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2편 강해-하나님의 심판

 

예, 시편 82편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 있습니다.

오늘은 짧은 구절이니까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아삽의 시〛

1.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2.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3.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4.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5.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7.그러나 너희는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의 하나 같이 넘어지리로다

8.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심판하소서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이니이다

 

아멘! 조금 특이한 구절들이 좀 나오지요. 평소에 우리가 읽던 시편하고 약간 이색적인 내용들이 있어요. 신들의 모임이라는 말도 있고, 너희는 신들이며,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엇을 이야기 하려고 하는 건지요? 그냥 어렴풋이는 우리가 알겠는데, 정확하게 따라 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천천히 그 내용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82편의 제목은 일단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잡았습니다. 꼭 하나님의 심판이라고만 할 건 아니죠? 이건 표제가 따로 없어요. 아삽이라고 하는 사람의 시라고 되어 있지요? 그게 표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거는 이것을 기록한 사람의 이름을 빌린 거구요. 보통 제목이라고 한다면 그 주제에 따라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 여기는 주제에 따른 표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 제목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정했는데, 꼭 정답은 아니고요, 여러분들이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제목을 따로 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나름으로 생각한 그러한 결과로 그렇게 제목을 그렇게 정했구요. 그리고 이건 저희 생각만이 아니라 성서주석학자들도 이런 주제로 정리하더군요.

 

82편이 좀 색다른 내용들도 있고 해서 좀 서론적으로 이런 것을 말씀 드리고 들어가야 되겠어요.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는 분명히 있는 거죠?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워낙 뻔 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이야기하니까요. 그래서 이 세상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잘 못 이해가 되면 세상을 적대적으로만 대할 수도 있고, 아예 관심이 없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너무 세속에 빠질 수도 있다라고 할까 그런 거였습니다. 어떤 관계를 맺는 것에 따라서 그 당시 당시에 교회가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습니다. 어떤 입장 였던지간에, 아, 이걸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 되겠군요. 우리나라 입장을 말하자면 좀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신앙과 세상이 별로 상관없다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된다고 하는 쪽이고요, 약간 진보 쪽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적극적으로 세계에 참여해야 된다, 이렇습니다. 반드시 그런 뜻만은 아니예요. 신학적으로도 역사가 굉장히 깊습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요, 종교개혁의 두 거장을 마틴 루터와 존 칼빈 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도 세상이해의 입장이 조금씩 다른 거예요. 뮌쩌도 끌여 들이면 조금 더 복잡해지죠? 그런데 여기서 마틴 루터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까요? 이 세상 문제에 너무 깊숙이 관여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그런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인 입장을 가리켜서 두 왕국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은 움직이는 질서가 다르기 때문에 매사에 그것을 참견하게 되면 문제가 있다, 그런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틴 루터가 세상의 문제가 잘 못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뮌쩌 같은 사람은 폭력적으로도 세상을 바꿔야 된다는 입장을 얘기 했구요. 칼빈 같은 사람도 굉장히 적극적입니다. 제너바였겠지요? 거기서 신성도시를 만들어 보려고 구체적으로 국회 같은 것들을 자기가 장악해서 활동도 했거든요? 하여튼 그랬습니다. 세상과 교회 관계는 한 두 마디로 끊어서 얘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복잡하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어쨌든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명제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해결하기 힘들다, 복잡하다, 학자들에 따라서도 생각들이 굉장히 다르다, 그런 것은 이 충돌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주 명확하게 딱 부러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충돌한다고 하는 그 두 가지 명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다 뻔 한 이야기예요.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예요. 그러나 그게 어떻게 충돌하는지 그리고 그 충돌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되는지, 이걸 아는 게 이제 신학이고 어쩌면 신앙, 신학이 똑 같습니다. 신학과 신앙이 다른 게 아니니까요. 신앙적으로 성숙해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다 무시하고 그냥 “믿습니다” 하면 간단하기는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면 뭐 성숙한 신앙이 되기는 힘들겠지요. 예, 두 가지 충돌되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고 하는 명제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종말까지 이르는 세계 전체 역사 이런 흐름들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고 우리가 믿습니다. 그건 보수다, 진보다 가릴 것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믿는 있는 절대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거예요. 그런데 또 다른 한 편으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에는 악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혹은 명제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게 왜 충돌하는지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하면 세상이 평화로와야 되잖아요? 악이 나오지 말아야 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 두 가지가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조금 더 창세기 안에 있는 악의 근원 시작부터 올라가는 이야기하고 연관시켜 말씀 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만든 것은 다 좋았잖아요?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뱀은 누가 만든 겁니까? 근원이 뭐예요? 하나님이 만들지 않은 것은 없잖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것이 사람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해서 온 인류에게 유전적으로 원죄라고 보통 이야기하죠? 그렇게 내려오게 되었느냐, 자꾸 원인론적으로 자꾸 따지게 되면 이건 사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 모순되고 충돌되는 그 사이를 우리가 뚫고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아주 오솔길이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확 트여지는 것은 아니고 천천히 우리가 성서와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 그리고 세계 이런 것들을 이해하는 것만큼 이제 그러한 길이 눈에 들어 올 겁니다. 오늘도 그 중에 하나인 거예요. 요 두 가지가 서로 충돌되는 이 명제를 해결해 보려고 성서기자들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여러분들, 그러니까 성서가 이런 문제들과 아무 상관없이 갑자기 기도하다가 영감이 올라 와 가지고 그렇게 쓴 게 결코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딜레마, 갈등, 모순, 충돌 같은 것하고 영적으로 투쟁한 거예요. 투쟁의 결과로 어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고 그런 것이 전승되면서 성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과정들을 우리가 찬찬히 따라가지 않으면 자칫하면 이 성경을 이현령비현령 식으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많이 있는 거지요. 이 충돌되는 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신정론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올바르다고 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논리, 이론’ 이런 것을 신정론이라고 해요. 연관되는 이야기입니다. 이거예요. 들어보세요.

