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2편 강해-여호와의 위엄과 긍휼

 

시편 113편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4.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시편 113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시편이 좀 되지요? 또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도 좀 될 겁니다. 그런데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시편은 제가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마는 별로 없을 겁니다. 113편은 좀 특이해요. 내용전체가 특이하다는 게 아니라 할렐루야를 앞머리와 끝머리에 그대로 했다고 하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그게 그리 중요한 건 아닙니다. 시편의 특징이라고 하는 점에서 좀 다르다, 그렇게 볼 수 있지요. 할렐루야라는 이 단어는 두 낱말의 결합입니다. 하나는 ‘할레루’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야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와 ‘야훼’의 결합이예요. ‘할렐루’는 찬양하라 그런 뜻 이구요. ‘야훼’는 여호와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할렐루야의 ‘야’는 야훼의 줄임말이지요. 할렐루, 야훼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찬송하라 그 얘기입니다. 야훼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일컬을 때 쓰던 여러 용어중의 하나예요.

 

우리 말 성경으로는 여호와로 번역되어 있어요. 또 다른 이름은 엘로힘 이라고 있습니다. 엘로힘은 보통 하나님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도나이도 있는데요, 그건 주님이라는 뜻이지요. 제 기억으로는 그렇습니다. 야훼, 엘로힘, 아도나이, 이런 이름들이 하나님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면요, 하나님에게는 이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름을 붙인다고 하는 것은 그 이름으로 그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규정될 수 없는 분이죠. 오히려 규정하는 주체이죠. 규정당해야 될 객체인 우리가 어떻게 규정하는 주체인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겠습니까? 피조물이 창조자를 창조할 수 없잖아요. 창조자가 피조물을 피조 할 수 있는 건 가능하지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대상에 대한 규정이라고 한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엘로힘, 야훼, 아도나이 이런 것들은 그 분, 창조주인 그분을 가리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고유한 언어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설명이 정확한 건 아닌데, 일단 그런 정도로 하고 이 부분 넘어 가겠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야훼라고 하는 이 단어가 할렐루야에서의 그 ‘야’로 축약 됬다고 하는 점을 말씀 드린 겁니다. ‘할렐루야’ 라고 하는 이 단어는 구약에 생각보다 많이 나오진 않습니다. 25번정도 나와요. 주로 시편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시편이 찬송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 주님을,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런 단어가 시편에만 나오는 건 당연합니다. 제가 확실하게 확인을 하지는 못한 건데요, 시편 외에 다른 구약에서는 이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을까. 이 공부를 준비하면서 구약 주석 책이 있거든요? 그 책에 따르면 시편에만 나오는 걸로 되어 있어요. 시편이외의 구약성경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다른 데는 나오지 않았을까, 그게 참 신기합니다. 연구해 볼 만한 주제입니다.

 

어쨌든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제가 읽은 게 정확하다, 전제할 때 시편에만 25번 정도 나오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는 물론 더 적구요. 요한계시록에 몇 번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한데 성서에서는 별로 흔하게 나오지 않는다는 거지요. 특히 흑인들,(흑인들이라고 부르는 건 낮춰 부르는 건가요?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그들의 예배에서는 이런 할렐루야라고 하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 같습니다. 목사도 그렇고 청중들도 우리보다 더 열광적으로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 같아요. 제가 직접 경험해 보진 못했습니다만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원래 한국교회에서도 예배드리는 중에 그렇고 설교시간에도 할렐루야! 그런 말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어떤 목사는 전화 받을 때부터 수화기 들고 목소리 깔고 할렐루야!! 그렇게 합니다. 좋은 용어래서 입에서 많이 내는 것은 신앙적으로 그렇게 문제는 있는 건 아닌데,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어쩐지 설교시간에 그렇게 할렐루야를 남발하거나 전화 받을 때마다 할렐루야를 외치는 것이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신앙이 어떤 생각 없이 말에만 붙어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아니면 어떤 문제들을 한 단어로 없애 버리려고 하는, 일종의 언어독단적인, 이 언어를 통해서 다른 것을 다 헤쳐 버리려고 하는 일종의 독단적인 생각이 거기 들어 있지 않나 하는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어쨌든 할렐루야는 참 중요한 단어예요. 이 113편이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납니다. 주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주님을 왜 찬양하라고 하는 걸까요? 그리고 그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이모저모로 우리가 살펴봐야 되는 거지요. 시편기자가 주님을 찬양하라 할 때 어떤 영적인 각성이 있었을까요? 이런저런 질문들을 우리가 기초로 놓고 오늘 113편의 내용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9절인데요?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딱 떨어지게 3절씩 나누면 됩니다. 1절에서 3절, 4절에서 6절, 7절에서 9절입니다.

