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강해 79편-재난과 찬양

 

시편 79편입니다. 지난주에 공부한 것은 아주 긴 시편이었어요. 72절까지 있는 긴 구절이었구요. 오늘은 그것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아주 짧죠? 13절까지 있습니다. 79편이 특징이 있어요. 아주 극심한 환란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들어가 있는 어떤 영성가의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기도문을 많이 읽었다고 그래요. 이거하고 백사십 몇 편인가? 대표적으로 있습니다. 오늘은 79편을 우리가 같이 읽고, 공부하겠습니다. 우리 돌아가면서 한절씩 읽겠습니다. 시계 반대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아삽의 시〕

1.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그들이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의 짐승에게 주며

3.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방에 물 같이 흘렸으나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 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워싼 자에게 조소와 조롱 거리가 되었 나이다

5.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 서

7.그들이 야곱을 삼키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함이니이다

8.우리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긍휼로 우리를 속히 영접하소서 우리가 매우 가련하게 되었나이다

9.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 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 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11.갇힌 자의 탄식을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해진 자도 주의 크신 능력을 따 라 보존하소서

12.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비방한 그 비방을 그들의 품에 칠 배나 갚으소서

13.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 대에 전하리이다

 

아멘! 오늘 79편 이 제목을 “재난과 찬양”이라고 정했습니다. 제목이라고 하는 것이 정답이 딱 있는 것이 아니고요. 또 관점에 따라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각각 나름대로 오늘 79편의 전체적인 핵심이 뭐냐, 주제가 뭐냐 그런 것을 좀 생각하시면서 또 제목을 따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저는 “재난과 찬양”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이 재난과 찬양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상투적인 이야기, 도식적인 단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거 뭐 제목만 들어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겠다 나오죠. 그러한 생각이 틀린 건 아닙니다. 거의 다 맞고요. 저도 뭐 뚜렷하게 여러분들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다 알고 있는 거라고 하더라도 더 정리하면서 구약성서의 배경, 그 어떤 세계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상당히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배운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어떤 방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몰랐던 것을 배우는 게 하나 있고요. 또 하나는 알지만 약간 흐릿했던 것을 더 명료하게 안다. 아니면 잘 알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더 다진다, 뭐 그러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재난과 찬양” 그 무슨 말인지 뻔하겠다. 머릿속으로 좀 그림이 그려지지요? 아, 재난, 어려움 이런 것 당하지만, 결국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찬양이다, 영광을 돌린다, 그런 얘기 아니냐, 그런 생각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은 거구요. 이게 참 자칫하면 자기 합리화에 떨어질 수도 있고요.

 

