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5편 강해-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

 

시편 115편입니다. 1절부터 18절까지 있습니다. 한 목소리로 기도하는 그러한 마음을 갖고 읽겠습니다.

 

1.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2.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3.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4.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8.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9.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2.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14.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16.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17.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18.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시편 115편을 같이 읽었습니다. 오늘 공부의 제목은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입니다. 일단 이 제목을 들어도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가 이 두 가지가 대립된다고 하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사실 이게 딱 선을 긋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성서에 많이 나와요. 특별히 구약성서에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구약성서의 전체적인 배경을 본다면 하나님여호와 신앙과 우상숭배의 투쟁에 대한 보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의 그러한 방식의 이야기들이 나오거든요? 일일이 그걸 다 제가 예로 들어서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알 겁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도 사실은 그런 거잖아요. 갈대아우르라고 하는 곳에서 아버지 데라와 같이 나오잖아요? 갈대 아우르는 초승달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들이야 뭐 어디서나 있었으니까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그런 어떤 것을 절대적으로 섬기지 않으면 사람은 불안해서 견대지 못하는 거예요. 그 만큼 삶의 토대가 약하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인들의 삶을 보면 그건 아주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마치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서너 살짜리가 세계에 대해서 막막하지 않습니까, 어떤 대상인가를 절대화해서 따라야 하는데요. 지역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요. 그걸 Taboo라고 하기도 하고요. Animism이라고 하나요? 동물숭배도 있고요. 우리나라는 호랑이기도 하고, 곰이기도 하고요. 곰을 전 세계적으로 좀 많이 섬겼던 거 같습니다. 샤머니즘이 발달한 데는 그게 강했던 거 같아요. 아브라함이 갈대 우르를 떠났는데 그것도 우상숭배라고 하는 지역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지역 쪽으로 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 가서도 사실은 태양을 섬기는 지역이니까 그들이 이집트를 떠나오게 된 배경 중 하나가 정치경제적인 어려움 민족적인 정체성에 대한 위기도 있겠지만 종교적인 것이 아주 강하거든요. 그 뒤로도 계속 그렇습니다.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거거든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위기를 겪을 때마다 예언자들이 한 경고의 내용은 정치경제적인 것 그러한 것보다 하나님 신앙이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실질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고유한 시각입니다. 실질적으로 주변에 여러 제국들이 많이 있어서 위기를 당하기는 했는데, 군사력이나 정치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런 정치적, 경제적인 위기가 올만한 더 근원적인 사태가 있다고 하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왜곡되었을 때 벌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십계명에서도 첫 항목서부터 셋째 항목까지가 우상에 대한 문제예요. 사실은 그렇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다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런 것들이 다 사실은 우상과 다 연관되는 문제들입니다. 그런데요. 이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어떤 구체적인 상을 만드는 거지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 불안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가시적인 상을 만들어 놓고 그걸 절대화하는 겁니다. 그런데 내면적으로 보면 어떤 피조물의 절대화가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구약성서가 반복해서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우상숭배가 딱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게 당연한 거라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는 거지요. 그러지 않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에게 불에 손 넣지 마라라, 하는 것은 한 번만 경험해 보면 애들은 손 안 넣습니다. 뜨겁기 때문에 그런데 우상숭배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구별되지 않아요.

 

계속 그것이, 사실은 그러니까 여호와 신앙하고 우상숭배하고 중복되어 있습니다. 이게 딱 선을 나눌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는 것을 두 번째 패라그래프에서 제가 설명했습니다. 구별되지 않는 그런 이유가 뭔가 하는 거예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근거가 확연하게 우리 앞에 드러나지 않는 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으시잖아요? 그런 하나님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다시 바꾸어야 되겠네요. 하나님이 확실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의 드러남이 확실하지 않은 겁니다. 눈에 띄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누가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을 가리켜서 오늘, 우리 같이 읽은 115편 시편기자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2절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2.어찌하여 뭇 나라가 이스라엘을 향해서 그렇게 하는 이야기지요?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확실하지 않는 겁니다.

 

주변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조롱한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뭐 계속되는 그런 문제였습니다. 바람처럼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 삶에도 그런 증거들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도 했고, 여러분들도 개인적으로 그런 고민 비슷하게 하고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을 아무리 잘 믿어도 불행을 피할 수 없어요. 불행을 당할 수 있습니다. 불행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은 사람들은 아, 믿어봐야 소용 있느냐, 거꾸로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싶긴 한데 그런 증거가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으니까 믿는 것에 대한 증거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데요, 그것이 기복신앙으로 잘 나타납니다. 그게 확실한 거니까요. 확실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도 드러나게 되고, 자기에게 좋은 일도 일어나고 그러니까 믿으니까 잘 되더라 하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런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그렇지 않다는 말이 좀 해명이 필요합니다. 성서가 그러한 기복이라고 할 때 그 복, 그걸 분명히 말합니다. 아주 구체적으로도 얘기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이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13.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그리 이야기하고 있고요. 아, 12절부터 봐야 되겠군요. 12.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아주 구체적이잖아요? 아주 명시적으로 언급 되었잖아요? 딱 분명한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집에도, 라고 하고, 아론의 집에도 라고 했어요.

