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4편 강해-야곱의 하나님

 

시편 114편, 우리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겠습니다.

 

1.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2.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3.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4.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5.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6.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

7.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8.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아멘!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마다 참 신기하게 생각됩니다. 이게 지금부터 2500년 전의 시, 기도시거든요. 찬양이기도 합니다. 2500년 전, 조금 적게 잡으면 2300년 전, 하나님을 믿던 어떤 사람이 또 그를 중심으로 한 어떤 공동체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이고 하나님께 향해서 불렀던 찬송입니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서 오늘 우리가 같이 읽었어요. 신기하지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의 후손들이 읽을 겁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따로 살지만 이 말씀 안에서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언어라고 하는 것, 특히 말씀의 언어는 신기롭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2500년 전 사람들하고 영적으로 소통하는 거구요. 앞으로 오게 될 몇 천 년 후 등등.. 후손들하고도 영적으로 소통한다고 하는 거지요. 이런 점에서 이 말씀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하고 똑 같습니다.

 

더 나가서 말씀 드리면 하나님 말씀의 경험이 바로 하나님 경험하고 똑 같은 거예요.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읽는다고 하는 것, 바르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첩경입니다. 오늘 제목은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성서해석을 한 사람들, 주석가들의 설명을 보니까 이 114편이 후기유대교전통에서 '유월절 찬양시'로 분류 된다고 합니다. 여기는 탄식시도 있고요, 중보기도도 있고, 찬양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시들이 나오지요. 시편에는 그렇습니다. 절기에 따른 것도 있고요. 이것은 유월절 찬양이라고 합니다. 제가 유월절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유월절이라고 하는 뜻은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Passover예요. 지나 간 거예요. 뭐가 지나간 걸까요? 혹시 아세요? 유월절 하면 뭐가 지나간 절기를 뜻하지 않습니까? 바로 말씀드린 대로 영어로 Passover, Pass 됬다, 뭐가 지나갔을까요? 예, 죽음의 천사, 천사하면 좋은 건데, 죽음의 사자가 지나간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있었던 그런 일이지요? 참 놀라운 거 아니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지금 구제역이 다시 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게 경북 안동에서 시작했는데, 안동소가 유명하다면서요? 거기서 발생해서 많은 소와 돼지, 염소 그런 것들이 살 처분 되었고요. 그게 뚫려 갖고 지금 전국적으로 퍼질 기미가 있습니다. 농민들한테 너무 안타까운 일인데, 정부가 그걸 보조해 준다고 하더라도 돈도 돈이고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람에게도 만약에 그러한 병균이, 만약에 치사율이 높은 병균이 오게 된다면 그런 소들을 살 처분해야 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을 사람들에겐 할 수 없습니다마는 유럽에 중세기 때 패스트가 옮겼을 때 1/3이 죽었다면서요? 그렇게 무서운 건데 어쨌든 제가 드릴 말씀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떼죽음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 자기들이 살아났다고 하는 사실을 거듭거듭 반복해서 확인했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얻었다고 하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 없잖습니까, 유월절이 그런 날이거든요.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일 년에 몇 차례 가거든요? 유월절, 또 오순절, 장막절 이럴 때 가는데요? 유월절이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참고적으로 말씀드리면 유월절이 그렇게 보면 굉장히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정치적인 의미도 있는 거구요. 애굽으로부터 탈출했으니까요. 농사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옛날 절기들은 다 종교, 농사, 정치와 다 연결이 되어 있는 거지요. 세월이 지나오면서 그것이 민간에게 축제를 벌일 수 있는 절기로 자리 잡은 거지요. 이 유월절 절기는 두 가지의 영적인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두 가지를 기억한 거지요. 유월절 절기에 대해서는 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인터넷을 통해서도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무엇을 했는지는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으로는 유월절 만찬이예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같이 유월절 만찬을 했잖아요? 그러면서 그 집의 가장이 자녀들에게 유월절에 대한 전승을 설명해 주고 합니다. 영적인 두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요. 조상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입니다. 애굽에서의 고난, 애굽에서 외국인으로 산 거니까요. 노예처럼 산 것처럼 출애굽기에 나오지만 어느 정도 심한 건지는 우리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거기에 소수민족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좀 당하긴 했을 겁니다. 그러한 애굽에서의 고난이 있고, 그 고난이 광야에 가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지만, 금방 또 가나안 땅에 들어갈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게 되지 않았고요, 40년 동안 광야에서 또 힘들어졌거든요? 사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좀 괜찮은 것 같았습니만 여전히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핵심적으로는 애굽에서의 소수민족으로 당한 서러움과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의 고난을 유월절에서 기억한 거예요.

