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강해 80편-하나님의 얼굴 빛

 

〔아삽의 시, 인도자를 따라 소산남에듯에 맞춘 노래〕

1.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2.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3.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4.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5.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6.우리를 우리 이웃에게 다툼 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비웃나이다

7.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여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12.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13.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14.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

15.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16.그것이 불타고 베임을 당하며 주의 면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오니

17.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18.그리하시면 우리가 주에게서 물러가지 아니하오리니 우리를 소생하게 하소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19.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아멘! 오늘은 제목이 “하나님의 얼굴 빛”이라고 되어 있어요. 조금 색다르지요? 제목이? 이 제목은 시편 80편에 몇 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어요. 이러한 용어들을 우리가 잘 따라가면 성서의 영성 이런 것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단어들을 잘 이해하고, 다음에 문장 그리고 전체 맥락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따라가야 되거든요? 그건 사실 굉장히 많은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슬슬 읽는다고 해서 다 들어오는 것은 아니예요. 물론 성서가 다 전문적인 신학적으로 깊이 파야만 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다 몰라도 그 말씀 자체가 원래 진리이기 때문에 읽기만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전달되는 어떤 그 힘이 있는 거지요. 그건 인제 전제하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그걸 좀 더 세세하게 아는 것하고 모르는 것 하고 차이가 있으니까요. 여기 제목이 몇 군데 나오냐 하면, 3절에도 나오죠?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되어 있구요. 또 7절 중반절에도 보면 주의 얼굴의 광채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굴의 광채, 얼굴의 빛, 다 똑같은 얘기죠? 그리고 마지막 19절,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사, 세 번 반복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시편기자가 이런 용어를 반복해서 쓴 다고 하는 것은 전체 시가 그 쪽에 무게를 둔다,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렇게 진행을 하면서 또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마는 일단, 주의 얼굴의 광채, 빛이라고 하는 것이 뭘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시편기자가 그러한 용어를 통해서 무얼 이야기 하려고 합니까? 더 근본적으로는 이 시편기자가 뭔가를 경험했을 것 아니예요? 경험하지 않고 이렇게 쓰겠어요? 예술가들, 시인들, 영성가들, 또 학자들, 그리고 물리학이나 화학을 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학공식 막 쓰잖아요? 이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게 무슨 이상한 암호 같지만, 그 화학자들은 어떤 세계를 본 겁니다. 화학의 어떤 세계를 보고 그것을 자기들이 통하는 그런 암호를 통해서, 기호를 통해서 설명한 거거든요? 이 주의 얼굴의 빛, 주의 얼굴의 광채라고 할 때 이 시편기자가 대체 무엇을 경험했는가? 무얼 봤는가? 그걸 여러분들이 생각하셔야 되죠.

 

그런 걸 이제 오늘 이 시편 80편 이 공부의 중심에 놓고 좀 더 천천히 내용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강의안에 서론적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요? 몇 가지도 아니예요. 사실 하나죠. 그건 제목을 방금 말씀 드리면서 드린 이야기하고도 통하는 거예요. 역사라고 하는 것, 지난주의 설교에도 그런 얘기를 드렸지요? 시편기자를 비롯해서 많은 성서기자들 대다수가 아주 고유한 어떤 역사를 경험한 겁니다. 그러니까 골방에서 기도하다가 번뜩 영감을 받았다, 그런 차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자기들의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걸 우리는 역사라고도 얘기 하거든요? 역사와 하나님 경험, 글쎄요. 이런 말들이 좀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강의안 뒤에도 나오겠습니다마는 그걸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600만 명이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구체적인 역사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자기 민족이 죽는데,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는 회의가 들지 않겠어요? 이렇게 자기들은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얘기 한다면, 모순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한 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학자들의 얘기하는 말로 바꾸자면, 하나님은 무조건 절대전능, 전지전능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무기력한 하나님으로 우리가 역사 안에서 경험 한다고 하는 거지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우리가 좀 더 깊이 들어가야 성서가 보일 거구요. 그리고 실제 우리의 삶에도 어떤 삶의 능력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 다가 올 겁니다.

