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 21편-야훼 하나님의 힘

 

순서에 따라서 시편 21편이 되겠어요. 1절부에서 13절까지입니다. 먼저 제가 읽을 테니까 여러분들은 눈으로 따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당신께서 힘이 되어주시오니 우리의 왕이 기뻐합니다.

     당신께서 승리를 안겨주시오니 크게 즐거워합니다.

2. 당신께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청원을 물리치지 않으셨사옵니다. (셀라)

3. 온갖 좋은 복으로 그를 맞으시고

    황금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습니다.

4. 오래 살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 들어주시고

    그에게 오래오래 긴긴 날을 주셨습니다.

5. 당신께서는 그에게 승리 주시어 그 영광 만방에 떨치게 하고

    위엄과 영화를 입혀주셨습니다.

6. 영원한 복을 그에게 내려주시니

    당신 얼굴 우러러 뵈고 마냥 기뻐합니다.

7. 우리 왕이 야훼를 굳게 믿사오니

    지존하신 분, 당신의 사랑받아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8. 당신의 손으로, 모든 원수를 덮치소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당신을 미워하는 자를 덮치소서.

9. 당신께서 몸소 나타나시는 날,

    그들을 가마 속에 던지소서.

    야훼의 진노로써 그들을 불사르소서.

    뜨거운 불길이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소서.

10. 이 땅에서 그들의 씨를 말리시고

     그 후손을 세상에서 끊어버리소서.

11. 원수들은 음모를 꾸며

     당신을 해치려 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일,

12. 그 얼굴에 활을 겨누시면

     모두들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13. 야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아멘! 내용이 후반부에 가면 좀 과격하구요. 앞부분에는 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죠? 좀 특이한 시편입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 사용되던 노래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다시 한 번 집중해서 1절부터 13절까지 우리 한 목소리로 다 같이 읽겠습니다.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노래〛

1. 야훼여! 당신께서 힘이 되어주시오니 우리의 왕이 기뻐합니다.

    당신께서 승리를 안겨주시오니 크게 즐거워합니다.

2. 당신께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청원을 물리치지 않으셨사옵니다. (셀라)

3. 온갖 좋은 복으로 그를 맞으시고

   황금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습니다.

4. 오래 살게 해달라는 그의 기도 들어주시고

   그에게 오래오래 긴긴 날을 주셨습니다.

5. 당신께서는 그에게 승리 주시어 그 영광 만방에 떨치게 하고

   위엄과 영화를 입혀주셨습니다.

6. 영원한 복을 그에게 내려주시니

    당신 얼굴 우러러 뵈고 마냥 기뻐합니다.

7. 우리 왕이 야훼를 굳게 믿사오니

    지존하신 분, 당신의 사랑받아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8. 당신의 손으로, 모든 원수를 덮치소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당신을 미워하는 자를 덮치소서.

9. 당신께서 몸소 나타나시는 날,

    그들을 가마 속에 던지소서.

    야훼의 진노로써 그들을 불사르소서.

    뜨거운 불길이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소서.

10. 이 땅에서 그들의 씨를 말리시고

     그 후손을 세상에서 끊어버리소서.

11. 원수들은 음모를 꾸며

     당신을 해치려 하겠지만, 어림도 없는 일,

12. 그 얼굴에 활을 겨누시면

     모두들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13. 야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참고>개역개정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2.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

3.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4.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

5.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

6.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7.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존하신 이의 인자함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8.왕의 손이 왕의 모든 원수들을 찾아냄이여 왕의 오른손이 왕을 미워하는 자들을 찾아내리로다

9.왕이 노하실 때에 그들을 풀무불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

10.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11.비록 그들이 왕을 해하려 하여 음모를 꾸몄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12.왕이 그들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들의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13.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아멘! 예, 21편 이거는 20편과 시리즈라고 할까요? 연속적인 그러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어요. 1편, 2편 이렇게 이야기해도 좋고, 전편, 후편 얘기해도 좋고요. 이 내용이 거의 임금의 대관식에 사용되던 찬송가라고 할 수 있어요. 20편도 그렇고 21편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그런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왕 즉위식(卽位式) 할 때 부르던 찬송가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어요. 여기서는 우리가 이걸 전제해야 됩니다. 구약성서는 유대인들이 처한 독특한 삶의 자리라고 그러지요? 거기서 하나님을 경험한 그런 내용들을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즉위식, 이런 때 사용되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거지요.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하나님 경험이 똑 같은 건 아니잖아요? 예, 제가 예를 든다고 그랬는데, 이거예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남 녀 간에도 어떤 사랑을 경험 할 수 있겠고, 우정이라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사랑이죠.

