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시편은 28입니다. 먼저 제가 1절부터 8절까지 읽겠습니다.
[1] 야훼, 나의 반석이여 이 몸이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귀를 막지 마소서.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이 몸은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사람과 다름없사옵니다. [2] 당신의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살려달라 애원할 때,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3] 악인들과 더불어, 죄인들과 더불어 이 몸을 끌어내지 마소서. 입으로는 이웃에게 상냥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엉큼한 생각을 품는 자들입니다. [4] 그들의 행실 따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 따라, 그들의 소행 따라 마땅히 갚으소서. [5] 야훼께서 하신 일, 손수하신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부수어주소서! [6] 나를 어여삐 보시고 내 기도 들어주신 야훼여, 찬미받으소서. [7]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방패, 나는 진심으로 그분을 믿고, 믿어 도움받은 것, 내 마음 기뻐 뛰놀며 감사하리라. [8] 야훼,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손수 세우신 왕을 건지시고 지키시는 분이여, [9]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고 당신의 유산에 복을 내리소서. 언제까지나 메고 다니며 보살피소서.아멘

요즘 밤기온과 낮기온의 일교차가 심해서 그런지 조금 목소리가 조금 탁해졌습니다. 원래 목소리가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요. 요즘 조금더 목소리가 잠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시편 공부에서도 조금 불편한 부분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시편 28편 이것은 이 제목을 제가 참고하고 있는 성서주석에 나와 있는대로 일단 ‘하나님의 침묵’ 이렇게 잡았습니다. 제가 보는 성서주석은요. 국제성서주석이구요. 여러분에게는 잘 보이지 않겠는데요.  아투르 바이저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아투르 바이저. 그러면 이런 이름, 스펠링만 보면요. 독일 사람인데요. 그런데 원서 제목이 The scilence
이것이 영역되었고. 그 영역을,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에요. 영어로 되었고 그것이 다시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군요. 중역을 한계 긴 말을 드릴 필요가 없겠죠. 그러나 없는 것보다 다행입니다. 독일어 제목은 디 잘리멘. 발음이 약간 다르죠. 책, 약간 두꺼운 겁니다. 여기에 제목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21, 시편이 전체로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1권에. 하나님의 침묵, 네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이 침묵한다. 그러면 또 하나님이 또 말씀하신다. 또는 하나님이 행동하신다는 말이 가능하겠죠. 어떤 때는 하나님이 행동하고 말씀하시지만 또 어떤때는 아무 행동도 안하시고 침묵하신다. 그렇게 들립니다. 실질적으로 그렇지 않겠죠. 하나님이 어떻게 침묵하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의 다른 면을 우리가 경험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거죠.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거죠. 그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침묵으로 하나님의 행동하지 않으심으로 이렇게 전달될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는 참 절망적이죠. 힘들죠. 오늘 여기 시편기자도 그러한 경험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바탕에 깔구요. 우리가 한 절 한절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텍스트에 들어가기 전에 한 말씀 더 보충을 해야 되겠군요.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하는 그러한 어두운 상황속에 있지만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행위하시라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자기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쪽으로 이 시편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편을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5절이 한 단락이고 6-9절이 한 단락입니다.
앞단락은 하나님의 침묵, 외면 이런 경험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탄원하는 그런내용이구요. 6-9절 두 번째 항목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전제하고 그러한 신앙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 찬양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예요.

