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76편-두려운 하나님, 경외할 하나님

시편76편입니다.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2.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6.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이 잠들었나이다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8.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9.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심판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 (셀라)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 다

11.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12.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아멘! 예, 76편 아주 짧죠? 아주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짧은 편인데 그래도 더 짧은 것에 비해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적당한 그런 시편입니다. 1절에서 12절까지 있습니다. 제목을 “두려운 하나님, 경외할 하나님” 제가 그렇게 정했어요. 제목이 뭐 딱 정답은 아닙니다. 예,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가 있는데, 그래도 하나의 흐름으로 이런 제목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뭐, 우리가 흔하게 들었던 거 아니겠습니까? 두려운, 두려운 하나님, 경외할 하나님, 따로 떨어져 있을 때가 많고 또 붙어 있을 때도 있어요. 이제 보통 두렵다고 할 때에 이게 공포심하고는 좀 다릅니다. 뭐, 비슷할 때도 있긴 있는데요? 좀 다른 문제거든요? 여기서 얘기하는 두려움이라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큰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다, 그런 관점에서 두렵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귀신을 만난다거나 혹시, 그러한 공포심하고는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족 자기위로 그런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어떤 조건을 바꿔서 해결 될 수 없는 그 근원적인 충격이라고 할까 그런 쪽으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경외할 하나님, 이따 우리가 본문에서 공부하겠습니다만, 하나님만 경외 받으실 분 인거죠. 늘 들었던 이야기기기 때문에 새로울 게 없다고 생각될 겁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쉽게 설명하고 넘어 가지요. 우리는 다른 것을 경외하고 살거든요?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다른 걸 경배한다거나 다른 것에 몰두한다거나 그렇습니다. 좋은 뜻으로도 그렇고 좀 나쁜 뜻으로도 그렇구요. 나쁜 뜻으로 하는 거야 접어둬야 되겠지요. 예, 어떤 남을 파괴한다거나 자기학대한다거나, 알콜 중독이라든지, 마약중독 이런 것들은 자기학대니까요. 그런 것도 다 그것을 경배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더 궁극적으로 본다면 좋은 뜻에서의 어떤 우리 삶의 태도에서도 문제는, 자기 모든 것을 거기 건다고 할 때는 그건 이제 하나님 대신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취미생활이라든지 여러 가지 등등 말이죠? 조금 더 그걸 쉽게 우리 맘에 딱 닿게 설명을 한다면 가족도 마찬가지인 거거든요? 이 가족이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대상이 되면 그게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원수가 식구다 그런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정말 하나님, 창조자 그리고 우리 생명의 근원, 그 분만이 할 수 있는 그 일과 관계된 그 분만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요소들이 많이 있거든요? 예, 어쨌든 뭐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시죠, 우리가 그 어떤 조건을 바꿔도 해결되지 않는 더 근원적인 것의 소유자로서의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고 그런 분만이 우리의 삶에서 경외할 대상이다 그렇습니다. 거기 서론적으로 제가 쓴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시편 76편은 앞에 나온 몇 몇 시편하고도 비슷한데요, 신학적 배경을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적 배경 하니까 또 조금 골치 아픈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편안하게 들어 보세요. 이 시편을 쓴 사람이 어떤 걸 배경에 두고 썼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도 현대시에도 그런 게 있잖아요? 여러 가지 말이죠? 김춘수라든지, 민중시를 쓴 사람들도 많이 있고, 하여튼 그들이, 이번 아이티 참사를 놓고도 어떤 시인은 시를 쓸 수 있고 말이죠? 그런 시를 나중에 누가 해석 할 때는 아, 이건 역사적인 어떤 사건을 배경에 놓고 썼다, 그런 게 나오지 않습니까? 이 구약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제가 자주 반복했습니다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한 개인이 몽상 중에 뚝 받은 게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저들의 삶의 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 삶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이건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도 그렇고 모든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지난 주 저희 설교 본문이 고린도 전서, <교회일치>, 예, 그것도 고린도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서 나온 거거든요? 그러면서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신학적인 영성, 영적인 경지가 확대되는 그런 것들입니다. 예, 그러한 어떤 배경들을 우리가 좀 알 필요가 있죠. 이 76편은 세 가지로 좀 볼 수 있어요. 첫째는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 방금 말씀 드린 거죠? 제가 어떤 성서주석학자의 책을 좀 빌려서 인용한 겁니다. 기원전 701년에 있었던 산헤드린의 예루살렘의 포위사건의 열왕기下와 이사야서에 나와 있는 겁니다. 이러한 아주 위기, 군사적인 위협 이런 걸 배경으로 두었다, 그런 관점이 하나 있고요. 두 번째는 이 시편이 제의 때 드려지던 찬송이다 그런 관점인 겁니다. 제사 드릴 때, 지금 말하자면 예배드릴 때요.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거잖아요? 그러한 배경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고요. 세 번째는 요게 조금 까다로운 건데, 첫 번째는 간단하지요? 구체적인 어떤 위기 가운데 어떤 역사적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그런 걸 기점으로 해서 제사 드리면서 찬양한다고 하는 배경이죠? 세 번째는 조금 다른 색깔이어요. 다른 관점입니다. 종말론적 해석입니다. 이 시편의 내용을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다, 이 세 가지예요.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로만 보기 힘들구요. 세 가지 관점을 다 같이 묶어서 보는 게 필요합니다. 충분히 가능하지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면서 그 다음에 거기서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요? 제사 드리고, 그리고 결국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승리한다고 하는 종말론적 그 승리에 대한 예언 이 같이 연관될 수 있는 거죠.

