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7편 강해-여호와 찬양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할 시편은 117편입니다. 시편 중에서 가장 짧은 시편입니다. 아마 시편만이 아니라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짧은 장이 아닌가 싶은데요? 딱 두 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2.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한 번 더 읽을까요?

 

1.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2.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아멘!! 예, 아주 짧은 구절 이예요. 그래서 이걸 공부를 뛰어 넘을까 생각했습니다. 너무 짧으니까 굳이 따로 공부시간 내어서 하는 것 보다는 다른 장을 공부할 때 다음 118편을 할 때 끼여서 할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따로 해야 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뭐, 그 이유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이유를 대려면 댈 수 있겠습니다마는 특별한 건 없어요. 이렇게는 이야기 할 수는 있습니다. 두 절이 아니라 한 절 만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우리가 30분에서 35분, 우리 시편공부가 보통 35분 내외지요? 길면 40분 까지 가는데, 한 30분에서 40분 사이, 그 내외로 얼마든지 공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시편 전체를 우리가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건너뛰는 건 좋지 않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117편은 가장 짧습니다. 곧 이어서 가장 긴 편이 나와요, 119편인데요? 다음 다음이죠? 118편도 제법 긴 구절 이예요. 29절까지 있고요.

 

그 다음에 119편이 나오는데, 이건 176절까지 있네요. 이거 어떻게 할까요? 미리 걱정 할 건 없겠습니다마는, 공부하는데 보통 20절 내외가 적당하거든요? 그러면 119편 갖고 아홉 번 정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건 없겠지요? 그건 그 때 가서 더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오늘 117편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이 시편 117편을 독립된 시편이 아니라 116편의 결론, 혹은 118편의 서론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긴 있습니다마는 길이 상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볼 수도 있어요. 딱 두 절이니까요. 어디 다 붙여도 되거든요? 그리고 시편이 처음부터 다 완성 된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걸 편집하는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으로 볼 때 그 내용이라고 하는 것하고, 형식, 문장 형식이요, 그런 것들은 히브리어의 고유한 뉘앙스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 그런 것들을 자세하게는 살필 수가 없어요. 제가 또 잘 알지도 못하고요.

 

학자들의 학문적인 입장에 따르면 그건 그렇게 어디에 귀속되어 있는 게 아니다, 짧지만 독립되어 있는 거다, 116편에 넣을 수도 없고, 118편에 넣을 수도 없는 그런 형식이고,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117편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다른 시편들도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마는 성전에 모인 순례 청중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형식을 갖추어서 말하는 거지요. 일종의 교독이라고 할까요? 제사장이 찬양하라 말하면, 모인 회중들이 찬양하는 그런 의식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 두 절 이예요. 각 두 절을 따로 나눠서 보겠습니다. 다 연결되는 문제예요. 1절은 여호와 하나님, 우리가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르기도 하잖습니까? 그건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히브리어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름이 없으니까 이렇게 저렇게 편의상 부르던 것들이 어떻게 굳어져서 하나의 학파를 구성해 갖고 히브리어로 하나님에 대한 명칭이 다르게 발전되어 왔거든요?

 

그건 우리나라말로 번역할 때 그렇게 한 겁니다. 야훼는 여호와, 엘로힘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하나님 명칭은 하나님 이렇게 번역한 거예요. 명칭은 다르지만 똑 같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얘기합니다. 이 찬송이 시편 전체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사실은 구약성경 전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다, 찬송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거거든요? 독솔로지(Doxology)라고 하는데요? 이게 모든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 이외의 것들은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시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는 가는 뒤에 공부하면서 나올 겁니다. 먼저 서론적으로 이 찬양이라고 하는 말은 예배라고 하는 말하고 동일하다 그걸 좀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찬양은 예배고 예배는 찬양이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린다고 하는 거죠, 헌금이나 제물 이런 걸 얘기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사가 된다거나, 목사가 된다거나 그런 차원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요.