 

왜 이렇게 구분했을까요? 그냥 이스라엘 집하면 될 텐데 말이지요. 이스라엘이라고 하면 보통 야곱의 집이라고 하는 뜻도 되고요, 그런데 아론의 집이 나왔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론은 모세의 형이거든요? 제사장 이었습니다. 이 시편 115편은 제사의식에서 불려 지던 찬송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제사장도 함께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아론의 집이라고 하는 것도 포함시킨 거지요. 이스라엘은 일반 사람들, 아론은 제사장의 집, 그러니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 복이 내린다, 고 하는 거지요. 그걸 13절에서 높은 사람, 낮은 사람 등등..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내린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더 나아가고 있어요. 더 구체적으로 14절에 보면 14.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 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이런 것 보면 다 기복적인 거예요. 그렇지요? 우리가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서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건데 이걸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16절에 가면 16.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땅에 대한 축복까지 이야기하는 거지요. 14절은 후손에 대한 축복이고, 16절은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모든 거지요. 사실은요. 이렇게 성서가 복된 삶,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조건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것들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성서읽기의 애로사항이 좀 있어요. 그리고 또 자칫하면 혼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편기자가 어떤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기록 됬다고 해서 무조건 사실적인 건 아니예요. 시를 해석할 때도 어떤 때도 사실적인 것도 있지만 어떤 것도 수사적인 것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암시적이기도 하고, 비유고, 은유 메타포지 않습니까, 이건 누가 봐도 옳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이렇게 풍요롭게 살았나요?

 

아니거든요, 겨우겨우 생존했습니다. 끊임없이 고난 받았어요. 나그네고 방랑자로 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다 아시잖아요? 이집트에 와서 정말 서러움 많이 받다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완전히 민족전체가 말살 위기를 건너오고요. 오죽했으면 그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겠습니까? 만나는 보통 때는 먹지도 못하는 거거든요? 굳이 말하자면 아카시아 꽃 같은 겁니다. 그걸 먹고 겨우 생존할 삶이었고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좀 반짝하고 괜찮을 때가 있었습니다만 주변으로부터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제국이 주변에 많았잖아요? 아싯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등등해서 끊임없이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시편을 기록 될 당시가 어떤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시편은 바벨론 포로 전후예요.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땅도 잃고 후손도 잃고 다 잃었어요. 사실은요, 실제로 없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실적인 게 아니라고 하는 게 분명합니다. 이게 그럼 무슨 얘기냐, 혼란스러운 거지요. 이런 말씀을 보고 무조건 하나님이 여호와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 주신다고, 이것을, 그냥 약 장수처럼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하거나 받아 드린다는 것은 성서기자의 영성을 조금 세속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기자가 쓴 것은 분명하잖아요? 이렇게 기록한 건 확실한 거 아니겠습니까? 시편 기자가 무슨 근거로 여호와의 복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시편기자의 이러한 진술은 자기들이 현재 있는 그 삶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실제 삶은 어때요? 가난하고 힘들고 땅 잃고, 포로로 잡혀가고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그런 것을 확인해서 쓴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온 거예요. 이 사실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어떠한 삶의 방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예요? 하나님 관점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뭘까요? 그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른 분이십니다. 3절에 그렇게 이야기해요. 3.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이 이야기는 우주공간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주공간에 하나님이 계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고대인들은 그 방식으로 생각 할 수 밖 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건 고대인들의 신화적인 세계관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구요. 우리보다 질적으로 다른 어떤 근원적인 분이다. 그것을 하늘에 계시다 하는 말로 표현 한 겁니다. 그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그 분은 3절 후 반절에 말씀 하시기를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절대적인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러한 절대적인 분이 바로 15절로 넘어와서 기록되고 있는 창조자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지요.