 

하나님이 사랑이시잖아요? 하나님의 속성, 명제입니다. 사랑, 하나님이 전능하시잖아요? 이것도 명제입니다. 다 분명한 거죠? 그런데 왜 세상에 무죄한 자들의 고난이 있느냐 하는 거지요. 사랑이 있고 전능하다고 한다면 그러면, 무고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셔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그들을 사랑하고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면 형이 동생 때리고 계속 왕따 시키고, 이즈매 시켜서 괴롭히고 있다면 아버지가 나서서 그것을 다 정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계는 그렇지 않은 거예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시련 이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며칠 동안 부산에서 벌어진 여자 아이의 성폭행과 살해사건 앞에서 참 아, 이건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다른 거구요, 신앙적인 차원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밖 에 없는 가하는 그런 고민이 정말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 이건 너무 낭만적인 이야기구요.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예, 제가 거기 강의안 서론에 썼습니다마는 성서기자들이 그걸 넘어서기 힘든 문제잖아요? 충돌, 딜레마가, 그들이 제시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내하고 계시다, 참고 계시다, 당장 유황불 이런 것들을 보내서 악을 섬멸할 수도 있지만, 절대적인 능력자라고 하는 점에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악을 일시에 섬멸할 수 있다고 하는 건 전제되지만 하나님이 기다리신다, 인내하신다, 그렇게 성서기자들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정말 그러냐 그건 이제 종말에 가면 다 드러나겠지요. 인제 그렇게 인식한 거예요. 아, 그럼 하나님이라고 하는 분이, 사람이 인식하는 것 뿐 이지 실제 그렇지 않은 분이냐, 그렇게 말씀 하시면 곤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거죠. 하나님의 계시와 인식은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자들이 계속 그런 문제 가지고 고민하잖아요? 신학적으로 사유하잖아요? 그런 정도만이 아니라 주변의 철학들하고도 끊임없이 대화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역사, 이런 과정들이 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는 과정으로 본 거지요. 하여튼 우리가 그런 걸 전제하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내하신 거다, 참고 계신 거다, 인내가 끝장나는 순간이 심판이라고 하는 거죠, 하여튼 이런 방식으로 성서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악이 여전히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능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해명할 거냐, 하는 그러한 질문에서 그렇습니다. 예, 제가 조금 아까 부산 사건 말씀 드렸는데, 자칫하면 이런 우리의 설명이 무책임할 수도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이 인내하시고 최종적으로 때가 되면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그렇게 기독교인들이 말한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서 희생당하는 사람의 운명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 이렇게 반론을 다른데서 펼 수도 있습니다. 여자의 부모, 여자의 소녀는 두 말 할 것 없고 말이죠, 하나님이 그런 것 마저 막아내지 못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거냐, 하는 겁니다. 제가 똑 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서 말씀 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깊이 생각하시라고 말씀 드리는 거예요. 예, 그러한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당장 실증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할 수 있을 정도로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우리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거기 강의안에 보시면 되겠어요. 두 가지가 요청 된다, 그랬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미처 다 지금 알지 못하거나,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게 들어맞게 딱 공식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거지 기독교적인 해명이 불확실하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꼭 아셔야 되는 거예요. 제가 간혹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아직 모른다, 그런 얘기를 했다고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내용들이 근거도 없고 정말 설득력이 없다, 그런 뜻은 아니니까 그걸 전제하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실증적인 대답을 사람들은 요구하는데, 실증적인 것이 무조건 정답은 아니거든요? 실증적으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구요. 그러한 비밀들은 종말에 노출된다, 우리는 그래서 종말을 기다린다, 그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알 수 없었던 무죄한 자의 고난,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들, 얼마나 많습니까? 시련과 고난들, 지금은 굉장히 무의미한 것 같은데, 무조건 이렇게 피해를 본 것으로 끝나고 정말 뭐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속상한 일들이지만, 그 때 가면 확연하게 들어 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 이런 것들은 종말론적인 것이죠.