 

에릭 프롬(Erich Fromm, 1900∼1980)이 쓴『사랑의 기술 Die Kunst des Liebens*그런 데 보면 우정이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출발점이라고 해요. 아마 제 기억으로 그렇습니다. 거기는 다른 이해타산이 들어가지 않고 순수한 두 사람의 정, 신뢰, 연대 이런 것들이 남기 때문이죠. 남녀관계는 그런 거 하고 좀 다르고, 부모와 자식관계도 종속적이고 상하관계가 있고요. 각각 여러 가지 사랑이 다르고요. 또 일반적인 이러한 사회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전쟁터 같은 데서도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의 색깔이 아니라 다양한 색깔로 사랑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경험도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혹은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때,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나서 외로울 때라든지, 아니면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깨달을 때라든지, 이런 저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런 것도 경험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사랑도 그렇고, 하나님의 경험도 그렇고요. 그렇게, 장소? 그 삶의 자리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20편과 21편이 임금 대관식 때 사용되던 찬송이지만, 그 과정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경험을 했다고 하는 겁니다. 예, 다시 한번 정리하면 시편 21편은 임금 직위식, 직위식이라고 하더라도 다 종교식으로 하잖아요? 다 제의지요. 제사를 드리는 그러한 순서요, 이 21편은 왕의 대관식, 이렇게 생각하면 되겠지요? 현대에도 왕의 전통을 갖고 있는 영국이라든지, 또 포루투칼도 있지요? 북유럽 같은 데엔 제법 많이 있는 것 같은데, 특별히 영국이 제일 강한 것 같고, 일본도 있죠? 그런 직위식 하는 것이 대단하거든요? 그런 걸 여러분들이 머리에 넣고 오늘 이 시편 21편이 유대인 왕의 직위식 하던 의식의 한 부분으로 불려진 노래다, 생각하면 됩니다. 이 노래 안에는 제사장이 하나님이 왕을 좀 보살펴 달라고 하는 기도도 들어가고, 또 회중들이 그것에 맞춰서 화답하는 그러한 내용들도 들어가고요. 성시교독처럼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로마 가톨릭의 미사나 성공회는 (미사라고 그러나요? 예배라고 그러나요?) 그런데 가면 서로 화답하는 그런 순서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이 21편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크게 봐서 이 21편은 두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어요. 아주 확연하게 구분해야 됩니다. 연결이 되지만 그러나 그 내용이 확연하게 차이가 있지요? 1부는 1절에서 7절, 2부는 8절에서 13절이에요. 1부의 전체 제목을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왕을 위한 제사장의 기도와 회중의 화답” 좀 길죠? 그렇게 대충 그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 내용이 그렇기 때문예요. 왕을 위한 제사장의 기도, 기도를 할 때는 어때요? 대게 그 사람을 위해서 한다면, 아주 좋게, 문학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런 수사적인 방식을 통해서 그러한 느낌들이 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그러한 노력들을 하잖아요? 여기 보면 그런 것 들이 많이 나옵니다. 왕을 위한 기도, 그 마지막 7절에는 그것에 대해서 회중들이 화답하는 그러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1부에 나와 있는 내용들은 간단하기 때문에 그걸 길게 말할 것도 없어요. 중요한 단어들만 좀 짚어도 됩니다. 1절에 야훼 하나님, 이렇게 부른 다음에, 내용이 이렇게 되요. 당신께서 힘이 되어 주시오니 우리 왕이 기뻐합니다. 힘, 그런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어요. 힘이 되어 주시니까 왕이 기쁘다, 그 다음에는 승리, 힘과 승리가 다 비슷한데, 다 긍정적인 거죠, 승리를 안겨 주시니까 다 즐거워한다. 힘과 기쁨, 승리와 즐거움, 그런 것들이 연결되어 있어요. 왕을 위한 제사장의 기도로 멋진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절, 뭐 중요한 단어만 짚겠어요. 소원과 청원, 왕의 소원과 왕의 청원, 왕이 직위하면서 어떤 소원과 어떤 청원을 했을까요? 선서를 어떻게 했겠습니까? 답이 나오죠? 지금도 보통 대통령 취임식 할 때 선서 하는 거 있잖아요? 헌법을 준수해서 국민들을 위해서 법질서를 지키겠다, 뭐 그런 것이 이 시편 21편이 불리어지게 된 임금 즉위식에서도 있었을 겁니다. 당신께서 맡겨주신 나라를 잘 이끌어서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겠다, 그런 소원과 그런 청원을 했겠죠. 바로 그 제사장이 그 제사를 인도하면서 그 왕의 소원과 청원을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어요. 당연한 거죠, 이게 하나의 찬송이라고 생각하십시오. 3절엔 복, 좋은 복과 황금의 면류관, 그것도 반복되는 임금에 대한 좋은 이야기죠, 4절에는 생명과 장수, 오래도록 천수를 누리기를 바란다, 이건 당연히 들어가야 할 내용이죠. 5절은 조금 생각을 해야 됩니다. 여기는 그 왕에 대한 기도, 왕을 위한 어떤 덕담 같은 것을 넘어서서 아주 과장된 표현들이 좀 나와요. 이렇게 나오죠? 당신께서는 그에게 승리를 주시어 뭐 승리는 좋구요. 그 다음에, 영광, 영화, 위엄을 이것을 입혀 주셨다, 걸치게 했다, 이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람에게 쓰기에는 좀 곤란한 거거든요? 위엄과 영화, 이런 것들도 사실은 사람에게 쓰기에는 좀 힘들지요. 임금이라고 하더라도 조금 있으면 다 병들고 죽는데, 그런 임금에게 그런 위엄과 영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겠어요? 이건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단어를 제사장이 왜 임금을 위한 기도에 넣었을까요?