 

이런 세 가지 관점이 이 76편에 있다고 하는 것을 좀 전제하고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걸 크게 전편 후편으로 나눴습니다. 보통 시에서는 연(聯stanza)이라고 하거든요? 1절에서 6절이 제 1연이고, 7절에서 12절이 제 2연, 이것은 두 연으로 된 한 편의 신앙시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예, 1절과 2절, 이게 다윗시대의 역사를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1절 보면, 이렇습니다. 1.하나님은 유다에 알려지셨으며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 알려지셨도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나오죠? 뭐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서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 나라가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졌어요. 자꾸만 혼동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때도 있고 유다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북쪽과 남쪽인데, 북이스라엘 남유다, 남쪽지역을 유다지파가 지배했거든요? 이게 갈라진 거는 솔로몬의 아들대에 들어와서 갈라진 거예요. 르호보암이거든요? 그 역사적 배경은 여기서 제가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장군과 정치적인 어떤 타협을 보지 못하고 결국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라고 하는 장군이 열 지파정도를 묶어서 북 이스라엘을 하나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세웠죠. 남쪽은 이제 르호보암 유다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아주 작은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두 나라가 갈라지게 된 것은 가장 결정적인 것은 솔로몬과 이 르호보암의 잘못이긴 합니다만, 조금 더 뿌리를 캐 올라가게 되면 다윗하고도 연관되고요, 하여튼 지역감정이라든지 여러 가지가 얽히고 설키었습니다. 그건 아주 복잡한 고대 역사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다 깊숙이 따라 가기는 힘듭니다.

 