 

예, 오늘 여기 시편 80편에서, 우리가 몇 가지 단어나 문장을 보면 이게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온 거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제가 거기에 거론했어요.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라고 하는 말이 나오죠? 2절이예요.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하면 혹시 생각나는 게 있으실까요? 공통점이 뭘까요? 우리가 주일학교 공부처럼 지금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름이죠? 이 세 사람의 공통점, 일반적으로는 가장 알기 쉽기는 이게 12지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얘기하죠, 그런데 열두 지파보다도 더 공통되는 게 있습니다. 세 사람에게만 있는 공통점요, 거의 찾아내기 힘들걸요? 이거 알면 제가 “선생님” 할텐데, 아, 라헬에 속하는 거예요. 라헬, 이 세 사람이 야곱이 네 명의 여자에게서 아들 12명을 낳잖습니까? 그 중에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라헬이거든요? 이 라헬에게 낳은 아들이 두 명입니다. 요셉과 베냐민이예요. 베냐민은 나오죠? 막내가 베냐민이구요. 요셉의 두 아들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입니다. 야곱은 이집트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이건 유대가 순수하게 혈통주의를 고집할 것 없어요. 이런 역사를 보면, 그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12지파에 들어 온 거니까요. 라헬지파다, 이게 공통점입니다. 이 지파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특징들이 다 있구요. 서로 대립할 때도 있었고, 또 소통할 때도 있었고요, 크게 나누면 북지파와 남지파, 남유대 북이스라엘 이런 지파가 대립했고, 하여튼 그런 등등의 과정들이 전문적인 이스라엘 역사로 들어가게 나오는데, 우리가 그렇게까지 알 필요는 없구요. 오늘 지금 제가 시편에서 말씀 드리려고 하는 핵심으로 본다면,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이런 것들이 이미 역사를 전제하는 거다, 대한 거죠, 또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이건 지금 이스라엘이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들어 있다고 하는 걸 전제하는 거죠? 바벨론 포로를 얘기할까요? 그 전후도 타 민족에게 하도 많이 어려움을 당했었거든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역사적 사건을 배경에 두고 이 시편기자가 어느 때까지 노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죠.

 

