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1편 강해-거룩하고 지존한 이름

 

시편 111편입니다. 짧은 구절입니다. 같은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크시오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다 기리는도다

3.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4.그의 기적을 사람이 기억하게 하셨으니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

5.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

6.그가 그들에게 뭇 나라의 기업을 주사 그가 행하시는 일의 능력을 그들에게 알리셨도다

7.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9.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10.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아멘! 예, 시편을 우리가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우리가 다 느끼고 있는 거고요. 또 다른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이야기하잖습니까, 어떻습니다. 우리가 읽을 때는 하나님을 이야기 한다, 그렇게 따라갈 수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을 때가 얼마나 있을까, 하는 거예요. 사람에 따라서 그런 차이가 있는 거지요. 영성이라고 보통 우리가 이야기한다면 영성이요, 스피리춸리티(spirituality),영성, 영적인 경험, 성령과의 관계를 통해서 경험되는 고유한 신앙적인 태도를 영성이라고 한다면 영성이 깊다면, 깊은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일상에서의 매 순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맺어진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건 그럴 수 밖에 없어요. 호흡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당연히 유지해야 됩니다. 그게 당연한 거지만 그런 사람들도 있고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늘 팽팽하게 유지되느냐면, 그렇지 않고 때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흔들리기도 하고 좀 그렇습니다. 그런 걸 우리가 넘어서야 되겠는데요, 우리가 세속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수도원에 있는 사람들처럼 24시간 거의 호흡하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우리가 그러한 수도원 영성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목사나 교회활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거기에 다 해당되는 거지요. 오늘 여기 111편 읽었는데,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어떻습니까, 아, 시편 111편을 쓴 성서기자는 정말 하나님을 경험한 걸로 생각 됩니까, 아니면 그냥 어렴풋하게 생각이 되나요? 이러한 질문이 조금 정확한 건 아닙니다. 질문이 좀 애매하긴 해요. 당연한 거니까요.

 

성서기자들의 하나님의 경험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쓴 건데요. 저는 이 질문을 성서기자들의 어떤 신앙경험이 좀 부족하다고 하는 뜻으로 드린 것이고요. 이해하는 우리가 그런데 잘, 그 경지까지 못 가니까 그것을 좀 확인해 보자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바꿔서 질문하는 게 좋겠군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나요? 예, 그런 질문 앞에 서게 되면 좀 당혹스럽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 경험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때도 있어요. 그렇지요. 아주 깊은 어떤 평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 어떤 기쁨 같은 것들이요. 어떤 좋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생명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신비로울 정도의 어떤 기쁨을 허락하거든요? 어떤 그런 경험들을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만이 하나님의 경험은 아닌 거지요. 성경도 여러 가지로 얘기합니다.

 

역사적 사건이라든지 출애굽이라든지, 바벨론 포로라든지, 이런저런 것들도 하나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색깔은 아닙니다. 가지가지 여러 가지 색이예요. 왜 이렇게 하나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고요, 그 차원이 다르고 할까요? 왜 그럴까요? 그리고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경험이라고 하는 유일한 잣대라고 하는 것이 없을까요? 하나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요. 또 다르게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자체가 사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설명은 그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의안에 있는 것을 조금 더 정리하겠습니다. 조금 아까 한 질문을 마무리는 해야겠는데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대한 경험에 결정적인 어떤 것이 없는가, 사실 그건 아니지요? 그러니까 그건 잘 못된 질문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하나님에 대한 유일하고 절대적인 경험인 겁니다. 답은 그거예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일어나 사건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다 이해를 해야 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끊어서 얘기 할 수 없다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작은 미생물이 큰 코끼리의 털 하나에 매달려 있는 형국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습니다. 경험할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하구요. 부분적 이예요. 그래서 각양각색이구요. 성서기자들의 하나님 경험에서 핵심을 많은 경험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는 내용은 구원자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구원자로 경험하는 거예요. 구원자,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죽을 병 걸린 사람이 낫는다거나. 이집트에 완전히 노예처럼 살다가 해방 맞는다거나, 여러 가지잖아요? 예수님에게서도 그런 일들이 여러 가지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핵심은 구원자예요. 구원, 하나님을 구원자로 경험하는 겁니다.

 

예, 오늘 여기 시편 111편 기자도 다른 시편기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런 구원자로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 조금씩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2절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데요, 여호와의 행위가 크고 크다, 하나님의 일이 크다, 여호와의 일, 행위 이것은 바로 구원행위입니다. 하나님 하면 구원, 그걸 꼭 생각하시면 되요.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어요. 소테리아(σωτηρία)라고 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 뜻이거든요? 소테리아, 그러니까 soteriology 하면 구원론(救援論)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똑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사건이 하나님인 거예요. 하나님은 우주 어디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분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분, 구원을 행하시는 분, 구원을 일으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구원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그 행위가 크다, 얘기를 하잖아요.

