 우리도 여기에 더 가까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10절에서 32절은 조금 특이한 내용들입니다. 오늘 여기 전체 주제인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그가 행하신 기적”, 요게 왜 연관되는지는 아시지요? 제가 설명하지는 않고 지나가는데, 그러니까 인자하심이 우리를 실제적인 고통에서 건져주신다고 그랬잖아요? 건져주실 때에 하신 일이 기적적인 일인 겁니다. 그래서 인자하심과 기적이 연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한 전체 주제를 이제 시편 공동체가 경험한 세 가지 특별한 사건을 해명하면서, 그것을 예로 들면서 더 설명하는 거지요. 세 가지예요. 10절에서 16절은, 이들이 원래 포로였다가 자유를 얻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걸 보면 아마 바벨론 포로 이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 107편이요. 참고적으로 말씀 드리면, 시편 전체는 물론이고 한 편 한편도 어느 한 시대만 딱 이야기 하는 건 아니예요. 여러 시대가 같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여러분, 그러나 그것은 훨씬 역사 후대에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고 하는 경험가운데서 나온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승된 이야기들 중에 엑기스가 남아서 이렇게 시편에 자리를 한 겁니다. 포로경험한 공동체가 거기 나옵니다. 이건 당연히 전체주제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의 놀라운 기적이다. 17절에서 22절은 병에서 치료받은 병자들를 전제하는 겁니다. 23절에서 32절은 바다의 위험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묘사합니다.

 

이건 특이해요. 어떤 걸 이야기하는 걸까요? 이스라엘이 지중해 면에 있어가지고요, 여러 무역선들도 보고 아마 이스라엘에도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집트, 그리스 등등 이런 쪽으로 항해하던 선원들도 중간에 들어와서 살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왔을 겁니다. 아니면 <오딧세이>같은 그리스의 항해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마 이들에게도 전달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더 확실한, 분명한 것은 이 시편 107편을 기록한, 그리고 107편과 연관된 이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바다에서 위험을 겪었다고 하는 것, 그겁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포로, 큰 병, 바다의 풍파, 이건 죽음에 가까이 갔던 경험이거든요, 밑바닥에 갔다가 건짐을 받았을 때 느끼는 기쁨, 이건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그러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 신약적인 시각에서 같이 연관해서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어느 성경 한 부분을 읽을 때도 만약에 가능하다면, 성서전체와 좀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죽음에 들어갔다가 건짐을 받았을 때에 그 기쁨이 구원경험이구요. 거기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고 하는 이 논리가 신약성서 쪽으로 이야기 하면 어떨까,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대충 여러분들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세례사건이 바로 그겁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전제가 우리에게 깔려 있는 거거든요? 우리는 직접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는 겁니다. 물 속에 들어가고요. 세례 받을 때에, 우리는 약식 세례를 합니다만, 원래는 물 속에 들어가는 침례였었구요. 의미는 똑같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세례, 그리스도를 통한 죽음과 삶의 경험들입니다. 이런 감격이 우리들에게 실질적으로 있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거예요.

 

그리고 이것을 좀 더 연장 시켜서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죽잖아요, 여기 있는 게 다 가게 되는 건데, 속히 가게 되는데, 결국 우리가 그 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 뿐인데요, 지금 살고 있지만, 이미 죽음을 받아 드린 거다, 신학용어로 선취라고 이야기합니다. 미리 끌어당긴다고 하는 거 말이지요. 죽음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로 받아드려지는 부활사건, 얘기가 좀 복잡해지지요? 내용은 간단한 겁니다. 그런 것들을 미리 당겨서 사는 겁니다. 이미 죽었다, 우리는 아주 실질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하나님 나라에 받아 드려졌다, 그겁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내 삶에 일치시켜서 살아 갈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떤 자유가 보장될까요? 어떤 해방이 우리들에게 놓여 있을까요? 어떤 감사가 우리들에게 놓여 있을까요? 감사 감사 하면 교회서는 감사헌금 드려라 그런 뜻으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않은 건 아시지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 영혼을 활짝 여는 거거든요? 그러한 상태로 우리가 될 겁니다. 아마, 살아 있어도, 시행착오가 많이 있어도,사실은 그렇게 될 거예요. 여러분들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죽었다가 다시 사는 거와 같은 여러 가지 질병, 고난 이런 것 없는 사람들은 감사할 필요가 없냐, 그건 아니지요? 그 부분은 강의안을 여러분들이 참고하십시오. 그 패라그래프 마지막 단락, 우리가 실제적으로 큰 위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요,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이 감사해야 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없다면 그게 어려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삶의 진수를 절실하게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팔복에서 말씀하신 이야기가 더 옳습니다. 그게 상대적으로 더 옳은 게 아니라 핵심을 이야기 하시는 거지요. 가난하고 우는 자들이 행복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 행복하다 이러한 영적인 경지, 이러한 상태가 우리가 따라가야 될 기독교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33절에서 43절은 이 109편의 2부입니다. 제사장의 요청에 따라서 전체회중이 함께 부르는 제의찬양시라고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이예요. 제사장의 요청이라고 하면, 예배드릴 때 목사가 몇 장 찬송 부릅시다, 이렇게 하는 것하고 비슷한 거겠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강이 변해서 광야가 되고 샘이 변해서 마른땅이 되고요. 옥토가 염전으로 바뀌게 되고, 도저히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우리의 계획을 뛰어넘는 어떤 사건들을 보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구나, 그것을 알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이스라엘아, 뭐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잖아요?

 

이러한 세계를 보는 성서기자들의 고유한 영적시각들이 있는 거지요. 예, 그 정도로 하고, 결론입니다. 43절입니다. 쭉 많은 이야기를 했지요. 1부, 2부 나눠서 했습니다. 그걸 이야기한 다음에 시편기자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네요. 43.지혜 있는 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지켜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이러한 일들은 뭘까요? 하나님의 구원통치예요. 기적적인 사건들이예요.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꼭 여러분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어떤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당대의 사람들이 그 당대의 세계관으로 이해 안 되는 모든 사건들은 기적이라고 된 거예요. 고대인들에게 화산폭발, 이런 것들도 이해가 안 되는 거거든요? 일식, 월식, 이런 것, 이해가 되지 않는 거거든요? 그런 것들이 다 기적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이러한 일들, 기적을 보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라 조금 이 말이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러한 예상을 뛰어넘는 기적? 그리고 대단한 사건들, 그런 걸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라든지, 노래를 하라든지 그렇게는 할 수 있는데, 인자하심, 그렇지요, 인자하심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게 어떻게 연관되는 걸까요? 이미 앞에서 설명한 그겁니다. 결국 그 모든 기적적이고 그 당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이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들은 결국은 뭐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결론 부분, 몇 문장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 우리에게 오는 재앙과 고난도 그 분의 인자하심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인생을, 혹은 세계를 우리의 얄팍한 머리로만 그리고 길들여진 머리로만 계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낱말 뜻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거시적이다. 훨씬 더 신기하다, 그걸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과 진술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고요.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예, 잠시 차 한 잔 마시고 질문응답 받기로 하겠습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