세 번째 8절,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이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집트에서 가져 왔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을 이야기하죠, 하나님께서 그러한 출애굽 시키신 분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것을 전제하고 이 시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냥 읽으면 지금까지 말한 것은 어느정도 알 수 있겠습니다만, 10절 보면 조금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가지가, 포도나무가지예요.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나오잖아요? 이것도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지중해까지 확장되고요, 그리고 강이라고 하는 것은 유프라데스, 티그리스 강,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 그 지역까지 이스라엘 이름이 떨쳤다, 그러한 국력이 굉장히 강력하게 된 당시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라고 얘기 할 수 있겠지요? 늘 그들은 그 시대를 가장 그리워하고, 이스라엘이 국력을 떨친다고 해 봐야 객관적인 세계사에서 보면 별 볼일 없지만, 하도 하도 어려운 나라였기 때문에 다윗, 솔로몬 시대에는 과장된 표현으로 부귀영화가 있었던 시대입니다. 그 때를 이야기 하는 거지요. 예, 여기 시편 80편에서 아, 그냥 기도 많이 하고 고통 가운데에서 힘내자, 그러한 막연한 혹은, 막연했다고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쨌든 한 개인의 고유한 역사와는 별로 상관없는 그런 영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다, 역사에서 경험한 시편기자들의 고백이다, 그 이야기를 말씀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두 가지가 거기에는 연결되어 있네요.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을 역사적으로 경험하지만, 이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아, 뭐 잘 이해 안 되도 괜찮습니다. 이 말이 자칫하면 관념적으로 들릴 테니까, 역사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확 와 닿지 않으니까요. 지금 신자유주의 등등, 소비만연, 물질중심주의, 이런 것도 다 역사입니다. IMF라든지, 이런 등등도 사실 역사구요. 이라크 전쟁 등등 사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잖습니까? 이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용돌이 세계사와 우리 한 민족사, 그리고 우리 가정이라고 할수 있을까요?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역사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영적시각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구요.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은 역사로써 말씀하시고 또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잖아요? 역사를 초월한다고 하는 것은 역사와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에 재한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게 아주 미묘한 긴장관계에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구체적인 역사로써 경험하기도 하고, 역사에 제한받지 않는 더 근원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도 있는 거구요. 이 두 가지가 사실은 우리에게서 건강하게 균형 잡혀서 잘 이렇게 자리를 잡아야, 우리 신앙이 건강해지지 않을 까 싶습니다. 이 두 가지가 극단으로 나갈 수 있어요. 역사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역사개혁, 역사진보, 역사변혁, 역사투쟁, 신학적으로 얘기하면 민중신학 이라던지, 해방신학처럼 그런 것에만 너무 몰두 할 수도 있고요. 또 하나는 그런 것 없이 기도만 하면 돼, 세상일은 세상이 알아서 하는 거고 우리는 기도 많이 해서 은혜만 받으면 돼, 몰 역사주의, 이런 쪽으로 빠질 수 있고요? 우리가 두 가지 긴장을 어떻게 붙들고 있느냐, 참 중요하고도 또 조금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성서를 통해서 배우는 거지요? 내용을 네 가지로 나눴습니다. 이건 보면 나오는 차이예요.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1절에서 3절까지, 기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아뢰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 일종의 간구? 간구하고 좀 다른 거구요. 네 번째가 간구인데, 기원과 간구가 비슷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지나가며 천천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을 좀 자세히 보죠. 1절에서 3절이 기원이라고 했는데, 각 절마다 기원이 담겨 있어요. 어떻게 해 주소서, 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는 간구도 좀 비슷한 겁니다. 기원하고 간구, 두 개다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인데요? 기원은, 지금 제가 그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네요. 하여튼 좀 제가 강의 끝 부분에서 제가 좀 정리가 되는대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각 절마다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1절에서는 결국 뭐라고 얘기해요? 빛을 비추소서, 그렇게 되어 있고요. 두 번째 2절에서는 우리를 구원 하소서, 3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예, 각 절마다 그렇게 세 번에 걸쳐서 기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3절에 주의 얼굴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 얻게 하소서 이런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 드렸지요? 얼굴의 빛, 얼굴의 광채, 그게 뭐냐 도대체 시편기자가 무엇을 경험했기에 이런 말을 썼을까?를 좀 생각해 보자고 그랬습니다. 그 주의 얼굴빛이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주, 하나님이라는 뜻이예요. 주의 얼굴의 빛, 이게 똑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게 사실 뭐 하나님의 얼굴에 광채가 있겠어요? 하나님의 얼굴, 지난 제 설교집의 제목이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만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그랬잖아요? 그런 형상 만들지 말고 우상 만들지 말라는 뜻이 뭔지 아시죠? 하나님을 사람들의 어떤 생각 속에 가두지 말라는 이야기예요. 사람들이 이걸 못 견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야 된다든지, 하나님은 늘 정의로와야 되, 이런 얘기 하잖아요? 하나님은 늘 정의로운 건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은 정의롭지 않다는 얘기 아니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정의롭다, 정의롭지 않다고 하는 것이 우리 범주예요. 우리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그런 말로 가둬 둘 수가 없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기호에 따라, 종교적 기호라고 할 수 있겠는데, 거기에 맞춰서 딱 모양 좋게 하나님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우상 숭배지요. 그러니까 전혀 하지 말아라, 우리가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생각 하면 하나님은 이미 뛰어 넘는 분이시거든요? 그런 하나님인데, 어떻게 얼굴이 있는지, 얼굴이라고 얘기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얼굴에 광채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사실 좀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일 수 있거든요?

 

예, 그게 뭘까요. 오늘 핵심인데요? 하나님 얼굴의 빛, 광채, 우리가 오늘 그것만 잘 정리해도 큰 공부가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공부가 매번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어느 순간에 본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한 어떤 깨우침으로 들어 갈 때가 있을 겁니다. 그게 꾸준한 공부가 필요해요. 갑자기 그런 것만 골라서 탁탁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것도 제가 설명해도 충분히 설명을 못 할 뿐더러 한다고 하더라도 귀에 안 들어 올 수가 있어요. 사람은 이상해서 들어도 이게 확 자기에게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이런 성경공부만이 다른 데도 마찬가지라는 걸 아시죠? 어느 때가 되요. 어떤 시점, 자기에게도, 닭이 알이 튀어 나올 때 안에서도 새가 이것을 콕콕 쪼고, 밖에서도 어미가 콕콕 쪼아서 깨진다고 하잖아요? 줄탁(啐啄:啐啄同機,啐啄同時)이라고 하나요? 그래야지 결정적으로 알이 깨져가지고 생명이 탄생하는 것처럼 인제 이러한 큰 깨우침, 공부죠, 그런 것들도 딱 계기가 맞아야 됩니다.

