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17편-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만족

 

시편 17편,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공부하고 또 기도의 제목으로 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선택한 계속 시리즈로 나가긴 하지만요. 이 17편은 앞에 우리가 공부했던 것에 비해서 조금은 기네요. 18편은 훨씬 더 길군요. 다음 수요일에 할 것은 50절까지 해야 되는데 뭐 대단합니다. 예, 일단 성경은 내용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읽는 게 기본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공부할 때 세 번 정도 읽도록 하겠어요. 한 번은 제가 읽고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서 보고, 같이 읽고 그리고 끝날 때 한번 읽고, 그런 정도로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먼저 읽을 테니까 눈으로 따라 보십시오.

 

〔다윗의 호소〕

1. 이 몸의 죄 없음을 밝혀주소서. 야훼여, 들으소서.

   이토록 울부짖는 소리 모르는 체 마옵소서.

   이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입술은 거짓을 모르옵니다.

2. "너는 죄없다." 판결하소서.

    당신의 눈은 결백한 사람을 알아보십니다.

3. 내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고 불에 달구어 걸러보셔도

   무엇 하나 나쁜 것이 내 입에서 나왔사옵니까?

4. 남들이야 무얼 하든지

   이 몸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5. 그 험한 길을 꾸준히 걸었사옵니다.

    가르쳐주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6.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

   하느님, 대답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7. 한결같은 그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당신께로 피하오니 오른손으로 잡으시어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소서.

8.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소서.

9. 이 몸을 짓밟는 악인들에게서 지켜주소서.

   원수들은 미친 듯 달려들어 나를 에워싸고 있사옵니다.

10. 그들의 심장은 기름기로 굳어졌고

     그들의 입은 오만불손합니다.

11. 달려들어 이 몸을 에워싸고는

     땅에다 메어치려 노려보고 있습니다.

12. 먹이에 굶주린 사자와도 같고

     숨어서 노려보는 새끼 사자와도 같습니다.

13.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

14. 야훼여! 손을 펴소서.

     흥청거리며 사는 자들의 손에서 이 몸을 구하소서.

     저들이 당신의 곳간에서 배를 채우고

     그 자식들도 배 터지게 먹고 남아

     또 그 어린것들에게 물려주게 하시렵니까?

15.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아멘! 자 그러면 이번에는 함께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

 

〔다윗의 호소〕

1. 이 몸의 죄 없음을 밝혀주소서. 야훼여, 들으소서.

   이토록 울부짖는 소리 모르는 체 마옵소서.

   이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입술은 거짓을 모르옵니다.

2. "너는 죄없다." 판결하소서.

    당신의 눈은 결백한 사람을 알아보십니다.

3. 내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고 불에 달구어 걸러보셔도

    무엇 하나 나쁜 것이 내 입에서 나왔사옵니까?

4. 남들이야 무얼 하든지

   이 몸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5. 그 험한 길을 꾸준히 걸었사옵니다.

    가르쳐주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6.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

   하느님, 대답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7. 한결같은 그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당신께로 피하오니 오른손으로 잡으시어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소서.

8.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소서.

9. 이 몸을 짓밟는 악인들에게서 지켜주소서.

   원수들은 미친 듯 달려들어 나를 에워싸고 있사옵니다.

10. 그들의 심장은 기름기로 굳어졌고

     그들의 입은 오만불손합니다.

11. 달려들어 이 몸을 에워싸고는

     땅에다 메어치려 노려보고 있습니다.

12. 먹이에 굶주린 사자와도 같고

     숨어서 노려보는 새끼 사자와도 같습니다.

13. 야훼여! 일어나소서, 악인들 맞받아 때려 누이시고

     칼로써 끝장내어 이 목숨 구하소서.

14. 야훼여! 손을 펴소서.

     흥청거리며 사는 자들의 손에서 이 몸을 구하소서.

     저들이 당신의 곳간에서 배를 채우고

     그 자식들도 배 터지게 먹고 남아

     또 그 어린것들에게 물려주게 하시렵니까?

15.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이다.

