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2편 강해-복과 견고한 마음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말씀은 112편입니다. 1절에서 10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교독하는 방식으로 읽겠습니다.

 

1.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4.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5.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6.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9.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0.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아멘! 시편 112편은 그 내용의 관점에서 시편 1편과 좀 비슷합니다. 시편 1편도 복있는 자는 하면서 쭉 나가지 않습니까, 잠깐 보실까요? 시편의 시작을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쭉 그렇게 나가요. 또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여호와의 율법은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런 점들을 보면, 복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좀 차원이 다르다고 하는 걸 느낄 수 있죠? 도대체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이 어떻게 복이 있는 건가, 생각을 해야 되겠지요. 예, 시편 1편 1절과 2편만 갖고도 우리가 많은 생각을 나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고 하는 게 뭔가, 그게 어떤 상황에서 가능한가 하는 겁니다. 이게 쉽지 않은 거예요. 여러분, 이게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당연히 복이 있는 사람은 신앙대로 살고 그렇게 하나님 말씀 그리워하고 살지, 하지요?

 

그런데 이게 우리가 성경을 매일 읽는다고 해서 말씀이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정말 즐거워하는 게 아닙니다. 묵상이 잘 안되요. 우리 머릿속에 다른 게 가득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그냥 스쳐 지나가고요. 전혀 자리를 잡기가 힘듭니다. 이제 그런 게 목사가 어떻게 풀어 가느냐가 숙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일반 신자들은 일주일 내내 주로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습니까, 세속이라고 해서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요. 종교적인 삶이 아니라 일반적인 삶이라는 건데, 아주 중요해요. 거기서 돈을 벌고 속고 속이고 미워하고 힘들고 즐거운 그런 일들로 머리에 가득 차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일 주 일에 한 번 듣고 어떻게 배운다, 그게 참 힘든 일입니다. 그런 신자들이 말씀에 깊이 들어간다고 하는 건 대단한 일이예요. 목사들도 그렇게 하기 힘든데, 그렇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거다 묵상한다고 하는 일이 그리 만만하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여튼 복 있는 사람이 그렇다는 걸 보면 이건 특별히 새로운 차원을 이야기 한다고 알 수 있죠. 신약에도 보면 팔복이 나오거든요. 산상수훈에요, 거기에도요. 어떤어떤 사람은 복이 있다, 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팔복에 보면 아시지요? 우리가 다시 그걸 일부러 확인할 필요가 없지요,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과연 복이 있을까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가난하고 울고, 여러 가지로 외롭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복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도 그런 걸 받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그게 복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복은 구원이라고 하는 말하고 똑 같은 차원인데요, 예, 복이 정말 중요한 문제거든요, 복은 성서에서는 구원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어떤 차원에서 생각하느냐 차원에서 복이 달라지는 거지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혹시 아세요? 그런 것들을 가난해도 위로 받아라, 힘드니까 위로 받아라 하는 그러한 차원에서 하는 말일까요? 아니면 실질적인 이야기일까요? 그것을 우리가 구분하면서 생각해야 되는데요, 성경은 결코 관념적이거나 사변적인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표현은 그래요. 표현은 그런데, 실질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서는 좀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이렇습니다. 리얼리즘에 입각한 이야기예요. 현실주의예요. 가장 분명한 것을 붙들고 있는 거지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을 그냥 힘드니까 위로해 주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실질을 뚫어 보고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이야기하면 부자가 화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도 있지요? 실제로 그런 표현도 있지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힘들다. 이상하게 그런 말씀들이 있는데도 지금 한국교회는 부자가 되려고 다들 애를 쓰는 것 같습니다.

 

기복적인 신앙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성서가 이미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뜻이겠지요. 이겁니다.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현실이 힘든 거예요. 그래서 결국 그런 사람은 다른 어떤 힘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거예요. 그 힘이 하나님의 나라인거지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렬한 기다림, 이게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이, 그게 뭐 별로 분명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 본문을 더 공부해야 되는데 아직 서론적인 얘기만 하고 머물러 있네요. 그래도 그건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삶의 여러 가지 조건들이 나쁘면 거기 한탄하고 빠져 있다면 그러면 그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는 거지요.