 

첫 번째 단락은 1절에서 3절까지로 소제목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똑 같은 이 어구가 반복되고 있어요. 1절에 나오고요, 2절에도 나오고요, 3절에도 나오고요.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1절에 나오지요? 2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절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똑 같은 이야기죠, 여호와의 이름과 찬양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여호와의 이름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분이지요.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규정인데요. 나무라고 하는 말이 있으면 거기에 속성이 딱 결정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모세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이름 이야기가 나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나를 보낸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 민족이 물을 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겠습니까, 당신을 어떻게 소개할까요? 당신의 이름이 뭔가요?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자존자다,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이 도대체 뭘까요? 일단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런 뜻이겠지요. 하나님은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식범주 우리의 어떤 개념 안에 들어 올 수 없는 분이죠. 존재의 근거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그 분을 우리가 어떻게 뭐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딱 부러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름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좀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인가는 이야기해야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오늘 여기 본문에도 속성에 대해서 나옵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 가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 쉬운 것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이다, 정의와 평화라든지, 신학적인 표현으로 삼위일체라든지, 그러한 것으로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는 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다 담아 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 이예요. 그럼 왜 모른다, 열려있다, 그렇게만 말하지 성서가 구체적으로 속성을 이야기 하냐, 그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이야기지요. 하나님에게 속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고요. 부분적으로 안다고 하는 것 뿐이죠, 창조부터 종말까지 전체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시는,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 하나님을 역사 안에 들어 있는 우리가 안다고 해 봐야 부분적으로 아는 거거든요? 부분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전체로 생각하면 곤란한 거죠. 하나님에게 연결되어 있지만 하나님 전체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해 2절과 3절에서 두 가지로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는 2절에 나온 이야기로 시간적인 영원성이고요. 다른 하나는 3절에 나오는 것으로 공간적인 무제한성입니다. 2절 보세요. 2.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이제부터 영원까지예요. 영원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제한되지 않은 분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인 거죠? 3절은 이렇습니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해 지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예요. 공간적으로 제한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해 돋는 데는 동쪽이지요. 고대인들에게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은 정말 막막한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실 마찬가지인데요. 그래도 우리는 해가 뜬다, 진다라고 하는 것을 물리학적으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제 해가 돋고 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요. 각 계절이 있는 것도 공전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것을 있습니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전혀 그러한 이해가 없었거든요. 해 돋는 데, 정말 아득한 곳이지요. 누가 거기 가 볼 수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해 돋는 데가 뭐가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궁금하게 생각했겠습니까, 해 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도 가 볼 수 없는 곳, 바다일 수도 있고 아무도 산 넘어 일수도 있는데 아무리 산을 넘고 넘어도 그 곳으로 태양이 가 버린다고 하는 것, 도저히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그 공간을 이야기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찬양 해야 되지요. 여기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 자체를 찬양하라고 하는 뜻이지요,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리고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절대적인 분, 그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 얘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냥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많이 들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더 절실하게 깨닫느냐 하는 것이지요. 예, 그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아 그것은 이제 줄여야 하겠네요.

 

앞의 문제를 더 정리하고 넘어갔어야 하는데, 다시 뒤로 넘어 갑니다. 그러니까 그 영원까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제한한 그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 대목을 짚고 그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려고 했던 거예요. 그 다음 단락이 아니라 다 연관되는 건데, 그 다음 단계를 이야기 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유일하게 찬송일 뿐이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의 말은 정확한 겁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제한받지 않고 초월적인 그 분 앞에서 우리가 도대체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찬송입니다.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귀한 일은 예배인 거지요. 곧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시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사건을 펼치시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찬양하는 거지요. 그것을 찬송하는 거고. 그것을 또 예배하는 거지요.