1절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야훼, 나의 반석이여 이 몸이 당신께 부르짖사오니, 귀를 막지 마소서.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이 몸은 깊은 구렁에 떨어지는 사람과 다름없사옵니다.
귀를 막지 마소서. 또 외면 하시면. 이런 표현들이 하나님의 침묵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이것이 연달아 두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의 상황이 이러한 표현에 담겨있는게 아닌가 일단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귀를 막지 말아달라고 하는 그러한 간절한 기도죠. 하나님이 외면하실지 모른다고 하는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겠죠. 아마 이러한 상황이 이 사람이 처한 구체적인, 사실적인 상황이 아닌지는 지금 우리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듭니다. 이 시편을 해석한 성서학자도 그렇게 말하고 있더라구요. 이게 어쩌면 그럴 가능성이 완전히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구요. 그러나 그것이 꼭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렇습니다. 이 두가지 가능성을 다 열어놓을 수 있죠. 먼저 가능성만 본다면 이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상황일까요? 아마 여기 오늘 이 시편 강의를 듣는 사람들중에서도 그런 경험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위기가 오는데 그것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구요.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싶은데 그러한 위로도 경험되지 않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 하나님, 여기 귀를 막지 마소서. 외면하지 말아달라 그러한 호소를 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메시지, 그런 것들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러한 표현들을 성서에서 많이 듣고 있긴 있는데 그게 실질적으로 어떤 건지는 사람들은 잘 알지를 못합니다. 잘 알지 못한다는 말보다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때가 많고요. 또 다른 차원에서는 좀 왜곡된 상태로 그거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자기합리화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업이 정말 안돼서 부도 직전에 몰려서 죽느다 그럴 때 부도가 잘 해결되었다거나, 예를 들자면요,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다 그러한 생각도 가능하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을 기계적으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기도를 들어주시는 기도의 응답으로 생각한다면 성서기자들이 말하는 어떤 영적 깊이하고는 거리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거죠. 그러니까. 어떠한 어려운 상황들이 실질적으로 해결되느냐 안되느냐는 것은 그것은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기는 하구요. 또 그런 일들이 잘 해결되면 응답이 잇다 그렇게 쉽게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서울쪽에 예배 드리는 그러한 장소문제로 희망봉 닉네임 가진 그분 전화를 하고 그랬었는데요. 마침 좋은 쪽으로 결정될 것 같습니다. 내일이겠군요. 준비위원들이 회의를 해서 결정하겠는데 일단 거의 좋은 쪽으로 결정될 것 같습니다. 교회 건물 지하인데. 담임목사님이 흔쾌히 우리가 주일저녁 6시부터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셔서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시기로 했습니다. 거기에 몇몇 준비위원들이 방문하고 돌아왔어요. 전화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서울 샘터교회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거네. 그러한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대상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바람직한 신앙이라고 하기는 좀 힘들죠. 그게 신앙이 아니라고 또 제가 잘라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나 원하는 부분들이고 또 그러한 방식으로도 하나님이 응답하실 개연성을 닫아 둘 수 없는데요. 그건 사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이나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느냐 안 이루어지느냐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미 응답하시는 거거든요. 그 단계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그거는 말이 잘 되지 않는다. 자기에게 잘 이루어지 않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혹은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자기를 합리화 하지 않느냐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성서기자도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해결되는지 안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사람이 하나님이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자기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그것으로 응답이 이루어지는 거죠. 무슨말씀인지 이해를 하시겠죠.

네. 하나님의 응답, 귀를 막지 마소서, 외면하지 마소서. 이러한 기도속에서 하나님은 결코 어느 상태에서라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외면하고 계시지 않느냐 오해하고 있는 것이죠. 그 오해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우리의 삶의 형식들과 비교해서 설명하니까 똑 아주 바로 그거다. 똑 같은거다 할 수 없지만 간접적으로 그런 비유는 가능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너무에서 아이들이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당장 아이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부모들이 자기들을 내버려둔다, 관심없다
그렇게 오해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런 것처럼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씀이죠.

2절에 이 사람이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살려달라 애원할 때, 내 소리를 들어주소서. 1절과 2절에 이렇게 간절한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지성소로 두 손을 들었다.’ 지성소요. 가장 거룩한 곳이죠. 손을 드는데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원하는 자세로 손을 드는 거겠죠. 지성소라고 하는 말을 좀 더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성소, 가장 거룩한 곳이요. 과연 그곳이 어디일까요? 구약의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의 어느 한 곳을 생각했겠지만 이미 시편 기자들과 여러곳곳에 나오는 성서 기자들의 기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이 그러한 장소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시거든요. 지성소라고 하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한 곳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거는 큰 의미가 있기도 하고 또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종교적인 건물들, 거기에 어떤 거룩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한다고 하는 점에서는 그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도 그런 점에서 아주 중요한거죠. 어떻게 보면 주일날 시간을 맞춰서 드리는 예배, 거기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모든 시간 모든 공간이 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시간이고 장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우리의 영혼만 열어놓을 수있다면 어디서도 그것이 다 그것이 다 예배겠죠. 우리가 밥먹는 행위도 또 그런 차원에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번 이렇게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형식에 의해, 예전이라고 하는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이 태도는 큰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게 교육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하구요. 우리가 그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예배의 차원으로 돌입한다고 하는 그러한 훈련이라고 하는 점에서도 중요하구요. 그러한 교육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고. 또 하나는요. 그게 제가 정확하게 정의되지 않아서 단어로 말씀드리기 힘드네요. 교육적인 것만 아니라 또 근원적인 어떤 중요성이 있다고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그게 개념으로는 조금 정리가 되어 있지만 정확한 용어를 찾기가 힘드네요. 그러니까 언어라고 하는 것이 참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해요. 언어가 없으면 하나님의 계시도 정확하게 전달이 안되니까요? 특별히 우리 신학의 역사가 담긴 서양 철학사라고 할까? 신학사라고 할까, 그런데서는 언어가 핵점적인 역할을 하거든요.