 

주님의 얼굴의 빛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 여러분들이 강한 인상으로 받는다면, 언젠가는 시편기자가 경험한 그 하나님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이게 참 언어가 가지고 있는 힘이기도 합니다. 지난주의 설교에서 유대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하나가 결정적으로 언어종교라고 했잖아요? 언어요. 염불을 외운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죠? 환상적이거나, 자기를 자학한다거나, 어떤 그러한 심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서 문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하는 특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언어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공부를 반복하게 되면 어느 순간엔가, 그 언어를 통해서 계시하신 그것이 어느 순간에 우리들에게 빛처럼 확 닿게 되는 거죠.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뭐라고, 하나님 자신이니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떤 것으로도 형상화 할 수 없고, 개념화 할 수 없고, 범주화 할 수 없고, 규정화 할 수 없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시면 결코 알 수 없는 그 근원, 그 분의 본체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얼굴, 문학적인 표현이죠,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힘에 사로잡혔다고 하는 뜻이겠지요. 그게 일종의 언어적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어요. metaphor 라고 하죠.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자체도 사실은 그런 건데, 얼굴, 광채 이런 은유들이 반복되면서, 언어가 다 말할 수 없는 어떤 근원적인 하나님의 실체를, 혹은 본체를 이 시편기자가 이야기 하고 있는 거지요. 예, 이 기원부분만 뭐 설명하더라도 오늘 공부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 얼굴, 빛에 관해서는 제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구요, 그런데 이 기원을 했잖아요?

 

세 가지 기원을 반복해서 했습니다, 아, 그거 뭐 당연하지, 그렇게 여러분들이 상투적으로 성경을 읽으시면 안 되요. 구원하소서, 구원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얼굴에 빛을 주소서, 무슨 얘기입니까?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조건들을 우리가 자꾸만 바꿔가고, 조건을 좋게 만들어 가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거죠. 하나님 경험이 곧 구원이라고 하는 거죠. 이게 참 중요한 건데요? 중요하기도 하고, 참 뻔한 이야기라고 그냥 지나 갈 수도 있고 말이죠, 그런데, 우리들은 정말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뻔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진 모르지만, 별로 하나님 경험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게 있다고 하는 것도 잘 인식을 모르고요. 대신 다른 것을 요구하는 거죠, 뭐 조금 많이 바꿔가지고 심심하지 않도록 살아가는데 머물러 있습니다. 아, 이것을 어떻게 바꿔서 설명할까요? 하나님 경험이 곧 구원이다, 그러니까 시편기자가 주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주소서, 거기에 매달리고 있잖아요? 참 놀랍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의 우리 삶의 경지가 좀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이런 기도를 좀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이것저것 뭐해 달라 이게 아니라 하나님 얼굴의 빛, 구원,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말입니다. 제가 비유적으로 이렇게 설명할께요. 왜 그게 하나님경험의 핵심이냐 라고 하는 것을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숨 쉬는 것,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핵심이잖아요? 숨 쉬는 것, 만약에 숨 쉬는 것에 내 모든 것을 다 집중시킬 수 있다면, 그 이외의 것들은 상대적으로 되는 거예요. 그런데 숨 쉬는 데는 돈도 들지 않는 거예요. 그게 있다고 하는 것을 알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숨 쉬고 살잖아요? 그런데, 이 공기 대기중에 있는 질소와 산소와 적합하게 있는 이 걸 우리가 들이마셔서 이렇게 우리 몸에 들어와서 작용해서 숨 쉬고 생명을 움직인다고 하는 그것에 우리가 정말 집중할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 좀 대학에서 떨어져도 그리고 뭐, 반찬이 좀 부실해도, 또 실연을 당했어도, 사실은 그런 것들은 그냥 지나가는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숨쉬는 것을 하나님 경험을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시라고 말씀 드린 거예요. 그것만 되면 그럼 사실은 그는 이미 생명이 유지되는 거니까 숨을 통해서, 하나님을 통해서 생명의 세계 속으로 들어 가게 되는 거죠,