 

여기서 찬송, 예배를 형식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 이예요. 어떤 사람들은 아, 그런 찬송, 예배가 뭐 중요 하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 보다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뭔가 일을 해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겁니다. 일은 할 때는 해야지요. 그러나 더 근원적으로는 예배입니다 영광, 찬송입니다. 예, 그렇게 정리가 되고요. 이러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것을 얼마나 절실하게 인식하고 경험하는가에 있습니다.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하는 말이 자칫하면 여호와를 내 삶에 적당하게 이용하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크시고 영원하시고 초월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 힘으로 내가 내 삶을 어떻게 해 보자고 하는 그러한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거구요. 다른 하나는 아, 뭐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냐 하면서 그런 건 사변에 불과하다면서 밀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건 바른 찬송의 태도가 아니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께 우리의 삶을 완전히 맡기는 영적인 태도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4절에서 6절입니다. ‘여호와의 위엄’입니다 오늘 공부제목이 <여호와의 위엄과 긍휼>이예요. 이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지요? ‘할렐루야’라고 하는 뜻의 근거가 바로 거기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여호와의 위엄과 긍휼’ 때문인 겁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얘기한 위엄도 사실은 여호와의 위엄이고요. 여호와의 위엄이지요. 그건 뭐 이미 설명한 거기 때문에 다시 하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첫 번째 단락의 소제목이 ‘여호와의 이름’이었었는데, 결국 이름도 여호와의 위엄을 가리킨다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단락에는 구체적으로 여호와의 위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호와의 속성이 초월적 능력으로 제시됩니다. 위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이야기하는 거지요. 4절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4.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예, 모든 나라보다 높다거나 하늘보다 높다, 높은 곳에 앉으셨다, 이런 표현들은 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 냅니다 이것을 칼 바르트식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전적인 타자’라고 하는 겁니다. Ganz Andere 라고 바르트가 표현했어요. 독일어입니다. 라틴어로는 보통 토탈리터 알리터(Totaliter alite)라고 합니다. 바르트의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분이다라는 거예요. 아날로기아 앤티스(Aanalogia entis)라고 해서 존재유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어떤 것을 보니 하나님이 유추된다, 이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거지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네요. 성서에도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고 또 하나님을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로 이야기 하기도 하고, 그런 비유, 유비, 아날로기아 이런 것들이 많이 나오지 않냐 하는 거지요. 그런데 왜 바르트가 존재유비가 불가능한가,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타자라고 이야기 하는가, 이런 궁금증이 있을 겁니다.

 

이 시간에 신학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 할 필요는 없겠지요. 바르트는 존재유비는 불가능하고 신앙유비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신앙, 신뢰관계를 유비적으로 설명하는 것 뿐 이지 그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존재유비는 안 된다고 하는 거지요. 저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이 땅에 있는 것을 통해서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유추할 수는 없습니다. 전혀 다른 분, 전혀 새로운 분, 늘 새롭게 행동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게 조금 다른 게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분 인거지요. 종말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면 아마 놀랄 겁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경험일거예요. 마치 우리가 외계인을 보는 거와 같은 상태일까요? 얼마 전에 미국 나사에서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들을 알게 됬다고 해서 뉴스에서 한 바탕 떠들었습니다. 비소를 근거로 해서 움직이는 박테리아를 발견했다고 하는 거예요. 비소는 거의 독약과 같은 건데, 그것으로 생명이 가능한 박테리아가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그것으로 우리와 같은 이런 방식의 생명체와는 전혀 다른 이물질적인 생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건 복잡한 문제니까, 저도 모르고 접어두겠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라고 하는 사실, 이것은 여러분들이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한 분, 절대전적으로 다른 분, 절대적인 초월적인 분, 이런 분이 존재하신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무얼까요? 우리가 빨리 찾아가서 그 분을 발견해야지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최선입니다. 성서가 또 그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신다고 하지 우리가 찾아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아 갈 수 없습니다. 이건 마치, 태양 안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실험해 보겠다고 하는 망상하고 비슷합니다. 블랙홀에 들어가서 블랙홀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실제적으로, 실증적으로 확인하겠다고 하는 그런 망상하고 비슷한데 그건 불가능한 거잖아요? 태양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 녹죠. 들어갈 수도 없고요. 근처 가기도 전에 없어지게 되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태양 같은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까이 가서 그 분을 확인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빛으로 오는 거지요. 그걸 기다리는 거지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정결의식을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갔을 때 애기였지요,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갔지요. 그 때 그를 만나 본 두 명의 영성가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시몬과 할머니 안나 입니다. 기다렸거든요? 기다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은 자칫 그걸 무기력한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더 능동적인 삶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그걸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걸 이제 설명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지금은 당장 못하더라도 이러한 성경공부, 영성훈련, 영성심화, 영적인 공부를 충분히 하게 되면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지금 설명한 것 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전히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한 거거든요? 여러분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영적인 세계 안에 들어갈 때가 오게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날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적게 갖고, 적게 가지니까 그리고 그 분의 오심에만 영적인 촉수를 맞추기 때문에 그건 강력한 삶의 모습입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자기염려에 빠진 사람들은 아무리 겉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약한 삶입니다. 오늘 현대 삶들이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잖아요? 신앙자체도 자기연민에 푹 빠지게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이걸 넘어서야 하는 거죠. 이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관심이 많기 때문에 그걸 넘어서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지금 대림절이지요? 대림절 영성을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닙니다. 또 그런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 삶이 역동적일 수 있습니다. 이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축소시키고 예수그리스도 사건에 모든 영적인 노력을 경주해야만 우리의 삶이 실질적으로, 역동적인 차원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성서가 가르쳐 주는 삶의 길이 그냥 막연하거나 사변적이거나 이상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훨씬 실질적인 거예요.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겁니다. 예, 여기 6절에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거 하고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앞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높다, 더 크다 이야기하다가 6절에 보면 6.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천지를 살피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낮추시는 하나님 이예요. 참 놀라운 이야기가 여기 나오네요. 케노시스(Κένωσις)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는 거거든요. 성육신이 바로 그것이고,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편에 이미 그러한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이라고 하는 사상이 나오는군요. 하나님의 높으심은 오히려 우리 삶의 낮추심과 일치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천지세계를 살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걸 가리켜서 신학적인 용어로 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락은 7절에서 9절입니다 '여호와의 긍휼'이예요. 바로 앞에서 짚은 6절의 그 말씀과 연결됩니다. 자기를 낮추셔서 이 세계로 오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는 이야기지요. 여호와의 긍휼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를 낮추신 분, 당연히 긍휼인거지요. 긍휼하신 분이지요. 구체적으로 가난한자, 궁핍한자, 불임여자를 사람답게 살게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성서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나오는데요.

