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6편 강해-감사의 노래

 

오늘 우리가 공부할 시편 말씀은 116편입니다.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한 절 읽고 여러분이 한 절 읽고 나누겠습니다.

 

1.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13.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16.여호와여 나는 진실로 주의 종이요 주의 여종의 아들 곧 주의 종이라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17.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8.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을 그의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내가 지키리로다

19.예루살렘아, 네 한가운데에서 곧 여호와의 성전 뜰에서 지키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201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2011년이라고 따로 어디 있겠습니까? 긴 시간 가운데서 사람들이 편리하게 붙여 놓은 숫자예요. 이런 시간들이 얼마나 지속될지 우리가 모릅니다. 당장 내일 모레라고 하더라도 이런 시간들이 단절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생태계의 균형가운데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거예요. 이제 시작했습니다. 2011년도, 앞으로도 계속 시편을 공부할 텐데 아마 금년 안에 다 끝날까요? 거의 그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말씀은 시편 116편입니다. 제목을 <감사의 노래>라고 했어요. 그 시편에는 여러 종류의 시들이 있습니다. 기도라고도 할 수 있고, 이건 개인이 부르는 찬송, 기도일 수도 있고, 공동체에서 드린 것도 있습니다. 일단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머리 속에 넣어 두세요. 전승이예요. 전승,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딱 누가 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힘듭니다.

 

물론 다윗의 시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요. 거기 다윗이 했다고 그렇지만 다윗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빌린 것 뿐이고요, 그건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주 독특한 신앙경험에서 나온 찬송가, 찬송시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여러 종류가 있어요. 탄식도 있고요. 탄원, 탄원하고 어떻게 다를까요? 간구도 있고 찬송 중보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 116편은 “감사의 노래“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학자들도 분류를 합니다. 시편을 이런시 저런시, 감사시로 분류를 하거든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그것이 응답받은 것에 대해서 우러나오는 감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서원제와 감사제로 드린 거예요. 그 서원이 뭐냐, 감사가 뭐냐, 그런 것은 여러분들이 아시겠지만, 뒤에 조금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면 일단 우리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쭉 공부해 왔는데, 거기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게 많았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원수를 갚아 달라는 증오에 찬 소리도 좀 들리는데, 그래서 그런 건 좀 불편한데, 이러한 감사시는 평화롭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에 대한 특별히,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거지요. 영적인 깊이로 또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 전체 흐름은 이거예요.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서원제와 감사제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핵심구도는 그렇습니다. 예, 그 내용들을 조금씩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바로 전체구도가 그렇다고 하는데서 여러분들이 알아차렸듯이 1절에서 시편기자는 그렇게 말합니다. 이건 뭐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명시적인 진술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귀를 자신에게 기울이셨다고 하는 겁니다. 들었던 이야기지요? 우리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솔직하게 질문해 보세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귀가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귀를 기울였다고 해요. 그건 문학적인 수사인가요? 음성과 간구를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게 무엇일까를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들은 풍월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그 분이 들으시지 뭐가 이루어졌지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는데, 그건 더 노골적으로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 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 시편기자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말할 수 있기는 있는데요, 그렇게 응답되었다고 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건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죽을병, 난치병에 걸렸을 때, 한국교회는 그런 게 유독히도 많으니까, 그게 간혹 있습니다.

