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20편- 야훼 하나님의 이름

 

시편 20편 오늘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절부터 9절까지 있습니다.

그렇게 길지 않는 시편입니다. 오늘 이 20편은 조금 특색이 있는데요? 읽다보면 나오겠습니다만 “임금을 위한 기도문”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정도로 임금, 왕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먼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서 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20편 1절에서 9절입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께 비옵니다.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소서.

2.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시온 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3. 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드리는 번제를 달게 받아주소서. (셀라)

4. 임금의 계획을 이루어주시고,

   그의 소원 그대로 채워주소서.

5. 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야훼여, 우리 임금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소서.

   이제는 알았습니다.

6. 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8.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

9. 야훼여! 우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이제는 교독해서 읽겠습니다. 마지막 구절은 다 함께 읽으면 되겠습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께 비옵니다.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소서.

2.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시온 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3. 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드리는 번제를 달게 받아주소서. (셀라)

4. 임금의 계획을 이루어주시고,

   그의 소원 그대로 채워주소서.

5. 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야훼여, 우리 임금의 모든 청원을 들어주소서.

   이제는 알았습니다.

6. 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7. 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8.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

9. 야훼여! 우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2.성소에서 너를 도와 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3.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아 주시기를 원하노라 (셀라)

4.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5.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 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6.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의 오른손 의 구원 하는 힘으로 그의 거룩한 하늘에서 그에게 응답하시리로다