 

두 가지를 일단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인데요? 고대인들에게 왕은 일반적으로 신의 대리자와 같은 역할을 했어요. 천부권,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주어졌다라는 거죠. 그래서 구약에도 보면,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들이 세 종류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왕이거든요?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이 임금, 이 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의 역할이다, 아주 보편적인 생각이었어요. 그런 흔적들을 구약에서 찾으려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만 예를 든다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서 다닐 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거든요? 그래도 손을 대지 않은 거예요. 왜냐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세운 그런 왕이기 때문에 내가 손을 댈 수 없다, 그러한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그런 걸 전제한다면, 이게 하나님에게만 해당 될 만한 단어인 위엄과 영화를 입혀 달라고 하는 기도를 왕을 위해서 했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되는군요. 두 번째, 이것도 앞에서 짚은 건데요? 이 시편이 제의에서 사용된 찬송가 혹은 교독문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해야 됩니다. 이거는 문학적인 수사가 개입될 수 밖 에 없다고 하는 거죠, 이러한 기도를 하면서도 제사장이 이 임금이 결국은 위엄과 영광을 계속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알았겠죠. 그래도 이건 문학적인 거예요. 문학적인 거, 그러니까 그렇게 제사장이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1부의 결론은 7절입니다. 1절에서 6절까지는그런 임금에게 좋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절대 영광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런 것들이 쭉 정리 됬고요. 결국 제사장이 무얼 이야기 하려고 합니까? 요게 바로 회중들의 화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게 결론 부분으로 제가 앞에서 쭉 이야기 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7절에 있는 거예요. 우리 왕이 야훼를 굳게 믿사오니, 여기 핵심은 왕이 아니라 야훼죠. 야훼를 믿는 거예요. 지존하신 분 당신의 사랑 받아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예, 야훼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 역시 주인인 거죠. 핵심, 주체인거죠, 앞에서 나온 이야기들도 다 그런 거예요. 모든 승리, 복, 건강, 장수 이런 것들이 다 어디서 온다고 말합니까? 야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 삶의 근본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것을 이러한 임금의 직위식의 찬송가를 통해서 성서기자가 강조하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잘 오해를 해 가지고 임금이면 최고다, 사람을 높이는 거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결국은 야훼 하나님인거죠.

 