 

고게 참 중요한 문제인데, 전달이 됬죠? 알고 계신 문제죠? 그래서 잘 알고 있는 어느 무명시인의 기도시에 그런 것들이 있다고 그러잖아요? “나는 내 눈이 없어도 하나님에게 감사 찬송하리라” 눈이 없어도 소리는 들을 수 있으니까, 내가 눈과 귀가 없어도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리라, 왜요? 촉감이 있고 후각도 남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없어져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리라, 아이구, 참 자학적이다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에게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영적인 경험이예요. 그러니까 이 기원부분에서 이 시편기자가 하나님 얼굴에 빛을 비춰주소서, 나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이것에 몰입했잖아요? 우리는 그것을 배웁니다. 두 번째 단락 “탄식”입니다. 그렇게 놀랍게 하나님께 구원, 빛, 얘기하더니, 탄식하냐, 여러분, 이건 내 신세가 왜 이래요? 라고 하는 푸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하는 모든 것이 손상되어도, 하나님의 빛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쏟아 놓는 거죠, 어린 아이들이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내 놓듯이 그런 순수무구한 어린아이와 같은 영적인 상태에서 하나님께 자기자신이 처한 위치를 정말 허심탄회하게 내 놓는 겁니다. 예, 이게 아까 제가 푸념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게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시편기자의 영성은 뭐냐면, 자기에게 오는 고난이나 환난 이런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와 자기 민족이 당한 고난을 이것을 하나님 언제까지 이렇게 우리에게 이런 분노를 품으시렵니까? 표현하잖아요? 그 말은 곧 그러한 시련과 환란마저도 하나님이 내리신 거다, 그런 생각이 들어간 거죠, 그러한 하나님의 인식으로 들어간 거죠, 참 놀랍습니다. 참 부럽기도 하고요, 우리는 툭하면 그러잖아요? 나에게 나쁜 경험은 누가 나에게 나쁜 일을 해서, 내가 죄를 지어서라든지, 아니면 나쁜 영이 와 가지고, 그러면 어떤 탓을 한다거나 그런 쪽으로 나가잖아요? 그러나 이 시편기자는 그것마저도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고 그러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 거예요. 어느 때까지 우리에게 노하시리이까? 4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여기에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한 가지만 말씀 드린다면 제 강의안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러면, 실제적으로 자기들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이렇게 기도만 했냐, 그 얘기 아닙니다. 아주 치열하게 싸울 때 싸우고, 고칠 때 고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지만, 결국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사람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예요. 정말 성실하게 살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성실하게 산 사람이 어딨어요? 그렇지만 결국은 하나님 손에 있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자포자기도 아니예요, 염세주의도 아니예요. 숙명주의도 아닙니다. 아주 철저하게 역사와 투쟁하면서, 그래도, 그래도, 역사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엊그제인가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 정병선 목사님이 피조물의 입장에서 생각해라, 그런 글을 올리셨는데,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자 앞에서 우리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을 늘 상대화 하는 거죠, 거기에 절대적으로 자기 삶의 무게를 놓다 보면 그거는 지쳐 쓰러집니다. 결국은. 잘 되도 그렇고 안 되도 그렇고, 잘 되면 허무하고 안 되면 성질나고 말이죠, 피조물은 피조물의 그 한계 안에서 창조자로부터 오는 생명의 빛을 받아야 되는 거겠죠, 예, 그래서 이 시편기자는 이런 탄원을 하는 대목에서도 역시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추소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참, 어느 정도의 영성이 심화되면 결국은 이렇게 기도할까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단계로 갈 수 있을까요? 아, 그런 사람들은 특별하지, 우리는 안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우리가 마음을 연다면 가능한 신앙의 경지입니다.

