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0편 강해-다윗과 예수

 

시편 110편입니다 1절부터 7절까지 있네요. 오랜만에 짧은 구절의 시편을 우리가 보게 되었습니다. 한 목소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의 시〛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아멘!! 조금 무난한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쭉 읽었는데 한 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좋은 말씀이구나,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그렇게도 그냥 읽을 수 있습니다만, 조금 생각을 하면 이게 무슨 말일까, 의문이 들을 만한 구절들이 있어요.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이름도 나오고요. 시체로 가득하게 한다, 그런 얘기도 하고요, 7절은 조금 전반적으로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좀 많이 흐트러집니다. 그 자체도 좀 이해하기는 힘들어요.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참 그렇습니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공부 하고 이렇게 저렇게 연구를 한다고 하더라도 다 아는 것은 아니고요, 모르는 것은 남겨 둬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최소한도 2300년~2500년 전 더 길게 잡으면 3000년 전까지 올라가는 이 시편들을 우리가 다 세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알겠습니까, 다 상황이 다르잖아요?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들을 우리가 기도문으로 썼다고 할 때 앞으로 3000년 후에 살게 될 우리 후손들이 그걸 알 수 있겠어요? 그래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공부해야 되겠습니다. 110편 표제가 이렇게 달려 있지요? 〚다윗의 시〛입니다. 표제가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요. 바로 옆의 111편은 표제가 없어요. 그 뒤로도 쭉 없고요. 앞에는 또 다윗의 시 이런 게 나오고, 그 앞에는 나오다 안 나오다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시편이 거의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고, 그런 표제가 제일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 달린 건 아니구요. 다윗의 시라는 표제가 달려있다고 해서 꼭 다윗이 쓴 것은 아닙니다. 다윗전승에 속한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어요. 다윗이 그것들을 직접 지었을 수도 있고요. 구약성경에 보면 다윗이 목동으로 살면서 악기도 연주했다고 되어 있어요. 예술적인 감각이 있었던 왕인 것 같습니다. 그가 이런 기도문들, 노래가사들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대에 다른 사람들이 쓴 것을 다윗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방식으로 글을 많이 썼거든요? 성경에도 그런 것들이 좀 있습니다. 어쨌든 이 110편은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내용이 그것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혹은 다윗왕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이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은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 중에서 가장 추앙을 받는 사람이지요? 단순히 추앙 받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조의 어떤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혹은 이스라엘 똑 같은 말 이예요. 남북이 갈라졌을 때에는 유대와 이스라엘이 구분되는 거지만, 통칭으로는 이스라엘, 유대 똑 같은 나라입니다. 북이스라엘, 남 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이 다윗은, 다윗 왕조전통이 있는 왕이죠, 최초의 왕, 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최초 왕이 있었다는 것은 아시지요? 사울 이예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이어받아야 되요. 왕조가 성립됬다고 하는 것은 세습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요나단과 이 다윗은 친구였어요. 막역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차여차해서 결국 요나단이 세습하지 못하고 왕위가 다윗으로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예, 거기 어떤 사정이 있었을까, 그건 뭐 역사적으로 더 더듬어 봐야 되는데요, 어쨌든 이 사울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졌다, 그게 성서기자들의 평가고요 또 다른 역사가가 본다면 이 왕위쟁탈투쟁에서 결국 사울이 졌다, 그렇게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다윗은 아주 뛰어난 사람으로 성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이유를 제가 그 강의안에 썼습니다마는 첫 번째는 바로 말씀 드린 대로예요. 그에 의해서 명실상부하게 왕조국가가 세워졌습니다. 둘째는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가나안을 정복했는데, 예루살렘이 가나안 땅에 있잖아요, 사사들이 가나안을 다스렸지요? 12지파가 나눠가지고요,

 