7.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 하리로다

8.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9.여호와여 왕을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아멘! 바로 앞서 제가 지적한 것처럼 ‘임금’이란 단어가 지나칠 정도로 자주 나오지요? 뭐 임금에게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이렇게 시편기자가 임금만을 위해서 노래하고 또 기도드리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 시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그 임금, 어떤 임금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대상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 성서학자들은 이 20편을 가리켜서 군인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날 밤에 드리는 제사의 기도문이다. 이렇게 기도하지만 또 그런 주장을 하는 성서학자들도 있고요. 그런 주장이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은 오늘 여기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전쟁을 연상할 만한 그런 단어들이 제법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게 그런 걸까요? 깃발을 높인다든지, 직접적으로는 7절 같은데 나오듯이 병거, 기병, 승리, 이런 것들을 보면 전쟁을 앞둔 병사들을 위한 격려의 그런 찬양, 혹은 그런 기도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한 성서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은 그렇게 전쟁전야에 부르는 찬양이나 기도라기보다는 축제제의에 사용하던 찬송시라고 합니다. 뭐 그게 그거 아니냐, 생각할 수 있는데 크게 다른 겁니다. 그 다른 부분이야 지금 우리가 길게 이야기 할 것 없구요. 이게 겉으로 그냥 보면 방금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제 그 전쟁과 연관된 전쟁을 연상할 만한 단어들이 제법 나오지만, 늘 그런 것들은 원래 이스라엘 삶에서 일상적으로 다뤄왔다는 점에서 굳이 그 단어만 놓고 이것이 전쟁전야에 불렀던 찬양이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겁니다. 늘 그러한 주변의 제국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전쟁해야 하는 그런 것들을 늘 일상적으로 살아 왔다는 점에서 이건 특별한 노래는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 20편 시편이 아주 평범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뭐, 글쎄 우리가 볼 때는 평범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하여튼 전문적인 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전쟁이라고 하면 누구누구 이렇게 지적해야 되는데 여기에는 그런 것 없이요. 구체적인 싸워야 될 대상들이 그렇게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전쟁을 대상으로 하는 그러한 노래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네, 그건 그렇고, 임금이라고 하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것은 그 당시가 고대시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좀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임금, 왕 정치에 대해서 임금을 위한 기도가 바로 이 백성들을 위한 기도와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시편기자가 여기서 임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이제 전이해로 놓고 1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우리가 조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야훼께 비옵니다. 우리 임금이 곤경에서 기도하거든,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소서. 일반적인 그러한 표현입니다. 다만 독특하다고 한다면, 야곱의 하나님, 야훼 이렇게 표현하죠? 그냥 하나님 야훼라고 하지 않고, 야곱이라고 굳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글쎄요,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파악하긴 힘들지만, 상식적인 것만 본다면, 그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국가, 민족 이름이 나왔다고 하는 점이 여기서 중요한 게 아닐까, 그 민족을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이 나온 야곱을 통해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지요. 그 야훼 하나님을 향해서 뭐라고 기도 하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기도를 들으시고 지켜주소서 라고 해요. 그 하나님을 향한 가장 절실한 삶의 태도 이런 것이 곧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1절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볼 때 흔하게 들은 거기 때문에 아주 상투적으로 들릴 수가 있는데요? 그러나 시편기자의 그 내적인 상태로 좀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부탁드리고 지켜 주소서 하는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가장 절실한 그러한 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대게 그런 것들을 놓치고 있잖아요? 사실 우리가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합니다. 물론 한국교회만큼 기도를 많이 하는 교회는 세계에 없습니다만 기도라는 문제를 놓고 보면 아마 두 가지의 양극단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완전히 열광주의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거죠.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고 마는 내가 얼마나 기도했다고 하는 자체에 만족하고 마는 그러한 것이구요. 그런 것을 포함해서 기도에 대한 소나무 뿌리를 뽑는다거나 예를 들자면 그런 표현들이 많이 있는데요? 아주 열광적인 그런 상태에 몰입함으로써 심리적인 카타르시스, 그런 것들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게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삶이라고 하는 문제는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 존재전체를 담는 그런 기도가 되지 못하고 어떤 감정적인 열광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도 좀 매력적이긴 해요. 그래서 사람들이 거기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어쩌면 일반 대중들, 일반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훨씬 더 효율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삶, 생명, 죽음, 시간, 역사, 심판, 계시 그런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까, 믿습니다 모이면 기도하고, 헤어지면 전도하자 이런 슬로건을 탁탁 던지면, 이제 그런 것이 확 닿게 되고요, 흔한 말로 주여 삼창, 이렇게 하면서 열광적인 분위기, 도가니로 몰고 가면, 그게 기도한 것처럼 사람들은 느낀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의 극단이거든요? 그렇다면 또 하나의 반대 극단은 무얼까요? 기도에 대한 냉소주의입니다. 전혀 기도라고 하는 우리의 경건한 세계에 대해서 모르는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아예 우리 생명의 심층에서 우리와 대화하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자기 독단 자기 독선 속에 빠져 있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냉소주의지요. 이게 서로 다른 극단인데, 따지고 보면 비슷한 거예요. 냉소주의도 결국은 자기가 중심이거든요? 열광주의도 무늬는 하나님인데, 사실은 자기도취인거예요. 자기가 막 뜨거운데 들어갔다고 하는 그 상태, 일종의 ‘자기애’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양극단이 있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진실로 열려있는 자세로,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에게 던지는 자세를 갖는 절실한 영적인 상태, 그런 것은 우리가 담아 낼 수 없죠. 이런 극단이 아니라 우리가 시편기자들을 통해서 계속 배우듯이 하나님을 향해서 생명의 가장 깊은 세계를 여는 삶의 자세가 그걸 우리가 배워야 되고 또 실천해야 되겠습니다.

 