 

앞 절과 뒷 절을 제가 연결했는데, 이게 너무 비약이 된 거 같이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시편기자의 영적시각을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예요. 이 현실은 고달파, 땅도 잃고 후손도 잃고 민족이 완전히 멸절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다 파괴되고 기물을 다 빼앗기고 지도자들 다 포로로 잡혀가고 그 지역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면서 바벨론 관리들이 들어와서 이끌어가고요, 풍지박산 될 때거든요? 현실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한데 그러나 시편기자는 그 눈 앞에 벌어지는 현실에 영적시각이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데로 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지요. 하늘에 계신 분이고, 전능하신 분이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일단 이걸 전제하는 거예요. 이걸 전제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온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지난 번 공부했었나요? 어떤 구절을 설명하면서, 연역적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의 관계라고 한다면 당연히 오늘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걸 희망하고 그것을 또 기다리고 그것을 이미 끌어 당겨서 아직 미래이지만 현실로 끌어 당겨서 살아 내는 거지요. 그게 이 시편기자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마치 부활을 오늘 현실로 아직 오지 않은 거지만, 끌어 당겨서, 그걸 선취(先取)라고 하거든요. 선취적으로 끌어 당겨서 살아내는 것처럼 시편기자가 그런 시각으로 그 당시의 그런 고난과 시련과 어둠의 시절을 넘어 선 거지요. 놀라운 영성입니다.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그건 아주 꿰뚫어 보는 거예요. 왜 그러냐, 그게 꿰뚫어 본거냐,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온다고 하는 것은 창조자이고 전능하신 분에게서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복을 설명하려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복을 설명하려는데 다른 길이 없는 거예요.

 

고대인들에게는 후손과 땅이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다 그랬어요. 이 후손과 땅 이외의 것들은 예를 들자면 건강이나 농사에 관한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따라 다니는 거지요. 같이 연결 되서 나오긴 합니다. 그러니까 성서기자들도 복의 내용들을 이런 방식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밖 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생존의 절대적인 조건들을 보장받는다고 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하는 말이 되는 거지요. 아브라함 전승에서도 약속으로 땅과 후손을 주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그런 영적인 시각을 좀 이해하셨지요? 겉으로 굉장히 기복적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근원적인 것에 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 기복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그건 그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일반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끌여 들여서 설명한 것 뿐이다. 그렇게 보면 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어린아이가 자기 친구에게 아버지 어머니가 자기가 사랑한다고 사실을 장난감을 선물 받은 것으로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아이가 장난감에게만 마음이 머물러 있다면 좀 우스운 거잖아요?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가 더 중요한 것 처럼요. 구약성서도 그렇습니다. 조금 더 실제적으로 보지요.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 그것은, 이건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자체로 완성 될 수는 없는 문제들입니다. 앞서 잠깐 설명해 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후손과 땅을 잃어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건 아무리 성취하려고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이 지구 안에서는 결국은 서로 많이 갖자는 투쟁이기 때문에 모든 세계 사람들이 다 선진국처럼 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의 수준으로 유복하게 산다면 지구의 에너지는 살아남질 못합니다. 이건 아예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문제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후손이 많아지고 땅이 많다고 하더라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여러분들이 다 경험하실 겁니다. 만약에 이 신앙문제를 후손과 땅의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우상숭배하고 다를 게, 사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상이 약속하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내용에 들어가면 똑같습니다. 더 엄격하게 얘기하면 우상숭배는 그러한 점에서 땅과 후손이라고 하는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 신앙보다 성격이 더 강합니다. 그건 노골적으로 그걸 얘기하는 거예요. 가나안에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있었어요. 이것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풍요와 다산입니다. 이걸 보장하는 신이 바알과 아세라였어요. 이것은 땅과 후손의 문제거든요. 만약에 이 땅과 후손이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게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계속해서 바알과 아세라 신상에 기울어졌잖아요?

 

여러분들이 참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지요? 아,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출애굽 시켜주시고 40년 광야에서 먹여 살려주시고 적군이 올 때마다 사사시대에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살리셨는데 왜 자꾸만 가냐, 이상하죠? 사사 시대 때 반복 되었습니다. 사사가 일어나서 승리하면 또 타락해서 바알 섬기고 또 반복 됬습니다. 이상하다, 생각되지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기복신앙에 빠지는 것 하고 다를 게 없습니다. 똑 같습니다. 제가 언제 설교할 때 예를 들었던 것처럼 그게 극단화 되어 갖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아세라, 바알신상이 세워 진 일도 있었습니다. 혼합주의지요. 결합 되는 거지요. 이게 굉장히 매력적인 거예요. 하나님도 섬기고 복도 받고, 이러한 것들이 인간의 심리이기 때문에 아, 왜 저렇게 하노? 우리가 너무 결벽하게 말할 수 없는데 그건 정상은 아닙니다.