 

예, 세 번째 이야기는 간단하게 그냥 넘어가도 되요. 이건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8절에서 13절까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한 거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서 가나안 땅에서 잘 살게 하셨는데, 그런데 지나가는 행인과 짐승들이 다 우리를 해하게 담을 헐어서 내 버려뒀냐, 그러한 호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소도 좀 탄원하고 비슷하죠? 예, 시편의 구조가 그러네요. 기원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에게 탄식하고 그리고 포도나무비유로 그것을 조금 더 사실적으로 문학적으로 설명한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 간구로 끝납니다. 14절에서 19절, 혹은 15절에서부터라고도 있구요. 혹은 16절로부터라고도 할 수 있고, 이건 정확하게 나누기가 좀 힘들었어요. 일단 14절로 했습니다. 간구, 지금 이 80편을 쓴 시편기자가 처한 상황은 어렵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요. 그래도 그는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 나와 있듯이 주의 얼굴의 광채를 비춰 달라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세 번이나 반복 된 거예요, 얼굴의 광채, 얼굴의 빛, 그걸 오늘 집에 돌아가셔서도 계속 좀 생각해 보시지요. 얼굴의 빛, 빛을 비춰달라, 그럼 우리 영혼이 환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억지로 내가 성냥불로 켜서 밝혀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가 노력으로 얻어내는 것은 성냥불에 불과 할 거예요. 조금 타다가 없어져요. 그러나 하나님의 빛, 창조와 종말과 부활의 빛, 이 안에서는 우리가 불꽃이 된다고 할까요? 근원적인 생명의 빛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는 거죠. 여러분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오직 하나님 얼굴에 빛만 마음에 가득한 그런 영적인 상태가 어떻게 가능할까요? 여러분도 그렇게 되고 싶으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느 때 그러다가 사라지고, 그게 반복되잖아요? 올라갔다 내려왔다 그러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빛이 계속 우리의 삶을 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또 그것이 가능한가, 좀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저는 두 가지로 그것이 가능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강의안에는 하나만 썼는데요? 다시 읽어 보다가 두 가지로 정리가 됬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빛이 우리를 비추는 그러한 영적인 상태가 가능한 근거 두 가지, 혹은 가능한 이유 두 가지, 첫째 자기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삶, 자기집중이 죄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아실 거구요, 성서가 말하는 하마르티아 죄는 자기집중입니다. 자기 연민이예요.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자기연민요. 이것이 아주 감성적으로 어떤 때는 아주 따뜻한 그러한 느낌으로 오긴 하지만, 그게 죄라는 것을 성서는 얘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집중으로 하루 빨리 우리는 그것을, 자기에게 무관심해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 차원이 아닌 것 아시죠? 그거는 이기주의 비슷한 겁니다. 자기집중은, 이것은 교묘하게 무늬가 고상하게 되면서도 결국은 자기집중하게 되는, 오늘의 사람들이 다 그 방식으로 나가거든요? 이제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죄로부터 벗어나기 힘드는데요? 하나님으로 집중한다, 그래서 훈련이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는 거기 강의안에 쓴 그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혹은 이 시편기자에게는 환란과 구원이 반대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결국 하나의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인식한 거죠. 그 얘기는 곧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매와 먹을거리가 사실은 똑 같이 사랑의 표현인 것처럼요. 우리가 그러한 단계까지 들어가야지요. 나에게 벌어지는 어려운 일들, 이것도 하나님의 밝은 것의 이면, 동일한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매라고 할까요? 그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네요. 시험이라고 할까요? 적당한 표현은 아닙니다. 하여튼 어떤 설명인지 이해하시겠죠? 환란과 행복한 일들, 이런 것들을 너무 분리해서 불행한 일이 오면 내가 하나님에게 저주 받았나, 뭐 이런 식으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는 일은 모든 게 합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이 환란과 시련이 지금 왜 있어야 하는지는 우리가 몰라요. 당장 끝쳤으면 좋겠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느 때 까지 우리에게 노하시겠습니까? 기도하는 것처럼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많이 있지요.

 

예, 이런 점에서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시련과 환란 앞에서,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죠. 죽음마저도 하나님의 행위니까요. 하나님의 행위중에서 선하지 않은 것이 있어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아까 어린아이들 아버지 얘기 했지요? 매를 맞는다고 했지만 그 아이는 이해를 못하죠, 예방 주사 맞아야죠, 너무 나이브한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들은 예방주사 왜 맞아야 되는지 어릴 때는 모르지만, 그게 필요한 것처럼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한번 신뢰를 해 보십시오. 조금 어려움들, 어둠, 시련들 그런 것들, 이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방식의 사랑이다 라고까지 한 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예, 여기까지 강의를 마치고 잠시 차 한 잔 하신 다음에 질문응답 받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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