1절에서 사실은 전반적인 것을 다 이야기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5절까지 그런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2절을 보면,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시온 산에서 임금을 붙들어주소서. 성소나 시온이나 이건 똑 같은 의미입니다. 시온산, 시오니즘 이야기 하지요? 예루살렘을 시온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근처 전체를, 거기에 있는 어떤 산, 이게 시온산이나 시온이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성소가 있으니까 다 거룩한 어떤 곳을 이야기 하거든요? 거기서 성소로부터 임금에게 도움을 내리시고, 도움을 주시고, 하는 거구요? 1절과 마찬가지 내용입니다. 3절에도 보면 3. 임금이 바치는 예물을 마음에 두시고, 마음에 두시고, 그러니까 임금이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고대사회에는 임금들이 제사장의 역할도 많이 했죠. 아, 물론 똑 같은 건 아닌데, 대표로 거기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물론 제사장은 따로 있긴 있는데요? 제사장의 옆에서 임금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제사 드리는 행위를 했는데 그걸 지금 3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그래서 계속 그런 이야기가 쭉 5절까지 반복되고 있거든요? 그럼 1절부터 5절까지 임금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얘기 했듯이 이건 뭐 도대체 민족을 위한 기도를 하지. 임금을 위해서 기도 할까 이상하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임금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이 곧 이스라엘 민중의 기도를 들어 주는 것 하고 똑 같다는 그러한 생각으로 시편기자가 이렇게 기도드리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구절을 읽으면서 이건 자칫하면 어용종교가 될 가능성도 있고요. 그렇게 타락하는 거죠. 일종의, 임금만을 위한다면 이건 어용종교가 되는 거죠? 그러나 임금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이러한 놀라운 시, 기도문 속에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더 놀라운 영성을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여기는 왕, 대통령, 이런 국가지도자의 위치가 뭐냐 하는 것을 그게 얼마나 엄격 하냐 하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거죠. 그러니까 시편기자가 임금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이렇게 하나님께 아뢸 정도의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 임금은 자기 정말 사리사욕, 자기명예가 아니라 자기백성들, 자기민중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헌신하는 그런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시편기자가 그를 위해서 그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에서 임금의 위치는 아주 독특했습니다. 예언자들이 일반백성들의 잘못 보다는 왕의 잘못을 정확하게 집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상식적으로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의 수 십명의 왕들이 있지요. 통일왕국에는 세 명으로 사울 왕 다윗, 솔로몬이었어요. 사실은 사울은 왕정시대로 돌입하기 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 어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왕정이라고 하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명실상부한 왕정제도인데, 이걸 사울이 못했단 말입니다. 이게 사울하고 다윗하고는 이건 경쟁대상이예요. 누가 이스라엘의 왕권을 잡느냐는 투쟁을 하다가 결국은 사울이 밀려난 거지요. 그건 접어두고, 하여튼 형식적으로는 사울, 다윗, 솔로몬이 통일 왕조시대 왕들이었고, 솔로몬 뒤에 와서 남북으로 갈라지잖아요? 수 십명의 왕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는 여로보암을 칩니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거든요? 남쪽은 여로보함이었구요. 그러니까 이 나쁜 왕을 지칭할 때마다 여로보함과 같더라 그런 표현을 합니다. 이 한 나라의 임금, 혹은 대통령이 자기백성들 자기 국민들을 진정한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한데요? 그런 점에서는 이런 지도자의 위치가 정말 떨리는, 좀 백척간두라고 할까? 자칫하면 예언자들의 큰 비난을 받고 또 정말 좋은 왕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기도를 대신 받을 수 있는 이러한 위치인 것 같습니다. 임금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부분을 잠깐 짚었어요.

 

5절에 보면, 5.임금의 승리를 소리 높여 기뻐하고 하느님 이름으로 깃발 높이 치키리니, 이것도 다 문학적인 표현이니데요? 그러니까 시편기자들은 상당히 글쓰기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시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깃발을 든다고 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 여기 임재 한다고 하는 것을 상징하는 그러한 뜻이라고 합니다. 예, 그런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임금의 청원을 들어 주소서, 그렇게 시편기자가 기도하고 있는 거지요. 그게 일부예요. 1절부터 5절까지가 한 단락을 이루고 있고, 6절부터 9절까지가 제 2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절 후반절서부터 6절까지 이제 알았습니다. 밑에 내용이 나오는 거죠. 6절에 있는 내용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는 것을 확신합니다. 라는 그 뜻입니다. 야훼께서 기름 부으신 임금에게 승리 주심을, 알았습니다. 그 거룩한 하늘에서 그의 기도 들으시고, 오른손 힘차게 뻗어 승리 주심을 알았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라고 하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했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뭐 전쟁을 해서 이긴다든지, 죽을병에 걸렸는데 낫는다든지, 그런 표현들도 좀 가능합니다만, 이건 아주 특별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하는 이 표현들은 제의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어떤 예전적인 표현이죠, 딱 어떤 표시가 나서 가난한데 하늘에서 금덩어리가 떨어졌다든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불치병에 걸렸는데, 나았다든지 그런 확신이 아니라 이건 제사 드리는 그러한 하나의 예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하는 것에 대한 종교적인 표현인거죠.