 

그래서 그 때는 나물을 먹더라도 쓴 나물을 먹고 빵을 먹더라도 무교병, 누룩을 넣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고 그렇게 고난을 기억했습니다. 이 고난을 기억한다고 하다고 하는 건 참 소중한 거예요. 왜 그런지 제가 설명 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그래야 삶이 내면적으로 풍요로워 지거든요. 어렸을 때 다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 어떤 조건이라도 다 만족할 수 있는데요,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그런 세계를 모르니까 오히려 더 영적으로는 미숙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인 이런 의식은 중요한 거지요. 고난 시련 이런 것들이 뭔가를 아는 거지요. 다른 하나는, 두 번째지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 유월절 사건의 핵심 두 가지, 영적인 의미로 두 가지로 말씀 드린 거예요. 하나는 자기들 조상들이 겪은 고난, 또 하나는 그걸 뚫고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런 과거에 있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회상이죠. 기억이죠. 그런데 그것이 회상과 기억으로만 끝나지 않는 거예요. 아시지요? 오늘의 삶을 끌어가는, 추동력이라고 하는데, 끌어가는 힘 이예요. 우리가 성만찬을 하는데, 성만찬도 사실은 이 유월절 의식하고 의미가 많이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잖아요? 고난 얘기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이 거기서 임한다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구원이 성만찬에 같이 있는 것처럼, 유월절 의식에서도 거기 다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유월절 의식이 신약에서는 성만찬이다. 생각하면 됩니다. 단지 그게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회상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의 삶을 생명과 밀착시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유월절에 불렀던 찬양이 114편입니다. 그 내용이 뭔가 살펴보지요. 1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야곱이라고 하는 두 명칭이 나옵니다. 이거 1절 자체가 출애굽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애굽에서 나왔다고 얘기했고요.

 

언어가 다른 민족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의 탈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이 나오잖아요? 사실 이건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국가 명칭으로는 이스라엘이죠. 그런데 야곱집안이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두 가지로 보기 전에, 거기 강의 안에 있는 것을 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거론 할 때 사실은 그 족장들의 첫 번 사람이 아브라함이잖아요? 그 아브라함이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야곱을 얘기한단 말입니다. 야곱은 족장들 중에서 세 번째잖아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기도 하고 더 중요한 인물인데 왜 아브라함의 집안이라고 하지 않고 야곱의 집안이라고 얘기 했을까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창세기 32장 28절에 보면 이 야곱에 하란 라반 삼촌집안에서 한 20여년 있었나요? 거부가 되가지고 고향으로 돌아 올 때 얍복 강나루터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천사 환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천사를 놓아 주지 않다가 씨름에서 이겼다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천사가 이 야곱에게 더 이상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리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부르리라, 그 뜻이 하나님과 겨뤄 이겼다, 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 이름을 가진 인물이 야곱이거든요, 그래서 야곱의 집안이라고 대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뜻입니다. 이스라엘과 야곱, 2절, 다음과 같습니다. 2.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똑 같은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유다,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눠서 볼 수도 있고요, 똑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긴 합니다.

 

이건 성서를 기록한 사람이 어떤 뜻으로 썼는가 하는 것을 전제하고 우리가 읽어야 할 것 같아요. 남 유다, 북이스라엘 이렇게 외워두시면 되겠습니다. 남북왕국이 분열된 배경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솔로몬의 아들이 르호보암 때 일어난 거거든요? 예, 그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생략하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이런 거예요. 여로보암이라고 하는 장군이 북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열 지파나 되는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솔로몬이 죽은 다음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이 정치를 할 때 와서 좀 유화정책을 써서 탕평책을 좀 쓰고, 솔로몬이 독재를 했다 잘 해 달라,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솔로몬이 우리가 볼 때 지혜의 왕이라고 하지만 문제가 많은 거 아시지요? 독재이기도 하고 사치스럽고요, 예,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때에 이르러서 결국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데, 르호보암이 아버지 보다 더 독재를 하겠다, 여로보암에게 말을 하므로 북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해서 반역을 한거죠,

 

