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8편 강해-여호와는 나의 구원

 

같이 공부할 시편 본문 말씀은 118편입니다. 1절에서 29절까지 있습니다. 우리 이 말씀을 기도하는 자세로 함께 읽겠습니다.

 

1.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3.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5.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6.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8.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9.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10.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1.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2.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13.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14.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15.의인들의 장막에는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16.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17.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선포하리로다

18.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19.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20.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21.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22.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25.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26.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27.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28.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29.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멘!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118편을 어디서 한 번 읽을 것 같은, 공부 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비슷한 구절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네요. 제가 이 시편을 지금 차례대로 쭉 보면서 공부할 부분을 색칠하면서 읽고 있거든요. 118편이 밑줄이 다 그어 있어요. 이상하다, 새로 공부할 건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까 생각이 나네요. 지난 주일에 117편을 했잖습니까? 너무 짧아갖고 이거 고만 두고 118편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이미 지난 주일에 118편 읽고 준비하다가 에이, 그래도 빼 먹으면 안 되지, 하고 117편 돌아갔습니다. 오늘 118편 공부하는 것 맞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는 읽고 그냥 은혜 받는다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게 어떻게 기록되었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좀 아는 게 필요하거든요? 그러니까 해석의 문제에서도 뭐, 역사학 이런 것도 다 해석 아니겠습니까?

 

그게 그 당시 어떤 뜻이었는지를 그 당시로 돌아가서 읽어야지 오늘의 관점으로만 읽게 되면 충분히 해석이 되지 않는 거예요. 텍스트 그 당시에 어떤 배경이 있었나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신학계에서는 성서신학자, 얘기합니다. 이건 고대 히브리어, 근동의 여러 언어들이 복잡하게 들어와 있거든요? 그러니 굉장히 연구들을 철저히 합니다. 우리야 그렇게까지는 따라 갈 것 없고, 할 수도 없고요, 대충 어떤 방향의 시편이다 그것만 알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집에서 읽으려고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고대인들은 사실 글을 읽지 못했어요. 문맹자가 더 많았습니다. 특별한 사람들만 읽었어요. 예수님 당시에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3,4%로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역사적 예수, 그런 쪽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도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목수 아들이잖아요? 공부할 기회가 없어서 특권층만, 2000년 전 이니까 말이죠, 글을 배웠다고 얘기 하는데 글쎄요,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미리 깨이면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런 점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직접 글을 쓰지 않고 책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 분이 글을 몰랐다고 하는 건 조금 비약이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이렇게 저렇게 예수님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면 고대 당시에는 사람들이 글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읽는 것도 아니고요, 특별한 사람들만 읽었고요. 그리고 사실은 고대만이 아니라 중세기까지도 성서는 일반 신자들이 읽지 못했습니다. 성서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건 전문적인 신학 공부를 한 사제들만 읽었거든요, 그걸 이제 마틴 루터가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종교재판 하던 보름즈(Worms)라고 하던 곳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에 프리드리히 선제후라는 사람이 도와주어서요, 사실,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것도 마틴 루터가 무조건 뛰어 났기 때문에 된 건 아닙니다. 그게 있긴 있지만 주변에서 받쳐줘요, 그러니까 영웅이 역사를 변화 시키냐, 아니면 역사가 영웅을 만드느냐,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 서로 맞물려 있는 거겠지요.

 

프리드리히라고 하는 선제후가 없었다면 사실은 마틴 루터도 없습니다.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종교재판 그 당시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데 이 선제후는 유럽지역에서 황제가 될 수 있는, 피선거권이 있는, 맞는 얘기인가요? 후보가 될 수 있는 몇 몇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권한이 크죠, 그 사람이 자기 부하들을 시켜 이 마틴 루터를 자기 성에다가 보호해 주었습니다. 바르트부르그(Wartburg)라고 하는 성인데요? 그 성에서 2~3년 동안 있으면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성경이 독문학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문서로 취급되고요, 그 때부터 일반 신자들도, 독일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거죠?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이 118편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사를 드릴 때 어떤 특별한 의식을 행하면서 읽은 교독문, 교창이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제사장, 등등.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 청중들, 그리고 왕도 이 제사에 참여해서 불렀던, 서로 나누어서 부르는 그런 교독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문 이죠, 의식찬송가이기도 하고요, 거기 참여하기 위해서 온 순례자들, 그리고 또 이방인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제사장들, 왕, 그리고 전문적인 합창단들, 이런 사람들이 차례를 통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불렀던 찬송가입니다. 그래서 그걸 학자들은 ‘의식적인 감사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투어 바이저 성서학자에 따르면 전체 구조가 다음과 같습니다. 1절에서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일을 합창단이 노래하고 그리고 거기 참여했던 회중들이 교창형식으로 노래하는 겁니다. 1절에서 4절은 그렇게 나와요, 그걸 어떻게 아냐, 그건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거기 인칭이 무엇으로 쓰여 졌느냐, 그리고 그 당시에 이러한 노래가사들이 어떤 형식이냐 비교연구해서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봐서 잘 모르죠, 목사들도 잘 모릅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런 주석을 통해서 좀 아는 거죠,

