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77편-기이한 분에 대한 기억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의 법칙에 따라 부르는 노래〕

1.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 울이시리로다

2.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 절하였도다

3.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 였나이다 (셀라)

10.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6.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17.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 이다

19.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 이다

20.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아멘! 예, 제가 젊었을 때 신학생이라든지 청년시절에는 시편을 외운다거나 뭐 그냥 읽었지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가 잘 알아서가 아니라 몰라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경구에 있듯이 아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처럼 말이죠. 이 성서의 세계도 아는 것만큼 보이고 들어 갈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이가 좀 들어서야 시편기자가 어느 정도의 삶의 경지를 갖고 이런 시를 썼는가 하는 것이 조금 다가갑니다. 이게 이제 다른 문학작품을 읽을 때도 비슷한 거거든요? 중고등학교 때에야 니체 책이라든지 그런 철학책이나 철학책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세계명작들에 대한 흥미들을 조금 성숙한 학생들은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것에 대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제 대학생 되고 조금 더 세계와 삶, 이런 것들이 눈에 뜨이게 되면 이런 명작들이 더 흥미 있는 거 하고 비슷한 거 같아요. 신앙생활도 성경을 아는 것들도 그러한 공부가 필요한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예, 오늘 여기 77편을 같이 읽었는데요? 제가 서론적으로 그런 얘기를 좀 썼습니다. 우리가 왜 구약성서를 읽는가? 시편을 왜 읽는가? 의무적으로 교회서 공부를 하니까 라든지, 아니면 우리나라 신자들이 성경공부를 하는 독특한 방식이 있는데, 큐티라고 있어요. 그래서 매일 성경 몇 구절씩 읽고 그걸 자기에게 적용하고 말이죠. 그리고 상당히 열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신자들은 성경에 대한 그 특심이 있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하는 점에서 좋은 거죠. 어쨌든 우리가 성경을 왜 읽을까요? 그거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생각을 해 보세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속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일단 시편77편을 읽었는데, 요건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시편기자의 이야기예요? 속으로 대답해 보세요. 시편기자의 이야기이거든요? 하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거든요? 시편기자도 성서기자들의 하나님 경험, 혹은 하나님 행위에 대한 경험, 그런 것에 대한 고백들인데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읽고, 그걸 받아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면서도요? 우리가 넘어서야 될 혹은, 그것을 확실히 이해해야 될 어떤 그 맥락이 있습니다. 아, 이 표현이 좀 정확하지 않는데요? 제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요. 하나님이 입이 있는 게 아니죠? 소리가 있는 게 아니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헬라어를 하겠어요? 히브리어를 하겠어요? 독일어, 프랑스어 무슨 말을 하겠어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간접적인 거죠. 성서기자들의 하나님 경험으로, 어떤 역사적 사건으로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이야기가 비록 시편기자의 아주 고유한 영적인 진술이지만, 이게 이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의 방식인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 통해서 말씀 하시는 거지요. 이 말은 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쓴다, 혹은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닌 거예요. 어떤 문학작품도 가짜, 통속작품들이 있잖아요? 그것도 많이 유행하고 많이 팔리긴 합니다마는 문학적인 가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거란 말예요. 구약에서도 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대언한다고 많이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통속소설과 비슷한 거예요. 그 당시 아무리 유행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잠깐 있다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성서기자들의 영적인 경험이 녹아 있는 그런 것들은 다 살아남았죠. 그게 이제 구약성경이 된 겁니다. 그런 것들은 지금도 반복된다고 할 수 있지요. 보통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고 하기도 하고 성경공부도 그렇고 많이 그런데, 아주 긴장이 있는 거예요. 이게 차이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있는가, 아니면 이건 완전히 약장사인가, 그런 차이 말입니다. 이게 참 어렵지요. 그걸 누가 또 판단하겠습니까? 쉬운 것도 아닌데,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고 할 때, 직접적으로 하시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신 말씀이라고 하는 그 맥락을 여러분들이 일단 이해하시고요,

 