 

자기가 어려운 병에 걸렸을 때 기도해야지요. 그런 걸 기도하지 않는 게, 그러니까 간구하지 않는 게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그리고 어려운 병이 걸린 가족이 있거나 또 친구들이 있거나 우리 교우들이 있다면 마땅히 기도해야지요.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라 직업적으로 이런 것만 하는 일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건 건강한 건 아니지요. 어쨌든 우리나라에게만 있는, 아, 우리나라에게만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기독교 전통이 있는 곳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문제들을 신앙의 중심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조금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난치병이나 죽을병이 걸린 사람이 기도한다고 해서 다 낫는 건 아니잖아요? 좀 옆으로 나가는 이야기입니다만, 손아무게 장로님이 그런 신유집회를 많이 하시는데, 그런 것들이 열광적입니다. 딱 눈에, 그 자리에서 낫는 것 처럼 보이니까 얼마나 혹하겠습니까, 정말 그게 그렇다면 그 분이 온 누리교회 장로님이신데, 온 누리교회 목사님의 병을 낫게 하든지 어떻게 해야 할 텐데, 다른 쪽으로만 자꾸 한단 말이예요?

 

병이 걸리게 되면 마음이 약하게 되거든요? 그렇게라도 위로를 해 주지 그런 정도로 보아 넘긴다면 보아 넘길 수 있습니다는 정직한 건 아니거든요? 다 낫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도했습니까? 기도원, 기도원마다 그걸 수 십 년 기도했는데요? 그런데 다 무조건 응답되는 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질문할 것은 왜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시고 어떤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실까, 하는 겁니다. 나는 응답에 확신을 얻었다, 그런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자기 확신이라고 하는 것하고 응답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거든요? 무조건 응답받을 때까지 작심하고 하는 기도가 옳은 기도다, 그렇게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런 기도를 일컬어서 뭐라고 이야기하지요? 될 때까지 하는 기도 있지 않습니까? 유명한, 강청기도라고 들어 봤어요? 성경에 나와 있는 어떤 과부가 억울한 일을 재판관에게 들어 줄 때까지 간청했다고 해서 이야기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서 해석이라고 하는 게 자칫하면 이현령비현령이 될 수 있거든요? 저는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씀 드린다면 기도無用論者가 결코 아닙니다. 당연히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의 간구를 드려야 됩니다. 예, 그런데 그걸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고 하는 거구요.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는 들으시고 어떤 기도는 들으실까요? 예, 제가 그 강의안에 썼습니다만 일단 듣는다, 안 듣는다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응답받았다, 안 받았다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도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런 것에 매달리게 되거든요? 기도는 영혼의 깊이로 들어가는 경건행위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실은요, 영혼의 깊이요. 그러니까 우리 생명의 가장 심층의 차원에서 움직이는 힘, 그런 걸 우리가 영혼이라고 하는데요? 성령과의 관계도 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건데, 그걸로 들어가는 경건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거예요. 이렇게 기도의 기본적인 것에 우리가 바르게 섰다면 걱정하지 말아야지요. 응답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영혼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 결정적으로 중요하겠습니까? 이 말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의 기도에, 정직한 사람은 꾸미지 않는 것, 있는 것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 그런 사람인데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고 할 까요? 그런 사람의 기도에 다 응답하십니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없습니다. 다 응답 이예요. 문제는 우리가 자기가 기대한 것하고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그렇다고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영적인 눈높이를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려갖고 응답 받았다, 안 받았다 그렇게 이야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지 성령과의 소통, 공명, 그런데 들어가 있다고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더라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응답이예요.

 

내 입장에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자고 하는 거지요. 우리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기도 많이 하잖습니까? 그게 한국교회의 특징인데, 그런데 그런 것 갖고서 조금 기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작정해 갖고 할 필요는 없는데, 뭐 그래도 그게 나쁜 건 아니고요, 어쨌든 그게 어떻게 되더라도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떨어져도 그게 하나님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함께 하는 거거든요? 여러분들이 마음 편하게 생각하시고요,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 응답에 대해서는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십시오. 중요한 건 하나님과 우리와의 영적인 소통의 문제이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조금 편리하고 유익이 되는 것, 그걸 확보하기 위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맘을 푹 놓고 사십시오. 시편기자는 일단 오늘 본문에 보면 응답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실제적으로 극한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뜻 이예요. 다 성경구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3절에 보면 사망의 줄, 스올의 고통,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어떻게, 쭉쭉..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들어갔다가 나온 거예요. 아주 극한의 곤경입니다. 오죽 했으면 내 영혼을 건지소서 라고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영혼의 문제였어요. 영혼은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생명의 가장 깊은 차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좀 배가 고프거나 살림살이가 좀 궁핍하다고 해서 영혼을 건져 주소서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영혼 운운 하는 것은 삶의 모든 희망이 끊어진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 절규라고 할 수 있지요. 절박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이것은 주관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별로 절규할 만한 것이 아닌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단 말입니다. 그걸 구분하기는 사실 좀 애매하기는 합니다.