정확하게 거기서 레위지파는 빠지고, 모세의 두 아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어쨌든 12개로 나눠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는데, 사울 시대 때까지는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이 그대로 살았습니다. 사실 엄격하게 얘기하면 다윗시대나 그 후대에도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통치권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다른 거지요. 사울 시대에도 여전히 예루살렘의 통치권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토종 원주민에게 있었어요. 그 원주민족을 가리켜서 뭐라고 하시는지 혹시 아시는지요? 여부스 족 이라고 합니다. 여부스 족, 마지막까지 가나안에서 통치권을 행사한 하나의 족속입니다. 씨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천연요새라고 하거든요? 왠만 해서 함락될 수 없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을 다윗이 함락시켜서 여부스 족 으로부터 통치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이름을 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지만요, 수 많은 왕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인간성이 좋다, 그건 아니예요. 그리고 인격적이다 라든지 그런 차원에서 좋다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좋다고 하는 겁니다. 성서가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할 때 그게 독특한 시각이거든요? 성서기자들의 독특한 시각, 그건 성서기자들 한 두 사람의 시각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정신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본 거예요. 믿음만 봤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치를 엉망으로 했는데, 하나님 잘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런 차원은 아니었습니다. 이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요, 믿음이 좋은 왕이 좋은 정치를 하는 거예요. 성서기자들의 평가에 의하면요, 이게 다윗 왕 에게는 거의 일치했습니다. 모든 왕에게 다 일치한 건 아닌데 그런 방향으로 본 거예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왕이 정치적으로도 잘하는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그런 평가에서 볼 때 이 다윗은 가장 좋은 왕이었지요. 그렇게 이름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업적이라고 하는 면에서는 아주 탁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제 정리 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도 다윗의 이름으로 거의 전승되는 거구요. 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와야만 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외에 다른 정통성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시편 110편은 그러한 것을 배경으로 한 하나의 왕권을 찬양하는 제의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문 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윗 왕을 높이는 겁니다. 다윗왕조에 대한 강조예요. 그래서 110편에 의하면 다윗이 거의 메시아나 마찬가집니다. 주(主)예요. 주 모든 세계에 평화를 이루고 권능을 보호해 주는 왕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그런데 110편이 신약성서에서는 다르게 사용되요. 그건 내용을 보면서 좀 나겠습니다. 제가 기록을 안했나요? 빠뜨렸나 모르겠네요. 예수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한 부분이 있거든요? 제가 그것을 빠뜨렸나요? 제가 마태복음을 잠깐 찾아보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론에서 나온 얘기에 나오는데, 강의를 준비하면서는 기록을 했었는데, 다시 정리를 하다가 빼 먹은 거 같아요. 머리가 좋으면 몇 장 몇 절 탁 나올 텐데, 참 그거 안 되네요. 그래도 찾아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1절 이하에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물었어요.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고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다윗이 한 이야기를 너희들이 착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합니다. 마태복음 22장 44절에 나와요.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 원수를 내 발 앞에 둘 때 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그러니까 이 구절을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다고 그렇게 해석을 합니다. 주라고 얘기했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겠냐,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겠냐, 그 보다 우선적이다, 더 선제적이다, 역사를 넘어서 먼저 있었다, 그런 뜻으로요. 그렇게 인용되어 있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조금 더 문자적으로, 아니면 더 본문에 가깝게 해석을 한다면 오늘 여기 110편 1절에서 얘기하는 주는, 내주 할 때 주는, 다윗을 얘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원수들로 내 발판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윗이, 혹은 다윗왕조가 악을 완전히 다스린다, 그런 뜻이죠. 유대인들에게 이 다윗은 거의 메시아와 같을 정도로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앞에서 간단하게 설명 드렸듯이 다윗은 사사중심으로 운영되든 유대민족을 주변에, 다른 왕정정치가 시작되는 거잖아요? 사울이 최초의 왕이긴 하지만 사울은 왕정정치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여전히 그는 사사의 역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다윗이 이스라엘을 주변에 있는 여러 왕정국가처럼 토대에 올려놓은 거지요. 사사시대하고 왕정시대하고 차이가 뭔지 아시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사사시대는 상비군이 없어요. 그냥 부족대로 살다가 국가가 어떤 재난에 처했을 때 군대를 모집해서 징병해서 그걸로 전쟁을 하는 거죠. 그 대표가 사사예요. 사사, 또는 판관이라고도 하고요. 그래서 이 사사나 판관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거나 양을 키우거나 일반사람으로 삽니다. 그러다 특별한 경우에 그가 대표적으로 나와서 싸우고 거의 전쟁에서만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어떤 국가의 체계는 없는 거지요. 그냥 다 부족대로, 부족국가라고 할 수 있겠군요.