여기서 1절과 2절에 그러니까 여기서 북이스라엘이나 남 유다 전체가 다 하나님에 의해서 통일이 되었다, 혹은 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2절은 하나님의 장막, 또 하나님의 처소와 연관되어 나오지요? 장막과 처소 뭐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낱말 하나하나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거든요? 예루살렘을 이야기합니다. 그 밑에 나오는 시온도 낱말만 다른 거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에 사는 주민을 다 얘기합니다. 시온산이라고 얘기하잖아요? 시온성,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계 중심국가가 되어야 된다고 하는 어떤 사상이 19세기, 물론 그 옛날부터 있었습니다마는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서 기원후 70년에 완전히 망한 다음에 계속 나라 없이 살다가, 한 200년 전쯤서 부터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온운동이 벌어졌거든요? 시오니즘(Zionism)이라고 얘기합니다. 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종교운동, 정치운동, 민족주의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중심이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으셨다는 뜻입니다. 뭐 특별한 것은 아니지요? 여기 역사적인 맥락이 조금 있는 거죠, 이 예루살렘은 사사시대까지 조금 더 내려오면 사울 왕 시대까지 아직 정복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요새라고 하죠, 그래서 열두지파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땅을 다 분배받고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많이 정복을 했는데, 이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거기 살고 있었던 이방인, 여부스족을 몰아낸 사람이 다윗이예요. 그래서 다윗에 의해서 명실상부하게 이 가나안 땅이 거의 이스라엘 손에 들어오게 된 거죠. 그렇다고 해서 거기 살던 이방민족이 다 물러 난 건 아닙니다. 여전히 거기서 뒤섞여서 살았습니다.

 

예, 그러니까 1절과 2절을 통해서 이 시편기자는 고대 이스라엘 중에서 특별히 다윗시대의 영광을 다시 한 번 회고하는 거지요. 3절에서 5절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적의 군사력이 파괴되는 장면을 아주 멋진 시적인 표현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3.거기에서 그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없이하셨도다 (셀라) 4.주는 약탈한 산에서 영화로우시며 존귀 하시도다 5.마음이 강한 자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잠에 빠질 것이며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3절에서 5절까지 시편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오늘 우리의 공부의 제목이죠.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두려운 분이다. 모든 것을 없앤다.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화살, 방패, 칼 등등..이런 것들을 다 없이하고요, 또 5절에 나온 대로 마음이 강한자도 모든 걸 빼앗기고 잠에 빠진다. 뭐 등등.. 그런 표현을 통해서 이건 다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이런 말들이 실감이 나나요?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는 겁니까? 보세요. 마음이 강한자도 모든 걸 빼앗기고 잠에 빠진다고 그랬어요. 장군들, 장사들도 모두 그들에게 도움을 줄 손을 만날 수 없도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때요? 이게 실질적으로 그런 것 같애요?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 같습니까? 속으로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게 이제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들어가야 될 하나님의 어떤 통치의 신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게 기계적으로 우리들에게 딱 맞아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강한 나라는 계속 강하잖아요? 약한 나라는 계속 약하고 뭐 나라끼리도 그렇고 한 나라 안에서도 돈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벌 수 있고, 없는 사람은 그것 벗어나기 힘들구요. 앞으로도 점점 더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이 있거든요? 가난의 대물림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는 이러한 세계에서는 오늘 여기 말하는 하나님이 모든 힘 있는 사람, 장수들을 혼비백산하게 잠에 빠지게 한다고 하는 말이 이게 참 실감이 안 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할까요? 제가 뭐 지금 여러분들에게 정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하는 게 성경에 있는 아주 정확한 대답을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건 아닙니다. 성경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 보자고 하는 거구요. 여러분들이 스스로 그런 것들을 찾아내서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들보다 신학공부도 했기 때문에 바둑으로 치자면 수가 조금 더, 이제 바둑에서 약간 고수이기 때문에 어떤 바둑을 수들을 제가 놓아 가고 있는 건데 그런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 바둑수가 늘어나는 거하고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리는 것을 아, 그게 정답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여러분 스스로 그러한 성서와 성서의 언어와 그가 말하려고 하는, 성서가 말하려는 세계, 또 성서기자들이 세계를 어떻게 봤는가, 그런 것들을 두루두루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지금 시편기자는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경험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거지요. 제가 답을 여기에선 달지 않았는데, 제 개인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 드리면, 그렇습니다. 겉으로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속으로 간담이 서늘한다거나 두려워 한다거나 이미 그렇게 폭력적이고 강압적이고 약탈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겉으로 볼 때 힘있는 것 같애도 이미 그들은 어디 의지할 데가 없는 거다, 어떤 심층적인 차원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뭐 쉬운 거로 말한다면, 조폭이라든지 이런 사람은 강할 것 같지만 늘 불안하게 살 거예요. 약할 겁니다. 그런 게 하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고요. 두 번째는, 두 번째가 더 맞는 이야기 같은데요? 이 역사의 시간을 길게 보는 거죠. 길게, 그러면 아무리 강했던 나라도 다 어느 순간이 되면 정말 초라하게 무너지거든요? 구약성서에 나와 있는 그 제국들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까지 계속 그렇잖아요? 아, 그러한 긴 역사에서 볼 때는 아무리 힘을 갖고 있는 나라나 개인이라 할 지라도 아주 초라하게 잠에 빠진 것 같은 그러한 데로 들어가게 되는 거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사이에 당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너무 힘들지 않느냐, 그건 맞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 또 우리가 나름대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을 해야 되는 거구요. 결국 하나님이 그러한 악한 세력, 불의한 세력은 겉으로 아무리 기세등등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잠에 빠지게 한다. 그런 희망, 그런 역사에 대한 관점을 놓치지 않고 우리가 이미 승리했다고 하는, 하나님의 승리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의 평화라고 할 수 있죠? 그런 관점으로 오늘의 이러한 뒤틀리고 우여곡절이 많은 이런 삶을 우리가 살아내야 되겠지요. 시편기자도 그런 세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신데요? 지금 우리가 3절에서 5절까지 본 그 내용입니다.