오늘 여기 77편을 쓴 이 사람이 어떠한 영적인 경험을 했는가, 그걸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마치 괴테의 어떤 시를 우리가 대학이나 그런데서 공부하듯이 괴테가 경험한 고유한 세계가 있는 거 거든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낱말만 공부해서는 시에 대한 공부가 안 되는 것처럼 오늘 여기 77편을 쓴 시편기자의 영적경험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를 전체적으로 네 단원으로 나눴습니다. 보통 셀라라고 하는 부분들로 나눴는데, 첫 번 문단은 셀라가 3절에 끝나지만 4절에 끊었습니다. 요 내용적으로 볼 때 4절까지 끊는 것이 마땅하다고 봤습니다. 셀라라고 하는 것은 아멘하고 비슷한 얘기입니다. 그냥 유대인들의 시 후렴구 비슷하게, 우리나라로 하자면 “얼쑤”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록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구요. 시의 반향 그런 것들을 부추기는 그러한 용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고런 것들은 대게 단락으로 나눠질 때 나오는데 하여튼 첫 번째 단락은 그 셀라가 있는 3절이 아니라 4절까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로 나눴는데요? 아, 이 전체의 주제는 제 강의안에 나와 있듯이 “기이한 분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건 시편기자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썼습니다.

 

11절에 후 반절에 보면 나오지요? 기이한 일을 기억하시리라, 그리고 또 14절에도 보면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요게 사실은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될 말씀의 핵심주제라고 할 수 있어요.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요거를 꼭 머릿속에 넣어 두시고요, 나중에라도 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어떤 뜻인가 말이지요, 이게 할 일 없어서 그냥 이런 얘기 설교조로 좋은 게 좋다 그런 식으로가 아니라 아주 정확한 세계이해, 역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 이 안에서 나온 고백들이거든요?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기이한 일, 신기한 일 그러한 뜻입니다. 일종의 신비스러운 일, 이 세계와 역사를 어떤 신비한 관점으로 볼 때만 가능한 이러한 고백이죠, 그런 일을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기계적으로 굳어져 있는 게 아니죠, 우리가 이 세계를 이용할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엄청난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계산해 낼 수 없는, 조금 전문적인 용어로 하면 우리가 계량화 할 수 없는, 계량, 몇 그람이다, 몇 킬로다 키가 얼마다 할 때 계량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계량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어떤 세계를 시편기자가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한 눈이 없으면 성경이 안 들어오게 되요. 그런데 우리는 이제 대게 이런 관점 없이 성경을 이용해 갖고 아, 내가 복 받고 편하게 맘 위로 받고 자위, 자기를 위로하는 뭐 그런 정도로 머물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 천 날 가 봐야 이건 신앙적으로 성숙할 수가 없습니다. 맨 날 할아버지들에게 약장수 하듯 그 사람들이 막 정신 빼 놓고 약 팔아먹듯이 다 그런 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세계에 하나님의 역사 이 전체 시간, 이런 것 속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섭리들, 이런 것들을 보고 있는 거지요.

 

예, 네 단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단은 1절에서 4절까지, 제목은 “불안한 심령”입니다. 1절부터 20절까지 그냥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굉장히 이 사람의 마음이 불안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데도 불안해요, 하나님에게 희망을 걸었는데도 불안합니다. 왜 내가 이런가, 하나님이 날 버렸는가, 이런데 까지 들어가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아, 아니지 그러면서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합니다. 그게 세 번째 단락에 있는 역사적인 일이구요. 4번째 단원으로 창조에 대한 얘기를 해요. 이제 흐름이 눈에 들어오시죠? 첫 번째 단은 불안한 심리를 이야기 하고요, 그거를 두 번째 단에서는 조금 더 문학적으로 조금 더 끝으로 나가서 어떤 그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결, 여기까지 나가고요, 세 번째 단에서는 거기서부터 새롭게 어떤 답답한 그러한 상태에서 탈출구를 찾는 거예요, 그게 역사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일, 그리고 네 번째로 하나님의 창조, 이런 데서 길을 찾습니다. 어째서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고, 하는 답답한 심정, 이걸 어떻게 되느냐 여기서만 해결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에 대한 기억, 여기서부터 시편기자가 새롭게 어떤 길을 찾고 있습니다. 이게 참 저에게도 평소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오늘 제가 77편을 읽으면서, 준비를 하면서, 더 새롭게 느꼈습니다. 첫 번째 문단요. 1절에서 4절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죠,

 