 

아주 더 근원적인 걸 얘기 하는 거예요. 내가 직업을 어떤 걸 선택했다, 그리고 제물을 어떻게 사용했다, 그런 건 다 부수적인 겁니다. 우리 영혼의 문제가 핵심이니까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구약을 보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제물을 가져온다거나 신약으로 보면 헌금을 드리고요, 또 실제로 기독교인의 삶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봉사 이런 것들이 따라 올 수 있습니다. 핵심은 그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영혼의 찬송이거든요?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와 찬양은 똑 같은 의미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간혹 어떤 분들이 은혜 받기 위해서 온다고 하는데 그건 틀린 이야기입니다. 은혜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영광을 돌리는 거예요. 찬양하는 겁니다. 은혜는 이미 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 할 때 받는다, 안 받는다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원칙적인 걸 얘기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배 잘 드리고 정말 찬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와 응답, 하나님의 자기 나타내심과 우리의 응답이라고 하는 우리가 예배에 참여하면 물론 은혜가 따라 오게 마련이지요. 이게 뭐 사실 어디서 어디까지 딱 끊어서 은혜고 또 찬양이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게 같이 맞물려 돌아가는 거거든요? 맞물려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엄밀하게는 예배는 은혜 받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것이다, 은혜는 이미 받은 거다, 그거지요. 예, 그런 건 우리가 서론적으로 마음에 담아 두세요. 1절에서 찬양하라고 이야기하잖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또 잊어버릴 때도 있고요. 그런 것들을 또 훈련하고 공부하면서 내용을 채워 나갈 수 있습니다. 찬양의 기초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혹은 구원자와 구원받아야 될 자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건 두 관계를 생각해 보세요. 창조주와 피조물, 구원할 주체와 구원받아야할 객체의 관계가 어떤지 이건 뭐 도저히 대등한 관계하고는 전혀 다른 거예요. 제가 그렇게 표현했지요?

 

두 존재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걸 전제할 때 찬양이 가능한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찬양이 불가능한 겁니다. 이건 전혀 질적인 차이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요, 그 주고받는 거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하고 우리와의 관계는 이거 주고받고 하는 관계 아닙니다. 내가 헌금을 얼마만큼 드렸으니까, 내가 얼마만큼 받는다든지 것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아주 세속적인 관계로 떨어뜨리는 거거든요? 아예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성서가 이야기 하고 있는 바예요. 세상 모든 게 다 하나님의 것인데 우리가 드리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소나 양, 이런 거 잡아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중요 하냐, 아니다,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 자체가 무의미한 건 아니예요. 형식과 그 내용 의미가, 형식과 내용이 잘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데, 이건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좀 문제가 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용보다는 형식, 이런데 머물러 있어갖고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꼭 주고받고 하는 것처럼 생각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관계를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로 설명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죠? 로마서에도 나오고 구약의 예레미아서에도 나옵니다. 질그릇의 입장에서는 어떤 불평도 불가능하고요, 시시비비도 불가능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을 너무 그렇게 형편없는 처지로 만들어 놓느냐,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은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너무 강하다,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왜 아닌지는 아시지요? 설명 길게 하지 않아도 되죠?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깎아 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거는 오히려 높이는 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피조물이라고 하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할 때만 우리가 새로운 세계로 고양 된다고 할까, 초월한다고 할까, 영적인 세계를 얻는다고 할까, 그런 거거든요.

 

질그릇은 토기장이한테 나를 왜 이런 그릇을 만들어 놓느냐,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만큼 미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 이예요. 토기장이의 창조, 토기장이의 섭리, 그런 것이 너무 놀랍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질그릇은 내가 왜 집에서 자주 쓰이는 좋은 자리에 있는 그릇이 아니라 험하게 쓰이는 그릇이냐, 그런 것들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거예요. 그건 아예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요? 감사와 찬양만이 가능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일종의 기독교 신앙의 일종의 본질에 대한 비유예요. 메타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알면 정말 놀라운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놓치는 거예요. 놓칠 수 밖 에 없는 것이 우리는 늘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기존의 이 세계가 돌아가는 이 원리, 경험에 너무 묶여 있기 때문에 성서가 이야기하는 세계로 들어가기가 참 힘듭니다. 어떤 혁명적인 어떤 사회변혁 이런 게 없이는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경우에 교회에서 세상에서 돌아가는 방식하고 똑 같이 신앙을 설명합니다. 그렇게 작동되는 거예요. 봐서 확인해 갖고 얻어야 되고 하여튼 자극을 받아야 되고, 이런 식으로 어떤 점에서 우리의 심리적인 욕망, 이런 것들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신앙이 설명되고 적용되는 경우가 많은 거죠, 전혀 다른 겁니다. 욥기 가르침도 이거하고 비슷합니다. 무죄한 이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의로운 자의 고난 이예요. 어떻게 보면요, 무죄한 자, 의로운자의 고난, 이 문제가, 이건 풀기 힘든 문제였었구요. 구약성서 기자들도 그것을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논란으로 생각했던 겁니다. 이건 누구나 생각 할 수 밖 에 없는 것들 이예요. 이런 것들을 욥과 욥의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서 설명하는 거잖아요? 친구들의 논리는 그겁니다. 네가 분명하게 뭔가 하나님께 죄를 졌으니까 이런 천벌을 받는 거 아니냐 하는 얘기죠,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게 그럴 듯한 거구요.