 

국가라기보다도 부족사회, 인류의 발전이 그렇잖아요? 처음에 씨족이 있었고, 그 다음에 부족이 있었고, 그 다음에 왕정시대가 되잖아요? 이 부족시대를 가리켜서 사사시대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씨족사회는 뭘까요? 그건 성경으로 보자면 족장들 시대라고 할 수 있지요. 아브라함, 야곱 이런 사람들입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는 상비군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가서 왕을 구한 에피소드 아시잖아요? 그들이 볼 때 부러운거죠. 주변에 그러한 군인들이 있는 나라가 있는 거 보니까 대단한 것 같고 왕도 있고, 든든해 뵈니까 왕을 세워달라는 그러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쨌든 이 다윗은 약소, 소수, 부족들로 이루어졌던 이스라엘에게 명실상부하게 주변의 왕정국가와 마찬가지로 탄탄한 나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는 이 다윗이 절대적인 군주로 이해가 되었구요.

 

그래서 오늘 여기 시편 같은 데서는 다윗을 거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오른편에 있는 자처럼 이렇게 평가하는 겁니다. 물론 이건 과장된 거지요. 시는 과장됩니다. 문학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과장 되요. 그리고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이건 의식문이예요. 의식문, 그러니까 어떤 사실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왕권을 더 빛내기 위한 꾸미는 성질이 많은 찬양입니다. 다윗을 거의 그리스도와 맞먹는 정도의 권위로 표현하려고 했던 거지요. 실제로 다윗시대에 문제가 없었겠습니까, 그건 아닌 거지요. 일단 그렇게 노래를 하는 것 뿐 이구요, 이제 역사가 흐르면서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시대를 황금기라고 하는데요, 그게 점점 허물어지고 힘들어지고, 사실 다윗에도 늘 완벽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은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많이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예, 일종의 메시아니즘이라고 해요. 메시아주의입니다.

 

그런 것들이 이스라엘에서 천천히 천천히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사람들 의식 속에 자리 잡고 그러면서 자라게 된 거예요. 처음부터 확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많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예언자, 제사장, 여러 정신적인 지도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하는 요청이 이스라엘 역사에 아주 강하게 일어났고요. 그런 것들이 이스라엘을 어떤 역사를 거치면서 강하게 되었을까요? 구약을 읽을 때 중요한 역적 사건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에 바벨론 포로, 예, 완전히 무력감 속에 빠지는 거예요. 이제는 도저히 자기들에게서는 가능성이 없는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리스도가 와야 된다고 하는 생각이 더 강렬하게 자릴 잡게 됬구요. 그것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점점 더 확장되는 거지요. 확장되면서 또 하나의 패배의식, 그런 것도 굉장히 깊었어요. 역사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색깔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여튼 뭐, 복잡한 이스라엘의 실제역사와 구원의 역사, 메시아니즘, 이런 것들이 막 연결되면서 역사가 흘러 갔구요.

 