 

5절에서 21절은 고난당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돕는다는 내용 이예요. 이것은 왕이 1인칭으로 부른 겁니다. 5절부터 21절까지는 내가, 내가 이렇게 나와요, 앞에 있는 것은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나오겠죠? 예, 그리고 22절에서 25절은 순례자들의 노래고요, 26절에서 27절은 제사장의 축복의 노래고요, 28절은 왕의 감사노래고, 29절, 마지막 절은 합창단의 감사노래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절하고 1절은 똑 같은 거예요. 후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이겁니다. 몇 가지로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교창을 한 거예요. 하여튼 중요한 내용들을 몇 가지로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서 4절과 그리고 마지막 29절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흔히 들었다, 인자하시다, 인자하심,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입에 붙어 있는 이야기예요. 샬롬, 샬롬, 이렇게 인사를 하듯이 인자하심은 늘 이렇게 자기들의 삶의 일상에 딱 붙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시편 전체는 그걸 말한다고 해도 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거지요. 멋진 이야기이긴 한데 이게 사실인가, 한 번 질문해 보세요, 물론 당연히 사실이어야 되죠, 사실인가, 물어보라는 이야기는 왜 이러한 진술을 하게 되었는지를 파고 들어가라고 하는 얘기죠, 그런 것 없이, 아 인자하구나, 인자하다네, 좋으신 분 인가보다, 그렇게 아는 것 하고 어떤 근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하고는 차이가 있는 거거든요, 우리가 이것만 아니라 일반시를 이해할 때도 똑 같습니다. 고은 시인이 이런 시를 썼을 때 어떤 걸 다 배경에 두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조간 한 겨레 신문 보니까 고은선생이 구제역 때문에 죽는 소와 돼지를 위해서 거기에다 시를 썼더라고요, 그 분 참 대단하신 분이예요. 고은선생이 노벨 문학상 내년에는 받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월요일 날 홍성사에서 제 책이 새로 나왔는데, <설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거든요? 거기에도 고은 선생의 시를 하나 인용했습니다. 시인들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참 놀랍습니다. 승려출신이고 불교적인 바탕을 놓고 무교적인 통찰도 있고 한데, 그래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좋은 그런 게 많이 있습니다. 예, 사실인가, 질문하세요. 인자하다고 하는 건 잘 못해도 좋게 말해주고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고, 그런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그런 거라고만 생각하면 곤란한 거예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 덕분으로 잘 된다, 어렵지 않게 잘 돌아간다, 이런 쪽으로 보면 이 진술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부정될 만한 일들은 많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나요? 하늘은 不仁이다. 인자하지 않다, 그런 이야기가 있거든요? (*天地不仁(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도덕경 제5장), 이 세계의 무죄한 자의 고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소아병동의 병실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사실 이걸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이 진술은요, 하나님의 인자하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걸 전제하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 대목은 제가 몇 주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것 같은데요, 하나님이 창조주라고 하는 것을 전제하면서 거기서 연역되어서 나온 거죠? 이 세상의 있는 것들을 일일이 살펴 가지고 이렇게 인자하다고 얘기하기는 참 곤란합니다. 창조주의 행위는 우리가 당장 좋다 나쁘다 판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힘들다, 억울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렇게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자할 수 밖 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라고 하는 데에 다 포함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인자에 앞서서 창조가 더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은 다 그걸 전제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신경도 처음부터 그 얘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예요. 그건 이제 여러 가지 이 세계의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도 그렇고 등등.. 창조주라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하게 되는 거지요. 그걸 전제한다면, 우리가 믿는다면 결국 창조주시니까 당신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선하게 인도한다고 하는 건 그의 모든 일들이 인자하다고 하는 것, 그걸 우리가 고백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인자를 드러낸 게 아니라고 한다면 창조론은 허물어지는 겁니다. 아, 그래도 그게 뭔가 조금 정확한 것 같지 않다,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땐 여기 어려운 일들이 많으니까요. 정말 비참한 일들이 많으니까 예, 그것은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조금 더 천천히 여러분들이 이해 할 수 있을 때가 올 거라고 보고요, 그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여기 그렇게 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아우슈비츠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창조성, 하나님의 인자가 근본적으로 훼손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도 사실은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거고요,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장:28) 모든 일이 협력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한 두 주 전에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이것은 종말론적인 시각이라고 얘기 했죠?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선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불편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눈에 거스리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는 그런 시각으로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인자한 거예요. 그렇게 보여요. 세상이요,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는 시각에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인자가 아니라 그냥 생존법칙이야, 정글의 법칙이야, 적자생존이야, 만약에 그런 식으로 세계를 이해하면 아마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이 세계가 그 만큼 깊이가 있고요, 아주 다층적이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이 세계는 여러분들에게 다르게 보여 지게 될 겁니다. 이제 그런 시각을 갖는 게 영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드러나는 실제적인, 그런 사사건건, 그것만 보지 않고 전체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볼 수 있는 눈, 영성이라고 할 수 있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삶을 여호와의 관계에서 풀어갑니다. 