 

구약에는 그런 생각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지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거든요? 심지어는 가문의 저주, 하여튼 그런 것 까지 이야기 할 정도로 아주 반 기독교적이고 반 성서적인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약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자극을 받게 되면 이제 흔들리고 혹시나, 그런가 따라가게 되는 거지요. 이 욥의 친구들이 욥, 네가 뭔가 잘 못 했으니까 그런 거 아니냐, 그건 일종의 인광응보의 세계관인 거예요. 이것에 대해서 욥은 나는 아니다, 나는 전혀 잘 못한 것이 없다, 그렇게 자기를 방어 합니다. 둘 다 잘 못된 거예요. 욥도 책망을 받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더 문제인 거구요. 이건 문제다 아니다, 누가 잘했다, 잘 못했다, 말하는 것은 사실은 조금 곤란하긴 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성서에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관점들이 구약에 전혀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걸 지금 우리가 누가 잘 했다, 잘 못했다 말하기는 좀 힘든 거예요. 그러니까 성서를 어떤 구절에 나온 것을 근거로 해서 모든 것을 다 해명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기에서만 이야기 하려고 하는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거 핵심만 우리가 잡으면 되고, 나머지는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해석하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기독교 성서와 기독교 신앙의 전체에 대한 관점들을 세워나가면서 각 구절들이 말하고 있는 그 근본을 아는 그런 공부가 필요하지요. 부분과 전체의, 전문적인 용어로 ‘해석학적인 순환’이라고 하거든요? 서로 순환되면서 해석되는 그런 공부가 필요합니다. 결국 욥기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판단, 생각 이런 것들을 뛰어 넘는다, 아예, 이게 왜 그러냐, 원인 그것 따지려고 하지 마라, 아예,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문제다, 그 얘기입니다. 이게 아주 장편의 시를 통해서 거기에 설명되어 있어요. 네가 바다, 물 속에 있는 뭐를 보았느냐, 하여튼 자연의 생명현상의 신비한 것들을 이야기 하면서 공연히 사람에게 벌어진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다, 이렇다, 말하려고 하지 마라, 규정하거나 재단하려고 하지 마라 그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찬양은요, 그런 것들을 근본적으로 뛰어 넘어서요, 창조와 피조의 근본적인 자리로 존재론적 자리라고 제가 표현 했는데요, 여러분들이 그런 단어들을 듣다보면 익숙하게 이해 할 수 있을 겁니다. 창조와 피조의 어떤 존재론적 자리, 그런 것들은 우리가 노력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존재론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에서 어떻게 건드려갖고 바꿔나가거나 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창조자의 자리로 갈 수가 없잖아요? 그러한 자리로, 혹은 유와 무, 더 근원적인 거잖아요? 뭐가 있냐, 없냐의 경계로 들어가는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아무 말도 필요 없는 거예요. 시시비비 가타부타 필요 없이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러한 상태입니다. 아주 극한의 생명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주 극도의 궁극적인 생명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찬양이라고 하는 게 그런 차원이거든요? 놀랍지요? 예배도 바로 그런 거와 같습니다. 아주 절대적인 힘에 압도당하는 거지요.

 

그래서 시편기자는 같은 1절을 얘기합니다.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들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모든 나라들아, 모든 백성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얘기한 겁니다. 모든 나라들아 는 모든 이방들아,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이외의 모든 나라, 모든 세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거지요. 하나님 찬양 앞 에서는요, 모든 개인적인 삶과 국가적인 삶이 하나님 앞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서만 달성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을 좀 생각하세요. 단순히 우리가 손들고 입을 벌려서 찬양한다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시겠지요? 아주 궁극적인 생명경험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서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그렇고 모든 세계가 참된 의미를 가질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제가 조금 더 부연 설명을 그렇게 했습니다.