 

기본적으로, 또 하나는, 지금 여기서 고통을 넘어서는 길을 찾는 것, 또 하나의 요청입니다. 그걸 교회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그리고 기독교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제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귀를 기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죠. 이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말이죠.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거와 사건들 앞에서도 결국 넘어서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이 공부의 제목이 바로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하나의 신앙적인 생각, 혹은 제가 표상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생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지금 굉장히 이렇게 복잡하고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 거와 같은 이런 모순, 딜레마 속에서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거죠. 하나님의 심판, 그게 뭔지 천천히 더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 절 한 절 볼 꺼예요. 구절이 짧기 때문에 두 절 볼 때 도 있고, 한 절 한 절 나누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은 이렇게 이야기 하죠, 1.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어떻습니까? 이 이야기가 맞는 것 같아요? 성경이 맞지 않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죠? 그런데 조금 우습지 않습니까? 신들의 모임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신들은 누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걸 혹시 오해 해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모임을 갖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씀 하시면 참 곤란합니다. 그게 아니구요. 여기서 말하는 신들은 누구예요? 그냥 속으로 생각해 보세요. 선한 신이예요? 악한 신이예요? 누굽니까? 그런데 이 신들은 당연히 악한 신으로 지금 비유되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신들이 그렇게 모여서 회의를 할까요? 이러한 그림들은 신화적입니다. 신화적, 미쓰(myth)라고 하는 거죠. myth요. 그리스 헬라 로마 신화에서만 나옴직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는 뭐, 제우스신부터 시작해서 바카스신도 있고 뭐, 프로메테우스 등등, 많은 신들이 뭐, 서로 옥신각신 여러 가지 일들을 세상처럼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 구절은 신화적인 그림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실은 성서의 하나님상과는 배치되는 거죠.

 

성서는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얘기하고 있거든요? 예, 하나님은 한 분이고, 신과 같은 존재는 많이 있다는 말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비슷한 종류의 신들도 있다고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나요?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떻습니까? 성서는 그것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 하고 있을까요? 예, 사실 이런 것들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거는 성서가 주변의 여러 사상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부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신적인 존재들을 인정하기도 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부정합니다. 이것도 서로 좀 모순되는 거예요. 성서의 신앙이 아주 일관 되게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다양한 색깔들, 서로 충돌할 수 있는 내용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니예요. 신들이라고 하는 것은 신화적 표상인데요? 그것은 주변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이걸 구분하고 더 공부합시다, 제가 깜빡 잊어버리고 말씀 드리지 않을까봐 미리 짚습니다. 그런 신화적인 표현이 들어 온 것을 가지고 오해해서 정말 그런 것처럼 생각하면 곤란한 거예요. 또 하나는 이런 것들이 들어 왔으니까 성서의 권위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곤란한 거예요. 성서기자는 이러한 주변의 신화적인 묘사를 받고 도움을 받아서 정작 말하려고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거죠. 그걸 찾아야 되는 겁니다. 이런 고대의 어전회의와 비슷해 보이는 신들의 모임이라고 하는 신화적 표상이예요. 그러한 이미지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지만, 결국 성서기자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뭘까요?