 

3절에 보면, 존귀하고 엄위하다 는 거예요. 3.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의라고 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이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어떤 존재방식, 구원 행위,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예, 영광이라든지, 영생이라든지, 의라든지, 또 뭐예요. 또 비슷한, 묶을 수 있는 단어들, 성서단어들이 또 뭐예요. 거룩 이라든지, 찬양 이라든지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는 용어들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라고 하는 것을 바로 거기서 알 수 있는 거지요. 크다, 행위가 크다, 존귀하다, 엄위하다, 그의 행위가 크다, 그리고 그의 의가 영원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시편기자의 표현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혹은 생각에 잘 정리가 됩니까, 이런 시편기자들의 표현들이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딱 보고서 확인해서 자연과학처럼 설명하는 것이 아니예요. 이건 시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들이 물에 대해 설명 할 때 H2O 그렇게 얘기합니까,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는 것 처럼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처럼 성서기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이 시인이 왜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할까요? 어떻게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했을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유요? 하나님의 일이 크고 놀랍고 존귀하고 엄위하고 의가 영원하다고 하는 그렇게 시편기자가 고백한 그러한 이유는 이 세상이 사람들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뚫어 보았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거예요. 거기엔 더 근원적인 어떤 힘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본 거지요.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 드린 출애굽,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겁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예요.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실제로 크고 존귀하고 놀랍고 엄위하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그것을 시편기자가 영적인 통찰력으로 뚫어 본거지요. 아싯리아와 바벨론 같은 제국들이 이스라엘을 파괴했는데 그런 나라들이 영원할 것처럼 보였거든요. 지금 미국이 굉장히 강한 나라잖아요?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보통 말해서 친미사대사상이라고 할까, 거기서 나온 형태는 다 옳다고 생각하고요. 교회형태도 다 미국을 따라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하고 비슷한 거예요. 고대 이스라엘 눈에 아싯이라와 바벨론 이런 나라들은 너무 막강하기 때문에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국도 정말 예상하지 못한 계기에 사라지거든요, 허물어지거든요. 아무리 큰 권력을 쥔 정치인이나 기업가라고 하더라도 다 무너집니다. 모든 인간과 그리고 그 사람의 계획과 더 나쁘게는 탐욕들, 이런 것들이 아무리 강해도요 그렇게 보여도 사실은 파도 앞에 모래성과 같다는 사실을 시편기자는 보았습니다.

 

더 근원적인 힘들이 작용한다, 어디에 작용한다, 그렇게 본 거지요. 이 파도, 호화찬란하게 모래성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파도가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역사에서 그 어떤 힘을 본 거예요. 그 힘이 정의로운 힘이고요, 그 힘이 거룩한 힘이예요. 그 힘이 의로운 거예요. 절대적인 거예요. 바로 그 분 모래성을 허무는 파도와 같이 크고 놀랍고 존귀하고 엄위한 어떤 그 힘을 행사하는 존재, 그가 바로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렇게 성서기자들이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하고 있는 걸 우리가 읽고 있는 겁니다. 성서는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을 하셔야 되요. 하나님이 나는 뭐 뭐다, 툭툭 이렇게 명령을 내려갖고 성경이 기록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좀 학문적인 용어로 얘기하자면 귀납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을 살펴보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더라 이러한 데에 도달한 거예요.

 

마치 물리학자들이 여러 가지 물리적인 실험을 해 보니까 여러 가지 물리의 원칙, 관성의 법칙이 있더라, 열역학 1번, 2번 이런 것들, 불가역의 어떤 성질을 발견하면서, 그런 거예요. 귀납법적으로, 아까 물리학 얘기한 거죠? 이런 저런 것들을 통해서 물리의 어떤 성질들을 얘기하는 것처럼 이 성서기자들도 이 세상의 역사, 인간의 삶 이런 것들을 보니까, 여기에 더 그걸 뚫고 지나가는 어떤 힘이 있다, 그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런 거지요. 그러나 오해를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결국은 사람의 그 머리 인식해 갖고 어떤 절대 원리를 찾는 것 하고 똑 같은 것인가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계시를 하는 거지요. 자신의 뜻의 어떤 것들을, 계시가 직접적인 건 아닌 거예요. 아, 자꾸만 복잡한 문제로 들어가는데, 그 얘기는 그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시, 자기의 구원 행위, 그런 것들이 있고 그런 것들을 일일이 귀납법적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통치가 어떻다 하는 것을 영성가들이, 혹은 성서기자들이 깨닫고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지금도 계속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해야 되요? 알아가야 되지요.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당연한 얘기지요. 종말에 가서야 모든 것이 드러날 그 어마어마한 어떤 생명의 주인인 그 분을 우리가 무슨 수로 지금, 이 지구 밖에 기껏 해 봐야 인간이 간 게 달 나라가서 잠깐 발 딛고 온 것 밖에 없는 이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120억, 130억광년 이라고 하는 동안에 된 우주 전체 창조자인 그 분에 대해서 말하겠습니까, 정말 해변가의 모래 한 알보다도 알고 있는 게 적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계속 하나님의 계시와 통치에 대해서 영적인 눈을 열고 그 분의 뜻을 알아가야 되지요.