1절 보면, 이렇죠?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고백합니다. 부르짖자! 이러한 구절 하나 갖다 놓고 우리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신자들에게 얘기하면 그것도 참 곤란한 거예요. 부르짖어 봐야 소용 없다는 겁니다. 사실은요. 자기는 그걸 기대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뭔가 될 거로 알고 해 봤는데, 귀를 기울이시도다 했는데, 아니거든요? 2절 후 반절에 보면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 하였도다 아무리 하나님께 매달려도 이 문제 좀 해결해 달라는 것 있지 않았겠습니까? 시편기자가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데요? 어떤 형편인지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어쨌던 이 사람이 정말 상당히 어려운 심정으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해결 될 거다 생각했는데, 거기서 위로가 안 되더라 예, 3절에 보면 아, 하나님이 기억하고 오히려 불안하다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기억하면 오히려 더 즐겁게 그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고 뭐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런데 불안하다 근심하고 내 심령이 상하도다,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4절에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네요.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문학적으로도 참 품위가 있지요? 아주 능력이 있습니다. 문필가로서 뛰어난 사람들이죠.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 잠 못 이루게 된다는 그런 뜻 일텐데 오죽했으면 그럴까요?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봐도 도저히 안 되더라, 이런 하소연입니다. 이런 낙심에 빠질 때가 예수 믿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면 늘 우리가 영적으로 굉장히 높은 경지에서 어떤 마음에 평화를 누리리라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건 되지 않습니다. 아주 훈련을 많이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신비주의 영성가들, 보통 헨리 나우웬 이라든지, 이런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보통 일반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지만, 심령이 굉장히 불안합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걸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면 그건 기본적으로 신앙이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예요. 예수님도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해 하셨잖아요? 그걸 생각하시면 답이 정확하게 나오거든요? 게세마네 동산에서 이게 하나님 뜻이냐 아니냐 이런 걸 놓고 굉장히 갈등을 많이 하신 거거든요? 불안해서 죽을 정도고 땀방울이 피 방울이 보일 정도로 그러한 시험, 한계, 불안한 마음을 겪으신 거예요.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목사도 그렇고 누구도 그렇고, 평생 동안 모든 걸 해도 그렇고요. 그런 불안들,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그런 것들은 떼 낼 수 없다, 그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5절에서 9절까지 참 멋지게 표현합니다. 이 사람이 계속 노력은 하는 거예요.

 

5절에 보면,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지나간 날에서 좀 벗어나 보려고 노력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게 어느 정도냐 하면, 그게 얼마나 힘드냐 하면 7절,8절에 에 보면 7.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절에 9.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예, 이 시편기자의 상태가 어떤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긍휼마저 감감한 상태라고 하는 거죠. 예, 이 사람이 처한 형편이라고 하는 것이 뭐 사업이 잘 안된다거나 뭐 건강이 아주 극심한 나쁜 상태에 빠졌다거나와 하는 종류하고 다른 일이라고 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개인에 따라서는 다 형편들이 다르니까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이 사람은 그러한 삶에 형편이 어려운 것, 자기가 원했던 것이 잘 되지 않는 것, 여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어떤 위로 사실은 모든 게 그런 것하고 다 연관되는 거지요? 그런 게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 거기서 이 사람이 굉장히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어떠세요? 저는 여기 시편기자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들은 노력하면 해결 될 수도 있고요, 안 될 수도 있는데, 그건 뭐 그런데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문제가 해결 되도 근원적인 위로가 안 될 수 있거든요? 그건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세계도 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아무리 기도하거나 해도 해결되지 않는 거지요. 이 시편기자와 같은 그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까지 두 번째 문단이었고요. 그럼 여기까진 절망적이죠? 예, 깊은 절망, 하나님의 긍휼이 나에게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거 아니냐, 이런 데까지 나갈 정도의 그런 불안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세 번째 단에 보면 새로운 관점으로 돌아서지요. 위에서 말한 그 내용은 자기의 잘못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걸 이제 깨달은 거예요. 지금 당장 나에게 위로가 되는 것, 그리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 이런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이건 위로가 되지 않는 거죠, 그게 아니라 10절의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이거는 뒤의 문장을 더 꾸며 주는 거니까요. 뒤의 문장을 의미하는 겁니다. 11.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기억이예요.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했어요.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똑같은 내용을 반복한 거죠? 여호와의 일들? 그것은 곧 기이한 일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억하는 거예요. 이거 아주 중요한 관점입니다. 우리가 내 문제에 풀리지 않은 문제에 딱 고정되어 있으면, 이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거긴 거구요. 관점을 완전히 아주 다르게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 이쪽으로 가는 거거든요? 이게 기본적인 영성입니다. 이게 주어지지 않으면, 그럼 이제 우리는 평생, 계속 어떤 악순환의 반복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뭐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응답받았다, 계속 그 상태에 머물게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행하신 일, 그것은 기이한 일인데, 신기한 일인데 그걸 기억하는 겁니다. 그 기억한다는 말을 12절에서 하나의 제사 드리는 것, 혹은 기도하는 것, 혹은 찬양 드리는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이건 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하나의 제의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제의, 예배드릴 때 공동의 기도문이라든지, 찬양 같은 거요,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작은 목소리로, 이건 목소리가 실제적으로 작다기보다도, 시편에는 큰 소리라고 하는 표현도 있고, 작은 소리라고 하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쓰일 때마다 뉘앙스가 다른 거예요. 정 반대의 뜻이 아닙니다. 다 우리의 영적인 깊이에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기도하듯이 읊조리고 그랬다고 기억한다는 말이지요. 그 내용들이 뭐냐 모든 소리를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고 하는데, 그런 일들을 13절에서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의 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하나님여 주의 도는 도는 길이라는 뜻이예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다시 14절에 전체 주제에 대한 용어가 나옵니다. 14.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요게 구체적으로 뭘 이야기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가나한 땅에 살게 하시고 출애굽하게 하시고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지키셨다고 하는 것, 이런 일이 기이한 일입니다. 신기한 일이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아주 약소민족, 정말 별 볼일 없는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인데, 그들을 정말 우여곡절 끝에 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고 또 40년동안 광야생활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온갖 이방민족들과의 싸움들, 뭐 여러 주변의 제국들로부터의 공격, 이런 가운데서 지키신 건 정말 신기한 일, 기이한 일이다, 그 얘기죠. 시편기자가 여기에 영성의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걸 우리들의 개인적인 신앙의 상태로 비교해서 생각하면 어떨까요? 우리 각자가 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의지하게 되는 과정자체가 신기한 일이 아닐까요?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바울도 그렇게 고백한 거 같애요, 나의 나됨은 바로 주님의 은혜다, 이렇게 얘기 했잖아요? 아휴, 뭐 그건 내가 노력해서 된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그건 신앙적인 눈은 아닙니다. 여기에 정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들이 작용, 거룩한 힘이라고 그러지요? 거룩한 힘은 성령이라고 하지요? 활동하셔서 우리로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게 하신 그런 하나님일이 신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어떻게 보면, 우리 대구샘터교회를 예로 들자면, 여기서 같이 예배드릴 수 있게 온 것도 참 신기한 일이예요. 여기 올 계획도 전혀 없었는데,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빙빙 돌고 돌아와서 여기 계신 분들, 다 여기 와서 만났네요. 만날 인연도 아니었었는데, 저는 진량에 있어야 되는데요? 어쨌든 세상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이 시편기자는 그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끌어오신 하나님의 일 보고 신기한 일이다 그 하나님을 본 거죠,