신앙이라고 하는 게 참 미묘합니다. 이게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요, 형식은 비슷해 보여도 그 형식 안에 있는 내용에 우리가 어떻게 닿아 있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 있어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까요?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이 말은 우리가 누구나 믿는 말 아니겠어요? 이건 정말 기독교라고 한다면, 이걸 대전제로 하는 건데요?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 그 얘기, 가장 간단한 명제인데 예수가 누구냐, 믿는다고 하는 것이 뭐냐 그리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나하나에 대한 세계를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고 그냥 그걸 따라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예술도 그렇고 다른 문학도 그렇고, 다른 세계, 역사도 그렇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뻔히 알고 있는 거다, 재난과 시련 어려움 당해도 그래도 하나님께 찬양하며 살자고 하는 그러한 당연한 대답이지만, 우리가 찬찬히 그 안으로 좀 들어가면서, 공부하다는 게 필요하다는 겁니다. 강의 안에 다 들어 있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살면서 어려운 일들, 재난, 시련 이런 것들이 그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천재지변 같은 것들이야 불가항력이지요. 한 달 전쯤인가요? 아이티에 있었던 큰 지진이라든지 화산폭발이라든지, 성경에도 소돔 고모라 성 같은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은 뭐 불가항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그거는 아마 지구에 살고 있는 한 계속 될 겁니다. 지금 지질학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좀 방비를 하기는 합니다만, 완벽한 방비는 안 되거든요? 뭐 그래서 등등 여러 가지 그런 거는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그것 말고 인간관계에서 벌어지는 재난들 있지 않습니까? 뭐 전쟁 이런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거죠. 대지진이 난다고 하는 거야,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하는 거야 누가 막을 수 없는 겁니다마는 전쟁 같은 거 정말 난폭하게 일어나는 것, 그런 것은 우리가 막을 수 있는데도 막지 못하고 살고, 사실 인류역사에서 평화로운 시기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고요. 일종의 인재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니까 천재지변 같은 것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가 힘써서 좀 새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데, 전쟁이나 어떤 사람의 몰염치한 행위를 통해서 어떤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는 것, 이런 건 정말 참기 힘든 거거든요? 그리고 또 그 재난이 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영성이 좀 차이가 난다고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우리는 배우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시련을 당했는지는 뭐 이스라엘만 그렇게 했습니까만 그러나 그 나라는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어려움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지정학적으로 우리나라하고 좀 비슷하다고 그래요. 그게 반도 국가는 아닙니다마는 주변에 제국들이 많이 있었거든요? 성서에 나와 있는 것만 하더라도 뭐 이집트라든지, 아싯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이런 거고 가장 대표적으로 로마제국들인데요? 제국이 주변에 있게 되면 주변의 나라들은 피곤합니다. 보통 제국주의(帝國主義), Imperialism 이라고 하거든요? 제국주의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주변나라들을 헐뜯고 하진 않는데, 조금 가다가 타일러도 말 안 듣게 되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습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시스템 속에 있습니다. 하여튼 이스라엘은 그런 많은 나라에 의해서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정확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제가 어디서 한 건가요?기억이 안 나네요.) 하여간 토인비(Arnold Toynbee, 1852~1883)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서요? “역사라고 하는 것은 도전과 응전(應戰)이다 ”『역사의 연구』중에서* 도전이 많은 곳에, 시련이 많은 곳에 거기서 문명이 발달하고 좋아졌다 그런 얘기들을 좀 하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똑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그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역사를 보는 안목 이런 것이 생긴 거예요. 그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도 정리가 되고 그렇지요. 어쨌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계속되는 그 어려운, 주변의 강대국에 의해서 받는 시련 이런 것들에 의해서 어떤 역사에 그런 것들이 점철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대로 2차 세계 대전 때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하는데요? 그게 어디 정확한 숫자겠습니까마는 그것도 또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하여튼 엄청난 숫자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사실 그런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기 시편에서 그러한 온갖 재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한 유대인들의 영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참 중요할 거예요. 강의안에도 이미 나온 거지만, 미리 말씀드리면 우리 개인들도 그런 재난을 많이 당하잖아요? 엄청난, 뭐라 그럴까? 살아가면서 그게 한 두가지겠습니까?

 