 

그걸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신학자구요. 교회는 이제 그런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신앙생활에서 같이 나누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말씀 드린 이 사실을 오늘 시편기자가 그 다음에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7절,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8.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그의 손이 하신 일이 진실과 정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다고 그랬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라고 했고요, 진실과 정의를 행하신 바라고 했습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예요. 반론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온 이야기들이 절대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닙니다. 이 표현이 적당한 건 아닌데요, 아직까지 종말에 가 닿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이 예수그리스도를 사실은 정확하게 몰랐던 거지요. 모르면서도 방향은 정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에는 율법들이 그러니까 한계가 있는 거지요. 여기서 법도는 율법인데요, 확실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는 확실한 거예요. 그 당시로서는, 한정적인 거지요. 그런데 지금도 다 확실한 게 아닙니다. 예를 들면 먹을거리 나눌 때도, 거기 분명하게 기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삼겹살 같은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건데요. 지금 우리들에게는 유효하지 않으니까, 그건 지난 간 거예요. 그런 것들이 영원무궁토록 진실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 문자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이스라엘의 문화적인 거니까 이거는 잘못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분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그 하나님을 표현해 내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적인 한계, 이거는 분명한 겁니다.

 

이걸 우리가 구분해서 봐야 되거든요, 그걸 뭉뚱그려서 그대로 받아 드리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됩니다. 지금도 유럽과 미국이나 이런 쪽의 문화를 기독교 본질이라고 착각하고 따라가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건 신앙과 성서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하나님을 항한,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 방향 이건 아주 분명한 겁니다. 이건 정확한 거예요. 그래서 그들의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 또 하나님이 계시된 그들의 응답, 그러한 역사가 바탕이 돼서 예수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등장하실 수 있었던 것이고 초기 기독교가 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이 기초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은 것은 분명합니다. 7절에 나오는 내용이요. 7.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라고 했잖아요? 이러한 통찰도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이 때 성서기자들은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에만 눈을 두지 않았습니다. 더 근원적인 데 그런 데에 마음을, 그리고 생각을 영적인 시각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요. 진실과 정의로 작동된다고 하는 사실을 그대로 믿고 살기가 좀 힘듭니다. 그렇지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거예요. 시편기자는 거기 강의안에 쓴 대로요, 파렴치하기도 하고 승자독식의 불의한 세상살이에서도 하나님의 진실과 정의가 살아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냥 믿은 게 아니예요. 뚫어 본 거예요. 이러한 믿음과 이러한 통찰에 이르려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이면,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걸 보기가 쉽지는 않지요. 우리는 당장 우리 눈앞의 손해냐, 이익이냐에 민감하고요. 그리고 또 오랫동안 세상살이에 길들여지기 때문에 그것의 이면, 은폐된 하나님의 어떤 손길을 의식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요.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평생 동안 교회 일꾼으로 일을 하더라도 어떤 세속적인 그러한 생각이 위장은 되요. 감춰지긴 한데 실제적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쪽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잖아요.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길 수 없다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그런 비슷한 말씀이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의 중심은 사실은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만큼 약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그 이면을 본 거예요.아주 고유한 그들의 영적인 시각인 거지요. 마치 연극에서 무대장면만이 아니라 그 뒤편에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좀 알아야 하듯이 그 비슷한 얘기라는 거지요. 하나님의 진실과 정의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 그런 영적인 통찰에 이르려면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지요. 이건 꼭 기독교신앙들에게 필요한 시각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시각이라고 하고요.

 

부활의 시각으로 우리 삶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참 거기까지 이르기에는 길이 참 멀지요. 그래도 우리가 가야 되겠지요. 9절은 여호와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노래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의 구원 행위에 맞설 능력이 이 세상에 없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을 때 이게 무슨 뜻인가를 여러 각도로 비춰 보셔야 되요. 이게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입니다. 그 말을 한 것은 어떤 걸 배경에 두고 늘 한 거예요. 그러니까 거룩하고 지존하시다 찬송 부르고 노래하는데요. 뜬금없이 하나님을 찬양한다, 높다 하겠습니까, 사람이 그게 아니잖아요? 어떤 경험, 어떤 생각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서기자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그 결과에 도달했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다, 지존하다고 하는 것은 세상에는 그런 게 없다, 맞설 만한 능력이 없다, 그런 얘기입니다.