 

예, 마지막 네 번째 단락은 16절에서 20절입니다. 세 번째 단락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이고요. 여기 네 번째 단락 16절에서 20절은 이거는 창조에 대한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두 개 다 기이한 일이거든요. 이 시편기자가 그렇게 마음에 불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한 긍휼의 한 조각마저도 느끼지 못한 그런 상태에 있다가 왜 이렇게 있었는지 아시죠? 아까 제가 설명을 했는데, 그러니까 이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계속 심령이 불안하고 상했는데, 그 이유가 왜 그런지 아시죠? 그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데, 왜 그런지 아시죠? 그건 자기 문제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왜 이거 해결해 주지 않느냐, 그런데 머물러 있으면, 이거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거였습니다. 그럼 여기로부터 시편기자가 어느 쪽으로 영적인 초점을 바꿨다고 그랬지요? 하나님의 행하신 일로 바꿨어요. 그러니까 관심이 나로부터 하나님쪽으로 바뀌어야만 가능한 거거든요? 그런데 이게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너무 강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연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기 집중이 너무 강합니다. 이건 사람이 착하냐 아니냐 인격적이냐 아니냐 하고 상관없이 착하면 착한 사람대로 못된 사람은 못된 사람대로 나름대로 자기에게만 몰두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도 거기만 매달려 있는 거지요. 하나님 이거 내 문제 어떻게 해 주실래요? 안 해 주실래요? 우리 교회문제 해결해 주세요. 이렇게 매달리는 거죠. 이래 갖고는 영적인 성숙은 도저히 불가능한 거예요. 오늘 여기 77편 시편기자가 아주 정확하게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행하신 기이한 일이 세 번째 단락이었고요, 네 번째는 하나님이 행하신 또 하나의 일이 있어요. 그거는 창조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예요. 크게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이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행한 것, 또 하나는 우주의 창조, 이 두 가지 관점이 다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에 해당합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 혼자 예수 열심히 믿어야지 하는 그런 믿음 만능주의 그런데 떨어지기 보다는 그거는 광신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거든요? 열광주의로 나갈 가능성도 많이 있고요. 그런데서도 조금,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역사에 행하신 하나님 일을 좀 봐야 되고 우주 창조 전체에 대한 관점들이 필요합니다. 여기 16절에서 20편까지 이 시편기자가 참 멋있게 썼어요. 어떻게 하면 글을 쓸 수 있는지, 참 놀랍습니다.

