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9편 강해- 저주의 악순환을 넘어서

 

오늘 함께 읽고 공부할 말씀은 시편 109편입니다. 우리가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고 여러분들도 같이 읽고 해서 31절까지 있으니까 마지막 절은 같이 읽으면 될 것 같군요.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읍시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2.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3.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4.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5.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11.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12.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13.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14.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15.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16.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17.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18.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19.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20.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21.그러나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를 선대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나를 건지소서

22.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23.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

24.금식하므로 내 무릎이 흔들리고 내 육체는 수척하오며

25.나는 또 그들의 비방 거리라 그들이 나를 보면 머리를 흔드나이다

26.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구원하소서

27.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28.그들은 내게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그들은 일어날 때에 수치를 당할지라도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이다

29.나의 대적들이 욕을 옷 입듯 하게 하시며 자기 수치를 겉옷 같이 입게 하소서

30.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31.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아멘! 예, 31절까지 우리가 같이 읽었습니다. 이 109편을 우리가 같이 읽으면서 뭐,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처럼 지난 갈 수 있는데요, 조금 생각하면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입에 담기 힘든 저주가 나온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좀 껄끄럽습니다. 그 내용을 이따가 우리가 살펴 볼 거예요. 그리고 그 내용을 자세하게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정형화된 저주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누구를 저주하기 위해서 쏟아 놓는 저주문 이렇게 형식이 갖추어진 거거든요? 그런 내용을 우리가 일일이 살필 건 없어요. 대단히 노골적입니다. 예, 이러한 저주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모양이 좋아 보이진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오히려 아무리 원수라고 하더라도 사랑하라고 하구요, 원수사랑, 아주 극단적인 표현인데요,

 

그게 사람에게는 사실은 가능하지는 않은 거지만 또 그게 어떻게 가능 하냐, 그걸 우리가 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쨌든 원수사랑, 구약이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원수 사랑이고, 또 악이 있다 하더라도 악으로 대하지 않고 선으로 이기라고 가르치고 있고요, 스테판의 순교 장면에 보면 사도행전 7장 60절인데,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원수, 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람들, 자기에게 저주를 쏟아 부은 사람들에게 똑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 신약의 가르침이예요. 이런 신약의 가르침과 구약의 가르침이 서로 충돌되는 것 같은데, 그래서 신약에 근거해서 이 구약의 진술을 잘못했다, 이랬다 저랬다 말하면 조금 곤란합니다. 이게 다 나름대로 고유한 그것이 진술되는 그 자리가 있거든요, 상황이 있거든요? 삶의 자리라고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현대에도 일어날 만한 일들이예요. 독재자의 폭력 앞에서 강력하게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기를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고 그랬다, 참아라 참아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거거든요? 그런 방식으로 구절을 떼어다가 다른 구절을 판단하는 게 이게 좀 경솔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오늘 여기 시편 109편 기자가 왜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리면서요, 이렇게 저주를 쏟아 붓고 있는가에 대한 형편, 이런 것쯤 알아야 되는 거지요. 그 시편기자의 형편을 좀 안 다음에 그것으로 좀 부족한 게 있다면 다른 걸로 보충할 수는 있습니다. 1절에서 5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 시편기자의 분노의 표시입니다. 이 시편기자의 쏟아내는 말들은 그가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있었느냐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똑 같은 욕이나 저주나 분노라고 하더라도요,

 

정말 자기 스트레스 해소라든지, 아니면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 나오는 그런 거 하고, 아주 억울한 그 고통 가운데 있어서 이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러한 한탄, 이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이 시편기자는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죠, 그가 아주 무고를 당하고 있고요, 거짓증언을 당하고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상태에 있는 거예요. 유대율법에 의하면 증인 세 사람이 공동으로 증언하기만 하면 법적효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 시편기자는 그렇게 거짓증언 때문에 억울한 일을 정말 많이 당했던 거 같아요. 그가 그런 얘길 합니다. 나는 사랑했지만 도리어 사람들은 나를 대적했다, 그리고 나는 선을 행했는데, 그들이 악을 행했다. 악으로 선을 갚았다. 이런 표현들입니다.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자기합리화를 하는 건 아닙니다. 이게 구분하기가 사실 쉽지 않습니다.

 

서로 둘이 싸우고 있는데 이 쪽 가서 말 들어보면 이 사람이 옳은 말 같고 저 쪽 가서 들어보면 저 쪽 말이 옳은 것 같잖아요? 그래서 이런 말들만 보고 판단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예, 그런데, 이게 자기변명으로 지금 이런 말 하는 게 아닌 거죠, 그건 자기영혼에서 아주 정직한 사람이 쏟아내는, 무고를 당하는 상황에서의 절규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호소, 그런 탄원, 그런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이건 당연한 거지요. 그걸 전제하고요, 이렇게 하나님에게 탄원하고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은 오히려 좋은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를 자기가 갚는 게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하는 기다림입니다. 비열한 방식으로 내가 당하는 만큼 내가 보복하겠다, 그런 차원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에게 온전히 억울한 사정을 아룀으로써 인간적으로 행하게 될 또 하나의 폭력을, 또 하나의 무고한 것들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영성이라고 하는 점에서 볼 때 다음의 사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요, 자기중심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전달이 되겠지요? 그게 굉장히 뭐라고 할까요? 미묘한 차이가 있으면서도 기독교 성서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성서의 영성이라고 하는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중심을 털어 놓는다고 하는 것은 그걸 상투적인 말로는 듣지 마시고요, 그냥 기도를 많이 한다, 그런 차원이 아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상태를 이야기 하거든요, 그런데 기도할 때도 그렇게 잘 못합니다. 자기 것은 자기가 딱 붙들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형식적으로 기도하는 게 많이 있거든요? 그렇게 해 가지고는 자기중심이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영혼의 기도가 아니예요.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하는 그런 부르짖음에 불과한 거지요.