 

7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은 이게 7절이 오늘 공부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제가 오늘 전체 제목을 말씀 드리지 않았지요? 다음과 같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 그게 제목이예요. 야훼 하나님의 이름, 그 7절을 근거로 해서 제가 그렇게 제목을 잡은 겁니다. 우리가 이 7절만 깊이 생각하더라도 많은 시간들이 필요하겠군요. 제가 다시 읽어 보겠어요. 7.누구는 병거를 믿고 또 누구는 기마를 믿지만, 우리만은 우리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믿사옵니다. 두 가지가 대비되지요? 병거와 기마, 그리고 다른 한 쪽에는 야훼 이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병거와 기마를 요즘 말로 바꾸면 뭐가 될까요? 미사일이라든지, 이런 거 아니겠어요? 핵폭탄이라든지 이런 게 될 것 같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 제국들의 이 병거와 기마 앞에서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이거는 뭐 불문가지입니다. 아주 분명한 거예요. 그래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주변 기마 병거에 의해서 함락되고, 정말 자기네 나라말도 잊어버리고,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도 다 파괴되고, 그런 정도이지 않았습니까? 지금 시편기자는 그 당시에 어떤 힘을 과시하는 상징으로써 병거와 기마를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야훼 이름을 믿는다. 어떤 것이 더 현실적일까요? 뭐 여기 병거와 기마를 꼭 미사일이나 핵폭탄으로만 생각 할 것 없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으로 본다면, 큰 재산 뭐 이런 거라고 할 수도 있겠죠. 보이는 힘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에 매력적으로 다가 갈 수 밖에 없기도 하고요. 또 그 앞에서 불안해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 현실이거든요? 기독교인들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봐야 되겠지요.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하는 이 기도는 그러면 극단적인 이상주의일까요? 기마와 병거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 몽상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예, 이런 표현들을 우리가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자기가 이 세상에서 해야 될 모든 책임감들, 이런 것들을 전혀 하지 않고, 무작정 하나님에게만 매달린다는 식으로 그렇게 이 말씀을 이해하면, 그건 오해하는 거죠. 준비할 건 준비하고, 성실하게 할 건 하고, 그런 건 최선을 다 하는데, 다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러나 우리의 운명 삶 전체의 근거를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게 그게 핵심인 거지요. 이거는 궁극적 생명의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을 누가 지배하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당장 돈과 건강,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애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우리 생명의 여탈권(與奪權)을 갖고 계시다고 하는 이런 신앙고백이 바로 이런 것들이죠. 이거는 제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가 여기서 80년, 90년, 건강하고, 사실 건강도 타고 난 거기 때문에 건강을 많이 챙긴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한 7,80년을 우리가 이 땅에서 살게 되는데,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가 성취하는 것들은 다 포기해야 되거든요?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고, 죽는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기 때문에 병거와 기마 이런 것들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 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냥 낭만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고 그러한 신앙이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주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이렇게 동력화 할 수 있도록, 이렇게 견인해 갈 수 있도록 그런 신앙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게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물론 그래도 우리가 또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약해지기도 하고 불안해 지기도 하는 것도 당연할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영성이 심화 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더 리얼하게 더 확실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오늘 시편기자의 이러한 기도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거죠. 사람들은 기병과 병거 미사일과 핵무기와 돈과, 하여튼 그런 것들에 의지하지만, 믿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 그러한 고백이죠.

