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8편 강해-여호와의 구원, 사람의 구원

 

시편 108편, 오늘은 같은 목소리로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찬송시〛

1.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2.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3.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4.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5.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6.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을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7.하나님이 그의 성소에서 말씀하시되 내가 기뻐하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측량하리라

8.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유다는 나의 규이며

9.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지며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하셨도다

10.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읍으로 인도해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꼬

1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의 군대들과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2.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13.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아멘! 우리가 오늘 공부하게 시편 108편은 될 내용은 앞에 나와 있는 것의 반복입니다. 57편 7절에서 11절이 바로 108편 1절에서 5절까지고요. 60편 5절에서 12절까지가 오늘 우리가 읽은 108편 6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중복 되요, 아마 이 내용들이 오랫동안 제의전통에 따라서 쭉 내려오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러서 각각 시편 57편과 60편, 그리고 108편에 인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본다면 어디 문제가 있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이 가능해요. 이렇게 중복된 게 분명하다고 한다면 나중에 시편 묶음집을 만들 때 좀 빼버려도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대로 있어요. 왜 그랬을까요? 거의 똑 같은 내용입니다. 108편 1절에서 5절, 그리고 6절에서 13절이 각각 시편 57편과 60편에 있는 거예요. 어떤 것이 먼저였을까요? 108편이 먼저였을까요? 아니면 57편과 60편이 먼저였을까요?

 

그냥 상식적으로 본다면 57편과 60편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108편 뒤에 있을 텐데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각각 시편 이것보다 먼저 어떤 전승들이 있었던 거예요. 부분적인 전승들, 다시 시편이 완성된 게 처음부터 그렇게 된 건 아니거든요? 먼저 여러 가지 시 구절들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이렇게 편집이 된 겁니다. 예, 이렇게 똑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볼 때 좀 완전하지 못하다, 좀 어딘가 잘못된 부분이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가능하겠지만 그런 건 아닙니다. 이걸 왜 몰랐겠어요?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성경이 나온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학문적이고 영적이고 그리고 전통을 잘 간직하는 사람들이고 세계 여러 민족가운데서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문서들을 소홀히 다뤄서 반복되는 것도 모르고 그냥 쓴 게 아니예요. 아마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걸 우리가 지금 다 따라가기는 힘듭니다. 이 내용은 따지고 보면 앞에서 우리가 57편과 60편, 공부할 때 이미 다룬 거기 때문에 그걸 보면 되긴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모여서 샘터교회에서 공부하는 것은 훨씬 뒷부분에서 되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공부한 것은 훨씬 뒤부분서부터이기 때문에 우리가 몇 편부터 공부했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공부한 것은 아니지만,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들어가면 앞에 다 나와 있습니다. 하여튼 거기 있는 것을 보면 되긴 하지만 저는 다시 오늘 108편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똑 같은 본문이지만 읽을 때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다를 수도 있고요, 예, 우리가 다 몰랐던 것도 새롭게 읽으면 새로운 영적인 의미들이 우리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런 관점이기도 하고 또 이게 나눠져 있던 것이 하나로 들어온 거니까요. 앞에 말씀드린 대로 그대로예요.

 

57편과 60편으로 나눠져 있던 고대의 시편 전승들이 이제 108편에 같이 묶여져 있을 때는 또 여기에 관계된 사람들의 어떤 특별한 영적인 생각들이 여기 담겨져 있지 않겠냐 하는 그런 관점에서 오늘 다시 보려고 합니다. 둘로 나눠서 봅니다. 1절에서 5절, 그리고 6절에서 13절입니다. 두 가지예요. 1절에서 5절은 전형적인 송영입니다. 독솔로지(Doxology),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죠? 찬양이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그러한 내용입니다. 찬양하고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거, 이런 것들이 시편에 많이 나오고요, 구약성서 전체가 그럴 수도 있고 신약성서에도 그러한 송영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신앙을 압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걸 그냥, 뻔한 이야기다. 그리 생각하고 지나가면 중요한 걸 놓치게 되는 거지요. 1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죠, 내가 노래하고 찬양한다. 노래하고 찬양한다,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노래하고 찬양이라는 이 이야기요,

 