2부는 8절에서 13절인데요? 이는 “승리를 위한 기도” 이런 제목을 잡으면 되겠습니다. 이 내용이 앞에 있는 거하고 많이 다르거든요? 앞에 있는 거는 주로 왕을 위한 기도인 반면에, 여기 8절에서 13절까지는 왕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죠. 그래서 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연결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1부에서는 그 왕에게 일어나야 될 모든 좋은 것들이 다 야훼 하나님에게서 얻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면, 결국 이것도 다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에게 그 왕을 채워 준다는 게 핵심인데요? 그런데 2부에서도 왕은 나타나지 않지만, 그 하나님, 어떤 하나님이죠? 그러니까 임금에게 장수와 승리와 위엄과 영예, 이런 것들을 다 허락하시는 야훼 하나님이 결국은 승리를 허락하신다, 그리고 승리를 허락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1부와 2부가 통하는 거죠. 양쪽 다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좋은 모든 것들의 주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 2부, 8절에서 13절까지 조금 정리를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내용이 들어가기 전에 이런 내용들이 사실 굉장히 살벌해요. 그렇죠? 8절도 보면, 당신의 손으로, 모든 원수를 덮치소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수를 덮쳐라,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의아심이 들기도 합니다. 특별히 우리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신약성서의 새로운 가르침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런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너무 거칠다, 완전히 하나님을 전쟁 신처럼 묘사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해석을 해야 되는데, 그게 어려운 부분이거든요? 이런 내용들을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드려 가지고 원수는 무조건 무찔러야 된다든지, 타종교는 무조건 박멸해야 된다든지, 아,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된다면, 그건 성서를 그냥 피상적으로만 아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문학적인 장치가 있는 건데, 시나 이런 것들은 문학인데요? 상징이기도 하고 은유이기도 하고, 메타포이기도 하고 등등이잖습니까? 그리고 성서는 신앙을 담고 있는 문학이기 때문에 훨씬 더 표면적으로 나타나 있는 거하고 이 중심이 뭐냐는 것을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2부에 나와 있는 말들은 우리 입에 담기도 조금 쉽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거예요. 9절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몸소 나타나시는 날, 그들을 가마 속에 던지소서. 불가마 솥, 뜨거운 물에 던지라는 거지요. 야훼의 진노로써 그들을 불사르소서. 뜨거운 불길이 그들을 삼켜버리게 하소서. 예, 이러한 기도를 할 때의 시편 기자의 심정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을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 뒷 절을 더 읽을 필요가 없죠? 계속 반복됩니다. 씨를 말려라, 등등, 그 얼굴에 활을 겨뤄라,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예, 이러한 문학적 표현들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들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하나는 이렇습니다. 원수 진멸사상, 지금 그게 나타나잖아요? 원수는 진멸해야 된다는 그런 사상은 고대인들의 계약전통에서 구성적인 요소라고 합니다. 신과 어떤 민족이 계약이 맺어지잖아요? 구약도 계약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이게 사실은 유대교에만 그런 게 아니라 타 종교에도 마찬가지예요. 그들이 섬기는 신이 자기들과 계약을 맺습니다. 보호해 주겠다, 이런 저런, 이게 법전으로 나타나거든요? 그런 것들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원수를 진멸해야 된다, 내가 믿는 신은 원수를 진멸해야 된다, 이러한 구성요소, 없앨 수 없는 일반적인 요소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고대인들은 참 악했다, 평화를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이것은요. 그들이 평화를 모르기 때문에 원수가 진멸되기를 바란 게 아니라 그 당시 상황이 그런 거예요. 그들은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이 죽는 거예요. 보통 그것을 요즘 용어로 하자면,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라고 하거든요? 전무냐, 전체냐, 이런 것이 아주 자기들의 생존에 걸려 있는 거기 때문에,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거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없었어요. 그런데 일반적인 그러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터에서 총과 미사일 날라 다니는데, 거기서 상대방을 측은하게 생각하고서 전쟁할 수 있어요? 그건 안 되는 거거든요? 그 때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그런 것들이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건 생존의 차원에 있을 때는 도덕성이 들어 갈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조금 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는 겁니다. 본질은 옳으냐, 그르냐, 참된 게 뭐냐 그런 걸 찾는 거잖아요? 그런데, 생존은 그걸 생각할 틈이 없는 거예요. 이겨야 되는 거죠. 살아남아야 되는 거죠. 서바이블 게임 비슷하게, 그런 상황이겠습니다. 지금 베이징에서 올림픽을 하고 있는데, 사격 할 때도 0.2점 차이로 금메달, 은메달을 따는데요. 북한 친구가 어려우니까 그 친구가 금메달 따게 하고 내가 은메달 따겠다, 그 친구에게 양보하고, 그건 불가능하잖아요? 그런 게임에 나갔을 때는 말이지요? 레스링을 할 때도 평화, 상대방을 봐 주고 그런 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구약성서가 기록될 때의 상황이 그런 정도로 그랬습니다. 여리고 성과 아이성을 공격할 때도 그렇고, 또 가나안 민족과 땅 투쟁할 때도 그렇고요. 그리고 그들하고 결혼도 하지 마라, 상대하지 마라, 그런 정도까지 강하게 율법적으로 유대인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그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런 문서를 놓고,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오늘도 똑 같이 적용하게 된다면, 그건 이제 문자주의에 떨어지게 되는 거죠, 예, 원수 진멸 사상은 고대인들의 계약전통에서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였다고 하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씀들을 읽어야 됩니다, 아, 그 당시는 그러한 방법으로 어떤 것을 경험했구나, 생명과 삶, 죽음, 민족의 미래, 이런 것을 생각해서 이렇게 표현한 겁니다. 그걸 뚝 떼어다가 오늘 우리들에게 적용시킬 수는 없죠. 그런데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그러한 계약사상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건데, 우리는 오늘의 관점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 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그 당시 살던 시대에는 이건 아주 옳은 거예요. 오늘의 관점으로 판단이 불분명하고요, 그걸 전제하면서, 우리가 정작 말씀에서 읽어내야 될 것은 그들이 원수들을 진멸하려고 했었다, 혹은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거였다, 라고 하는 사실 그게 아니라 다른 거죠. 그건 하나님의 배타적 권능과 주권을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원수 진멸에 핵심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원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맥도 못 춘다 그 얘기지요. 하나님의 배타적인 것, 배타적이라고 하는 뜻 알죠? 아무것도 거기에 항거할 수 없는, 그 분에게만 오로지 있는 그러한 권능과 주권, 그 어느 것도 그 분에게 그 주권과 권능 앞에서 항거할 수 없는 그 하나님을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문학적으로 표현 한 거예요. 이렇습니다. 참 멋진 표현이예요. 그 얼굴에 활을 겨누시면 모두들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원수 진멸이 유대인들은 늘 원수, 원수 갚자 그러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전쟁신 처럼 묘사했지만, 그걸 말한 게 아니예요. 안티기독교 사이트 그런 데 가면, 구약성서 하나님을 비판도 많이 하거든요? 그들이 성서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말하기 때문에, 그런 오류가 발생하게 되는데요? 그건 기성 문자주의에 떨어진 우리 정통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비슷한 잘 못을 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원수를 많이 갚기보다는 많이 당했어요. 그걸 아셔야 되요. 그들은 별로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보면, 그냥 재미있으라고 표현하면, 뻥치는 것하고 비슷하죠, 실제적으로 유대인들은 주변에 비해 힘도 없어요. 가나안 땅은 이미 철기문화가 발달해서 안전하고요. 문명이 굉장히 발달한 지역이었거든요? 40년 동안 광야생활 하다가 들어가서 사실은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점진적으로 조금 씩 조금 씩 가나안을 정복해 갔지, 한꺼번에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사울 시대도 마찬가지고,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기본적으로 왕정통치권을 확보했는데, 그 뒤에도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했으니까요.