두 번째 대목에서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그것을 받아 더 드리려면 앞에서 창조라고 한 것을 전제한다고 했죠? 하나님의 창조하심, 하나님의 능력, 그 창조의 능력은 부활의 능력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세상의 완성능력이기도 한 겁니다. 이 세계 전체의 근원인 거예요. 그러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걸 알게 되면 그 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은 사실은 인자하신 거고요, 그런 걸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실제로 자기 삶으로 받아 드린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든 자기의 일상적인 것 까지를 포함한 자기 운명을 여호와의 관계에서 풀어갑니다. 당연히 그럴 수 밖 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거지요. 여기 본문에 보면 6절, 7절에 굉장히 적나라하게 표현해요, 내편이다, 여호와는 내 편이다, 그 관계성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 편이 아니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이건 서로 편을 가르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다 하나님의 것 이예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설령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네 편 내 편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어떤 영적인 경지에서 보는 하나의 문학적 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 만큼 밀착하는 거지요. 거의 그 분에게만 모든 삶을 집중하려고 하는 그러한 영적인 태도를 가리켜서 그걸 문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내 편’이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에게 밀착하는 사람은 당연히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요. 그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다.” 이렇게 표현 할 수 있고요, 그러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곧,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근거를 말하는 거죠. 제 설명이 조금 비약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이 새겨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편기자가 그걸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람이나,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 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낫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요, 이거 옳은 이야기잖습니까? 우리가 기도 할 때도 늘 그렇게 하고 실제 삶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데, 사람 믿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이러한 말을 얘기하는데요, 그런데 아주 솔직하게 질문해 보세요. 사람과 여호와, 고관과 여호와가 실제로 구별이 되나요? 구별이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기 딱 보이게 계시면 구별이 되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잖아요? 어떤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어떤 것이 권력을 가진 사람, 고관, 힘 있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하는 걸까요? 확 눈에 보여야 우리가 좀 하지 않겠습니까? 무얼 얘기하는 거예요? 이게요? 구별이 실제로 가능 하냐, 그런 질문이죠, 눈에 보이는 건 아닙니다. 만일 그게 분명하다면 여호와를 신뢰하기는 쉽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떨어졌잖아요? 그건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성경 읽을 때 아, 성경시대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 정말 확실하게 보이고, 홍해가 갈라지고, 그래서 확실하게 하나님 믿었겠구나, 그렇게 그건 오해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분 못 하잖아요? 그 당시도 그랬습니다. 여리고성이 허물어지고, 아이성이 어떻게 되고, 그런 것들도 시대가 다 흐른 다음에 다시 역사를 뒤 돌아 보면서 자기들이 신앙 안에서 그것을 해석 해 나온 거지 그 당시, 고대에는 하나님이 어떻다, 확실성, 이런 것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사실은 마찬가지예요. 이게 참 중요한 질문인데요, 어떻게 구별하세요? 구별이 되냐, 하는 질문입니다. 잘 안되죠? 어렴풋하죠? 대개 어림짐작으로 아, 교회 열심히 나오는 거지, 사람들이 주로 교회중심으로 생각하고 아니면 좀 더 정직하게 살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을 따르는 거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거다, 생각할 겁니다. 그게 무조건 아니라고 말씀 드리기는 힘든데요? 그것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더 근원적인 것인데요? 그 설명을 오늘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한 두 마디로 끝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요, 꾸준하게 영성이 깊어짐으로써 천천히 그런 윤곽이 드러나는 거죠. 그건 금방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며칠 씩 밤 새워서 철야기도 한다고 해서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이제 본론을 가져야 그게 되는 건데요?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로 떨어져라,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와 닿게 되고 풍요로워지는 거지요. 마치 음악가가 세월이 지나면서 음악을 실제적으로 더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정도로 하고요, 세 번째 단락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여호와가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두 번째 단락에서 설명 안했던 것이 이 세 번째 단락에서 조금 설명은 될 수 있겠군요. 그러니까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능력을 발견하는 거예요. 구원의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 구원을 행사하는 그 능력자,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거죠, 예, 5절에서 21절은 “왕의 노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안에 든 구절 이예요. 하나님이 나의 능력과 찬송이라는 말이 그 구절 안에 있습니다. 그럼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구원이고 능력이기 때문에 노래 부를 수 있었다,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왕들도 늘 두려워합니다. 지금 대통령도 마찬가지이고, 다 두려워합니다.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그것을 놓칠까봐 두려워하고요,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또 두려워하고요, 그렇습니다. 전혀 그런 것이 해결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왕이기 때문이 아니라, 왕의 이름으로 여기에 교창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앙이 여기 녹아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여호와만이 권능을 베푸신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거지요.