 

그래도 근본이 뭔가는 우리가 알고는 있어야지요. 우리가 잘 되고 후손도 잘되고 건강하게 살게 되는 것, 그런 것에 대한 기대는 인지상정이니까 우리가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서의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면 우상숭배에 성격이 거기에는 다분히 많이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뭐냐,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냐, 그런 마지막 질문이 있죠. 후손과 땅은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생명의 문제예요. 고대인들을 후손과 땅이 있어야 생명 이 연장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굉장히 직관적이예요. 그건 틀린 게 아니예요. 우리가 일단 무엇을 먹어야 사니까 후손이 있어야 우리가 연장된다고 생각하고요, 또 유교적이거나 샤머니즘적인 차원에서 보면 내가 죽어도 후손이 제산을 드려 줘야 내 영혼이 산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이 없을 때는 양자를 얻어서라도 제사 받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죽은 혼령이라고 제사 드려줘야 어떤 생명이 연결 된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고대인들의 생각이니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생명의 이해가 어떠냐에 대해서 이런 모든 문제가 달라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으면서도 근본이 뭐냐를 찾아야 하고요. 그리고 신약의 차원에서 새롭게 또 이해해야 하고, 신약도 2000년 전의 문서잖아요? 지금과 2000년 전하고는 생명에 대한 이해가 다르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이해 안에서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근본을 찾아내야 되는 거지요. 생명에 대한 문제예요. 생명에 대한 약속이예요. 그러니까 후손과, 땅, 아브라함에게 땅을 준다, 후손들이 티끌처럼 많아진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보장하겠다고 하는 얘기거든요. 그런데 이런 성서기자들이 고대인들의 그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긴 있지만 중요한 걸 놓치지 않고 있어요. 뭔지 아시지요?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걸 전달하는 방식은 고대인들이 어떤 신화적인 그런 방식이었지만 핵심은 달랐습니다. 우상들과 다른 거지요.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바로 섬겨야 된다, 피조물 그 어떤 것, 우리의 생명을 풍요롭게 할 것처럼 생각하는 금송아지들, 이걸 거부해라, 생명이 주인이 누구냐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뚫어보고 있어라, 하는 거지요. 그냥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생명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럼 대충 우리가 살면 됩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냥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아직도 숨어 있는 거라고 보잖아요? 생명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거잖아요.

 

그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열린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로 우리가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더 집중하는 것이고요.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들이 약속하는 다산, 그리고 농사 풍년 드는 것, 이런 것에 우리 생명을 걸어 두지 않는 거지요. 그러나 또 그것이 없으면 살 수는 없습니다. 농사도 필요하고 후손들도 필요하지만, 그걸 절대화 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이 생명관에서 우상들은 근본적으로 무능력한 거예요. 성서가 그걸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열정적이고, 뜨겁고, 숫자놀음하면서 대단한 것 같지만, 아주 무능력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걸 구약성서도 정확하게 뚫어 봤어요. 그러니까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 거지요. 재미있게도 오늘 5절에서 7절에 보면 그 사실을, 어떤 사실요. 우상들은 생명에 관해서 무능력하다고 하는 사실을 풍자적으로 묘사합니다.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거거든요? 아주 정확한 이야기예요. 오늘의 어떤 자본주의에 대한 것을 그대로 적용시켜도 됩니다. 굉장히 큰 힘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근본에서는 무능력한 거거든요. 겉으로만 그럴 듯한, 포장만 잘 된, 실제 생명에서는 무기력한 존재들이 우상이라고 하는 거지요. 오늘의 우리가 개인의 사적인 소유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체제도 우상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에까지 수단화 하고 이용하는 삶의 태도들이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뚫어 보는 것이 영성이겠지요. 쉽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거기에 약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하기도 하고요.

 

더 근원적으로는 생명이 뭐냐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우상숭배는 계속 반복된다, 구약에 있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까지 수 백 년 반복 되었던 그런 일들이 성서만이 아니라 오늘 시대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다 얼굴을 얼굴로 보는 것처럼 아는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주어졌어요. 우리는 참된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은 사람들입니다. 계속 우리가 할 일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그 분의 약속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꾸준하게 알아가는 일입니다. 가장 필요한 일이지요. 그러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많이 알수록 우리의 영혼이 생명의 토대를 그 쪽으로 옮기게 되거든요. 자연스럽게 실제로 뭐가 우리 생명을 풍요롭게 하는지 어떤 것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도 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이천 수 백 년 전에 가나안 어느 땅에서 살았던 어떤 영적인 시인, 신앙인 혹은 어떤 공동체가 우리들에게 전해 준 시편 115편 말씀을 읽고 공부했습니다. 생명에서 무능력한 우상에게 기울어졌던 그러한 악순환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서 반복되지 않도록 저희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열어주신 놀라운 부활생명에 세계에 대해서 우리 영혼이 늘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생명이 우리들에게 실체로 온전하게 드러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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