 

이 시인들이 이렇게 노래를 하고 있긴 있지만, 사실은 상대방에게 폭력과 이런 것을 저지른 것 보다는 당한 게 더 많다, 그러니까 이건 깊은 신앙 고백인 거예요. 그 얼굴에 활을 겨누시면 모두들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도망 안 갔을 거예요. 거기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가 유대에게서 도망갑니까? 오히려 유대가 더 속박당하고 식민지가 됬는데요, 그들 유대인들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그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예, 마지막 결론은 13절입니다. 쭉, 왕 즉위식에서 부른 노래를 앞에서 하고, 2부에서 원수 갚는 일도 하나님에게 있고,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이야기 한 다음에 마지막 13절에 대 합창단의 합창곡의 후렴부분 정도처럼 내용입니다. 야훼여! 힘을 떨쳐 일어나소서.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하리이다. 예, 현실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바벨론 포로 등등, 이 시편이 대게 다 기원전 500년 전, 지금부터 2500년 전 이니까요. 바벨론 포로 전후기, 상당히 어려운 때이기 때문에 이게 편집되고 완성된 거룩한 문서들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어려울 때거든요? 그래도 시편기자들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고 이렇게 노래 할 수 있었던 거지요.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 하리이다. 예, 우리가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힘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내가 출세하면 된다가 아니라고 하는 건 아시겠죠? 다른 사람보다 내가 앞서는 거하고는 전혀 차원을 달리 하겠지요? 분명합니다.