 

어떤 젊은 여자나 남자가 실연당했다고 합시다. 그럼 어떤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될 텐데 그럼 절규가 나오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뭐, 그래, 대충은 지나갈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삶의 조건이나 상황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거라서 어떤 것이 딱 영혼을 구원 하소서 라고 하는 기도냐,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그런 걸 전제하고 오늘 말씀을 우리가 보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말 할 때 돈이 좀 부족하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자기 생명 전체가 걸린 차원에서 기도하는 거지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그런 기도의 경지와 거의 비슷합니다. 보세요.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하고 연관됩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 라고 하는 기도의 차원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응답받지 못할 기도가 없는 거지요. 이미 기도자체가 기도 받은 거거든요?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이 구원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더 무엇을 요구하겠어요? 나머지 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사는 데 좀 편리한 것들이거든요? 물론 이게 소중하긴 합니다. 그런데 그건 절대적인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게 안 됬다고 해서 내 신앙이 없다거나 응답받지 못했다거나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예, 다시 정리하면 이러한 영적인 깊이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도 할 때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매달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중요하지 않잖아요? 어떤 것이든 그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니까 말이지요. 내일 비가 오면 어떻고 해가 쨍쨍 나면 어떻겠습니까? 내일 놀러갈 사람들은 해가 나면 좋겠지요, 그런데 비가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건 아니잖아요? 예,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쉽지는 않습니다. 매번 모든 일들이 다 절절하니까요. 다 절절하잖아요?

 

예, 어떤 면에서 보면, 아, 어떤 면에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볼 때에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일상을 최소화시키고 나와 관계된 것들을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영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그런 것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쉽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자기집중이 강하니까요. 자기연민에요, 예, 그게 좋은 뜻이기도 하고 다른 뜻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것을 축소시킨다고 하는 것은 어렵기는 합니다마는 그게 아니고는 없습니다. 제 강의안 세 번째 단락 이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편기자가 실제로 곤경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어떤 데서 벗어났는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벗어났는지는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이건 아주 그 사람의 영적인 경험에서 나온 거니까요, 그런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벗어났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이 오히려 더 핵심이라고 보는데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게 전제되지 않고는 사실은 응답이고 뭐고 없는 거지요.

 

그걸 가리켜서 5절에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데 때로는 비약이 있긴 있습니다마는 전반적으로는 굉장히 친절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변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실질적인 거예요. 그 연결은 우리가 어떻게 해내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내 간구를 들으셨다, 사망과 스올에서 이러저러하다고 이야기하잖습니까? 그게 자기가 감사기도를 드리게 될 이유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그런데 5절에서 하나님 여호와가 어떠하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지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도다, 그 세 가지는 여러분들이 꼭 한 번 기억해 두세요. 늘 들었던 이야기기 있긴 한데요? 잘 보십시오. 은혜와 의로우심과 긍휼입니다.