 

16절,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들이 주를 보았다, 물, 물론 이런 물을 이야기 하는데 구약시대에는 물이 세계 전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도 물이 있고 땅에도 물이 있고요. 하나님이 물을 위와 아래도 나눴다고 얘기하고요. 그게 근거가 없는 얘기도 아닙니다. 헬라의 탈레스라는 그런 사람은 “만물의 본질은 물이다”라고 했잖아요? 하여튼 그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지구에도 물이 없으면 아예 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물이라고 하는 사물은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점에서 성서가 물에 대해 많이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물들이 주를 보았다 참 멋진 표현입니다. 그 물의 놀라움, 거기에 인제 하나님의 행위가, 하나님의 창조사건이 혹은 하나님의 계시가 거기 숨어 있다고 하는 말이지요. 그 다음 17절, 구름이 물을 쏟고 이건 자연현상을 이야기하네요. 비가 내리는 거지요? 궁창이 소리를 내며 궁창은 하늘 전체를 이야기합니다.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들, 문학적으로도 아주 고급한 그러한 글들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뒤로도 계속 그렇습니다. 18절,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지진, 화산폭발 그런 것들이죠? 이런 것들을 기억한다고 하는 거예요. 예, 지금 여기 차가 한 잔 있습니다마는 이게 물이잖아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실연당했다거나 그런 걸로 사람들은 굉장히 힘들어 하잖습니까? 자식문제도 잘 안 풀릴 수도 있고, 개인적인 부도, 사기를 당할 수도 있는데, 그런 일들이 참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 물 이 한잔을 통해서 이런 걸 보면서 이런 것들이 더 참 소중한 것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환하게 비추게 된다면, 다른 일들은 사실은 벗어 날 수 있는 거죠, 이 시편기자가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땅이 흔들리고, 물이 깊고, 19절,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보이지 않잖아요? 거기에 하나님의 창조행위가 있다, 그걸 보는 거예요.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런 영적인 시인의 눈에는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 땅에서 벌어진 일들을 완전히 자기삶이 파괴되지 않고 어려웠다가도 힘을 낼 수 있는 거죠. 근본적으로 영적인 관점이 다른 얘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표현이 재미있어요.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예, 이게 인제 우리가 풀어야 될 숙제지요. 물위에 길이 있어, 바다에 있고, 물이 있는데, 발자취는 찾을 수 없는 거거든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거는 영적인 시각으로만 가능한 거거든요? 다시 물 말씀 드립니다. 이 지구안에 이렇게 정말 이 신비로운 물질이 있다고 하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예요? 그릇에 담으면 이런 모양이 되고 말이지요? 이걸로 우리 몸도 씻어내고, 우리 몸도 피고, 정말 놀라운 물질입니다. 물만 그런 게 아니라 이 지구에 색깔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죠, 소리가 이렇게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 여기 있는 바다에 하나님의 길이 있다고 하는 시편기자의 표현과 같은 거지요. 그러나 그건 그냥 보면 발자취가 보이지 않는 거죠. 예, 여기까지 공부했습니다. 결론을 어떻게 내리면 될까요? 오늘 본문에서 어떤 걸 생각하셨나요? 아주 중요한 영적인 공부가 77편을 통해서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하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믿는 사람이고, 신실하게 살려고 하고, 하나님에게 부르짖은 사람인데, 그러나 심령이 불안했어요. 그러니까 내 문제, 이거 하나님 어떻게 해 주십시오. 이런 상태에서는 그는 긍휼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른 시각으로 하나님이 하신 신기한 일에 영적인 촉수라고 할까? 시각 이것이 열리니까,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거죠, 쉽지는 않을 거예요. 일상적인 생활 하면서 계속 우리 삶을 소진하잖아요? 일상적인 일, 그거 중요합니다. 제가 그거 필요없고 맨 날 고상하게 하나님 일만 생각해라 그런 말씀 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또 뭐 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 우리에게 행하신 일, 역사에 행하신 일, 창조에서 행하신 일, 이런 것들 여러분들이 좀 생각해 보십시오. 영적으로 시각을 좀 열어 보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생명의 힘이 여러분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예, 여기까지입니다. (잠시 차 한 잔 마시고 질문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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