 

그런 존재에게만 어떤 존재요,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에게만 거룩하다는 말을, 지존하다고 하는 말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요. 거꾸로 얘기해서 인간과 세계를 구원할 자가, 혹은 구원한 자, 그 분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굉장히 그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 가운데서 나온 건데요. 그런 걸 다 잘라 버리고 그냥 아전인수 격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패권적인 생각으로 들은 거예요. 우리만 최고다, 하나님을 우리만 독차지 하는 걸로 우리가 생각하고요. 그래서 타종교에 대한 냉소, 폭력. 이런 것이 진행될 수도 있고요. 그리고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이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 거냐, 그래서 성서이원론 이런 데도 빠질 수가 있습니다. 2000년 기독교역사에서도 그런 일들이 좀 일어났어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최근에도 땅 밟기 같은 헤프닝이 일어났는데, 이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하는 말들을 굉장히 왜곡시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을 극복하려면 성서의 이런 진술이 진리의 차원에서 검증 받아야 됩니다. 진리의 차원이라고 하는 말은 성서의 가르침을 독단적으로 진리를 독점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윽박지르는 방식으로 아니면 자기 암시하는 방식으로 자기 쇄뇌 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논쟁에 과감하게 나서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퇴행적인 방식으로 자기들끼리 끼리끼리 하는 끼리 집단으로 빠져서 자기합리화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이 진리는 보편적인 것 아니겠어요? 옳은 거 아니겠어요? 그런데 나서야 되는 거지요. 이러한 방식으로, 어떤 방식이요? 진리의 논쟁이라고 하는 차원으로 우리 믿음을 적극적으로 변증하는 것이 바로 선교, 전도의 본질이다, 저는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시편111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0절에 있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당연한 거지요. 여호와의 행위가 크고 존엄하고 그는 진실과, 정의로운 분이고 그 분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요, 바로 지금 세 가지로 말씀 드렸지요. 크고 존귀하고 진실과 정의로운 분이고 그 분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하는 세 단락으로 말씀 드렸는데, 꼭 이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설명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세 단락으로 되었네요. 이런 것으로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서 조금 가까이 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너무 딱 고정된 실체로 뭐 책이라든지, 이렇게 딱 만져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건 정말 잘 못된 길로 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만큼 우리는 그 분을 따라 갈 수 있는 거지요. 바로 그런 분이니까 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죠. 이것도 상투적으로 듣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지혜의 근본일까요?

 

다른 것은 근본적으로 무능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무능력해요. 어떤 면에서 무능력합니까, 구원에서 무능력한 거예요. 이게 다 모든 것들이 시시해집니다. 굉장히 절실한데요. 처음엔 다 절실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면 시시해지기 때문에 거기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오해하지 마세요. 우리가 광신적으로 생활해라, 교회생활이 절대다, 그런 차원으로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요. 이렇게 교회생활 습관에 길들여지는 것, 그런 차원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거예요. 우리 영혼의 문제예요. 예,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요? 여호와를 향해서 우리의 영혼이 기울여질 수 있을까요?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실제적으로 거기에 그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 그러니까 우리의 가장 깊은 생명, 그리고 우리의 미래, 우리의 운명까지 거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게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겁니다. 또 하나의 어떤 오해라고 한다면 삶의 허무주의로 빠지는 거거든요? 허무주의, 세상이 허무하다, 무의미하다, 이제 그러한 쪽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일치시키면 그건 잘 못이죠.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허무주의는 자리할 틈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호와가 생명의 창조자이고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오늘 두서없이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이 시편 111편을 주석한 주석학자의 글을 잠시 보니까, 111편이 조금 두서가 없는 것이라고 하네요. 이것저것 여러 가지 글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서 조금 일관성이 떨어진다, 뭐 그런 얘기를 하네요. 그렇다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족하다고 하는 뜻은 아니고요. 기록한 사람들의 영성이 특색이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111편이 다른 시편들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게, 조금 달리 논리적인 게 조금 떨어진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귀한 그러한 말씀이지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다,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새겨 보도록 합시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11편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하고 지존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원자시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들었습니다. 하나님, 이러한 말씀들을 흘려보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도록 역사해 주옵소서. 날씨가 점점 깊은 가을로 깊어가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깊은 가을과 겨울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맺혀야 될 영의 양식을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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