 

자기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는다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나의 의지, 나의 인격, 나의 모든 계획들,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건 참된 기도고요, 그 때 정말 진정한 호소가 되는 거예요. 이게 다음을 가르킨다고 하는 것을 아시지요? 사람에게는 자기중심을 털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늘 가리게 되요. 결혼한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친구사이도 그렇구요. 말하다 보면 복선이 깔리게 되거든요? 이게 내가 솔직하다 솔직하다 하면서도 역시 뭔가가 가리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정말 불가능한데요? 그게 된다면 좋겠지만 사실은 늘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가능한 거지요. 실질적으로 가능합니다. 그게 다시 반복하는 얘기지만 그게 참된 기도예요. 그런 기도가 가능한 영적인 차원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제 사람에게 받는 배신감, 자기계획이 어긋난 것들, 그런 것들이 다 사실은 극복되는 거지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 109편에 저주의 기도가 묶인 이유도 결국은 저주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관계가 됨으로써 더 이상 저주의 방식이 아닌, 원수 갚는 방식이 아닌, 비열하고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그런 영적인 차원에서 삶의 문제들, 고독, 분노 이런 것들이 극복된다고 하는 거죠, 거기에 시편의 영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른이 되는 거지요. 말하자면요,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어른이 돼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의 모든 문제들이 다 수용되는 거지요. 그런 상태가 되면 내가 계획했던 것들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나 이루어지지 않나 그것은 점점 작아지게 될 겁니다. 예, 1절에서 5절,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 앞에 자기 처한 상태를 놓고 탄원을 드리는데 그 속에 사실은 불길 같은 분노 이런 것들이 숨어 있긴 합니다. 그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이구요. 그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밀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6절에서 19절은 실제적인 저주의 내용입니다. 6절에서 19절입니다. 일일이 제가 설명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이것은 그 당시에 정형화된 저주 주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9,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8.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절,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절.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정말 비열한 저주예요. 이 저주는 시편기자가 직접 한 게 아니라 이 시편기자에게 적대자들에게 쏟아 냈던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물론 이 시편 안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시편기자가 기도한 거지요. 그러나 그 내용자체는 억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시편기자에게 어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쏟아 낸 그런 것들입니다. 시편기자는 여기서 이 저주의 내용을 조금 장황할 정도로 똑 같이 반복을 하면서 자기에게 내린 저주가 어느 정도 심각했는지를 확인하고 있는 거지요.

 

정말 저주잖아요, 모든 것들이 끊기는 상태, 후손들이 다 풍지박산 되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이런 저주를 내리며 사네요. 참 이상하지요? 다른 사람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욕망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지요. 늘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어떤 계기가 되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인간죄의 어떤 보편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편성, 인간에게 있는 죄의 경향은 어떤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보편적인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교육이나 자기 절제심, 교양 그런 것으로 조금 가려지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하지만 강도의 차이가 있지 사람들에게는 거의 다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 강의안에 소설책인데 잠깐 소개했는데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거기서 낮에는 박사로 점잖게 활동하던 사람이 밤에는 거의 야수처럼 변하는 소설이예요. 인간에게 그런 양면성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와 악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가 전쟁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감추려고 하더라도 잘 되지 않습니다. 예, 그래서 아마 저주라고 하는 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이 내려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6절에서 19절까지가 거기까지가 저주의 내용입니다. 다시 우리 입에 담고 싶지도 않지요. 그럼 20절에서 31절입니다. 이게 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데요, 저도 성서주석을 좀 참고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는 겁니다. 그냥 읽다보면 왜 이런 이야기가 있는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20절에 보면, 19절까지 저주의 내용을 다 끝내고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거예요. 20절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20.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예, 이것만 보면, 자기가 내린 저주가 자기의 적대자들에게 임한다, 하나님이 그 원수 갚아준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 저주의 악순환을 넘어서려고 하는 시편기자의 영적통찰이라고 해요. 그게 여러분들에게 느껴지시나요? 우리가 읽으면서 그게 들어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서주석학자들의 설명을 조금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전달한 겁니다. 그런 설명을 놓고 보니까 그렇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자신들의 저주가 그대로 전달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드라마, 사극에서 보면 궁중에서 저주가 많이 벌어지잖아요? 바늘로 찌른다든가, 이런 저런 잘 못된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 저주를 하는데요, 그렇게 저주를 내리면 그대로 전달된다고 믿었습니다. 시편기자는 그게 아닌 거지요. 이런 저주를 끊을 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재앙이 내리는 것도 그 사람이 저주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주했다고 하는 사실,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27절 보면 이렇습니다. 27.이것이 주의 손이 하신 일인 줄을 그들이 알게 하소서 주 여호와께서 이를 행하셨나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사실이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일을 행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이상 저주해도 소용없는 거구나, 저주로 이런 원수 갚는 게 아니구나, 그걸 알게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더 이상 이제 인간들 사이에 저주하는 일이 없게 되겠지요. 예, 그러한 영적인 갈등, 삶의 분노, 그런 과정에서 이 109편 시편기자는 우리가 쉽게 따라가기 힘든 어떤 문학적인 서술방식을 통해서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러한 저주의 악순환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똑같이 저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도 이제 확신하는 것이고 상대방도 그것을 알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결국 그래서 시편기자가 어떤 상태로 나갑니까?