 

죽음과 부활 생명 앞에서 개인의 차이 국가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잘 난 사람, 못 난 사람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죽음과 부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우리의 존재 전체를 이렇게 엄습한다면, 다른 차이들은 정말 사소해 지는 겁니다. 무의미 해지는 거거든요? 전적인 찬양으로만 나가게 되는 거지요. 존재의 아득한 깊이에서는 인간 삶의 모든 차이가 극복 될 수 밖 에 없다, 극복 되어야 된다고 하는 거지요. 그래서 이사야나 그런 데서도 놀랍잖아요? 그러니까 어린아이가 뱀의 굴에 손도 넣고, 사자가 양처럼 풀을 뜯고 하는 그러니까 묵시적인 새로운 하나님의 전적인 통치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차이, 그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깊이에 들어 갈 때에 그리고 그런 깊이에서 나오는 영혼의 외침이 여호와의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좀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쉽지는 않은 문제예요.

 

실제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나, 인간 갈등, 이게 그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지금 제가 설명한 아득한 생명의 깊이에서 나오는 영혼의 외침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가야 될 길인데, 당연한 신앙의 경험인데, 당연히 여러분들이 또 부분적으로 하셨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것도 은총이어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1절을 설명한 거예요. 이제 2절은 그런 찬양해야 될 이유를 설명합니다. 두 가지예요. 하나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딱 두 절인데, 앞뒤가 딱 맞지요? 앞에서는 찬양을 이야기하고, 찬양은 깊이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설명을 좀 설명을 했습니다마는 나중에 여러분들도 성경을 혼자 읽으시면서 제가 설명한 것을 조금 염두에 두시고 보면 내용들이 들어오게 될 거예요. 그런 것들이 공부가 많이 되면 듣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더 풍부하게 성서의 세계를 풀어 낼 수 있습니다.

 

앞뒤가 딱 맞는 이야기예요. 찬양, 창조와 피조, 궁극적인 아득한 생명의 세계에 휩싸이는 우리 영혼의 외침이라고 하는 그런 찬양을 1절에서 이야기했고, 2절에서, 뭐 그냥 나온 게 아니거든요? 이유가 있는데, 두 가지로 설명한다, 그겁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라고 하는 것을 마틴 루터는 여기서 인자라고 하는 것을, 제가 히브리어로 연구해 오진 않았는데요, 히브리어를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이 다 정확하게 나오기 힘들 겁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인자하심, 이렇게 되어 있는데, 루터는 그나데(Gnade)라고 번역했어요. 은혜라고 번역했습니다. 진실하심을 바하이트(Wahrheit), 진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조금 번역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요, 진리라고 하지 않고 트로이에(Treue:신뢰), 이렇게 번역하는 것도 있어요. 어쨌든 이 인자하심과 은혜, 이건 번역이 약간 다른 건데, 이게 다른 건 아닙니다. 큰 틀에서는 똑 같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그의 은혜이니까요.

 

예, 이 시편기자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다는 이 말을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분을 은혜로 경험 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해하려면 일단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떨쳐 버려야 되어요. 그게 참 어렵습니다. 앞서도 제가 설명한 건데,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경험을 하거든요, 그 경험이 고착되어버려요. 뭐, 좋은 경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면 좋을 경험만 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는 거의 생존경쟁의 원리로 작동되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딱 굳어 버립니다. 그게 어떤 사람들은 더 노골적으로 나가고요, 어떤 사람들은 적절하게 자기를 컨트롤해나기는 합니다만, 사실 거기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세속적인 그런 가치관에 딱 묶여 있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맞습니다. 벗어나야 되는 건데, 우리 기준으로만 보지 말자고 하는 겁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야만 우리는 그게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 인자하시다, 그렇게 생각하잖습니까,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많이 베풀거나 베품을 받아야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걸 또 복을 받았다, 보통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다 고정관념인 거예요. 그게 인간이 사는 게 그렇지 어떻게 거기서 벗어 나냐, 그건 옳습니다. 쉽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성서는 다른 건 기억한다고 하는 걸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다른 것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게 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성서적 표현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우리를 영적인 세계로 끌어주기 위해서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잘 안 들어오니까, 계속 혼란스럽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거지요. 이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좋은 일만 벌어져서 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늘 그렇습니다. 이건 아주 실제적으로 그런 거예요.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봉사 잘 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불행도 닥치고, 행운도 닥치고 그렇습니다.