 

그러나 상황이 나쁘기 때문에, 병에 들린다거나, 정말 생존이 위태롭거나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강렬한 그 기다림을 갖고 살게 된다면 정말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게 왜 실질적이냐 하면 여기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소유하고 있는 것,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 생각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요. 그러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지 못한다는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삶이 파괴되는 거지요. 여기까지만 설명하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제가 설명한 것 보다 여러분들에게 잘 전달되었기를 바랍니다. 복, 행복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고요. 우리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정말 성서가 얘기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과연 어떤 것이 복이냐 어느 누구도 딱 결정적으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구원이 뭐냐, 하는 것처럼 궁극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많이 느끼는 겁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조건 가운데서도 흔한 이야기로 하는 거예요. 영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있고요. 삶이 참 힘들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영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더 옳을 거예요. 제 개인적으로도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나, 이럴 때요. 다들 사는 게 힘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 때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운 삶인데 그걸 가지고 우리가 행복하다 말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건 계속 구원이 뭐냐, 하는 것처럼 궁극적인 문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 112편에서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이것을 사실은 두 가지로 보게 될 겁니다. 번호가 쓰여 있지요. 1번하고 2번 되어 있는데요, 1번, 2번 나눠져 있는데, 1번 쪽에서는 적극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는 거구요. 그리고 2번에서는 좀 소극적인 부분입니다.

 

이게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마는, 구도로 보면 그렇습니다. 내용이 어떤 가를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지요. 1절에 복이 있는 사람의 조건을 이렇게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새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지요. 여호와를 경외하고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하는 겁니다. 상투적인 표현처럼 들려요. 우리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요.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것이 무얼까요? 경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영적 태도를 유지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게 어떤 건지를 더 생각하셔야 됩니다. 여호와 앞에서, 사실은 여호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여호와 앞에서라고 말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이야기예요. 우리는 참 막연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은풍월로 한다거나 아, 그러려니 생각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그래도 정확하게 최선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경외라고 하는 것은 내가 앞으로 불행해질까, 행복해질까, 내가 주식투자했는데, 이게 성공할까, 아닐까 뭐, 이런 차원에서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그냥 걱정 근심이지요. 걱정 근심, 그런 것은 경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경외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두려움이예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 루돌프 오토라고 하는 종교학자가 이 거룩한 두려움을 신앙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누미노제(Numinose)라고 해요. 누미노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그런 걸 경험해 보셨어요?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그게 확 드러나지는 않는데요? 모세가 호렙 산에서 가시떨기나무에 불붙는 현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와 같은 상태, 이사야가 성전에서 어떤 천사들의 찬양을 들었다고 표현하던 어떤 그런 경외들입니다. 그걸 이렇게 저는 설명했습니다. 생명을, 삶이죠. 생명이죠. 삶, 생명을 낯설게 경험할 때 이런 두려움이 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깊은 생명의 근원들이 있구나 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아 갈 때 이런 경외심이 생깁니다.

 

직접적인 예를 들면 외계인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있는지 없는지도 우리가 잘 모르는데요, 외계인을 봤다, 외계인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전혀 상상할 수 없거든요, 외계인이라고 해도 잘 못입니다. 그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생물체, 지능을 가진 생물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요, 우리가 지금 알고 경험하는 생명현상을 절대화 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너무 익숙해요. 우리가 결혼해서 가족 꾸리고 또 아이들 교육시키고 교회 이렇게 하고 등등.. 우리가 여태까지 경험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데에서는 이런 경외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걸 강화하고 확장하는 것에만 노력합니다. 내가 더 잘 살게 하고 내가 어떤 지위를 얻고 소유하고 이런 것으로만 이런 것으로만 생명이 한정되는 거예요. 여러분, 생명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 전혀 안 그런 거예요.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실 테니까 더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경험이 하나님 경험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물건처럼 생각하시면 안 되고요. 익히 알고 있었던 생명을 더 근원적으로 이끌어가는 그 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제 표현이 좀 제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습니다. 진도를 더 나가보지요. 이런 두려움의 영성에 들어간 사람은 복이 있고 행복합니다. 왜 그런지 아시겠지요? 전혀 다른 생명을 경험하니까요. 그래야만 어떤 그 내 삶을 확장해야만 된다고 하는 긴장감, 그런 불안, 그런 것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꼭 돈을 많이 가져야만 그게 이제 출세했다, 아니면 행복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절대화되고 있잖아요? 고정관념으로 딱 뿌리박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자면 아이들은 좋은 대학 가야되고, 그런 것들이 되어 있는데요,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반적이 삶의 형태들입니다. 누구나 다 거기에 영향을 받아요.