     이 밤이 새어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기도〕

1.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2.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3.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 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4.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 지 아니하였사오며

5.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6.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7.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8.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9.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0.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11.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12.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13.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 소서

14.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아멘! 시편말씀들이 가지각색 여러 모양들입니다. 그리고 시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자기의 생각을 아뢴 거기 때문에 여기에 비약도 많은 거예요. 어떤 일기문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이건 어떤 논문도 아니고요. 그야말로 시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시를 쓴다. 시인의 섬세한, 예민한 생각들이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시를 쓸 땐 그렇게 쓰잖아요? 그렇게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우리가 오해 할 수도 있는데요? 굉장히 노골적인 표현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거친 표현들이 제법 나옵니다. 시라고 하는 형식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 시인의 마음이 굉장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격동이 좀 심했다는 그런 뜻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 시편 17편은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다른 것에 비해서 좀 거칠다고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내용들이 좀 빠진 부분들이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건 뭐 제가 자세하게 살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아주 전문적인 부분이니까요. 그러나 그냥 상식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좀 거칠다고 하는 것은 많이 나타나요.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자기 정당성을 어떻게 보면 잘 난 척 하는 것처럼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라든지 또 어떤 부분에서는 원수들, 대적자들이죠, 자기하고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야냥거림, 조롱 같은 것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의 정서가 상당히 요동이 심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편기자는 바르게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예, 그 내용이 어떤 가를 우리가 몇 단락으로 나누어서 좀 보겠습니다. 앞의 시편들보다 구절이 좀 길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구요. 적당하게 우리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 여기에는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내가 정당하다 의롭다고 하는 것을 1절과 2절에서 얘기하는 거죠. 2절에 보면 분명하게 그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죄없다." 판결하소서. 얼마나 이 얘기를 듣고 싶었을까요? 하나님으로부터 너 잘했어, 너 잘못 없어 이런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마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긴 했습니다마는 주로 구약은 의(義)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의(義), 이 사람이 의롭냐, 의롭지 않으냐라고 하는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 홍수 때도 이 노아가 의로왔다 그런 얘길 하잖아요? 욥기서 에서도 동방의 의인이다 라는 표현을 하고요.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그러한 표현들도 많고요. 의, 그 사람의 의, 그게 율법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게 의로워지는 거예요. 자기 의죠. 하나님 보실 때에 잘 못된 일들이 없는, 정말 의로움 그런 것들이 구약성서에서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구원과 일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 부분이 신약성서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죠? 의 자체에 대해서는 다 중요하지만 구약은 자기의가 강한 반면에 어떤 것을 행해야 되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착해야 되요. 그러나 신약에는 조금 포커스가 다른 데 있습니다. 자기의가 아니라 칭의(稱義)라고 해요. 칭의는 주님이 우리에게 의롭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구약은 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로워져야 되거든요? 물론 이 문제가 구약과 신약을 딱 칼로 무를 자르듯이 끊어서 말하기는 힘들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 의를 이렇게 강조하고 또 그렇게 의롭다는 선언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그것을 우리는 1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1절과 2절에 나오는 데요. 그 다음에 3절과 5절에는 그러한 마음을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그러한 사실을 변론하는 거예요. 3절에서 5절은 변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표현이죠.

 

3절도 보십시오. 이렇습니다. 3.내 마음을 샅샅이 뒤져보시고 밤새도록 심문하고 해달라, 범인을 형사가 심문하듯이, 밤새도록 심문하고 불에 달구어 걸러보셔도 이 표현을 보면 나를 고문하듯이 살펴봐라, 나에게서 하나도 나쁜 게 나온 게 없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3절에서 5절까지 전체가 다 그런데, 자칫하면 좀 뻔뻔스럽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아니예요. 아, 지금 이 시편기자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겁니다. 정당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나를 고발 했을 때 그러한 심정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 심정을 이러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거죠. 나를 밤새도록 고문해 보십시오. 아마 어쩌면 자기가 고발당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또 포도청 같은 데 잡혀가서 고문 당할지 모른다는 염려도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기 억울함 이런 것들을 호소하는 거지, 뻔뻔스럽게 자기 잘 났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 하나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 이래서요,

 