 

여호와만이 권능을 베푸신다, 참 된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하는 것을 안 겁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걸 알기만 하면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을 텐데, 그게 잘 안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걱정 저 걱정,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잖습니까?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도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겁니다. 아, 그럴 때만 권능이 뭔지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자기사업이 망했다가 갑자기 좋아진다거나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전혀 그런 것 하고는 다른 차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공신화 그런 것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가장 적절한 사건은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어요. 하나님의 권능이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거기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이건 하나님의 무능력을 나타내는 거예요. 그건 실패거든요? 그렇게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으니까요, 인생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건 실제로, 아주 실질적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어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이 인류구원의 길이 되었다고 하는 사실, 그런 게 권능인 거죠, 그걸 조금 더 예수님의 다른 핵심적인 사건하고 연관시킨다면 이렇습니다. 십자가의 현실에서 부활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건이거든요? 십자가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의한 결과예요. 그러니까 바른 것을 하다가는 그런 십자가를 질 가능성도 많이 있습니다. 이건 전적인 무죄한 자의 고난을 얘기합니다. 죄가 없는 자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세상은 많이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없앨 수는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가 억울한 일을 안 당하게 하거나 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건 예수 아무리 잘 믿어도 되는 일이 아니예요. 간접적인 효과는 있을지 모르지요, 우리가 바르게 살면 마음도 평화로워지고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 좋은 일이 일어 날 수 있긴 있습니다마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예요. 십자가의 원리가 이 세상 굴러가는 법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거기서 전혀 새로운 삶으로, 생명으로 변한 사건이거든요? 그건 어떤 실증적인 것으로 증명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그건 영적인 시각으로 우리들에게 깨우쳐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생명사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죄한 자가 고난 받고 또 일들이 뒤틀어지고, 우리 개인만이 사회도 그렇고요, 그리고 빈부의 격차도 심해지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계속해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래서 이 세계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마는 이런 세계 속에서 우리가 부활의 빛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거죠, 그건 아주 굉장히 통합적인 영성이 필요한 겁니다.

 

이제 22절부터 다시 “순례자들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거기에 나오는 구절에 이런 게 나와요,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십자가로부터 부활에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건축자가 필요 없다고 해서 버린 돌이, 집의 가로세로 모퉁이의 가장 힘을 많이 받는 곳 아니예요? 거기에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고요, 정말 기이하다, 큰일이다, 대단하다,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납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공부한 이러한 내용을 서로 번갈아 가며 부르면서 여호와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찬양하고요, 그래서 그들이 일상에서 당하는 시련들도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권능의 빛 안에서 극복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도 이와 같습니다. 예,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118편을 같이 공부했습니다. 2500년 전, 까마득한 옛날, 유대지방에 살았던 한 영성가,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전승된 귀한 신앙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시각이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오니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원함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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