박완서 선생이 쓴 신앙에세이 중에 하나가『한 말씀만 하소서』** 라고 있습니다. 혹시 읽으셨는지 모르겠어요. 박완서 선생님이 자기 남편이 암으로 죽은 지 몇 달 만에 수련의를 하고 있는 아들마저 죽었어요. 교통사고로, 교통사고 맞죠? 남편 죽었을 때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만도 한데 아들 죽은 다음엔 정말 이걸 못 견뎌 했던 거 같아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한 6개월인가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픔을 참척이라고 얘기하거든요? 참척을 당한 그 어머니의 아픔, 남편만이 아니라 아들마저 몇 달 사이에 잃었으니까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 그런 질문부터 왜 이런 일이 꼭 나에게, 그런 질문 흔하게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서 어떻게 그가 그런 일이 왜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냐 그런 대답을 받으면서 새롭게 용기를 얻는 과정이 담담하게 때로는 또 격렬하게 글장이다운 그런 필치로 잘 적어 놓았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그런 비슷한 일들이 느끼기에 따라서 조금 다르지요. 작은 것도 그렇게 느끼면 문제 겠습니다마는 하여튼 그런 일들이 많이 있는데요? 피할 수도 없는 거구 말이지요.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재난에 대해서 대처하느냐, 대처라는 말이 적당하지는 않는데요? 하여튼 다른 말이 없어서 일단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 오늘 성서기자가 얘기하는 그런 관점으로 보면 이 재난에 대한 직접적인 대처는 아니예요. 뭘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거예요. 우리의 문제들을 모든 문제들에 매달리게 되면 사실은 해결 안 됩니다. 그거는 계속 반복되는 거구요. 거기에 머물러 버리게 되거든요? 우리가 성서를 읽는 이유는 그렇게, 박완서 선생이 쓰는 용어로 참척의 슬픔, 유대인들의 이러한 하나님 당신은 없지요? 라고 말 할 수까지 없는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이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시련을 겪어내고 했다고 하는 거, 이게 우리가 배워야 할 문제지요. 이런 사실을 어떻게 보면 재난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재난과 반대되는 말은 뭘까요?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행운 같은데 우리가 너무 집착하게 되면, 그것도 또 우리의 영성은 건강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누구에게나 벌어 질 수 있는 거예요. 불행한 일이나 행운이나 그런 것들 때문에, 좋아하긴 좋아해야지요? 힘들 때는 슬퍼해야지요? 그러나 거기에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좋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 영성이 더 깊어지고, 나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영적인 세계에, 그 영적인 세계, 영성이 뭔지는 여러분들이 뭐, 대충 아시겠죠? 그건 제가 다시 설명하지 않겠어요. 그건 두고두고 계속 또 생각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영적인 세계가 깊어지는 것 이게 핵심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런 시편기자의 이 시를 통해서 배우는 거죠. 정말 배울 게 많은 거죠.

 