5절에 자기를 변론하면서 그 변론의 결론을 5절에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하는 사실의 핵심은 뭐냐, 가르쳐주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가르쳐 주신 길이거든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길, 이것이 바로 옳은 것의 기준이었습니다.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죠. 당연한 이야기를 다 그냥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드리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따랐습니다. 뭐 아주 경건한 유대인들은 옷소매에다가도 성경 구절들을 붙이고 다니고 집안의 곳곳에다가 흡사 우리 옛날에 샤머니즘을 지키는 사람들이 부적을 갖다 붙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붙였어요. 이마에도 붙였다고 하는데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겠죠.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자기를 의롭게 한다, 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런 것들이 참 좋기는 했는데, 그게 또 극단적으로 나가게 되면, 원리주의 적으로 나가게 되면, 근주의적으로 나가게 되면, 그 말씀의 근본의미를 놓쳐 버리고 상당히 독단적으로 행동할 때가 있거든요? 고런 게 잘못인데, 율법주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거죠.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정신이 조금 흐려지고 오히려 율법의 껍질, 거기에 지나칠 정도로 매달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율법이 사실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살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을 어떻게 해요? 오히려 죽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 기억하시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거 말이죠? 여기서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살이의 힘든 일을 말 하는 게 아니라 그 당신 종교적인 짐들이었습니다. 율법이 사람들을 살리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되는데, 그게 예수님 당시에는 정말 율법주의가 되어 버린 거지요. 그래 갖고 무거운 거예요. 신앙생활에, 지금도 그런 일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하나하나가 사실은 평화와 자유 그런 쪽으로 하나님 나라와 일치를 통해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그러한 평화와 자유 기쁨으로 들어가야 될 텐데, 그것이 오히려 짐으로 작용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인간은요, 심리가 좀 복잡해서 자기를 좀 학대하는 방식으로도 만족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건 좀 병적인 현상인데 사이비 이단들에게는 더 많이 나타나는 현상들이구요. 신앙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자칫하면 독단적으로 사용하게 될 때에 자기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하는 것으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양면성이 있는 거죠. 예, 지금 이 시편기자가 두 단락으로 제가 나뉘어서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1절과 2절에서는 자기 자신의 무죄에 대한 확신을 말했구요. 하나님께 그걸 인정받고 싶어 했고, 3절에서 5절까지는 그 자기 의로움에 대한 변호, 변론이었습니다.

 

그 다음 단락은 6절에서 9절이예요. 여기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런저런 여러 가지 말을 하는데 그런데 그걸 아무에게나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 근거 없이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자녀들이 우리 부모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부모하고의 관계가 될 때 가능한 거지 관계가 없는데 무조건 얘기합니까? 비슷하게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가 제가 앞에서 설명한 대로요. 하나님께, 조금 어떻게 보면 유치하게, 고자질하듯이, 일러바치듯이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철부지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데, 누가 어떻다 이렇다, 동네에서 노는데 누가 어떻더라 그런 이야기 하듯이 말이예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그런 태도인 거죠. 아, 내가 이렇게 실수하는 것처럼 말하더라도 나의 그러한 허물들을 받아 주신다고 하는 신뢰가 있습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신앙인 거예요.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그런 분, 지난주의 설교와도 좀 연관되는 건데요? 여러분들의 삶에 가라지들이 있잖아요? 있어도 너무 그걸로 고민하지 마시고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종말론적으로 우리 삶을 정리해 주실 것이고요. 당장 우리 삶속에서 허물들이나 가라지 같은 것들이 일소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이거든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우리 신앙의 밑바탕에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됩니다. 신뢰를 6절에서 9절까지 이야기하는데 한 소절씩만 좀 인용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절,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애들이 엄마에게 “엄마, 엄마 내 말을 들어봐, 들어봐” 이런 식으로 정말 신뢰하니까 그런 말 할 수 있잖아요?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6절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고, 7절에는 오른손으로 잡으시어 하나님의 우편, 고대인들은 구약시대에 오른 쪽을 같은 권위로 생각했습니다. 임금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임금과 똑 같은 권위를 갖고 있는 거거든요? 하나님이 나를 오른 손으로 잡아 달라고 하는 것은 그런 얘기죠. 하나님과 일치, 우리가 하나님과 권위 있다고 하는 뜻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다고 하는 그런 의미를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8절에는 눈동자처럼 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하는 단어들입니다. 눈동자처럼, 그리고 9절에 그러한 표현보다도 전반적으로 보면 지켜 주소서, 악인들에게서 지켜주소서. 이야기 하고 있네요. 예,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음 10절에서 12절엔 다시 시편기자가 원수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원수들의 오만한 행위, 이 시편의 흐름이 있죠? 흐름요, 나의 무죄에 대한 것, 인정받고 싶어 하고 자기 변론을 하고 내가 왜 이렇게 고백하느냐 하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이야기 하다가 이제 흐름이 조금 바뀌어서 자기를 대적하고 있는 사람들의 오만함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정당함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억울하게 고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아뢰는 그러한 중에 있습니다. 그 원수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10절에서 12절까지 그건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문학적인 표현이네요. 문학적인 표현요, 심장은 기름끼로 굳어졌다. 심장이 굳었다. 입이 오만불손, 교만한 말들, 굶주린 사자와 같다. 새끼 사자와 같다. 이런 표현들입니다.