 

4절에 보면, 영화로우시며 존귀하시도다 얘기하잖아요? 이 두 개 서로 배척된 개념들이 같이 연결되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울 정도로 힘을 행사하시는데, 그러한 분이신데,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영화롭고 존귀하시다, 시편기자는 지금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잖아요? 앞부분에는 다윗시대의 일이고 6절에는 출애굽 사건을 다시 회고합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와 있는 거거든요? 거기에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여자들하고 소고를 들고 춤추는 장면도 나오고요? 하나님이 바로의 병거, 군사들을 다 홍해에 다 집어넣었다고 하는 찬송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 거기까지 1절에서 6절을 봤습니다. 이건 시편기자가 지난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적 회고의 대상은 두 가지예요. 다윗시대에 이스라엘 전체를 통일한 그 사건이고, 두 번째는 출애굽입니다. 이제 두 번째 연으로 올까요? 7절에서 12절입니다. 그 소제목을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렇게 정했습니다. 제 1연에서는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런 정도로 하나님이 큰일을 행하셨다, 두려운 분이다, 그러니까 그 분만이 영화로우신 분이다, 이제 그걸 이야기 한 거구요?

 

이제 두 번째 대목에서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지 않냐,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 경외한다고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나약한 걸로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아,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요? 정말 참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가질 때만 경외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영원한 것하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이 있어야 그때 이제 마땅히 경외 받으실 분, 그 분에게 경외할 수 있는 거죠. 우리는 예배를 경외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고 거기 참여합니다. 예배는 그러니까 소극적인 게 아니라 굉장히 적극적인 삶의 태도예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 생명이 완성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더 직시하고 생명의 주인이신 분에게 우리의 영혼을 맡긴다고 하는, 우리의 거룩한 행위,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이게 왜 적극적이냐 하냐면 그 외의 그 어떤 것은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 보다 더 큰 힘은 없잖아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비굴해진다거나 아니면 불안해한다거나 나름대로 자기가 이 땅에서 소유하려고 하고 이루어갈려고 하는 것이 안 되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접어놓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관점에서 말이죠? 그건 정말 강한 능력이 되는 거죠. 예,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지 않냐 그런 얘기입니다. 구약성서, 신약성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예수님을 믿어라 거의 그런 얘기들이 반복, 반복 되지 않습니까? 이건 정말 삶의 진수로 들어가라, 그걸 직면해라 그 얘기거든요? 그럴 때만 우리에게 참된 평화가 가능하고요, 그럴 때만 우리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안식이 가능합니다. 그 외의 것으로는 아무리 용맹스러운 장수라 하더라도, 나라를 몇 개나 침공해서 정복했다고 하더라도 불안한 거예요. 거기서는 안식이 불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다, 그리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걸 지금 후반부에서 이야기 하는 거지요.