전체적으로 세 단원으로 나눴습니다. 1절에서 4절, 여기는 “탄원”이죠. 탄원, 하나님께 드리는 탄원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 신세가 이렇게 됬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하소연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 내용을 보면 그 재난이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어요. 이렇게 문학적으로, 이렇게 비유적으로 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되어 있어요. 1절에 보면, 성전,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었다. 이방 나라들이 들어와서 성전을 허물고, 이방 사람들이 성전안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더럽히는 거니까요.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었다고 하는 것, 모든 건물들이 다 허물어지고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아주 역사적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런 일들을 수 없이 당했거든요? 우리 육이오 이후라고 생각하시면 되겠네요.온 전국 도시들이 중심도시를 중심으로 다 돌무더기 된 것 같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되었다는 거구요. 2절에 보면 시체가 새에게 밥이 되고, 또 땅의 짐승에게 밥이 됬다. 날 짐승, 들 짐승에게 밥이 됬다, 장사도 못 지내고, 모두 시체를 노천에 내버려 둘 수 밖 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처절한지 상상이 가시지요? 그건 사실적인 묘사인 거예요. 그런 걸 경험했을 때는 그 민족성 자체가 바뀔 것 같애요. 그건 아주 정말 경험하기 힘든 것들 아니겠습니까? 자기 이웃? 자기 가족? 자기 자식들? 전부 길 바닥에 장사 지낼 수도 없는 상태로 지금 학살당하고 있는 상태 말입니다. 그걸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3절에 보면, 그걸 그대로 이야기 하잖습니까? 시체들이 깔려 갖고 피가 홍수처럼 물처럼 흘러 내려갖고 매장을 한 사람도 없다, 정말 겪을 수 없는 참혹한 일들입니다. 아마 이 시편기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상황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이야기 하지 않는가싶습니다. 그게 기원전 587년 이예요. 이 횟수를 꼭 기억하시라고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도 얘기 했든가요? 587년,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 함락? 이 말은 곧 바로 이어지는 역사가 뭘까요? 바벨론 포로생활이거든요? 이게 왜 중요한 지 아시겠죠? 구약성서는 여기에 다 뿌리가 있습니다. 587년과 그리고 50년 정도에 이르는 포로생활, 바벨론에 지도자들이 다 끌려갔거든요? 그리고 포로귀환이 되는데 50년 이후에 몇 번에 걸쳐서 송환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정신과 모든 것들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그러한 때거든요? 587년의 이 예루살렘의 함락사건이 왜 중요 하냐, 구약성서를 읽는데 왜 중요 하냐, 이거예요. 창세기도 여기에 근거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재미있죠.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에 잡혀가서 유대인들이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됬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 선민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왜 지금 이 신세가 됬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고 여기서 편안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서 살겠다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쭉쭉 이렇게 약속해 주고 했는데, 이렇게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이 다 돌무더기가 되고 바벨론 포로로 가고, 아무 희망이 없는 절벽과 같은 상황에 빠지게 된 것이 이게 왠 일이냐, 뭐가 문제냐, 그런 것들을 이스라엘의 영성가들이, 예언자들이, 성서기자들이 고민한 거예요.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나온 대답이 뭘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요. 지금 너희들이 볼 때 하나님이 죽고, 없는 것 같고 너희들을 버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다음의 사실을 기억해라, 어떤 것을 기억하라고 했을까요? 핵심적으로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자다, 그러니까 창조에 대한 이야기, 창조전승이라고도 하고, 창조설화라고 얘기하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몇 일에 뭐 만든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 바벨론 포로 시대 때 나온 겁니다. 그 상황이 정말 열악하고 한심스런 자기들의 운명, 가운데서 그래도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이 바로 창조자다 이걸 기억한 거지요. 그러니까 놀랍죠. 그런 점에서 이 성서기자들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사람들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또 하나는 출애굽인거예요. 그래서 587년이라고 하는 것을 저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하다, 중요하다 여러 번 말씀 드리는 겁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 바벨론 포로도 재난이잖아요? 사람이 재난과 이 어려움이 없으면, 성숙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모든 게 풍요롭기 때문에 어쩌면 인간 삶이 그렇게만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 해지고요. 자기중심으로 살게 되잖아요? 이 재난과 실험과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굳이 불행하게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정말 참기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래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 일 수 있다, 그렇게 좀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 그 다음 패라그래프에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게 다시 여기 나온 거죠? 개인적으로도 파괴당하는 경험을 우리가 하잖아요? 좀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좀 노력해 보겠는데, 그것마저도 안 되는 상황을 경험해 보셨나요? 아주 완전한 절망 말이지요. 그래서 그때 되면 수치심에 빠지게 되고, 도대체 내가 지금 왜 이 모양인가라고 말이죠, 저는 좀 그러한 심정을 잘 이해해 보시라고 현대 역사에서 두 가지만 좀 인용했습니다. 하나는 그 이라크 전쟁이요. 미국이 어쨌든 어떤 이름으로 시작했든, 이라크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미군도 많이 죽었지요? 그런 걸 생각하면 참 그들이 굉장히 절망적이겠다 그런 생각이 들고요? 도시 재개발로 보상 없이 쫓겨나야 하는 세입자들도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 그런 것들이 하나의 절망 아니냐, 이런 구약사건을 조금 개인적인 민족적인 거나 개인적으로 축소시켜서 이렇게 좀 연결시켜봤어요. 이게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 그게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보는 창구일수 있다, 그러한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거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경험한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오죽 했으면,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런 말들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시면 곤란한 거예요. 아주 실질적으로 이해를 하셔야 되요. 신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거와 같은 상황 말이죠. 거기서 모든 게 끝장났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거죠. 그게 바로 온 인류 구원의 씨앗이 됬다, 토대가 됬다, 혹은 단초가 됬다고도 얘기하는데, 그렇게 됬다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어떤 예상이나 어떤 설계, 프로그램, 그 방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거죠.

 

예, 그리고 두 번째는 간구입니다. 간구, 5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탄원을 하고요. 하나님께 그냥 푸념을 풀어 놓는 거지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기도가 늘 고상한 기도만 드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말 힘들 때는 탄원을 해야죠. 죽겠습니다라는 거요. 그리고 이어서 간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 간구한다고 하는 것, 이게 사실 엄청난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게 사람들은 그렇게 간구를 하지 않아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야 누구나 다 간구한다고 말하죠. 그러나 정말 간구하느냐, 그러나 그건 형식적으로 하고 그냥 자기 계산으로 모든 것들을 해나가는 것은 좀 차이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우리가 세상 사람들하고는 달리,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걸 막 해결하려고 발버둥치고 애쓰고, 그건 부분적으로 최선을 다 해야 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거 아니죠,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한다고 하는 것, 이건 참 놀라운 영성입니다. 이게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유대인들은 어떤 그런 삶을 전통으로 이어 받았습니다.