 

예, 8절에 그 믿음의 결과가 표현 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예요? 기마와 병거를 믿는 사람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강력한 ..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지만 우리는 꿋꿋이 선 채 넘어지지 않사옵니다. 어때요? 이게 정말일까요? 그리고 이게 어떤 뜻일까요? 그건 바로 앞서 말씀 드린 겁니다마는 우리 운명이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는 확고한 사실들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고요. 아, 이런 점을 말씀드려야 겠네요. 이 사람들은 휘청거려 쓰러지겠다고 하는 말, 사실 자기가 쌓은 업적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더 불안합니다. 그거는 분명한 사실이예요. 잃을까봐 그건 불안하게 됩니다. 뭐 좋은 쪽 으로도 마찬가지예요. 학문적인 업적을 많이 남긴 학자들은 그걸 유지하지 못하면 불안한 거예요. 정확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황우석 박사가 자꾸만 거짓말했잖아요? 자기가 처음에 뭔가 하나 이뤘거든요? 그게 계속 되지 않으니까 불안해서 거짓말을 통해서라도 유지하려고 그런 결과가 된 겁니다. 목회차원에서도 마찬가지지요.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면, 그건 기분이 좋을 것 같지만, 제가 쉽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건 목사들에게 또 하나의 유혹이 되고 또 그게 불안한 소제가 됩니다. 그걸 유지하게 되면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게 때문에, 휘청거리게 되는 거지요. 뭐 크게 했든지 작게 했든지, 결국은 나중에 다 놓아야 되는데, 적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을 때 말이죠, 다 손 놓고 가야 되는데, 그럴 때는 적게 이룬 사람이 오히려 속이 편한 거예요. 아깝지 않은 거지요. 말하자면, 제가 설명한 게 요 구절하고 딱 들어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과히 틀린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러니까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다고 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내 생명과 영혼을 거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것을 걸어 두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못해서 문제이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당연히 휘청거리지 않는 거죠. 하나님만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요? 답은 나온 거지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시편기자는 그걸 확연하게 보고 얘기 하는 겁니다.

 

마지막 구절, 9.야훼여! 우리 임금에게 승리를 주소서. 이야기 하고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소서. 예, 말씀을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제목은“야훼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부제를 잡는다면, “제의적 영성” 해도 됩니다. 제의라고 하는 말을 아까 몇 번 했죠? 이 시편이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그러한 제의라고 하는 말씀을 드렸는데, 어떤 구절을 얘기하다 그랬나요? 축제, 제의거든요? 제의적 영성, 요즘말로 말하면 예배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우리의 삶이 팍팍하더라도 혹은 반대로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너무 일비일희( 一悲一喜)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그냥 우리가 가는 거예요. 과정 중에 있는 거예요. 그건 잠정적인 거예요. 그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닌 거예요. 열심히 해야 되는데, 거기에 완전히 우리 영혼을 쏟아 부으면, 결국은 우리가 휘청거리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팍팍하든지, 잘 풀리든지, 중요한 것은 제의적 영성을 놓치지 말자, 하나님에게 예배드리는 그러한 영성, 예배는 하나님께 최선을 바치는 거잖아요? 그러한 관계, 그러한 영성, 그런 것들을 오늘 우리의 삶의 현상에서 놓치지 않아야만 오늘 여기 20편을 쓴 시편기자의 영성에 우리가 비슷하게 가는 겁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시편20편 기자의 영성을 계속 배우고 따라 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처럼 휘청거리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에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이 서서 넘어지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들 시편 20편,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삶의 현실들, 이런 것들을 헤치고 나가야 되는데, 힘들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적인 눈을 야훼 하나님의 이름에 맞출 줄 아는 저희들 되게 인도해 주십시오. 기마와 병거와 같은 것에만 솔깃해 하는 저희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완성하실 바로 그 창조자 하나님 이름을 온전히 믿고 사는 저희들 되게 도와주십시오. 시편 20편 기자의 영성처럼 우리도 늘 우리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거와 같은 깊은 영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든 말씀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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