 

예수 믿기 때문에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건 전혀 아닙니다. 이건 전혀 다른 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 복 이야기 하면 그건 참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다 라고 하는 말은 관점을 다른 데 두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옳고 선하시다고 하는 고백입니다. 근본적으로 선하고 옳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을 구분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을 거기 전제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구별할 수 있는 인식능력이 없다는 말을 앞부분에서 공부한 단어하고 연관시키면 우리의 피조성인 거거든요? 우리의 질그릇의 운명, 이건 좋은 뜻으로요, 운명,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속성인 거거든요? 성서기자들이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야기한 겁니다. 사도 바울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잖아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이런 영성가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거예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마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것에 기쁘고 슬프고 거기에 계속 우리 영혼이 흔들리고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영성이 더 성숙해지면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것이 옳으신, 선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것이 우리들에게 옳은 거다, 선한 거다, 그 분의 은혜다, 그런 관점인 거지요. 이 종말론적 관점은, 한 마디 보충하고 넘어 갈까요? 모든 종말로만 미루어지느냐, 그 때만 좋고 지금은 고생바가지로 해도 좋겠냐, 그 뜻은 아닙니다.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 모든 것들을 선하게 인도하시지만, 그것은 무조건 미래의 일만 아니라 그게 오늘 우리의 삶도 지배하는 거지요. 개입해 있는 거지요. 도입해 있습니다. 마지막의 우리에게 어떻게 도입해 있는가, 그것은 제가 설명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가거든요? 우리가 그걸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좋을 일을 행하신다고 하는 영적인 안목이 분명하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벌어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다르게 사는 거죠. 바울이 그렇게 살았으니까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순전히 모든 걸 미래로 미루어 놓자고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신비한 방식으로 끌어가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관점, 이것은 여호와가 진실하다고 하는 그 진실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진술이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 그 영원하다고 하는 말이요?

 

이건 여호와가 종말론적으로 옳다고 하는 뜻입니다. 지금은 우리 눈에 볼 때 이 세상이 헝클어져 갖고 이상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종말론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의 질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제가 더 설명 드리지 않아도 이해하실 거예요. 왜 이 따위로 세상이 돌아 가냐,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헝클어지냐, 그런 것도요, 이런 종말론적인 기독교적인 안목이 생기면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다고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영혼이라고 하는 것, 이건 종말론적인 관점인데, 이것을 우리가 사실,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유한한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제가 이 시간에 더 이야기 하지 않겠어요. 여기서 영원하다고 하는 말은, 이건 한 번만 더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여호와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여기 묶여 있고, 하나님은 그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에 가 있지는 않은데 하나님은 이미 종말에 가 계신 분이고요, 이 세계는 이미 종말론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겁니다.

 

그 때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고 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요, 그게 영원이라고 하는 말하고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여호와가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는 뜻이 이 영원이라고 하는 말에 담겨 있는 뜻이다,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결론 부분입니다. 두 가지라고 했잖아요? 인자하심, 은혜라고 하는 것이고, 진실하심, 진리인데 영원하다, 말씀 드렸어요. 결론이 다음과 같습니다. 은혜가 크고 진리가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경험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여호와를 찬양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 이예요. 그리고 지극한 생명에 대한 희망에 사로잡힐 겁니다. 그러니까 찬양하는 거지요. 지극한 생명의 약속에 대한 희망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런지 여러분이 또 제 설명 없어도 아시겠지요? 그 분은 은혜로우시고 그 분은 진리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에 대한 희망을 그 분 안에서 누리는 거지요. 로마서 15장 11절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또 모든 열방들이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이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니 롬15:11)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저희들 오늘 시편 117편, 짧은 구절을 공부했습니다. 이 말이, 언어가 문자가 얼마나 신비로운지요. 2500년 전 어떤 유대 한 영적인 시인이 쓴 이 글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공되었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여러 가지 이 세상의 풀어야 될 문제들과 연결되었지만, 그리고 때로 힘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으로 모아지게 인도해 주옵소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하심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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