 

시편기자의 간구가 어떻게 되는지, 시작되는지 보십시오. 5.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질투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 민족에게 온 이런 재난, 감당할 수 없는 재난을 결국은 바벨론 저 놈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 쪽으로 생각하잖아요? 이렇게 시각이 다른 거예요. 일단,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마세요. 세상에 잘 못 한사람도 없고 그거는 내 버려두고 무조건 하나님 앞에만 기도해야 된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지금 영성가의 영적인 태도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건 실제로 잘 못한 사람이 있으면 때에 따라서는 우리가 재판을 할 때는 하긴 해야지요.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 따질 때는 따져야죠. 이런 걸 다 무조건 모른 척 하고 기도만 하자 하나님께 뜻만 따라야 된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읽으셔야 될 겁니다.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 재난의 상황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걸로 본 거예요. 이게 참 여러분들에게 전달되는 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굉장히 정확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행위마저 하나님이 행하신 거다, 그게 좀 모순이 되나요? 하나님은 선하신 것만 행하시는데 악한 걸 하느냐, 여기 그런 걸 따라 가려면 조금 다른 생각을 하셔야 하는데요? 성서는 기본적으로 궁극적인 것에 토대를 일원론적인 시각으로 봤어요. 이원론이 아니라, 여기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선만 있는 거예요. 선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있는 거지 하나님과 대적하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이제 페르시아나 다른 쪽의 이원론이거든요? 영지주의라든지, 다른 시각입니다. 우리 신약시대도 마찬가지고, 모든 근원의 토대는 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모순이 있는 거예요. 모든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신데 실지로 악한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악한 일마저 하나님이 하셨냐,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겁니다. 그건 때에 따라서 성서가 다르게 대답하는데요? 제가 언제 설교시간에도 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욥기서 같은 데 보면 하나의 문학작품이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악을 행한다, 욥에게 일어난 재앙 같은 것들을 하나님의 허락이라고 얘기를 하고요. 하여튼 복잡합니다. 그건 접어 두고, 결국 오늘 여기 본문에서 성서기자가 자기 민족에게 임한 이 재앙, 재난을 하나님의 진노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하신 일, 이 표현이 정확하지 않는데, 그렇게 밖에 말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그것을 좀 구분해서 생각하셔야 되겠네요.

 