 

하나님이 재판한다, 하나님에게 이니셔티브(initiative)가 있다고 하는 것, 그걸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런데 신화적인 요소를 이야기 하는 것은 그 고대인들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웠어요. 그들이 이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거죠, 말하자면, 그랬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성서기자들은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린아이를 키울 때, 아주 어렸을 때는 뭐, 산타클로스 그런 것들을 이야기 하면서 “정직해야지 선물 받어,” 이런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에게는 신화적인 상상력이 많이 있거든요? 그러나 어머니가 그 아이에게 산타클로스를 말하는 것은 꼭 믿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이야기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 실상을 알게 되는 거구요, 그러니까 신화적인 것은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 이예요. 신화라고 하는 것은 그러나 신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거구요? 성서기자들도 주변에 성서의 근원과는 좀 삐끗하게 어긋나는 거지만, 주변의 신화적인 요소를 받아들이면서 정말 성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 이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들의 모임에서 하나님이 initiative를 쥐고 재판한다. 이걸 알아라, 이걸 모르고 엉뚱한 짓 하고 있다, 그 얘기인 거죠. 예, 제 강의안 1절 설명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표현은 다신론적 환경에서, 신화적인 것은 다신론적인 거죠? 다신론적인 환경에서, 고대에는 늘 그랬습니다. 일신론적 정통성을 지켜내려는 노력이다” 뭐 중요하지도 않은 건데, 혹시나 도움이 되는 분이 있을까 해서 적은 겁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성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서 온갖 사상적인 투쟁을 거쳐서 나온, 그러니까 뭐라고 할까요? 검이 숯불에 달궈져서 만들어진 것처럼 연단, 단련이죠, 심각하게 그런 과정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신론적인 그런 세계관이 만연했던 고대 근동지역에서 유대인들만 아주 고유한 방식으로 오직 다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신들의 모임, 즉 신들의 천상회의를 말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의 뿌리를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신화적 인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벌어지는 많은 악행들 있잖아요? 결국 그런 것들이 천상회의에서 악한 신들의 주모, 모의죠. 그런 것에서 일어나는 거다, 하는 거죠, 그것도 사실은, 그런 악한 신들이 그렇게 능력 있다고 말하려고 하다기 보다는, 사실이긴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다 주관하신다, 그걸 얘기하는 거죠.

 

예,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2.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셀라) 이건 이 세상에서의 악과 천상에서의 악이 같이 연결되는 것을 놓고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성서기자들이 이 악, 죄의 문제를 안이 하게 보지 않았어요. 아주 엄중한 사태로 보았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몇몇 사람이 이렇게 공부를 하거나 교양 훈련을 하거나 인격 수양을 해 갖고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거죠. 이건 아주 존재론적인 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악마, 사탄 이런 것들이 성서 안에 등장하는 겁니다. 더 근원적인 어떤 악, 뿌리 이런 것들에 대한 메타포 metaphor라고 할까요? 메타포가 은유거든요? 바로 사탄, 마귀, 그런 것들을 너무 실체론적으로 이해하시면 곤란 한거예요. 실체론적인 게 아니라 그것은 메타포인 거예요. 어떤 근원적인 어떤 악한 힘을 말하기 위한 어떤 문학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참, 여러분들은 다 이해하실 겁니다. 제가 뭐 더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신자들은 그렇게 말하면 이해하지 못하고 그게 정말 있냐 없냐 자꾸 따지고 들거든요? 그런데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있냐, 없냐 그런 것을 말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도 계시냐,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그건 이제 어린아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3절과 4절입니다. 거기서 이제 구체적으로 악이 적시되고 있어요. 참 성서는 거시적인 신앙의 내용을 말하면서 동시에 아주 구체적인 그러한 실천 문제도 이야기 합니다. 거시와 미시, 이런 것들이 같이 연결된, 그러니까 먼시각과 아주 작은 시각, 사실은 작다고 했는데, 구체적이라고 하는 뜻이예요. 가난한 자, 고아, 곤란한 자,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이 말은 곧 베풀지 않고 있다는 뜻이죠.