그래서 나라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갈라진 것 같긴 한데, 사실은 그 이전에 남 쪽에 있는 지파들하고 북쪽에 있는 지파들이 원래 나빴습니다, 그건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서 제가 이 자리에서 설명할 수는 없는 건데요. 지파끼리 다툼도 많았고요. 그런 상태에서 어떤 게 계기가 되 갖고 남 유다, 북이스라엘로 완전히 분열되었습니다. 오늘 여기 2절이 말씀하려고 하는 뜻은 분열 됬다, 남쪽과 북쪽이 관계가 나빴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남쪽이나 북쪽이나 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유월절의 은총에 참여했다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예, 3절, 이렇습니다. 3.바다가 보고 도망하며 요단은 물러갔으니 이것도 다 출애굽에 있었던 사건을 설명하는 겁니다. 바다가 도망갔다고 하는 것은 홍해가 갈라졌다는 뜻이고요. 요단이 물러갔다고 하는 것은 요단강이 갈라졌다는, 물이 흐르다 멈췄다는 얘기입니다.

 

이 두 가지가 똑 같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한 40년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건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요단강이 갈라진 사건은 여호수아 때 일어난 것이거든요? 이 둘 다 물과 관계가 있습니다.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갈라졌다고 하는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 사실은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의 어떤 글쓰기 방식은 이런 것들을 어떤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자연스런 거였어요. 이런 것을 조금 더 역사 비평적으로 설명하면 이제 요단강이 멈추는 것도 자연적으로 가능한 일이예요. 일시적으로 갈라지는 거죠. 요단강이 별로 크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협곡이 있을 때 그게 무너지게 되면 멈추게 되거든요. 그러면 당분간은 그 밑으로 물이 흐르지 않으니까, 요단강이 갈라지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고요. 홍해도 비슷한 자연적인 사건일 수 있습니다. 이게 자연적이다, 기적적이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고대인들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하게 구원하셨다고 하는 것을 얘기하려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4절에서 6절까지 굉장히 문학적으로 수준이 높은 표현들이 나오네요, 출애굽에 있었던 사건들을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4절은 이렇습니다. 4.산들은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은 어린 양들 같이 뛰었도다 이게 가능하지 않은 거잖아요? 산이 어떻게 숫양들처럼 뛰놉니까, 그렇게 시적으로 쓴 거지요. 그러니까요. 잊지 말고 기억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시예요. 시, 아주 시편은 더 전문적인 시입니다만 사실은 다른 부분들도 다 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에는 상징이 있고 비유가 있고, 은유 메타포가 있고 때에 따라서는 과장법도 있고, 등등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성서가 그렇습니다. 그런 문학적인 차이들을 잘 분간하면서 정말 그게 말하려고 핵심이 뭔가 그걸 찾아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성경은 어떻게 보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이 손가락을 통해서 달을 보는 게 중요하지 손가락 자체에 매달려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앞서 제가 처음에 한 이야기하고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여러분들이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이 성경을 읽는 것 자체가 이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똑 같다고 얘기했고, 지금은 손가락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게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뭐 지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하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관점들을 우리가 늘 새롭게 새롭게 해 나가는 게 좋습니다. 시예요. 시를 읽을 때는 시처럼 읽어야지 사실 언어로만 읽으려고 하면 오해가 될 수 있지요. 예를 들자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44,000숫자를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렇게 얘기할 거구요. 구원에 드는 숫자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참 큰 오해지요. 표현이 참 아름답습니다. 산들은 숫양들같이 뛰놀며, 사실적인 표현은 아닌데, 과장되기도 하고 문학적인데 굉장히 우리들에게 리얼하게 들리잖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어떻다고 하는 거예요?

 