 

7절 보시죠? 7.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음,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좀 바꿔 얘기하면 경외 받으실 분이 주님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어때요? 이런 거 읽으시면서 감이 오시나요? 시편기자가 어떻한 생각을 하면서 이런 말을 쓰고 있을까요? 그의 머릿속에 하나님의 이미지가 어떤 걸까요?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 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표상, 그게 뭘까요? 뭔가를 그리고 아니면 생각하고 아니면 경험하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하나님, 우리가 말로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분, 폴 틸리히 신학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 예를 들자면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될 수 있거든요? 그 하나님, 그 절대자, 그 여호와, 그 분에 대한 생각, 표상, 이미지가 어떤 것인가, 이런 것들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더 깊이 있게 만들어 가셔야 될 거예요. 그게 안 되면 어린아이처럼 되는 거죠. 계속해서. 어린아이가 어머니 아버지를 자기 용돈 주는 사람으로만 생각해서 계속 조르기만 하고 애만 먹이면서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상태로 그 부모에 대한 표상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 앞에서 그럴지 모르겠어요. 이런 성경기자들은 이러한 면에서 굉장히 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되겠습니다. 지금 제가 단어 몇 가지 이런 것들을 설명했잖아요? 경외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냐, 그러니까 정말 변하지 않고 영원하고 참된 생명에 관계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어떤 분, 그 분, 그 분을 가리켜서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그 분이 또 역사도 주관 하신다, 그런 얘기죠.

 

7절에 대한 제 강의안 설명을 보십시오. 주님은 경외 받으실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만 절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능력,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 그러한 능력, 이 세계를 마지막 때 완성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만드실 그 분, 창조를 완성하실 그 분,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니까 그런 분만이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말해야 되는 거죠. 그가 노하실 때에 아무도 주의 목전에 설 수 없다. 이건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 부르는 찬송과 비슷한 겁니다. 하나님의 노(怒)라고 얘기 했잖아요? 이 노를 사람의 감정처럼 누구를 미워하고 그런 차원에서 화가 났다 그렇게 보면 좀 곤란하고요. 이 하나님의 노는 문학적인 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 할 수 없어서 이런 문학적으로 표현 할 수 밖 에 없는 거예요. 무엇을 그렇게 말 할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그건 하나님이 노하셨다고 밖에 없는, 더 표현 할 수 밖 에 없는 강력한 힘인 겁니다. 그걸 경험하는 거예요. 그런 걸 역사 안에서 보는 눈입니다. 시편기자가요. 예언자들도 다 그렇게 했고요. 그런데 그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거든요? 이 노는 장군이나 그 누구도 아무리 강한 사람이나 아무리 잘 난 척 하는 사람이나 그 어떤 피조물은 제어 할 수 없는 강력한 능력을 행사하시는 그 분의 그 상태, 그 사건 그 현장 그 능력 그런 것들을 다른 말로는 안 되는 거죠. 아, 하나님이 노하셨다, 이 노는 누구를 미워하고 아니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 오히려 8절과 9절에 나옵니다마는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는 힘 인거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신다. 그게 하나님의 강력한 힘이죠. 그러니까 자기 감정표현으로 우리는 노를 풀어내잖아요? 카타르시스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방식이 아니라 지금 성서기자가 노(怒)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온유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이라고 하는 거지요.