예 단순히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찬양을 하게 되면 감정이 들어가죠, 멜로디가 있고 하기 때문에, 가사도 그렇기 때문에 가사에다 음율을 붙여서 부르게 되면 우리 감정이 거기 포함되기도 하고 당연히 우러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감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시지요? 그리고 감정은 감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것이 뒷받침되어 있습니다. 뒷받침 되어 있을 때만 그 감정이 이제 잘 못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감정만 남게 되면 그건 어디로 튈지 몰라요. 우리의 삶도 그와 비슷합니다. 여기서 노래와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이라기보다도 모든 삶을 거기에 집중하는 영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노래한다,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우리 모든 삶을 집중시키는 영적인 태도라고 하는 거지요. 이게 사실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나 다른 강연이나 등등 이야기하는 바입니다마는 우리가 다른 것에 우리의 영혼이 분산되어 있어서 하나님에게만 집중시킨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고요. 쉽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방향으로 왜곡 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신앙이 감정위주로 흘러가게 되요. 열광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겁니다. 옛날에 제가 서울 천호동에 살 때 그 근처에 전도관이 있었습니다. 가끔 그 옆을 지나가다 보면 무릎 꿇고 앉아 몇 시간씩, 몇 시간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찬송가를 반복적으로 굉장히 열정적으로 부르곤 했었습니다. 일반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은 자주 일어납니다만, 그렇게 하다보면 기독교 신앙은 둘째 치고 자기감정에 휩싸여서 엑스타시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거든요. 엑스타시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부정할 수 없어요.

 

신앙도 고차원으로 가게 되면 결국은 자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긴 합니다만 그러나 그게 신앙의 중심이 되면 문제가 되는 거죠. 사람들이 그 쪽으로 나가기 쉬워요. 나 갈 수 있습니다. 그게 극단이고, 또 하나는 순전히 율법주의가 되는 거예요. 자기가 행하는 종교적 업적에 열정적으로 매달립니다. 앞서 있는 건 감정적으로 매달린다고 한다면 두 번째는 자기의 종교적 행위에 대한 예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죠, 그런 극단으로 왜곡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에게 집중되지 못하는데, 그러나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는 강압 속에서 우리는 그런 양 극단으로 빠질 수 있다. 그건 건강한 영성이 아니고요. 삶 자체가 노래와 찬양이 되는 그러한 신앙으로 나가야 되겠지요. 예, 그거 이해하시겠죠? 삶 자체가 노래와 찬양이 된다. 아, 그건 즐거울 때나 되지, 좋은 일이 많을 때나 되지, 힘든 일이 많은데 어떻게 가능 하냐, 그게 가능해야만 기독교 신앙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라든지, 행운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이건 우리가 느끼는 거거든요? 물론 실질적으로 어렵고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찬양의 이유가 되어야 됩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쁨과 평화를 안고 살아야 되요. 이게 가능할까요?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시고 본인에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 자신에게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저에게도 묻고 싶은 거예요. 모든 게 풀리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에서요. 골치 아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삶의 위기가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노래와 찬양이 가능한가, 하는 거죠. 가능합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은 제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신앙경험일 거예요. 그러한 경험이 있지 않으면 말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냐, 안 된다. 힘든데 어떻게 거기서 기쁨과 찬양이 나오냐,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한 마디 이론적으로 설명한다면 이와 같습니다. 삶의 실체를 뚫어 보는 것 하고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인식 혹은 경험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찬양의 삶을 살 수 있어요. 삶의 실체를 뚫어 본다는 게 뭔지를 설명해야 되는데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우리의 기쁨만이 아니라 슬픔도 다 지나갑니다. 다 잠정적인 거예요. 기쁜 것만 붙들고 살고 싶죠? 그렇게 안 된다고 하는 것 아시죠? 그리고 고통 가운데서 이건 죽는다 이렇게 생각하다가도 그것도 지나간다는 것도 아시죠? 큰 질병을 안고 있거나 사업이 파산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이거든요? 과정이기 때문에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 차원 아닙니다. 힘들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적인 촉수를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맞추면 그게 이제 가능한 거죠. 이건 힘든 일을 억지로 힘들지 않다, 이렇게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실체예요.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어떤 것을요, 삶의 실체를 뚫어보는 것 하고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건 많이 들은 얘기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인식하고 또 경험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삶은 내거다, 어떻게 살아도 내가 확장시켜야 된다, 그게 가능합니다. 성서는 근본적으로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제 매일 묵상에 자살에 대해서 잠깐 썼습니다만 그건 굉장히 복잡한 개인의 심리학적이고 또 사회학적인 문제라서 한 두 마디로 끊을 수 없는데, 그래도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기초만 이야기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대한 거부라고 하는 거였어요. 거기 쓰면서 그런 얘길 한 겁니다. 짧은 부분은 오해가 될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구요. 핵심적으로 그겁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 모든 것이 귀하고 선하다는 얘기예요. 그걸 전제하고 살아야 합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다 선한 거예요. 더 궁극적으로 얘기하면 악한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거든요. 생명은 선한 거예요. 그것을 어떤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것은 옳은 게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우리의 존재전체가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알게 된다면 고통스러운 사건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 기준으로 못살겠다, 힘들다 이게 문제지 하나님의 차원에서 우리가 그 분에게 온전히 속했다고 하는 것을 말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느낀다면 우리가 뭐, 정말 초라하게 살든지, 살아가는 문제가 우리의 경제적인 문제나, 신체적인 문제나 질병이나, 이런 것들로 정말 고단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하고요, 성서가 누누이 그걸 얘기하고 있고요. 그리고 아주 멋진 그런 삶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도 똑같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그렇게 잘 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풍요롭다, 그런 생각이 정확합니다.