 

30절에 보면요. 그렇잖아요? 앞에서는 계속해서 원수, 욕먹는다, 수치다, 수치로 옷 입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가 30절에 보면, 감사와 찬송을 드리겠다, 얘기합니다. 30.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원수가 재앙을 받는 것을 보고 감사와 찬송을 한다는 것이 아니지요. 31절에, 겉으로 보면 이제 저주 이런 것들이지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그것을 오히려 끊고 넘어서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는, 그게 근거가 되는 거예요. 이해하시겠지요? 다시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31절이예요.31.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걸 이 시편기자가 정확하게 뚫어본 거지요. 뚫어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궁핍한 자의 오른 쪽에 서 있는지 아닌지 실제 눈에 보이는 겁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인생살이를 살펴본다면 궁핍한 자는 가련하고 힘들어요. 그래서 궁핍한 걸 면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건 꼭 물질적인 궁핍한 것만 아니라 외로움 등. 모든 그러한 것들이 포함될 건데요, 그런 삶들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다 그걸 좀 피해보려고 노력을 하는데요, 여기 시편기자는 다른 관점으로 그걸 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뭘까요? 31절만 가지고 여러분들이 묵상을 한번 해 보세요. 집에 가서라도요. 31절이 앞의 부분하고 딱 나눠지는 건 아닙니다. 앞의 구절들을 전제하면서 31절만 가지고 한 A4용지에 좀 써 보십시오. 그게 훈련이거든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거지요. 그게 앞의 감사와 찬송하고도 연관이 되는 건데요? 어떻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거하고 다른 영적통찰이 있는가 하는 거죠.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궁핍한 자는 힘든 거예요. 외로운 사람들은 그냥 외로울 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이 궁핍한 자의 오른쪽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런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그 우편은 거의 동등한 어떤 차원을 이야기하는데요, 옛날 히브리 사람들에게 오른쪽은 굉장히 중요했습니다. 오른쪽에 서서 오히려 구원하신다. 누구에게서 구원하시냐하면 그의 영혼을 심판하시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심이로다. 그러니까 그 심판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을 심판 못하거든요? 그냥 하려고 하는 거지요. 저주를 내리고 그리고 거짓 증언하고 아주 무고하고 그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저주에 빠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들에게서 구원하신다,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겁니다. 어떨까요? 여러분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대답은 앞에 쭉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핵심이 무얼까요? 사람에게 임하는 여러 가지 불행이나 이런 것들이 저주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우리의 삶의 이해를 높이게 된다면 우리는 영혼이 병들지 않는 거지요.

 

이해가 되시겠지요? 나에게 내린 큰 난치병이라든지, 뭐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라든지 그런 것도 저 사람이 나에게 저주를 내려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다, 정말 우리가 실제적으로 믿고 받아 드린다면 그러면 우리 영혼은 병들지 않는 거예요. 왜 그런지 아시지요? 하나님이 하신 일은 다 선하기 때문이예요. 우리가 지금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냥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한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손상당합니다. 제가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쪽으로 제가 이해를 했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억울한 일들마저 하나님의 손길이다, 그런 차원으로 우리의 영적인 수준이 높아진다면 그 어떤 대적 앞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지요.

 

여기서 조금 오해하기 쉬운 부분만 오늘 지적하고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숙명주의적으로 그냥 받아 드려서 다 하나님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떨어지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가 투쟁할 것은 투쟁하고 또 탄원할 것은 탄원하고 또 열심히 풀어야 될 것은 풀어야 되는 거지요. 그러나 어떤 사건이나 일 앞에서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게 누구의 저주, 아니면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러한 피해의식, 이런대로 떨어지지는 말자, 그건 우리 영혼마저도 상처를 받는 일인 겁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다 하나님의 손에서 되는 것으로 우리가 받아 드릴 수 있다면 우리 삶의 어떤 문제들도 우리 영혼을 상처내지 못합니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09편 말씀을 같이 나눴습니다. 서로 거짓 증거하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무고하면서 살아가는 삶 속에 어떻게 우리가 이 모든 인간적인 악한 질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손길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 비록 우리들에게 원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임을 저희들이 깊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인줄 믿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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