지금 이러한 표현에는 이 모든 궁극적인 것의 근원을 하나님에게만 두고 있다는 아주 근본적인 시각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이 악이라고 하는 것은 궁극적인 힘이 아니다 결국 이것은 허물어진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그냥 움직일 뿐이다고 하는 그러한 시각이 성서안에 있는 겁니다. 설명을 하려니까 조금 까다로와서요. 정확하지는 않는데 대충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예, 강의안 보십시오. 결국 문제해결을 하나님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바벨론이 자기를 침략했지만, 바벨론 갖고 옳다 그르다 시험하지 않고 우리 조상의 잘못이 뭔지 그것을 기억하지 말고 잊어 주십시오. 그리고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렇게 8절에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까지가 악 마저 결국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것, 그런 시각이 여기 있는 거지요. 아까 말씀 드렸지만 그 말을 오해는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정말 악을 행하셨느냐, 그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악한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났다고 하는거죠, 악을 이용하신다고 하는 거지요. 결국 이것도 하나님 책임 아니냐, 질문하면 그것도 잘 못된 겁니다. 이거예요. 악은 현실이예요. 불행은 현실이예요. 그것을 이제 어떻게 접근하느냐 하는 것이 성서의 시각인거죠. 그것마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 그것마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는 어떤 것에 불과한 것, 그러니까 악을 가소롭지 않은 거로 보는 거죠. 기본적으로는, 저는 이런 성서기자의 시각이 아주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하나의 시각이고요. 또 하나는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힘드니까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관점도 있지만, 성서기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계속되는 건데, 뭘까요? 정리가 됬어요? 다른 데서도 나온 것이라서요.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십시오. 라고 하는 겁니다.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하나님 당신이 모멸 받고 있다, 그 하나님 이름을 위해서, 당신 이름을 위해서 정말 이 악을 제거해 달라, 상당히 수준이 높다고 봐야 되겠지요? 내가 힘드니까 나를 좀 살려 주십시오. 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뜻, 당신의 이름, 이게 지금 이방인들에게 모멸 받고 있으니까, 이걸 좀 명예를 회복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간구하는 거지요. 이러한 시각이 참 필요하겠지요?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그 방향인거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 이런 것이 우리의 삶과는 상관없이 뜬 구름 잡는 식으로 하는 얘기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바로 우리 삶의 내용이기 때문에 아주 깊숙하게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이어서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복수해 달라, 하나님을 부정하지 못하도록, 그 단락에서 제가 결론을 그렇게 내렸습니다. 이러한 간구는 그냥 원수 갚겠다고 하는 복수심에 불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아주 반듯한 영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 됬구요.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13절 찬양입니다. 여기 오늘 결론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전체 제목이 “재난과 찬양”이예요. 그래서 재난에 대해 탄원을 했고, 그 다음에 간구를 했고,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찬양입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도, 절박한 게 어느 정도 절박한지 아시죠? 시체마저도 매장하지 못할 정도의 그런 어려움 가운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양이라고 하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앞서 제가 설명한대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중에서도 우리 이 민족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고 하는 질문 가운데서 그래도 하나님이 창조자다, 그래도 그 시각, 그 분이 출애굽의 주인이시다 라고 하는 걸 말했다 것처럼 이 시편에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 양이라고 얘기 했습니다. 그걸 전제하게 된다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리고 주의 영광을 후대에 전하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죠. 주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 영광,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영광이라고 할 수 있고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그걸 좀 쉽게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창조 능력, 이런 것들, 하나님의 출애굽의 능력, 해방의 능력, 그런 것을 약간 종교적인 언어로 영광이라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모호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생명과 관계되는 것이고, 정의, 평화, 해방, 창조영성, 이런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건 부활, 질적으로 새로운 생명이니까 이런 것들을 이런 종교적인 언어로 영광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아주 어려운 상태에 들어가 있는, 그러한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이 창조자이심을, 하나님이 해방자이심을, 후대에 전하겠다, 참 놀랍지요? 이러한 영성이 창세기서부터 사실은 창세기는 거꾸로 올라 가는 거지만, 어쨌든 전체 구약성서에 면면히 숨어 있습니다. 예, 이러한 신앙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게 과연, 시편기자가 그렇게 노래하고, 이스라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알지만, 현실적으로 이해 가능하냐 하는 겁니다. 쉽지는 않죠. 여러분들이 앞으로 두고두고, 시름해야 될 문제입니다. 거기서 신앙의 어떤 경지가 달라 질수도 있고요. 아우슈비츠 이후로도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가능한가라고 하는 질문이 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오래 동안 있었습니다. 그렇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말이죠, 가스실에서 어린아이가 죽어가는 상태에서, 예, 이런 것들은요,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가장 처절한 싸움 가운데서도, 어느 신학자가 한 이야기군요. 아유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죽는데 금방 안 죽어요, 막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그걸 같은 유대인이 본 거예요. 그래서 그 랍비한테 그렇게 물어 봐요. 랍비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냐, 랍비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들어 보시지 않아도 아시죠? 저기 저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다 라고 그런 대답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역사, 이러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가 삽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는 그런 재난이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지구 곳곳에 어딘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거구요. 이렇게 똑 같은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삶의 재난들은 이거는 뭐 끊임없이 있을 겁니다. 그 문제를 가능한 대로 헤쳐 나가도록 노력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죠. 재난 가운데서도 찬양을 했던 시편기자의 이러한 영적인 태도가 오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잠시 차 한 잔씩 드시고 그 다음에 질문하고 대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A. J 토인비, 『역사의 연구』 홍사중 역, 동서문화사, 2007.

** 박완서 저, 『한 말씀만 하소서』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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