 

찬송의 내용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 정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해요. 1부터 5절까지만 따로 설명하더라도 시간이 많이 필요한데요, 우리가 정해진 시간이 있기 때문에 다 전체적으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오랫동안 수 백 년 동안 이렇게 역사적으로 검증되고 신앙고백 되고 한 것들이 엑기스로 압축 되서 성경말씀으로 된 거거든요. 이 안으로 파고들어 갈 수만 있다면 놀라운 영적인 세계가 거기 펼쳐질 겁니다. 5절에 찬송할 이유, 혹은 내용 그런 것들이 있는데요, 하늘과 온 땅에 하나님이 높이 들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찬양이죠, 사실은요,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것은 핵심적으로 그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는 거요.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림을 받게 하는 겁니다.

 

이게 하늘로 들림을 받는다 이런 것들이 오해를 받을 수 있어요. 공간적인 의미로만 생각해서 저 하늘, 우주 이런 것을 생각하면 좀 우습고요. 이렇게 또 어떤 쪽에서는 아, 이것은 가부장적이다, 하나님만 높이고 인간은 낮아지냐, 뭐, 그렇게 오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서를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이 혹은 그의 이름이 하늘과 온 땅에 높이 들림을 받는 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입니다. 공간적인 차원에서 높이가 아니라 오히려 깊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바로 생명의 심층입니다. 그게 드러난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조금 더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혹은 인문학적인 그러한 방식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높이 들림에 대한 찬송은 하나님이 주인인 생명이 도구로 다뤄지지 않기를 바라는 신앙고백인 거예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손길로 피조되었다고 하는 건 그 생명들이 학대받지 않고 파괴되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찬송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이렇게 노래를 부른 이유는 다 아시겠지요? 세상에서 생명이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림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런 것이 잘 되고 있으면 성서기자들이 말 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우상을 섬기는 일들이 반복해서 되기 때문에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겁니다. 지금 우상에 대한 이야기도 제가 드렸고요. 이 생명이 파괴되는 세상 속에서 생명이 파괴되지 않기를 바라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들림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이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이런 쪽으로 좀 정리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면 안 되요. 말이 정확한가요?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아닐 텐데 이게 잘 안되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라는 건가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하기 싫은데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게 아니냐 그런 겁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 것,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에겐 그게 딜레마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상을 섬기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게 많지요. 자식도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물질도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그렇게 나가게 되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는 명령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욕망과 그것을 다스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사이에서 힘들지만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야 되겠다,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일들이거든요? 당장은 호기심이 가는데 결국 그것이 자기를 파기하는 겁니다. 예, 그리고 오늘의 삶에서, 오늘 구절도 연관되는 건데요? 결국 생명이 파괴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들림을 받아야 된다고 하는 찬양대로 사는 것이 뭐예요,