 

거기서 당장 우리가 벗어 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으로도 규정하거나 가둬 둘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영역이라고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제 그럴 때. 그게 복이 있는 거지요. 전혀 생명의 세계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것 하고 달리, 어떤 것 하고요, 생명을 낯설게 신비의 방식으로 깊어지는 그 세계와는 전혀 달리 자기가 지금 알고 있는 삶을 자신의 계획과 구도 안에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다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종교인은 될 수 있는 거지요. 자기에게 있는 어떤 종교적인 생각들이 많아질 수 있는 것은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호와를 경외하는 건 아닙니다. 그의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나오고 있지요?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다음에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자는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도 포함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얘기한 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차원하고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낯설게 이해하면서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에 더 깊은 생명의 깊이로 영적인 안목을 돌리는 거라고 한다면 그의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지금 있는 일상의 삶을 감수한다고 하는 겁니다. 두 가지가 좀 차원이 다르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삶의 어떤 궁극적인 신비하고 관계된다고 한다면, 그건 잘 생각해 두십시오. 밑줄 치시고요. 삶의 궁극적 신비예요. 이거는 아, 궁극적 신비? 놀라운 거죠. 이거하고 관계된다면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것은 삶의 표면적인 일상과 관계된다, 그러니까 이 1절에서 생명의 신비와 일상은 생명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 들이예요. 이것들이 일치가 됩니다. 신비와 일상이 일치가 됩니다.

 

그러니까 성서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런 일들을 중심에 놓고 있지만. 일상을 전혀 소홀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일상은 그 하나님의 존재신비와 생명의 궁극적 토대가 드러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지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이 오시니까 대충 살자 그건 아닙니다. 깨어 있고요. 일상을 진지하게 받아 드리고 책임 있게 살아갑니다. 1절만 하더라도 참 중요한 이야기들이 많지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그의 계명을 즐거워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아는 사람은 복이 있다, 복의 차원이 달라지는 거지요. 저는 분명하다고 생각 합니다.그런데 이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확 닿지 않아서 문제예요.

 

2절부터 6절까지 복의 내용이 열거됩니다. 후손, 부와 재물, 공의, 빛, 자비, 긍휼, 의, 은혜, 꾸어줌, 정의 흔들리지 않음, 영원히 기억됨, 중요한 단어들을 제가 여기 나열했습니다. 귀한 것들이지요. 후손이 잘 되고요. 재물도 많고, 또 의로운 사람으로 살고요. 그런 것들입니다. 복 있는 삶의 내용들입니다. 1절은 복이 있는 사람의 근원을,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라는 이유를 얘기한다고 한다면 2절부터는 그 열매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표현들을 기계적으로 읽어서 이건 부자가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참 곤란합니다. 그리고 저건 정말 옳은 얘기가 안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가난해 질수 있고요. 고난 받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죽을병에 걸릴 수 있고요. 그건 기계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읽는 데에 조심해야 되고요. 오해 할 수도 있는 겁니다. 분명히 그게 드러났잖아요?

 