 

4.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하시는도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거죠. 그거는 천상에서 회의하고 공모하고 있는 악한 신들에게서 일어나는 그들을 향한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 그러한 천상의 악한 힘에 노예가 되어서 그 일들을 행하는 이들을 위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예, 여기 3절과 4절에 보면, 윤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잖아요? 특별히 사회적인 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구조적인 문제 아니겠어요? 어느 사회에서나 가난한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자기 노력하면 좀 되지, 그건 안이한 발상입니다. 노력 안한다고 해서 다 가난하게 되는 것은 아니고요. 여러 가지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될 수도 있고요. 태어난 신분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고 말이죠. 사회구조적인 문제거든요? 그런 문제를 사회윤리라고 보통 신학에서 얘기합니다. 사회윤리,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구분하기도 하는데, 두 가지 다 중요한 문제인데요? 한국교회는 거의 개인윤리에 치우쳐 있습니다. 그냥 도덕성 회복하고, 착하게 살고, 남 도와라 구제해라, 얘기하거든요? 구제로 이런 것들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행하는, 대구샘터교회도 나름대로 구제 이런 일들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남을 돕는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들 돕는다, 그것은 동정심에 불과하거든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어떻게 여기에 구조적인 하나님의 공의가 일어나느냐 그런 차원이겠죠. 사회윤리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이걸 어떻게 이야기 할까요? 한 마디만 더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양심을 갖춰서 잘 사는 것으로만 해서는 세상이 정의로와 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는 거예요. 그건 분명합니다. 나인홀드 니버라고 하는 이미 죽은 미국의 유명한 윤리학자가 쓴 책이 있는데요? 그런 걸 다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라고 되어 있어요. 개인은 모랄하지만, 인간이 사회에 들어가면 부도덕해진다, 그러니까 사회구조를 투명하게 만드는 건 아주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사회 윤리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런 사회윤리에 대해서 투쟁을 좀 해야 되는데, 전혀 그런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평화주의자들하고 같이 연대해야 되는데, 오히려 평화주의자들을 억압하려고 말이지요. 우리는 거의 다 개교회 이기주의에 머물러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부분이 많이 있지요.

 