 

우리를 곤고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걸까요? 우리를 생명의 차원에서 풍요롭게 만드는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예,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하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머무르지 마시고요, 실질적으로 생명이 풍요로워진다고 하는 사태가 뭔지를 조금 예민하게 그리고 또 실질적으로 여러분들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6절에서 13절은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고백이고 동시에 구원에 대한 간구입니다. 이것이 시편 60편 5절에서 12절에 그대로 반복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구원해달라고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 하나님이 구원자 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한 논리지요, 생명의 주인, 세상의 주인에게 우리가 구원을 간구하는 거지, 피조물에게 구원을 간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7절, 9절에서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인 이 세상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여기 보면 이방도 다 포함되고 있어요. 7절에 나와 있는 것은 이스라엘지역, 가나안 땅이구요, 8절도 그렇구요, 9절에 보면 이건 이방인 지역입니다.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이걸 은유법이라고 하나요? 이런 것들요?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내 소유라고 하는 뜻이죠, 목욕통에 다른 사람이 못 들어가잖아요, 에돔도 이방입니다. 에돔에는 내 신발을 벗어 던질 것이며 블레셋에서 내가 외치리라, 이게 다 근동에 있었던 이방지역입니다. 쭉 그런 이야기들이예요. 참고적으로 8절에 보면 여긴 가나안 12지파들인데요,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투구요, 투구는 잘 아는 거고요, 유다는 나의 규라고 했습니다. 규는 지팡이라고 하는 뜻이죠, 아마 옛날 성경은 홀리라고 나왔을지도 모르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전반적으로 굉장히 가까이 사용하고 있는 일상도구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을 문학적으로 묘사한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그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구약이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는 보편적으로 모든 세계가 여기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 신앙은 두 가지의 생각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또 상응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배타적이죠, 이방사람들은 완전히 저주받은 민족들이예요. 그런데, 창조의 차원,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편적이예요. 특수성과 보편성, 이스라엘 사람들의 특수성, 이스라엘 사람들만 구원받은 자다,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는 것하고,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다라고 하는 보편성, 이런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런 신앙들이 서로 각축을 벌였을 거예요. 이스라엘 신앙은 하나의 색깔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신앙의 관점들이 서로 다투었어요.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국에도 좀 진보적인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고, 좀 보수적이기도 하고, 좀 중도적이기도 하고,등등 여러 가지 색깔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구체적인 문제에서 서로 입장이 다르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런 것처럼 사실은 이스라엘에도 신앙이 다양한 형태로 자랐습니다. 이방 민족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하는 보편적인 입장이기도 하고, 우리들만 안다고 하는 그러한 배타적인 입장도 있고 말이지요. 그리고 선지자의 전통들, 예언자의 전통이 있었고, 또 제사장의 전통들도 있고요.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전통들이, 뭐라고 할까요? 각양각색으로 여러 가지 형태로 오랜 역사를 통해서 각축을 벌이면서 천천히 자리를 잡게 됬습니다. 그 중에서 서로 충돌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신앙으로 나가기도 하고 또 의미 없는 것은 없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스라엘 신앙이 발전하게 됬습니다. 그런 것을 오늘 우리가 이 구절에서 이방세계까지 다 똑같이 차이가 없잖아요,

 