그 결정적인 시간에 예수그리스도의 사건이 일어난 거지요. 2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이것도요, 왕권을 강조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그럴 듯 하지요? 이해가 되지요? 여호와 앞에서, 시온에서, 시온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상징적 용업니다. 시오니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히브리인들이 세계역사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이 바로 시오니즘인데요?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데, 가까이 있어요. 해발 755미터의 언덕을 가리킵니다. 사실은 별거 아니지요. 그게 유대의 정신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지팡이예요. 홀이라고도 합니다. 권능, 지팡이는 권능을 나타내지요. 모세의 지팡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런 것도 있고요. 그러한 것을 시온에서부터 여호와께서 주셨다, 얘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다윗, 이 다윗왕조가 큰 권위, 권능, 이것을 가지고 있다, 혹은 가질 거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결국 다윗, 혹은 다윗왕조는 원수들을 다스린다, 이렇게 이야기는 겁니다. 포부가 대단했죠? 조그만 나라인데요. 그 주변의 큰 나라들에 비해서는 정말 형편없는 나라였습니다. 주변에 제국들이 많았잖아요? 지중해 연안에요. 이집트는 역사도 오래되고요. 그리고 거기에는 문명이 오래 전 서부터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한 곡창지대로서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 아닙니까, 지금은 역사가 바뀌었지만, 고대국가에는 이집트가 대단했습니다. 바벨론이라든지, 메소포타미아 문명국가들, 시리아 이런 나라도 굉장했잖아요? 거기서 뭐, 겨우 가나안, 요단강 물줄기 근처 주변에 모여 살던 그들이 어떻했겠습니까, 사실은 초라한 모습인데요,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시각은 달랐습니다.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자기 왕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셨다, 자기들은 선민이다, 원수들을 다스린다,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절, 그것을 더 설명하는 거예요. 계속이요. 왕위 제의식 때, 혹은 왕 제사 때 부르는 찬송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그러니까 주의 권능의 날, 다윗의 권능의 날, 다윗이 크게 되는 날에 3.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그러니까 왕의 권위가 나타나는 어떤 축제 같은 것을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그려 보시면 됩니다. 성서 주석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라고 하는 표현은요, 군인들의 어떤 행렬을 이야기하는 거라고 그래요, 북한에서나 우리도 옛날에는 많이 했는데, 요새는 잘 안하지요? 군사시절에 많이 했던 건데, 군인들 퍼레이드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기들이 대단히 강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요. 결국 대통령이나 대표에게 충성서약 하는 그런 장면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윗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군인들, 그런 모습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게 이제 신약에서는 다윗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지요. 주의 날은 그리스도의 권능의 날이지요. 메시아 날입니다. 그렇게 구약과 신약이 이 본문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보시면 되겠습니다. 4절에도 나오는 이야기가 그런 거예요. 다윗을 높이는 이야기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다윗을 향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거구요. 그 내용이 멜기세덱과 연관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 18장 14절에 나오는 인물 이예요. 이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곡창지대, 소돔성, 소알이라고 하나요? 아브라함은 다른 쪽으로 가고요, 결국 롯이 거기서 살다가 가나안 그 쪽 지역에 여러 이방 연합군들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 갑니다. 그 소문을 듣고 이 아브라함이 자기가 집에서 훈련시킨 군인들, 사병이라고 그래요. 사병 몇 백 명이 나와요. 강의록에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서 안 썼습니다마는 성경퀴즈대회 할 때는 자주 나오는 것들인데, 군인들 데리고 가서 전쟁을 해서 다 빼앗아 옵니다.

 

그걸 보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연합군을 다 공격해서 전멸 시킬수 정도의 능력이 있었을까, 참 이해가 안 되기도 하고요. 뭔가 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나안 땅에 얼마나 되었다고, 짧은 시기잖아요? 사병을 몇 백 명씩이나 거느릴 수 있다고 해서 특이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해하려면 이해 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아버지 데라, 아내 사라, 조카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북쪽을 걸쳐서 중간 기착지에 들어갔잖아요? 거기가 어딘지 아세요?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 아버지하고 살던 지역이? 하란이라고 하는 곳이거든요? 예, 거기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아버지 데라가 죽을 때 까지 살았습니다. 그 때 거기서 재산을 많이 늘렸어요. 그 재산은 아마 거의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걸 가지고 가나안에 까지 온 거죠. 가나안에 들어 올 때 이미 거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게 장사수완이 다 좋구요.

 

그러니까 그렇게 이름이 날 수 도 있지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군인들도 많이 훈련을 시켜서 데리고 있고, 잘 기억인 나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저개발국가 이런 데서는 개인적인 사병들을 키워서 떵떵 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흡사 작은 국가의 왕처럼 지내기도 합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그런 역할을 했을 거예요. 그런 모습으로 살았을 겁니다. 이제 다 궤멸시키고 돌아오면서 이제 맞이한 사람이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왕이었습니다. 왕이기도 하고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기분이 좋은 거지요. 뭐, 전쟁도 이겼겠다, 자기 조카도 살렸겠다, 그리고 전쟁에 이기면 늘 노획하는 게 있거든요? 그것도 가져오고, 그 중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고 그래요. 이것도 십일조 이야기 할 때 근거로 가끔 사용하는 용어이기 한데요? 그렇게까지 나가면 아전인수의 해석인데 어쨌든 십일조라고 하는 말이 거기 나옵니다. 거기 멜기세덱에게 준 거거든요?