예, 5절 그들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천상의 신들과 땅의 악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동시대상으로 하는 이야기예요. 알지도 모르고 깨닫지도 못해요. 무엇을 모르는 걸까요. 여기서, 그 문장구조로만 한다면 목적어가 나와야 되잖아요? 무엇을 모른다는 걸까요? 깨닫지 못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깨닫지 못한 걸까요? 문법적으로 제가 질문하는 겁니다. 예, 뭔가가 있겠지요. 이 성서기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썼을까요? 그거는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요? 여러분들이 더 생각하시면 좋겠는데요? 등등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어요. 사실 이 히브리어를 더 정확하게 알아야만 찾아 갈 수 있을까요?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1절에 나와 있는 그 대목입니다. 이게 핵심이거든요? 사실은요? 뭐예요. 너희들 악한 신들의 노예가 되어서 이렇게 악을 행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모르는 게 있다, 아무리 악한 신들이 공모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이 재판한다,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신다,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악한 신들도 그걸 모르고, 사람들도 그걸 모르고 결국 그렇게 모르니까, 흑암 중에 왕래하고, 결국 그런 것들은 고아, 가난한 사람들, 사회윤리가 땅에 떨어지고 무죄한 자가 고난 받게 하는 것, 그런 일들로 회오리 바람처럼 계속 움직이는 그러한 것들, 그렇게 되면 모든 터가 흔들린다, 그러한 이야기지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 (제가 그 대목에서 무엇을 하나 짚으려고 잠깐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금방 까먹었어요. 중요한 게 하나 있었는데, 아, 이야기를 하다가 계속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데, 그걸 놓치면 영 생각이 안 나요. 기억력이 나빠서 그런지, 어때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거예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흑암중에 왕래하고요. 결국은 터가 뭐 흔들린다,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6절과 7절 좀 어려운 구절이 나왔네요. 그냥 간단하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그건 천상의 신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내가 너희들을 신들이라고 인정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주도권이 여전히 하나님에게 있는 거예요. 악이 횡횡하죠?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가능한 겁니다. 아까 잊어버렸던 말들이 이제 떠오르려고 하네요? 결국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인데, 아,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고, 그 외에도 그 비슷한 일들이 있습니다. 물론 악이 하나님이 허락 없이도 그런 일을 행하는 걸로 나오는 성경 구절들이 있긴 하지만 결국은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신화적인 생각으로 신들이 있어서 회의를 연다 그런 생각은 일반적인 고대인들의 생각이었었는데, 그런데, 그걸 굳이 인정을 하는 거죠. 그 당시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걸 이렇다 저렇다 말 할 것 없고, 그래 내가 그 신들을 신이라고 인정한 적이 있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조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왕이라든지 귀족이라든지, 신들과 같은 권세를 행사하던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그런 것과도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7절이 중요하죠. 신들처럼 인정한 적이 있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도 사람처럼 죽으며 고관과 같이 넘어진다. 이 얘기죠. 그러니까 다른 신은 없는 거죠. 헛깨비죠. 말하자면, 자기가 자꾸만 잘 난 척 하니까 그래, 네가 한 번 그렇게 해 봐라 그렇게 잠시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할까? 하나님이 허락하여서 그렇게 하다가 결국은 너희가 다 없어진다, 다 사라지고 죽는다고 하면 신은 아니잖아요? 아, 그렇다면 아까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벌어지고 주권 하에서 벌어진 거라면, 결국 악한 신들, 악한 것들, 이런 것 때문에 희생당하는 운명은 어떤 거냐, 이런 질문은 좀 곤란하다는 거지요. 그런 것은 다른 차원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고요, 지금은 하나님의 윤리성? 주도권? 하나님의 통치의 절대성,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예, 마지막 8절요, 마지막이군요. 1절부터 7절까지는 그 당시 일반적이었던 신화적 세계관을 통해서, 천상의 신들의 회의를 이야기 했고, 그런 방식을 통해서 사회적인 윤리를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서 올 곧게 세우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이제 정말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나온 거예요.

 

8.하나님이여 일어나사 1절에는 재판하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했고, 이제는 심판 하소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굉장히 힘차죠, 그래서 그 강의안에 그렇게 썼어요. 시편기자의 힘찬 고백이 결론으로 나온다고 말이죠, 여러분들이 세상을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악한 힘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잠깐 인내하시는 잠시 유보된 과정에서 신들이 악을 행하고요,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하게 들어나신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면 이 분이 창조자이시고, 모든 게 그 분에게 속했으니까요. 이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정말 그 어디에도 안식이 없습니다. 개인문제도 그렇고 사회문제도 그렇고 말이죠, 그건 완전하게 어떻게 해결은 불완전 한 거예요. 유토피아(헬ούτοπία utopia)라는 말이 있죠? 그건 ‘장소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어원적으로 보면, 토포스(헬τοπος topos)가 장소라는 뜻이고 ‘유(헬ού no)가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유토피아는 세상에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예요. 이 세상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 생존자체가 타고 난 거기 때문에 그리고 이게 또 왜곡되고요. 여러 가지 방식으로요. 그리고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 드러내고 있고, 노골화 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점점 참된 안식, 참된 평화 이런 것들을 경험하기 힘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죄한 자의 고난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많습니다. 왜 세상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절대적이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인데 왜 이 모양이냐, 라고 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고민들은 고민대로 해야 되고요. 우리가 풀어나가야 될 해결책은 또 찾아나가야 하고요, 우리가 힘을 모을 때는 모으고요, 그건 그것대로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결국은 심판하신다는 거지요.

 

심판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예요. 왜 그런지 아시죠? 생명이 드러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사건을 심판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토대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 분의 십자가 부활, 궁극적 생명 그런 것들이 우리를 이 모질고 고된 세상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하는 거지요. 이러한 영적인 힘으로 구약의 믿음의 유대인들이 수 천 년 동안 어려움 가운데서도 버텨왔고, 로마와 그 유대교의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살았던 초기 기독교인들도 버텨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난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고유한 생명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예, 오늘 여기까지 공부하고 잠시 차 한 잔 하고 질문응답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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