 

5절 하나만 놓고 여러분들 개인이 한 번 묵상을 해 보시지요. 그래서 A4용지로 5장 정도나 몇 장 써 볼 수 있겠어요? 그렇게 여러분들의 생각이 넓어져야 기독교 의 중심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낱말 뜻, 나에게 이루어졌냐, 아니냐, 그런 차원에서 머물지 않으셔야 합니다. 어떤 세계가 있어요. 그걸 지평이라고도 하고 세계라고도 하고요, 사건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그렇습니다. 이 5절, 한 구절만 갖고도 들어가서 하나님의 많은 역사와 계시와 인간의 운명과 미래 이런 것들을 얘기 할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그걸 전문적으로 하는 거구요. 설교자들은 사실은 그걸 해야 되는데, 그런 해석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낱말 뜻만 얘기하고 우리들에게 호감이 가는 게 뭔지, 사람들에게 관심만 자꾸 자극시키기 때문에 우리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세 가지 연결을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있어요? 한 번 해 보십시오. 은혜, 의, 긍휼, 오늘은 우리가 그 하나하나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을 이야기하는 이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다고 하는 점은 여호와가 누구냐고 하는 인식에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으로 돌아가면 이러한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그 응답이 우리가 생각하는 쪽으로 이루어졌든지 안 이루어졌든지 그게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게 작아지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긍휼이 우리들에게 크게 오게 되는 거지요. 예, 이러한 세 가지, 두 가지라고 해도 좋고, 하나라도 좋아요. 이런 것이 충만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바꿔야 됩니다. 은혜, 긍휼, 의 자체가 하나님인 거예요. 그런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곤경에 빠진 그를 구원하시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과인거예요. 자연스런 결과, 이해하시겠지요? 뭐,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결과가 응답받았다고 하는 것이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다,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은 거예요. 아주 논리적인 이야기입니다. 당연한 이야기구요. 오늘 좀 더 설명을 하긴 해야 하는데 조금 복잡하니까 그런 정도로 넘어 가고요. 뭐, 이런 문제들이 앞에서도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반복될 겁니다. 이게 그렇다는 거냐, 안 그렇다는 거냐, 딱 부러지게 얘기하라,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통치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고요. 이게 아주 총체적인 거예요. 천천히 우리가 따라 가면서 우리의 영적인 안목이 넓어지는 때를 기다릴 수 밖 에 없습니다. 예, 그것은 이런 문제만이 예술도 그렇고 시나 문학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시를 이해 할 수 있는 게 넓어져야 시가 나에게 말을 걸지요. 이게 억지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시를 하나 달달 외웠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우리는 시를 이해 할 수 있는 그러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해석의 능력, 이런 것들을 신앙의 차원에서도 확보해 나가야 됩니다. 그건 뭐 하루 이틀에 되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가도록 하시지요.

 