큰 산들이나 작은 산들이 다 양들처럼 말을 잘 듣는다, 산이 직접 움직이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전권, 하나님의 큰 능력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겁니다. 바로 앞 절, 제가 아까 설명한 3절하고 비교해 보세요. 바다가 보고 도망한다, 요단은 물러갔다, 바다가 갈라지고 요단이 멈췄다고 하는 표현하고 산들이 양들처럼 뛰논다고 하는 것들이 사실은 비슷한 방식입니다. 산이 실제적으로 뛰지 않는 것처럼 바다가 실질적으로 갈라지는 거 아닌 거지요. 이해하시겠지요? 아, 그렇게 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면,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 말씀에 어떤 권능, 전능, 성령으로, 거룩한 영으로, 영감으로 된 그러한 권위가 떨어뜨리는 건 아니냐, 혹시 그렇게 생각하실지 모르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은지는 굳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아시겠지요? 예, 그 다음에 5절은 3절이 다시 반복되는 거지요? 예, 5.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대단히 어렵고 품격이 높은 시적표현입니다. 그런 걸 뭐라고 그래요? 사물을 사람처럼 보고 표현하는 거, 의인법이라고 하던가요? 사람처럼 부르면서 표현하는 겁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정말 감동적이었을 거예요. 그 세계가 다 두려웠잖아요? 산들이 화산폭발하고, 바다가 해일이 치고요. 강이 범람할 때도 있는데,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 것들하고 또 주변의 큰 나라들한테 당하는 일들, 또 얼마나 두려워요? 그런데 바다나 산이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는 장난감 같다. 이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 그러한 영적인 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세계가 새롭게 보이는 거죠, 예, 6절은 다시 4절의 반복입니다. 그러니까 3, 4, 5, 6, 이렇게 반복이 됬네요. 3절이 5절로, 4절이 6절로 반복되면서, 이게 점층법이라고 하나요? 하여튼 문학적으로 대단히 세련된 방식이지요? 유월절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강의안에도 썼습니다만 이 시가 언제 나왔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이게 바벨론 포로 전 중간 후 그 지점입니다. 기원전 587년요, 기억하시지요? 587, 그때 전후해서 이 시편이 기록된 것이거든요. 보세요. 가장 어려운 처지에 빠졌을 때에요. 이스라엘 유대가 가장 가련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을 때 바벨론이 모든 패권을 쥐고 휘두를 때, 그럴 때 이런 시를 노래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완전히 세상을 그 시대 사람들이 보는 것 하고는 정 반대로 새로운 차원으로 보는 거지요. 아마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이러한 노래를 듣고, 미쳤다 현실적이지 않다,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러나 유대민중들은 114편을 쓴 이 시인의 영성을 받아 드렸고요. 그렇지 않았다면 이 시편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누가 시작했든지 시편이 시작되면서 유대인 백성들, 유대민중들에게 살아남은 거예요. 그래서 계속, 전달, 전승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안에 들어오게 겁니다. 그렇게 받아 드렸고 결국 이러한 시편의 내용을 통해서 그 고단한 시절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7절과 8절, 이게 결론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시인이 땅에게 명령하는 방식으로 나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가관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7.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이 땅이 혹시 바벨론을 가리키는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이 떤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순종을 가리킵니다. 어린 양처럼 목자 앞에서 말을 들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것처럼 땅이여,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순종해라 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마 이러한 구절들을 생생하게 받아 드렸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희망을 살려 나갔습니다. 예, 우리에게도 이런 영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각각 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하나로 말씀 드리기 힘듭니다만 자연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할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뚫어 보고 살아야 하겠지요.

 

8절은 더 적나라해요. 순종해야 될 이유를 설명하는 건데요, 이렇습니다. 8.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차돌, 차돌맹이로 샘물이 되게 한다, 참 시인들의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이것도 물론 시적인 표현이지요. 어떻게 차돌이 샘물이 되겠어요.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고 하는 걸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 놀라운 얘기지요. 그러니까 창조자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읽는 우리가 이제 바른 걸 찾아야 되요. 이걸 더 오해해 갖고 우리는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든지, 안 되는 것도 무조건 되게 해야 된다든지, 신앙적인 교만, 일종의 패권 같은 그런 쪽으로, 나가면 곤란한 거지요. 이건 고유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대한 영적인 안목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일수록 더 겸손하게 될 거구요. 그리고 기다리고요. 그리고 또 어떤 상황 앞에서도, 어떤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정치, 사회 모든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그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뚫어 보면 두려워 할 게 사실은 없는 거구요. 뚫어보지 않고 그냥 습관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운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다고 하는 것은 정말 생명의 실체의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적인 시각을 맞춤으로써 허상에게 물들지 않고, 허상을 허상으로 볼 줄 하는 영적인 태도, 그런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혼란스러워지면, 이게 잘 안 되거든요, 이게 쉽지 않습니다. 흐트러지게 되면 삶이 뒤죽박죽 되는 거지요. 우상을 섬기게 되는 거지요.

 

허상을 절대화 하는 게 우상 아니겠습니까, 예, 오늘 결론 부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예수님의 부활에서 경험한다. 죽음으로부터의 새로운 생명으로, 그러니까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말한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질적인 변화라고 하는 말은 비슷한 건 설교시간에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실질적으로 잘 생각해 보세요. 이게 잘 잡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참 좋은 시를 읽었습니다. 집에 가셔서도 반복해서 읽어 보세요. 짧은 구절이니까 읽기도 좋고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월절 영성이 아주 깊이 있게 담긴,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탁월한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론된 하나님의 구원행위들이 이제 우리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완성될 날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같이, 주님께서 가르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오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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