오늘 여기 표현에 보면요, 내 목욕통이다, 신발을 벗어던진다 앞에서는 규다, 하면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지역이나 모두 다 하나님의 세계다, 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그냥 하는 게 아니예요.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 당연한 논리입니다.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걸 증명하려고 오랫동안 노력을 한 거죠, 이러한 신앙이 늘 이스라엘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려지진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습니다. 심지어 바벨론 포로 그 직전쯤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바알 신상이 세워지기까지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면 이상하죠? 도대체 참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성전 안에 바알 아세라 신상이 세워질 수 있느냐 그러한 질문이 가능한데요? 가능합니다. 이스라엘 신앙이 이렇게 순수하게 지켜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 순수하게 하나님의 신앙으로 나가려고 하는 세력하고 일종의 혼합주의,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고 해요. 바알과 하나님의 신앙을 적당하게 섞어서 신앙생활 하는 거, 이게 또 매력적인 거거든요? 이게 늘 각축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주로 하나님만 섬기자고 하는 세력이 좀 약했을걸요? 전체적으로 보면요, 어쨌든 하나님만이 구원자라고 하는 사실, 이런 것이 이스라엘에게 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려지질 않았습니다. 이게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볼 필요는 없어요. 사람은 삶이 하도 고단하면 다른 것에 한 눈을 팔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쉽지 않은 거예요. 목회적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여기서 설교 공부했는데, 젊은 목사님들 중심으로 오셔서 같이 얘기를 했습니다마는 아무리 의식 있는 목사라고 하더라도 이 구조자체가 이게 잘 받쳐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한 눈을 팔고 어떤 그 방법론, 교회성장을 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어떤 것이라도 이용하는,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역사가 너무 고단해서 그들은 바알의 유혹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언자 중심으로, 예언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참된 예언자들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원이야말로 그거야말로 참되다고 하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요, 이걸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구원이다, 이걸 예언자들이 선포하면 백성들이 아멘하고 받아 드리겠습니까, 안 받습니다. 지금 먹고 살기 힘든데, 그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의 구원이고 뭐고 생각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예언자들이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아무리 하더라도 그걸 받아 드리기 힘들었습니다. 이거예요. 그래서 예언자들에겐 갈등이 있는 거죠, 백성들은 일단 먹고 살아야 되고, 당연한 얘기구요. 그리고 가능한대로 좀 더 풍족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예요. 예언자들 설교에도 그런 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역사에는 아주 힘든 일들이 더 많았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먹기 살기 힘들고 고단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다른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청중들이 인식하도록 영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힘든 거예요.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악순환, 시행착오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희들에게 먹을 것, 입을 것 다 주고, 이른 비, 늦은 비 그런 약속을 하더라도 실지적으로는 그렇게 안 되는 거거든요, 결국 그러한 시행착오 가운데서 근본이 살아 있는데요? 구약성경의 후반부로 오게 되면 결국 그들의 구원관이 묵시문학적으로 바뀝니다.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설교할 때도 한 두 번 얘기 했죠?

 

이것은 이른 비,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풍족하게 잘 살게 된다고 하는 그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이 세상살이의 살림살이 이런 것들이 다 끝장나고 하나님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세계, 에온이라고 하거든요? 그것을 초월적인 방식으로 임하게 하신다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결국은 그 묵시문학적인 구원을 얘기하게 된 거구요, 그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쪽으로 나오게 됬습니다. 좀 복잡한 얘기인데 대충 그렇게만 이해를 하십시오. 하나님만이 참된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에 집중했는데요, 이것은 곧 사람의 구원은 헛된 것이라고 하는 말에 대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2절에 보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어요. 사람의 구원은 헛된 것임이니라 사람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뭔지 아시겠지요? 왕을 중심으로 해서 군사력을 비치하고 그리고 우리가 세계 GNP 몇이 되고, 예를 들면 그런 숫자를 통해서 수출 많이 하고, 그런 방식을 통해서 우리가 살게 좋게 된다고 하는 이런 방식이 사람의 구원이거든요?

 

예, 그것이 헛된 것이다. 그것이 계속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구요. 대체적으로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이예요. 1절에서 5절하고 6절에서 13절, 이 두 대목이 앞의 다른 시편에 있었던 것이 인용되어서 합쳐졌다고 말씀 드렸어요. 1절에서 5절은 하나님에 대한 찬송이었습니다. 6절에서 13절은 구원에 대한 간구였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답이 나오는 거지요. 궁극의 높이에 계신 분만이 영광을 받아야 될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궁극의 높이, 이건 생명의 심층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심층이라고 하는 말도 이해하실 거라고 보고요, 생명의 심층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만이 12절에 나온 대로 사람의 헛된 구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 이런 이야기들이 그냥 말에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실질을 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 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던 어느 집단, 혹은 개인이 우리들에게 남겨 준 시편 108편 말씀을 같이 나눴습니다. 바람처럼 우리가 어떤 흔적도 없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삽니다. 열심히 무엇을 소유하고 성취해 보려고 애도 씁니다. 하나님, 사람의 구원이 헛되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에 우리 생명을 우리가 완성할 수 없음을 또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 하나님만이 참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풍요롭게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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