예를 들면 루아흐라는 단어만 하더라도 영, 바람 등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습니까? 루아흐라는 단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다른 것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존재론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이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장소에서 예전적 형식에 따라 예배드리는 이 행위는 교육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하다 그 양면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는데요. 그런데도 제가 대충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지 전달이 되었으리라고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전, 거기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씩만 들어간다고 하죠. 거기서 모든 죄를 사하고 그 백성들을 위해 특별을 의식을 행한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예루살렘에 있는 일정한 장소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시편 기자들과 다른 성서기자들 예언자들이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이 그곳에 갖혀 계시는 것이 아니죠. 온천하가 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니까요.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세계전체 우주전체가 다 성전입니다. 전체가 다 지성소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모든 세계를 성전으로 이해하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 성전일 뿐만 아니라 지성소라고 하는 그러한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그렇게 해야 좋다고 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지성소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수평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공간을 의미한다고 하기 보다는 수직적인 차원에서의 어떤 깊이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좋은 계절 가을에 숲속에 들어가서 어떤 생명에 농축된 현상들을 만난다고 할 까요? 여기에 생명의 영이 개입하고 있는 생명의 신비를 우리가 만약에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을 지성소라고 할 수 있겠죠. 오늘 여기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시편기자의 이러한 영적인 상태를 우리가 배운다는 차원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지성소를 향해서 손을 드는 거와 같은 그러한 차원으로 나가자. 나가야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3절에서 악인들에 대한 징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죠. 