그러니까 만약에 앞 뒤 다 빼버리고 3절만 딱 끊어서 설교한다면 아, 봐라!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다, 그런 식으로 물질적인 축복을 강조할 수 있을 거예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거기에 관계된 예화도 많이 들을 수 있고, 구약에도 부자로 산 사람도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요.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뭘 얘기하는지를 놓치면 좀 곤란합니다. 두 가지 관점이 필요 합니다 하나는 여기서 말하는 복의 내용을 종말론적으로 봐야 합니다. 당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게 종말의 차원에서 일어난다고 봐야 되고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행위가 긴밀한 방식으로 실현된다고 하는 겁니다. 당장 부자가 된다, 건강하게 된 다기보다도 이게 기계적으로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방식인 비밀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드러난다고 하는 겁니다. 아, 그럼 하나님을 믿는 것하고 세상에서 복되게 사는 것하고 아무 상관이 없네,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복의 차원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 하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서가 이야기하는 복의 깊이로 한 발한 발 들어가는 게 중요 합니다. 그런 것에는 관심 없이 몇 가지 나타난 몇 가지 단어들로 복을 이해하면 오해 할 수 있습니다. 뒷부분으로 가면 그게 왜 그런지가 더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강의안 2번이라고 쓴 부분을 보십시오. 시편기자는 복된 삶을 무조건 기계적으로나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다 잘 된다, 모든 다 그렇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7절에 보면 그렇잖아요?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그 말은 또 뭐냐, 흉한 소문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있다는 거지요. 흉한 소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계명을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있지 말아야 될 건데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좋은 소리만 듣지 않습니다. 그건 전제해야 됩니다. 이 말은 아주 실질적인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행이 닥칠 수 있다고 사실을 전제하는 겁니다. 그런 게 흉한 소문 아니겠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라든지 그런 것들은 그런 일들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것 다 피하고 비 안 맞고 하나님이 우리만 햇빛 쪼이기를 바라기만 한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 욕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만도 아니고요.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행복을 실질적으로 깨닫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걸 전제해야 되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행이 닥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가 말하는 복은 성공신화하고는 차원이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게 이제 흉한 소문이고요. 실질적으로 불행이 닥칠 수 있고요. 또 하나는 이게 더 중요할지 모르겠는데, 세상 사람들이 믿는 자들의 삶을 경계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의로운 사람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 세상사람 그래서, 제가 적대감을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삶의 가치가 다른 거니까요. 우리가 있는 곳곳에서 어디 있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말 두려워하고 생명의 깊이가 드러난다고 하는 것에서 놀라고 그래서 그 말씀을 즐겁게 생각하고 일상에서 하나님 뜻대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세계의 사람들은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흉한 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와 같은 걸림돌이죠, 스캔달(Scandal)과 같은 것들입니다. 걸림돌이라고 하는 거예요. 좋은 뜻에서의 걸림돌이지요. 말썽 피우는 걸림돌이 아니라요. 불의한데 거기 의로운 게 있으면 뭔가 귀찮잖아요? 흉한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 시편기자는 흉한 소문을 들어도 복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참 놀랍죠? 쉽지 않지요? 아시지요? 어렵습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이런 저런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성경이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이 참 친절하지요? 거기 다 설명하고 있어요. 연결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간혹.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행간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들이 있고요. 고대인들이 쓰는 독특한 언어사용이라든지, 어떤 개념 같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알지 못하는 부분도 있긴 있습니다는 대체적으로는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있어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를 의뢰하고 마음을 굳게 정했기 때문입니다. 7절 그대로 나오고 있잖아요? 여호와를 의뢰하고, 신뢰한다, 의존한다, 여호와를 의존한다, 그에게 마음을 굳게 정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뭐, 우리가 흔히 듣던 이야기라서 아, 믿음 생활 이야기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금 더 이 말씀을 새롭게 이해해 보시지요. 앞에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낯설게 경험하고 거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통치하시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데도 연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낯설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너무 낯익어요. 교회를 몇 년 다니고, 10년, 20년쯤 다니면 늘 들었던 풍월 이라서요. 이 말씀들을 새롭게 읽지를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오, 그렇지 믿음 생활 해야지, 이런 정도로만 아는데 시편기자가 어떤 차원에서의 이렇게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얘기했는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의뢰한다는 것은 1절에 말하고 있는 경외한다고 하는 뜻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보세요. 이게 우리가 잘 되지 않아서 실제로 이러한 영적인 상태가 된다면 그러면 전혀 다르게 우리의 삶이 전개될 겁니다. 여호와는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고요, 종말에 완성하실 분이고요. 우리 운명을 주관하는 그 분 아니겠습니까?

그 여호와를 경외하고 신뢰한다고 한다면 사람들에게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 나에게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불행한 일들, 이런 것 때문에 우리 영혼이 뒤죽박죽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혼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이게 설교 조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 이건 실질적인 이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거지요. 우리의 어떤 삶의 방식들이 끊임 없이, 끊임 없이 신앙에서도 인간중심이라고 할까요? 포퓰리즘(Populism)이라고 할까요? 나 스스로에게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고 계속해서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예, 소문을 두려워하는 거죠.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영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이런 저런 흉한 소문에 민감한지, 아니면 우리에게 늘 낯설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 민감한지 기준이 뭐죠?

 

8절에서 마음이 견고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똑 같지요? 7절, 8절, 연결되면서요. 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렇게 반복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은 이게 쉽지 않다고 하는 겁니다. 시편기자라고 해서. 우리와 다른 삶을 살겠어요? 밥 안 먹으면 배고프고, 여러 가지 똑 같을 거구요. 사람들 이상한 소문 들으면 기분 나쁘고요, 잠도 안 오고, 똑 같았습니다. 마음이 늘 흔들리는 건 비슷했습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이런 점에서 투쟁해야 될지 모릅니다. 마음을 하나님 중심에 두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 점에서 결론적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래서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아주 견고하게 서는 것 자체가 우리 능력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의 은총, 아닐까, 하는 거지요. 그 분의 은총으로만 우리의 마음을 그 분에게만 둘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견고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견고한 마음, 이것이 우리들이 추구해야 될, 혹은 기다려야 할 참된 하나님으로부터의 복이다, 오늘 말씀을 결론적으로 맺을 수 있습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시편112편, 아주 오래전 2500년 전, 팔레스틴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썼던, 그러나 여전히 시행착오가 많았던 어떤 신앙인의 신앙고백을 저희가 다시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들 복이 있는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 여기 저기 많은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하는 그 근본에서만이 복된 삶이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흉한 소문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맡기도록 인도해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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