 

그 멜기세댁이 왕이면서 동시에 제사장이었어요. 종교권과 정치권, 그러니까 제사장권과 왕권 두 개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110편 기자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다윗도 그와 같다, 정치적인 권한도 갖고 종교적인 권한도 갖는 두 개를 다 갖고 있으니까 얼마나 뛰어나요, 실제로 다윗이 왕이긴 했습니다마는 그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을 빼앗고 거기서 통치권을 완전히 물려 받은 다음에 이 두 가지 권한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그게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는 제사장 임명권 같은 게 다 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거의 권한이 왕에게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정일체가 고대시대에는 많이 그랬잖아요? 그렇게 다윗을 높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5절에서 7절입니다. 같이 묶으면 되는 거예요. 크게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묶겠습니다. 이것도 이제 다윗의 왕권을 높이는 노래입니다. 높이는 데 여호와를 앞세워서 하는 거예요.

 

주의 오른편에 계신 주께서 한 쪽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어쨌든 그냥 내용을 보시지요. 그의 노하시는 날에 여호와의 분노하는 날, 여호와의 분노하는 날입니다.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다, 때가 되면 여호와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그래서 다윗을 통해서 이방 모든 민족을 깨뜨리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6절에 가면 좀 더 끔찍해요. 뭇 나라를 심판하고 시체로 가득하게 하고 여러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린다, 이건 완전히 포악한 장군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의 신처럼 묘사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을 또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구약성서가 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늘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건 특별한 경우예요. 물론 다른 데서 전쟁이 많이 나오긴 합니다만 이건 문학적인 묘사니까 이걸 너무 사실적으로 읽으시면 안됩니다. 이거 뭐 깨뜨린다, 시체로 가득하게 한다, 머리를 친다, 이런 것들은 다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큰 능력을 행하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의 세계들을 깨고 이기게 한다, 그걸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된 나라는 별로 없어요. 이스라엘이 얻어 터졌구요. 그렇게 공격적으로 살아 있을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공연히 큰소리치는 거지요. 사실 말하자면요, 실제적인 걸로 보면 어디 가서 싸워서 이기고 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그렇게 고난과 시련이 많았던 민족이라서 그런지 그 나라가 떵떵거리고 힘을 받게 되는 데에 대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예, 그게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호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 오늘 110편은 그런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약성경, 신약시대에 와서 새롭게 해석이 되는 거지요. 다윗의 왕권을 높이는 그러한 말씀 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통한 승리, 이런 것들로 해석됩니다.

 

예, 결론을 지어야 되겠네요. 유대인들은 그 시대가 여전히 그랬는데, 폭력적인 방식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메시아니즘을 생각했다면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신약시대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 메시아니즘으로 자리를 잡게 됬어요. 칼로 쓰는 사람들은 칼로 망한다는 말이 거기에 약간 연관되는 수도 있고요, 근본적으로는 이렇게 시체로 가득하게 하는 방식, 머리를 쳐서 깨뜨리는 방식이 아니라 부활의 사건, 생명사건이죠, 부활사건의 전혀 새로운 세계의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약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다윗과 예수>예요. 메시아니즘의 어떤 충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말하는 다윗과 다윗후손을 통한 메시아니즘이고 또 하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새로운 생명사건으로써의 그러한 메시아니즘입니다. 물론 우리는 후자지요. 다윗은 메시아가 될 수 없고 메시아의 조상이 될 수도 없고 그는 구약이 말하는 정도의 차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10편을 읽고 같이 공부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아 대망이 그들의 역사경험으로 나타난 시편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메시아 대망이라고 하는 귀한 신앙의 모습들을 봅니다. 그리고 배웁니다. 그들의 기대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도 여전히 평화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지배가 시급합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저희에게 하나님의 참된 위로와 평화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주님, 소수의 무리가 모여서 공부했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영적인 성장의 귀한 밑 걸음이 되도록 도와주옵소서. 각자의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될 사람들도 있고요, 주님, 또 몸이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기억하시고 각자 형편에 맞도록 주님께서 적절한 은혜와 그리고 삶의 길들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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