[3] 악인들과 더불어, 죄인들과 더불어 이 몸을 끌어내지 마소서. 입으로는 이웃에게 상냥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엉큼한 생각을 품는 자들입니다. 아마 이 사람은 악인들과 더불어서 자기도 같이 휩쓸려서 파멸될까 두려움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자기 친구들의 우정에 대한 회의, 근본적인 회의, 그런 것도 있겠죠. 친구들은 겉으로는 웃음을 띠고 화평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모습은 거기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도 우리 일상적인 삶에도 그러한 친구가 원수처럼 되는 그런 경우들이 없지 않아 있죠. 친구가 누구냐 그러한 것도 또 생각을 보아야 될 문제입니다만 다정한 친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같은 회사 같은 동아리나 같은 이웃이라든지 그렇습니다. 친속관계는 다를 수 있는데요. 어쨌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사이에서 이중성 그런 것들을 경험할 때 좌절감, 이런 것을 우리는 여기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상냥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속으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이러한 사람들 틈에서 이 시편기자는 실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기도하는 거죠.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배신감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행한대로 갚아라 저지른 죄악에 따라서 갚아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조금 바람직하지 못한게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거는 우리 제3자 입장에서 그런 거구요. 이건 어떤 사람을 향한 증오심이라기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증오심으로 원수,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대할 수 없는 거거든요. 원수에 대한 그러한 증오심, 그런 것들에 대해서 나왔다기보다도 다른 차원인거죠. 다른 차원인데 기본적으로 우리가 보면 이 사람이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거예요. 보통 같으면 나서잖아요. 정의감에서라도 나서서 어떻게 하는데 시편기자들은 모든 원수 갚은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증오심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한 거죠. 이게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겠어요. 실질적으로 자기가 당한 것을 똑같이 갚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서로 악순환이 벌어지게 되니까요악이 재생산이 되는 구조적으로 빠지게 되니까 이걸 하나님의 손에다 맡기는 겁니다.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하나님의 덕분으로 원수갚으려고 하는 것이아니냐 그런 방식하고도 좀 다른 것입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하소연들이 많이 있는데요. 이것은 실질적인 원수에 대한 미움과 증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전제하고 읽으셔야 됩니다. 시편 묵상이라든가 그런 책을 로이스가 썼던가 그런 책이 있는데 제가 몇 달 전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나중에 제가 시간있을 때 제가 소개하기로 하구요. 거기서도 그분이.. CS Lewis 가 맞을 것은데. 아닌데. 제가 나중에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도 시편 기자들이 노골적으로 분노를 하나님을 통해서 표현하는 것과 같은 그 이야기들은 단순히 원수 갚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오늘 여기서도 일단 자기가 직접 원수 갚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고요. 자기가 원수 갚을 테니까 힘을 주십시오. 이렇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 맡기는 거구요. 이것은 곧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떨까요? 이 시편기자가 악인들을 소행대로 갚으시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렇게 들으셔서 했을까요? 이런 문제도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원수갚아 달라고 해서 원수가 급살맞는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집안이 풍지박산이 난다는 방식으로 일이 해결된다면 참으로 곤란한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은 삶이 잘 안풀리는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하죠. 물론 욥기서 이런데 보면 사탄의 시험으로 욥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러한 이야기들은 특별한 그러한 이야기들은 다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래서요. 그 욥기서를 보고 하나님이 직접 심판했다 복을 줬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그거는 성서 텍스트의 깊이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욥기서 까지는 가지 말고요. 하나님이 심판한다고 할 때 겉으로 드러나게 망한다 이런 식으로가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행위, 혹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악인들의 행위들은 이미 그 행위자체가 심판인거예요. 이해하시겠죠. 그러나 동의하지 않으시나요? 악인든 완전히 지옥불에 들어가서 고생해야지만, 삼족이 멸해야지만 그게 하나님의 심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악이 실행되는 순간에 이미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지요. 왜 그런지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실겁니다.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자기 존재 근거를 허물어 버리는 거거든요. 그래도 그렇게 하게되는거예요. 판넨베르크의 어느 설교에 보면 하나님은 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멋대로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심판하신다고 했는데 표현했는데 저도 옳다고 봅니다.


이 시편기자가 행한대로 갚아주십시오. 했다고 해서 그들이 당장 망한다고 한다거나 그런 방식이 아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모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5절에 그렇게 나와 있네요. [5] 야훼께서 하신 일, 손수하신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짓부수어주소서!
하나님의 일, 그 자체를 아랑곳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악이고 죄이고요. 그 자체가 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ㅣ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는 어떤 행위도 가치 있는 것이 없구요. 구원이 아니고 우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심판이잖아요. 가면 갈수록 사실은 근본적으로는 겉으로는 파괴되지 않는 것 같지만 승승장구하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전달이 되었죠. 이까지가 앞부분입니다. 1절에서 5절까지, 하나님에 대한 탄원, 간절한 하소연 그런 것들이구요.

6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6] 나를 어여삐 보시고 내 기도 들어주신 야훼여, 찬미받으소서. 금방 들어주신 것처럼 표현이 되잖아요. 아마 시편기자가 1-5절까지 탄원기도를 드리면서 그 기도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을거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일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는 그대로 이실직고라고 할까? 있는그대로 자기의 속 중심을 자기 존재전체를 자기의 영혼이죠. 말하자면. 영혼이라고 하는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몸과 대별되는 어떤 차원에서 정신적인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성서에서는 몸과 육으로 이렇게 구분은 하지만 분리하지는 않거든요. 통전적으로 다 인간인거예요. 그런데 인간 생명에 생물학적인 차원이 있고 영적인 차원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을 더불어서 생명의 가장 심층에서 작용하는 생명현상의 힘, 이런 것들을 우리는 영혼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니까요. 관계를 맺는 것이 기도잖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과정에서 이미 그것이 응답인거예요. 참 그것이 놀랍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머니 아버지하고 꾸밈없이 이야기하면 거기서 다 부모의 사랑이라고 할까. 그런 것들이 전달되므로 모든 것이 다 치료되잖아요. 상처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정말 참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정말 그 기도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승화될수 있을 겁니다. 