 

13절에서 14절로 넘어 오면 이제 하나님을 향한 막 쳐들어가는 듯이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말을 안 들을 때 막 흔들 듯이 “내 말 들어 보세요. 내가 얼마나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좀 내 말 들어 보세요. 대신 좀 갚아 주세요.” 막 거칠게 대쉬한다고 할까요? 그러한 뜻입니다. 상당히 난폭한 언어들이 나오고 있어요. 음, 13절에도 보면 칼로서 끝장내요, 이 목숨 구해주소서 원수들을 칼로 끝장내라 좀 살벌하지요,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가 굉장히 격정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그 원수들 자기들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제가 처음 시작할 때 말씀 드렸듯이 상당히 조롱 섞인 표현들입니다. 저들이 당신의 곳간에서 배를 채우고 자식들도 배 터지게 먹고 물려주게 하고 이런 것을 내버려 두시렵니까? 예,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시편기자가 지금 영혼이 혼란스럽다. 그런 것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15절, 그러나 이 시편기자가 그래도 대단한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은 또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결론이 결국 정말 원수 갚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나의 정당함을 하나님 앞에 아뢰긴 했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예? 하나님과의 관계, 그러니까 절대적인 생명과의 관계이죠.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인간에게는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게 결론은 아니예요. 그런 심정을 표현은 하지만 그러나 시편기자들은 결국 하나님에게 돌아갑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나는 떳떳하게 나는 고발을 당하고 있지만 나는 떳떳하게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이 밤이 지나가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지나가서 당신을 뵙는 일 이 몸은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렇잖아요? 누가 잘 되고 못 되고 이 것 때문에 잠시 흔들릴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탄탄해지기만 한다면 그게 분명하기만 한다면 이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습니다. 만족, 쭈후리덴(Zufrieden) 독일어로 그렇게 되는데요? 후리덴(frieden)이라고 하는 것은 평화인데 쭈(Zu)는 영어로 to라고 하는데 그게 붙어 갖고 만족, 평화로 가는 것, 이런 것이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영적 삶의 태도, 이런 걸 오늘 우리는 시편기자에게서 배웠습니다. 참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참 다행스럽기도 하고 이러한 선배들의 글이 남아서 아, 우리들도 방향을 잡을 수 있잖아요? 하나님과의 관계, 천착, 집중, 몰입 여기서 참된 만족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 이것이 바로 신앙인들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고맙습니다. 이 무더운 절기에 저희들 잠시 짬을 내어 주님 앞에 진정한 마음으로 기도를 아뢰고 또 오래 전 영적 선배가 기록해 놓은 이 시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하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들 삶에 시행착오가 많지만, 우리의 정서가 오락가락하고 중심이 많이 흔들릴 때가 많이 있지만, 이제 성령의 도우심으로 다시 중심을 잡아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는 저희들 되기를 원합니다. 또 그렇게 인도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 안팎이 상당히 시끄럽습니다. 특별히 이 나라를 중심으로 한 남북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또 미국과의 관계,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 대한민국에 필요한 정의와 평화를 허락해 주십시오. 각각 일을 맡은 사람들, 양심껏, 성심성의를 다하여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에 조금씩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제 흩어지는 발걸음 또 다시 만날 때가지, 어는 곳에 있든지 우리 삶을 하나님께서 눈동자처럼 지키실 줄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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