 

그걸 좀 다른 말로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믿는다고 하면서 정말 실질적으로 어떻게 믿느냐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승리한다고 우리가 얘기 하는데, 그 승리를 무엇으로 보느냐는 거지요. 그게 너무 실질적으로 와 닿는지 아니면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지,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그런 질문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못되면 통속적인 승리주의로 가거든요? 그러니까 불가능은 없다는 식으로 나간다거나, 아니면 긍정의 힘 식으로 나간다거나, 안 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승리로 생각한다면, 그건 시편기자들의 영성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이런 게 조금 어렵기 때문에, 그 신앙의 실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자꾸만 다른 데서 그런 것을 찾으려고 내가 감정적으로 exciting해 진다거나, 실질적으로 기복적으로 모든 일이 좋아진다거나, 아니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모범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등등, 그러한 것들로 자꾸 확인하려고 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성서에 나오는 시편기자들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 하나님의 힘을 노래했기 때문에 그런 거죠. 어떻게 그것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느끼고 인식하고 신뢰하고 살아 갈 수 있을까요? 이게 사실은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게 spirituality 거든요? 뭘까요? 다른 걸로 좀 비교한다면, 이렇게 질문해도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진리가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고 살 수 있을까요? 옳은 게 승리한다고 우리가 배웠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진리가 승리한다고 그러나 실제로 진리가 승리하는 게 아니죠, 그리고 진리가 뭐냐 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물어야 되겠고, 진리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라고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다. 그런 것하고 다 연관되는 문제들인데, 이게 자칫하면 뜬 구름 잡는 것 같아서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사람들이 자꾸만 어떤 것들을 가시적으로 요구합니다. 지금 시편기자가 말하는 당신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실증적인 것은 아닙니다. 미국처럼 힘이 있어 가지고 이라크가 말을 안 들으면 다 쫓아낸다거나 혹시 석유에 대한 야망이 있어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는데,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그게 실증적인 힘이거든요? 그게 정말 하나님의 힘이겠어요? 지난주에 설교에서 잠깐 예를 들었던 것처럼, 올림픽 평화의 제전 열면서 러시아가 그루지아 공격해서 완전히 항복 받아냈다고 하네요. 수 백 명이 죽었을 텐데 말이죠. 이런 승리들을 이 세계는 힘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서기자가 그런 것을 얘기 할까요? 그건 아닐 거란 말입니다. 뭘까요? 예, 그걸 어떤 거다 딱 끊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거는 설명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만 자기에게 들어오게 되었어요. 아, 참, 저의 언어의 한계인데, 동양사람들이 한 그 말이 맞긴 맞습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는 거요, 말로는 불립, 세울 수 없다, 문자로 세우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떤 궁극적인 진리는 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잘 모르는데, 종말까지 그 분은 계속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그 하나님의 통치세계 안에 들어가야만, 그 하나님의 힘이 뭔가를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으니까, 이게 참 딜레마죠. 그러니까,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역설인가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한 건데, 제가 말하다 보니까 오늘 성경공부 시간에 다 말하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까, 조금 정리를 해야 되겠네요. 핵심적으로는 그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게 실증적으로 어떻게 결정 된 것은 아니예요. 그것은 그 관계 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느끼는 고유한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 더 핵심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설명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그 힘을 경험하게 되는 거지요. 예수그리스도 사건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지 않습니까, 그게 세계예요. 십자가의 세계가 있고, 부활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거는 계속 들어가는 거죠, 하나의 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인들이 착각 하는 게 기독교의 교리가 딱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들은 교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깊기 때문에 종말론적으로 열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들어가는 만큼 열려지는 거거든요? 예, 여기까지만 말씀 드리면 되겠네요. 제가 결론 부분을 좀 쉽게 설명해야 되겠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어렵게 된 것 같습니다. 오늘 여기 시편기자가 정말 중요한 얘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 힘을 기리며 노래 하리이다. 꼭 기억하세요. 이 사람이 어려울 때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는 거예요. 어려운 가운데서, 그러니까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장난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느끼고 사는 게 정말 성숙한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분의 생명의 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영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시편 21편 말씀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종이 미련해서 앞뒤가 맞지 않게 설명했거나, 또 충분하게 풀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진리의 성령께서 이후에라도 우리 믿음 식구들 마음속에 역사 하시어 이 말씀을 더 풍요롭게 풀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 말씀이 옛날에 그냥 선포된 하나의 죽어 있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있어서 정말 우리 삶들을 하나님의 참된 힘과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폭력과 아첨과 서로 안면몰수 하는 이런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을 더 깊이 경험하며 살기 원하는 우리들에게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이 무더운 절기에도 우리 몸과 마음을 주님께서 지키실 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에릭 프롬,『사랑의 기술 Die Kunst des Liebens:The Art of Loving』,황문수역, 문예출판사,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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