저는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것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위치는 아닌데요. 앞으로 제가 기도문제에 더 신경을 더 써볼 생각입니다. 오늘도 제가 책꽂이에서 발견한 것인데요. 영혼의 기도라고 되어 있지요. 포사이 세시움, 유진 피터슨이 서문을 썼구요. 제가 출판사에서 선물을 받았어요.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출판사에서요. 이걸 좀 더 이번 가을가기전에 차분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기도가 약해요. 그래도 지금 말씀드린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소통인 기도자체가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루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아주 실질적으로 모든 것이 손에 잡을 정도로 실증적으로 이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잖아요. 이것은 조금 수준낮은 신앙입니다. 신앙이라고 할 수 없겠죠.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루어진 것으로 이미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죠.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순간에 이미 그것이 바른 기도라고 한다면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칼을 달라고 그런 기도를 하면 되지않겠습니까? 그게 바른 기도라고 한다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미 이것은 이루어진 것 이지요. 결과에 상관 없이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이미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다 아시겠죠.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어떤 올드 미스가 결혼하기 위해서 기도했다고 합시다. 정말 자기가 마음을 비우고 고양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면 실질적으로 남자를 만났든지 못만났든지 이미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거예요. 어느쪽이든지 거기는 하나님이 충만하시기 때문인거죠. 그거는 여러분들이 이미 아시겠죠?

야웨여 찬미받으소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7절에 야훼는 나의 힘, 나의 방패, 나는 진심으로 그분을 믿고, 믿어 도움받은 것, 내 마음 기뻐 뛰놀며 감사하리라. 앞에서 그렇게 힘들던 사람이 곧 찬양하는데 돌아서잖아요. 결국 기독교 신앙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까요. 거기에는 찬양, 영광송이죠. 독솔로지라고 하지요. 영광송이죠. 죽음이 눈앞에 임박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영광찬양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단계, 그게 마지막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주 최고봉, 영성의 최고봉 그 단계에 들어가면 찬양이죠. 틀림없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 뛰놀고 찬양하죠.

그 뒷부분에서는 자기 백성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중재기도죠. 9절만 볼까요. 당신의 백성을 건지시고 당신의 유산에 복을 내리소서. 언제까지나 메고 다니며 보살피소서.이 유산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야기하죠. 언제까지나 메고 다니며 보살펴 주소서. 어머니가 아기를 등에 둘러메고 다니듯이 백성들을 보살펴 달라고 하는 기도, 중보기도죠. 모든 기도의 기초가 중보기도죠.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보다도 누구누구를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라고 하더라도 일종의 중보의 차원에서 기도하는 거죠. 이기적인 차원에서는 그거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주세요. 뭐 주세요. 어떻게 이걸 기도라고 할 수 있겠어요.


제가 기도문제, 제가 가장 약한 문제인데 신학적으로도 기도는 중요한 부분이구요. 칼 바르트도 그런데에 대한 글도 많이 썼을거구요. 제가 어떤 면에서 솔직한 고백을 드린다면 한국교회의 기도 열광주의에 대해 조금 제가 거부감을 청년시절부터 갖고 있어서 일부러 그런쪽으로 많이 나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적으로 제가 철이 덜 들었다고 하는 것인지 모르죠.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합리화도 많이 하죠. 아 내가 늘 스물네시간 주님과 영적으로 호흡하는 거교. 내가 숨쉬듯이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굳이 내가 일정한 형식과 자세를 갖추어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생각을 한거거든요. 이게 꼭 옳은 것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이 있지 않는 사람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어떤게 옳은 기도냐 말씀드릴 수 있는거죠 중보기도다. 참된 기도는 중보기도다. 나를 위해서도,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를 중보하기 위한 차원에서도 드리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열광주의, 이기적인 건데요. 심지어는 교회강단에서 목사가 이런 기도도 드리잖아요. 우리교회에 십일조 천만원 할 수 있는 그러한 사업가 나오게 해 주시고. 이런 이야기 말이죠. 완전히 성서와 기독교 신앙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그런 기도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애기는 할 필요 없죠.

오늘 공부 다 마쳤습니다. 제목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었는데 그러나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새로운 영적인 단계에 도달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는 그러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그런 상태로부터 하나님을 찬양하고 중보의 기도까지 가는 신앙적 발전, 신앙적 성숙 이런것을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시편 28편, 혼자라도 많이 읽어보시고 묵상 보십시오. 오늘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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