 

예, 10.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이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이 노여움은 무얼까요? 앞에서는 하나님의 노라고 했고, 여긴 사람의 노여움이라고 했는데, 모르겠어요. 제가 히브리어로 다 확인해 갖고 오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언어유희 인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법적으로 그걸 다 설명할 자신은 없구요. 이렇게는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노는 아까 제가 설명한 그 부분이고요, 사람의 노여움은 하나님의 큰 힘에 의해서 완전히 잠에 빠지거나 아니면 파멸당한 그 사람이 느끼는 어떤 것, 사람의 분노죠, 분노, 노여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조금 이상하죠? 사람의 노여움이 어떻게 주를 찬송하게 된다고 하는 걸까요? 결국 하나님의 큰 능력에서 자기가 파멸되는 것을 느끼는 교만한 사람, 교만한 힘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자기를 높이 세우려고 하는 그러한 것들이 무너지게 되면 화가 나잖아요?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큰 힘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거죠. 그게 찬송하는 거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예, 마지막으로 11절 12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시편기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엄청난 힘 앞에서 사람들이 경험해야 될 두려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할 분으로 말을 하면서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계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다는 걸 짚고 있어요.

 

11절 중반에 보면,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만민이죠.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경외할 이, 그 11절에 있는 말은 12절과 연관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왜 그가 마땅히 경외를 받아야 될 분이냐 하면, 그가 고관들의 기를 꺾으시리니 그는 세상의 왕들에게 두려움이시로다. 예, 반복되는 이야기군요. 이게 우리가 하루하루 여러 가지로 일상생활에 많이 시달리다 보면 이런 것들이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가 됩니다. 당장 내가 실업자가 되냐 안되냐, 예를 들자면 그런 거라든지, 아니면 남편과 굉장히 불화한다거나, 이웃과의 문제에서, 아니면 가족, 친척사이에서 정말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아, 당장 경제적인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말이지요. 그런데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단계 단계들인데, 여기에 완전히 취해 버리면, 그건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해요. 그렇게 들어가 버리면 벗어나기는 힘듭니다. 왠만해서는 거기 빠져 나오기 힘든 거죠. 부도가 났다면 정신 못 차리고 그걸 해결하려고 하잖겠습니까? 그에게 당장 그것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양해라, 이건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그건 전제하면서 다른 어떤 관점, 우리에게 한계가 있긴 있지만 그것을 벗어 날 수 있는 어떤 삶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또 가능한 거구요. 그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르게 아는 거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 어린아이들이 친구들하고 싸워갖고 좀 맞고 힘들고 하더라도 그 아이가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잘 알면 금방 힘을 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들과 싸워서 얻어터진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고 어머니 아버지와의 관계가 핵심인 것처럼 말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시행착오를 내 잘못도 있고 다른 잘 못도 있고 그런 것들 속에서 가능하며 한 발짝 물러서느냐, 일반적으로는 아마 당장은 안 될 거예요.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빠져 나오게 되면 이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그러한 평화, 기쁨, 그런 세계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의 핵심이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바르게 아는 것이죠. 그것을 아는 하나의 공부가 성경공부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있는 내용을 다 알아 들으셨지요? 예? 이런 것들을 우리가 조금 더 세심하게 촘촘하게 실질적으로 잘 이렇게 파고들게 되면 우리의 영성이 깊어지는 거죠. 예, 시간이 됬군요. 요 정도로 제 강의는 마치고 차도 한 잔 들면서 질문응답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일단 노래를 한 번 하고, 아까 부른 찬송입니다.

 

<소망이 되신 주님>주현절 노래입니다.

 

소망이 되시는 우리 주님 주님의 능력은 한이 없네.

이 땅에 겸손히 오실 때에 사랑의 몸으로 나시었네.

우리의 구주로 오시었네 구하소서 생명을 주소서.

한 소리로 주를 찬양하고 정성 다해 주를 경배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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