 

이것도 하나의 속성인데요. 어떤 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을 직접 보고 하는 것처럼 생각 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건 일부입니다. 이런 것만으로 하나님을 모두 다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일부이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있는 거지요.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가난한 자, 궁핍한자, 불임여자 이런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세워서 자랑스럽게 하는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나는가 하는 겁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거든요. 꼭 이렇게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가난한 사람은 대를 이어서 가난할 수 있고, 궁핍한 자가 그걸 면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불임여자가 애기를 다시 낳게 된다거나 아니면 또 여기 9절에 있는 대로 자녀들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된다, 그렇게 꼭 일어나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어떤 문제인지 제가 또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만, 어쨌든 삶이 형편없다고 낙인 찍혔던 사람들이 다 회복한다고 하는 것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럼 뭐냐고 하는 거예요. 일어나는 게 아닌데 꼭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따라 가기가 간단한 게 아닌데 여러 각도로 우리가 봐야 합니다. 말씀들이 기록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이게 단선적으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은요. 연역적인 진술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다고 하는 그 전제안에서 나온 하나의 귀결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시고 자비로우시고 전제하고 볼 때에 이 세계에서 고난받고, 가난한 사람들이 그런 것을 극복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지요.

 

귀납적인 진술하고 상반되는 글쓰기 방식입니다. 사유방식입니다. 귀납적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어떤 것을 보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든지 정의라든지 그렇게 말하는 거구요. 여기에 눈에 들어나는 것을 보고 더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요. 연역적이라고 하는 것은 먼저 그 전제가 있고, 거기에서 어떤 귀결들을 설명하는 방법이죠. 저는 이러한 진술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시고, 세계완성자시고 정의로운 분이시고 사랑이시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난하고 궁핍하고 임신 못하는 여자들에게 희망, 그런 삶을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다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언제 되느냐, 어떤 방식으로 되느냐, 그건 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정도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바로 이 진술은요, 시편 113편 기자가 마지막 세 구절을 통해서 한 진술은, 연역적인 진술이라고 얘기 했는데, 시편기자가 그렇게 살겠다고 하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또 하나님은 일하신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만이, 긍휼이 바로 그렇게 나타난 거잖아요, 이런 사람들을 불러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는, 이런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사람만이 이런 내용을 따라서 살아 갈 겁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삶이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기도 하고요. 예, 113편 1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저도 이걸 준비하며서 시편에 놀라운 이야기도 참 많이 들어있다는 것을 세삼스럽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찬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낮추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 연역적인 진술이며, 신앙고백에 대한 이야기 등등입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아주 오래전 가나안 땅에 살던 한 영성가의 기도와 찬송을 전해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위엄이 얼마나 크신지요.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찬송뿐임을 고백합니다. 예배뿐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이 이 땅위에 확연히 드러나는 데에 우리의 영적인 눈을 두고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이 대림절 기간에 하나님의 오심에 대한 약속을 저희들이 다시 한 번 회복하도록, 회상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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