하나님이 은혜와 의와 긍휼이 많은 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를 곤경가운데서 구원할 리가 없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한 어려운 일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미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 그 부분이 중요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응답받자, 응답받자, 맨 날 그런 얘기 하고 살거든요? 그건 어린아이 신앙입니다. 기도 응답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곤란하고요. 응답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엄마와 아주 어린아이하고 비슷할 겁니다. 젖 먹고 싶다고 그랬을 때 마구 울고 그러면 젖을 먹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만 가지고 응답 받았다고 할 수 없잖아요? 비록 울어도 젖을 못 먹잖아요? 그래도 어머니가 아이에 대한 그건 있잖습니까? 이게 젖을 먹지 못하는 방식으로 응답을 받는 거거든요? 그게 더 핵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르게 유지된다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런 차원으로 우리가 다 들어 갈 수 없을까요? 이게 아전인수인가요? 자기 합리화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일 날 교인총회 했는데, 질문하는 가운데 저도 불현 듯 나온 말이긴 한데 우리 교회 비젼 없습니다. 라고 얘길 했는데, 뭐, 어디 댓글에 올라 왔더라고요. 앞으로 계획을 어떻게 할 거냐, 그런데서 우리 교회는 비젼 없습니다. 그런 얘길 했습니다. 아, 그게 지나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저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뭐, 매사가 다 하나님의 비젼이고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데, 우리가 목표를 세워서 이게 우리의 목표다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 하는 겁니다. 집사람하고 흔하게 얘기하듯이 자꾸만 부부간에 이벤트 하려고 하느냐, 맨 날 살고 있는 게 이벤트인데, 핑계를 대면서 어디 가자고 하는데 안 가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안 되겠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예,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얘기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더 깊은 영적인 관계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기도해야 되죠. 하루 시작할 때, 잠 잘 때 기도해야 되지요. 하루가 아주 유일한 우주에서 아주 중요한 시간이기 때문에 그 하루를 산다고 하는 게 얼마나 감격적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알아야 되는 거지요. 예, 이런 것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오늘 7절을 인용하면서 말씀 드렸는데, 평안함 속으로 들어 갈 수 밖 에 없습니다. 그게 영혼의 안식이지요. 그리고 8절에 여호와는 건지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예, 참된 안식을 주시고 우리를 건지시는 거지요. 영혼을 구원하소서, 건지소서, 앞에서 얘기했듯이 건지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이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꼭 그런 단계까지 나아가셔야 되고요. 어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해 본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상태인지를 넌지시, 하나님과의 관계와 똑 같은 것은 아니니까 다는 모르지만, 똑 같은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기도와 기도응답에서 핵심은 실제로 응답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는 거다, 하는 거죠. 마지막 단락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깊이를 경험한 시편기자는 이제 여호와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이 116편이 감사의 노래라고 했잖아요? 쭉 앞의 일들을 설명한 다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편을 쓰게 된 동기이기도 합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따로 굳이 감사를 표현할 것은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 삶 자체가 감사의 표현이어야 되고요. 우리가 일 주 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립니다마는 사실은 근본적으로는 삶 자체가 예배여야 되거든요? 바울이 늘 깨어 있고, 늘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뭘 떼어서 드리는 것도 뭘 할 수 있겠어요? 헌금을 드린다고 해 봤자 얼마나 드리겠습니까? 자기 것을 다 드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으로 다 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감사의 태도, 예배의 태도, 이런 것은 중요한 겁니다. 이 사람은 두 가지를 드린다고 했어요. 첫째로 서원제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14절과 18절에 나와 있어요. 서원의 내용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나오게 되면 양을 드리겠다, 소를 드리겠다, 그렇게 서원을 한 건지 아니면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내 재산을 바치겠다고 한 건지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이잖습니까? 그런 것을 지키겠다,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두 번 째는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서원제가 있고, 감사제가 있어요. 그건 제사의 형식이니까요. 거의 비슷한 겁니다. 이 시편기자는 서원제와 감사제를 사람들 앞에서 바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겠지요. 영혼이 건짐을 받았을 때의 감격이 어떠했을지 분명합니다. 예, 우리는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살지요. 왜 그런지 아시지요? 그런 게 놓치게 되니까, 열광주의로 빠지게 되는 것도 아시지요? 결국 열광주의는 자기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거든요?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를 건지셨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우리 영혼에 말 건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기쁨을 생생하게 살아 갈 수 없을까, 그게 숙제입니다. 이게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 반듯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영성을 긴장해서 유지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피아니스트들이나, 바이올리니스트 이런 예술가들도 늘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 아니거든요? 예술적인 감각이 늘 살아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건 우리 숙제라고 생각하고요, 금년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오늘 여기 이 시편기자의 경험 같은 것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기도를 응답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감격으로 서원제와 감사제를 드렸는데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더 근원적인 감사의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예, 그러한 부분들이 우리들에게 더 생생하게 살아나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저희들 시편 116편을 공부했습니다. 감사의 노래로 불리어진 고대 이스라엘의 한 영적인 시인의 신앙고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하는 그 기쁨이 충만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간구했음을 또한 저희들이 배웁니다. 주님, 이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구원받았다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에 우리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며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로 가득 하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금년 한 해, 우리 영혼이 더욱 주님과의 관계 속으로 깊어지길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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